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노 요코

 




'''오노 요코
Ono Yoko / 小野洋子
'''
'''본명'''
Yoko Ono Lennon
요코 오노 레논
'''국적'''
일본 [image]
'''출생'''
1933년 2월 18일 (91세)
[image] 일본 제국 도쿄 [image]
'''거주'''
미국 뉴욕주 뉴욕 시 [image]
'''직업'''
음악가, 행위예술가
'''신체'''
157cm
'''배우자'''
이치야나기 도시(1956~1962)
토니 콕스(1963~1969) 
존 레논(1969~1980) 
샘 허배토이(1981~2001) 
'''자녀'''
쿄코 챈 로즈매리 오노 콕스(딸) 
션 레논(아들) 
1. 개요
2. 상세
2.1. 비틀즈와의 관계
2.2. 존 레논과의 만남 그 후
3. 작품 활동
4. 논란 및 비판
4.1. 비틀즈 멤버들 간 불화에 대한 책임
4.2. 야스쿠니 신사 방문 논란
5. 수상
6. 기타


1. 개요


일본의 설치미술가이자 행위예술가. 존 레논의 아내로 유명한데, 후기 비틀즈의 불화에 영향을 끼쳐서 비틀즈의 팬들에게는 "일본에서 온 희대의 마녀"라고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2. 상세


풀네임은 요코 오노 레논(Yoko Ono Lennon). 일본인으로서의 이름 한자 표기는 "小野洋子". 다만 미국에서 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オノ・ヨーコ'로 표기하는 게 일반적이다. '洋子'라는 한자 이름은 존 레논이 비틀즈 시절 만든 곡 "Julia" 의 'Ocean Child' 라는 가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플럭서스 계열에 속한 유명한 아방가르드 행위예술가로 플럭서스의 창시자인 조지 마치우나스로부터 열렬한 찬사를 받았다. 같은 계열의 존 케이지하고 백남준과도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오노 에이스케와 야스다 이소코의 장녀로 태어났다. 증조 할아버지는 훗날 메이지 유신으로 발전한 반 도쿠가와 막부 운동에 참여한 자작이었다고 한다.[1] 부친은 황실 혈통의 전도유망한 은행가, 모친은 야스다 재벌을 일으킨 명문 권세가의 딸로 오노 요코는 황족귀족들의 학교인 가쿠슈인(學習院)을 졸업했다. 그 전에는 지유가쿠엔, 게이메이가쿠엔이 있다. 둘 다 가쿠슈인만큼이나 귀족 학교. 게이메이가쿠엔의 동기로는 히로히토 덴노의 아들들과 미시마 유키오가 있다. 가큐슈인에 입학 당시 요코는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가큐슈인 철학과에 입학했지만 적응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도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대학 도중까지(2살 때 샌프란시스코에 잠시 머무른 후 4살 때 다시 귀국, 소학교 재학 도중 잠시 뉴욕으로 갔다가 다시 귀국하여 일본 소학교에 다시 편입. 이 혼란스러운 기록 때문에 오해가 생기는 듯 하나 엄연히 '''대부분의 성장과정을 일본에서 보낸 사람'''이다.) 일본에 살며 2차 세계대전을 경험하기도 했다. 가쿠슈인 대학 철학과에 진학하여 1년을 보낸 후 뉴욕으로 이주하여 이후의 삶은 계속 미국에서 보내게 된다. 그녀 스스로는 이민자로서 정체성에 혼란을 느낀 모양으로, 자신을 '오렌지도 레몬도 아닌 자몽' 이라고 표현했다.

