다다이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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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20년대에 벌어진 아방가르드 미술 운동.
2. 주요 개념
다다(dada)라는 어원의 유래는 여러가지가 있다. 독일어로 '취미' 라는 뜻인데 선구자였던 후고 발이 '''칼로 독일어 사전을 찔러서''' 명칭을 무작위로 선택했다는 설이 있고, 프랑스어로 어린이들이 타고 노는 목마를 가리키는 말이나, 작가들의 태도 그 자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다만 다다이즘의 어원은 '까까', '빠빠', '쬬쬬' 처럼 애들이나 쓰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이 정설로 꼽힌다. 서양 아이들이 다다다 하고 옹알이를 하는 소리의 그것이다.
한마디로 유아적인, 유치한 단어라는 이야기. 이런 단어로 불리게 된 건, 다다이즘이 ‘무의미함의 의미’를 표현하는 사조였기 때문이다. 전반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는 'dada'라는 단어를 통해 카모폴라쥬를 하거나 무의식이나 허무주의를 나타냈다. 쉽게 말해 기존 예술을 그냥, 생각 없이, 뒤엎고, 가지고 노는 게 '다다이스트'들의 목적이었다.
3. 역사
다다이즘 역시 미래주의처럼 조형예술뿐만 아니라 문학, 음악의 영역까지 포함해 다양한 예술가들이 참여했다. 처음에 다다이즘은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시작되었다. 1916년 2월 작가 겸 연출가인 후고 발(Hugo Ball)이 취리히의 카바레 볼테르(Cabaret Voltaire)란 주점을 열고, 시인인 트리스탄 차라, 리하르트 휠젠베크, 장 아르프 등과 함께 어울려 놀기 시작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이상한 시낭송 대회를 하면서 형식에 벗어난 예술 형식을 실험하고 예술 자체의 정의와 이해의 확장에 힘쓰는 '느슨한 단체'를 구성했다. 이 초기 다다 운동의 참여자들을 오늘날에는 취리히 다다라고 부른다.
이 카바레 볼테르에 모여 놀던 예술가들은 공통적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을 피해 취리히로 망명 온 사람들이었다. 말이 망명이지 사실 전쟁과 징집을 피해 도피한 사람들이다.[1] 이런 사람들이니 기존 전통, 질서, 국가 등에 얼마나 부정적일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1차 세계대전 시기 이후 인간 이성에 대한 환멸이 유럽 전역을 휩쓸었다. 그렇게 잘났다 자부했던 인간과 이성이 이뤄낸 결과란 게 기관총이나 독가스 같은 대량학살무기와 참호전으로 수백만 군인들이 죽어나가는 꼴이었으니, 이런 상황에서 웃고 떠드는 게 사실 더 정신나간 일이었을 것이다.
4. 다다이즘의 의의
다다이즘은 모더니즘 사상에 큰 영향을 받은 예술관으로, 모더니즘 예술가들은 과거의 예술과 단절함으로써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예술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다다이즘은 '파괴'에 중점을 두었던 사상으로, 그 당시의 관습적인 문화적, 교육적 표준을 거부하고 공격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극렬한 지지자들은 인류 사회를 구성하는 근간과 제도 자체에 도전하기도 했다.
다다이즘을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허무적 이상주의'''와 '''반항 정신''' 두 가지인데, 이는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예술의 '관례'에 대한 반대였다. 그래서 다다이스트들은 예전에는 시도하지 않았던 예술형태를 도입했다. 다다이즘으로 인해서 예술과 삶의 경계가 사라졌고, 관중들은 예술활동에 최대한 많이 참여하게 되었다[2] 그리고 동시대의 모든 예술가들이 예술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시험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 다다이스트들은 과거의 모든 예술형식과 가치를 부정하고 비합리성, 반도덕, 비심미적인 것을 찬미하였다. 트리스탄 차라는 "새로운 예술가는 항의한다. 새로운 예술가는 이미 설명적·상징적인 복제(複製)를 그리는 것이 아니다. 그는 돌이나 나무나 쇠로 직접 창조한다. 특급기관차와 같은 새로운 예술가의 유기체는 순간적인 감동을 싣고 모든 방향으로 향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선언하였다. 이들은 1920년까지 취리히에서 잡지 《다다》를 발간하고, 우연을 이용한 추상시, 음향시 등을 발표했다. 다다미술은 서구미술의 형식을 부정하는 새로운 퍼포먼스, 시낭송 등을 혼합한 연극적인 예술요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고, 전통적인 타이포그래피에 반대하는 반언어적인 텍스트를 사용하여 때로는 해독이 불가능한 기호와 이미지를 제시하였다. '''쉽게 말하면, 이상한 의상을 입고 전혀 플룻이 없는 연극을 한다든지, 손에 잡히는 대로 붙여서 조각작품을 만든다든지, 이상한 소리를 지르면서 싸움판을 벌이고 다 때려부순다든지 했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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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그 그로츠, <사회의 기둥>, 19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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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하트필드, <히틀러식 경례의 의미: 작은 남자가 큰 선물을 요구한다. 모토: 백만장자가 내 뒤에 있다!>, 1932 (잡지 'AIZ'의 표지) #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취리히에 있던 다다이스트들은 독일, 프랑스 등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고, 그곳에서도 다다를 계속했다. 독일 출신 다다이스트들은 베를린, 하노버, 쾰른 등으로 돌아갔고, 이중 베를린 다다와 쾰른 다다가 유명하다. 베를린에서는 라울 하우스만, 게오르그 그로스, 한나 회흐, 존 하트필드 등이 주로 작업했다. 취리히와는 달리 베를린 다다는 정치적 작업을 주로 했고, 혁명적 요소를 강조했다. 하우스만은 아상블라주(assambleuse)[3] 회흐나 하트필드는 포토몽타주[4] 작업을 주로 했다. 이들이 했던 작업을 보면 바이마르 공화국과 나치 독일을 비판한 작업들이 많다. 그로츠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지배층을 구성하는 출판업자들, 민족주의자, 군주제 지지자들, 성직자 등을 대표하는 이들을 위선자, 도덕적인 불감증을 가진 자들로 묘사했다. 하트필드의 경우는 아예 총통 각하를 비아냥대는 풍자물을 대놓고 제작하였다.
5. 다다이즘의 영향
결국 유럽의 다다이즘 역사 자체는 짧게 끝난다.
다다이즘은 '파괴'를 목적으로 한다. 다다이즘은 예술사조를 부정하고 예술을 현실로 끌어올린다. 그 중간과정에 예술이라는 테두리는 사라지고 현실에 녹아든다. 여기서 예술의 개념이 사라지고, 다다이즘은 예술을 부정하는 꼴이 된다.
하우스만은 1919년에 이렇게 말했다.
다다이즘은 예술사조를 부정했다. 그것은 다시말해 다다이즘이라는 예술사조 또한 부정해야함을 의미한다. 다다이즘은 그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고 역사로 사라진다.[5]“다다에 화를 내는 독일 속물은 누구인가? 독일 시인이다. 독일 지식인이다. 그는 기름기가 번지르르한 자신의 영혼이 저잣거리의 웃음거리가 된 데 분노를 터뜨린다. 그는 뇌 한가운데에 총알을 맞고서 미쳐 날뛴다. 그런데 그의 뇌는 머리에 있는 게 아니라 그가 앉은 곳에 있었다. 이제 그는 앉아 있을 데가 없다! 아, 신사 나리들, 우리를 공격하지 말라.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적이 된 지 이미 오래고, 우리를 저격하는 방법을 당신들보다 훨씬 잘 안다. 당신들이 어떤 입장을 보이든 우리는 전혀 상관치 않을 것임을 알라. 우리는 당신들과 종류가 전혀 다르다. 당신들은 온몸의 힘을 다 모아서 당신들의 정신적 사업의 북을 두드려라. 당신들의 뱃살을 힘차게 두드려라. 신이 그 소리를 듣고 불쌍히 여길지 모르지 않는가. 우리는 이 낡은 북을 이미 버린 지 오래다. 우리는 툴툴거리고, 꽥꽥거리며, 욕설을 하고, 비웃으면서, 아이러니를 말한다. 우리가 다다인 것은 안티다다이스트이기 때문이라고! 이제 당신들은 난감해졌다! 당신들의 긁힌 뼈를 쉬게 하고 당신들의 해진 입을 기워라. 당신들은 헛수고를 한 것이다. 당신들이 우리를 총살할 수 없으니, 우리는 잔치라도 벌이고 싶다. 이제 우리는 당신들의 속을 까발려서 당신들이 얼마나 잘났는지 결산해보고자 한다.”
많은 젊은 예술가들이 이들의 개념과 행위를 모방하기 시작하자, 너도나도 다다이즘과 같은 예술이 널린 세상을 더 이상 다다이즘으로 파괴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다만, 그 영향력과 중요성은 아직도 남아있다. 대표적으로 초현실주의는 다다이즘의 파리 분파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이며, 이후 앵포르멜, 네오 다다, 플럭서스, 각종 행위예술들은 어느정도 이 다다이즘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현대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마르셀 뒤샹 역시 다다이스트 중의 한 명이었다.
5.1. 다다이즘의 영향을 받은 사례
어쩌면 다음과 같은 사례에서도 다다의 여운을 느낄 수 있을지 모를지도 모르겠다. 뭔가 아스트랄하고 생뚱맞으면 다다의 영향을 한번 의심해 봄직하기도.
- 백남준
- 오노 요코
- 이상(작가)
- 예술가의 똥(이건 엄밀하게 말하면 개념미술이다.)
- 포스트모더니즘
- 부조리극/부조리 코미디
- T.O.P 의 노래 DOOM DADA
- 혁오가 제작한 다다이즘 모자
- 그랜트 모리슨의 둠 패트롤[6]
[1] 이들뿐 아니라 블라디미르 레닌 등 훗날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는 사람들도 취리히에 망명하기도 했다.[2] 재미있는 사실은 주류문화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예술운동이 대중에게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이다.[3] 여러 가지 오브제를 모아 붙이는 것. 콜라주와 다른 점은 콜라주는 평면인데 반해 아상블라주는 입체라는 것이다.[4] 2장 이상의 사진을 붙여 중복인화 ·중복노출 등으로 새로운 시각효과를 노린 것.[5] 허무주의, 회의주의, 불가지론 등 무언가를 부정하는 사상을 메타적으로 적용하면 마찬가지 역설이 발생한다.[6] 슈퍼 빌런 미스터 노바디가 다다이즘에서 따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