2.1. 비틀즈와의 관계


비틀즈의 멤버 존 레논의 두번째 아내이기도 하다. 결혼할 때 즈음 비틀즈의 불화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비틀즈 해체의 원인을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다. 본인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존이 비틀즈보다는 개인 위주의 활동을 하게 만드는데 요코가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존이 공식적으로 신시아 레논과 이혼을 하고 요코와의 관계를 대중들에게 공표한 시기는 화이트 앨범 작업 도중이었는데, 앨범을 들어보면 알겠지만 한 밴드의 앨범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따로 논다. 폴은 'Blackbird' 녹음에 치중했고, 존은 'Revolution 9'과 같이 실험적인 곡들을 작업하는데 바뻤다. 에릭 클랩튼을 끌고 와서야 존과 폴이 성의를 보여 겨우 녹음을 진행할 수 있었던 조지의 경우 무척 지못미. 오노 요코가 비틀즈의 해체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분명히 비틀즈의 해체에는 그녀 이외의 외부적인 요인들과 멤버들 사이에는 이미 내부적인 갈등이 존재하고 있었다. 브라이언 엡스타인 사후의 매니지먼트 문제로 폴과 나머지 멤버들이 대립한 것과 조지 해리슨이 항상 자신이 존과 폴의 반주자밖에 안 된다고 투덜거려온 것이 좋은 예시다. 그녀가 없었다고 해도 비틀즈는 얼마 못가서 해체됐을 것이다.
요코는 비틀즈 해체의 이유는 자신이 아니라 폴에게 있다고 밝혔다. 폴 매카트니도 2012년 인터뷰를 통해 그녀는 비틀즈의 해체 책임이 없다고 말했다. 오노 요코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기도 전에 이미 비틀즈는 분열 단계에 있었으며 존 레논도 이미 슬슬 밴드를 나가려고 준비하고 있었다고. 또한 시간이 흐르면서 폴도 오노 요코의 영향을 받은 존의 전위 음악을 높게 평가하게 된 듯하다. 기사 내용.
그러나 비틀즈 해체의 가장 큰 책임이 폴에게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폴은 해체 전까지 영화 작업을 리드하거나 앨범 하나라도 더 내려고 동분서주 하는 등 팀의 화해를 위해 애쓰다가 지쳐버린 케이스다. 폴 역시 감정적인 태도를 보여주었지만, 오히려 존의 솔로 활동이 비틀즈의 분열에 기여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비틀즈 해체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꼽히는 것은 두 가지인데 첫 번째는 매니저인 브라이언 앱스타인의 사망과 그들이 세웠던 회사인 애플의 경영을 두고 벌인 불화, 두 번째는 존이 요코의 몰상식한 행동을 두고보았을 뿐더러,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멤버들을 비난하고 팀이 아닌 자기만의 음악을 시작했다는 것.
존과의 슬하에는 션 레논이라는 아들을 두고 있다. 일본식 이름은 오노 타로. 션도 아버지를 따라 가수로 활동하고 있지만 유명세가 아버지는 물론 어머니에게도 못 미친다. 허나 한국에서는 일본 전범행위와 욱일기를 옹호하는 무개념 발언으로 유명해졌다.

2.2. 존 레논과의 만남 그 후


'''이들의 사생활은 불륜으로 시작해서 불륜으로 가득했다.''' 레논도 아들 줄리안이 있는 유부남이었지만 요코도 이미 결혼해서 딸이 있는 유부녀였다. 비틀즈 시절에도 유명한 바람둥이였던 존 레논은 오노 요코와 결혼 후에도 계속해서 다른 여성들과 바람을 폈고 요코와 결혼해서 사는 도중에도 크고 작은 불륜 사건들이 벌어졌다. 마침내 레논의 행동에 화가 난 요코는 레논과 함께 살던 집을 나가서 젊은 작곡가와 동거를 시작했다. 이때 요코는 '어차피 다른 여성과 계속 바람을 필 거 아니까 차라리 내가 아는 사람과 해라'면서 자신의 비서 중 한 명인 중국 출신의 메이 팡을 레논의 집에 보냈고 메이와 레논 둘이 일시적으로 동거를 하기도 했다.[2] 그리고 요코는 존 레논이 죽은지 '''4개월만에''' 전에 동거하던 작곡가와 다시 동거를 시작, 무려 20년간이나 같이 살았다. 다만 이런 불륜 관계는 부부 생활에 권태를 느끼던 둘이 합의해서 이뤄진 거라고...

3. 작품 활동


남편과는 완전히 다른 예술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주로 설치미술이 가장 유명하지만 그 외에 실험적인 단편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고 일반인이 범접하기 힘든 관념적인 음악을 만들기도 했다. 그녀의 행위예술과 설치예술은 여러 가지 작품이 있는데 주로 반전과 평화에 대한 메시지를 그 주제로 하며 아방가르드한 소재로 표현을 하였다.

'''Yoko Ono "Cut Piece" Performance Art'''
주요 작품이자 가장 유명한 작품은 행위예술인 'Cut Piece(조각내기)'. 1964년 도쿄의 소게츠 아트 센터에서 첫 공연된 이 작품은 그녀의 대표적인 행위 예술 중 하나로 기록될 만큼 유명하다. 그 내용은 요코가 무대의 중앙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고 그 공연을 구경하는 참가자들이 한 명씩 와서 가위로 알몸이 될 때까지 옷 조각을 하나하나 잘라 내는 것이다. 요코는 이 작품을 통해 사회적 연대와 사랑을 주요 주제로 하여 성(性)과 성차별, 그리고 인간의 고뇌와 고독으로 인한 거대한 우주적인 고통을 다루고 있다.
존과 그녀를 처음 이어줬다고 알려진 작품도 유명하다. 존 레논이 처음으로 요코의 전시회에 왔는데 천장에 하늘이 그려져 있고 사다리가 놓여있었다. 사다리를 올라가 천장을 자세히 본 존 레논은 거기서 "yes" 라고 쓰여진 작은 글자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 긍정적인 메시지에 처음으로 반했다고.[3] 이때도 그렇고 후일 낸 <Grapefruits> 작품집을 봐도 그렇고 타이포그래피언어를 설치미술의 일부로 사용하는 특색이 있다.
페미니스트로, '모든 여성은 페미니스트다. 페미니스트가 되는 건 여성이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나쁘지 않다.' 등의 발언을 하였고, 존 레논도 그녀의 영향을 받아 페미니스트가 되었다.[4] 페미니즘에 관련된 전시회나 작품도 많이 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2003년에 국내에서 'Yes Yoko Ono'라는 이름의 개인전을 개최하여 그 기념으로 내한을 했었다. 전시회 행사장에 참여하여 그곳에서도 소리를 지르거나 도자기를 깨뜨리는 등의 기괴한 퍼포먼스를 행하였다고 한다. 이날 취재진들이 와서 존 레논에 대한 질문을 몇몇 했으나, 주최측에서 사생활과 관련된 질문을 엄격하게 통제한 탓에 인터뷰가 잘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4. 논란 및 비판


요코가 욕을 먹는 가장 큰 이유는 그녀의 행실 때문이다. 처음부터 과 유명세를 얻기 위해 믹 재거폴 매카트니 같은 락스타들에게 집착하며 계속 한 명이라도 낚으려고 하였는데, 그 한 명이 존 레논이 되었다. 존 레논은 오노 요코와 재혼하고 비틀즈가 해체되자 그동안 자신이 줄리안에게 좋은 아버지 역할을 못한 것에 대해 후회하며 줄리안과 시간을 보내기를 희망했는데[5] 요코는 줄리안이 레논을 '''만나지 못하게 막았다!''' 참고로 레논과 다르게 요코는 레논과 결혼할 당시 전남편 사이에서 낳은 딸[6]과 아예 연을 끊었던 상태였다. 이에 상처받은 줄리안이 아버지에게 편지를 쓰자 이 편지들을 존 레논이 보지 못하게 요코가 빼돌렸으며 존 레논 사후 그녀는 이걸 '''경매로 팔아버렸다!'''
게다가 존 레논장례식에 전처인 신시아는 물론 존 레논의 사촌 누나들까지 못 오게 했다. 장례식에 가겠다는 신시아에게 "우리가 동창도 아니고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지 않아요?"라며 오지 말라고 했다. 또한, 존 레논은 생전에 자신이 죽고나서 화장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완전히 사라져버리는 것 같다면서. '''하지만 요코는 존이 죽고 나자 바로 화장시켜 버렸고 존의 유골 또한 가져가버려서 유골이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은 요코 외에는 아무도 없다'''(…).'''[7]
그리고 존 레논 사후에 줄리안과 존 레논의 물건을 경매로 팔아치우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의 속옷부터 시작해서 사용했던 변기(!), 그리고 마크 채프먼에게 저격당할 당시 존이 쓰고 있던 피 묻은 안경도 있었다. 심지어 분명히 줄리안의 것이었을 물건들 (존 레논줄리안에게 물려준 기타와 줄리안의 어린 시절에 줄리안 레논과 같이 놀아줄 때 그림을 그렸던 스케치북 등)도 경매로 팔아먹었다.
또한, 그의 유산을 독점함과 동시에 신시아줄리안에게는 한 푼도 주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줄리안은 요코와 소송을 벌여야 했다. 줄리안은 기나긴 소송 끝에 유산의 일부를 찾았지만[8] 그것으로 요코가 팔아먹은 아버지 유품을 다시 되찾는데 고스란히 써야만 했고[9] 이러한 상황에 대해 불만을 크게 토로한 바가 있다. 존 레논 추모행사에도 자신의 아들인 션 레논만 참석시키고 줄리안은 부르지 않을 때가 많다. 참고로 줄리안은 자신의 이복동생이자 존과 요코 사이의 아들인 션 레논과는 잘 지내는 편이었다. 그런데 최근 줄리안이 자신의 엄마인 요코를 비난했다는 이유로 공식적인 인터뷰는 물론이고 줄리안에게 사적으로도 난리 부르스를 쳐댔고 결국 줄리안이 사과하도록 만들었다.
또한, 폴 매카트니는 그녀의 허락 없이는 레논-매카트니의 크레딧을 바꿀 수 없다. 비틀즈의 노래는 대개 레논-매카트니로 되어있는데, 이 사망한 현재 저작권의 반은 유족인 요코에 있기 때문이다. 레논-매카트니라고 해서 모두 공동 작곡이 아니다. 비틀즈 활동 초기에만 둘이 공동으로 작곡했고 (공식적으로 <Baby's in Black>이 마지막으로 이 50:50으로 합작한 곡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후에는 녹음 중간 중간에 편곡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안하는 것을 제외하면 기본적인 곡은 존 따로 혹은 따로 곡을 만든 것이 대다수였다.[10] 비틀즈 중후반부터 폴이 단독으로 만든 노래들도 작곡가 크레딧은 레논-매카트니이기 때문에 폴 매카트니는 비틀즈 시절 자신이 만든 노래조차 매카트니-레논으로 표기 순서를 바꾸려 할때 요코의 반대에 부딪혀 기존의 레논-매카트니로 표기를 돌렸다(…).[11]
예술가로서 그녀의 작품과 행위예술도 예술을 가장한 관심병이라고 비판 받는다. 사실 예술과 외설, 사회적 책임이 뒤섞인 문제이긴 하다.
또한 유부남과 불륜을 저질러 신시아에게 큰 고통을 준 비도덕적 행보 때문에 비판받는다.

4.1. 비틀즈 멤버들 간 불화에 대한 책임


요코가 비틀즈 팬들에게 가장 비난을 받는 지점은 비틀즈 멤버도 아니면서 그들의 음악 활동에 지나친 월권 및 간섭을 했다는 점이다. 악기 연주는 평범한 수준이고 가창력은 '''최악'''이나, 음악에 대한 욕심때문에 계속 비틀즈에 참여하였다. 일단 스튜디오에 세션맨을 제외한 외부인을 데려오지 않는다는 것은 비틀즈의 불문율이었다.[12] 이처럼 그들만의 사적인 영역인 녹음 스튜디오에 존 레논은 오노 요코를 데려왔고[13] 요코는 단순히 들어오는 차원을 넘어서 매트리스를 끌고 들어와 누워있거나 멤버들 앰프를 깔고 앉아있는 등 선을 넘는 태도를 여러차례 보였다. 심지어는 '''자기 의견을 내세우면서 비틀즈의 음악에 간섭하기까지 했다.''' 이는 비틀즈의 불화와 존과 폴, 조지의 사이가 악화되는데 큰 일조를 했다. 이에 폴은 자신의 아내 린다를 스튜디오에 데려오는 것으로 맞대응했다. 그래서 존이 요코를 스튜디오에 데려온 시점은 비틀즈의 와해가 시작되는 시점으로 평가된다. 비틀즈 해체 후에도 존 레논 솔로 작업에 참여하여 곡을 망쳐놓았다.
결과적으로 존과 폴의 공동작업이 사라지면서 비틀즈의 불화와 갈등이 심화되었다. 특히 존이 요코 특유의 예술가적인 정신세계에 크게 경도되면서 폴과의 공감대를 많이 해쳤고 결과적으로 존에게 두번째 결혼은 '폴과의 이혼' 을 선언한 셈이 되었다. 오노 요코의 기이한 만행들로 폴 매카트니와 조지 해리슨은 그녀를 대놓고 싫어했으며, 이 점이 존 레논의 분노를 가져왔다. 그는 자신의 연인이 무시당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은 안 그래도 흠집이 나던 그들의 관계에 더 큰 균열을 가져왔다. 멤버 중 맏형이었던 링고 스타 정도가 그나마 그들의 관계를 존중해주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링고 또한 요코의 기이한 행동들을 싫어했다. 당시 링고의 아내였던 모린이 인터뷰에서 밝히기를 비록 둘 앞에서 티는 내지 않았지만 링고도 매우 화가 났을 때는 요코에 관한 욕을 했다고한다. 조지의 개인 사물함을 뒤져서 찾아낸 다이제를 몰래 먹은 적도 있다. 당연히 조지는 빡칠대로 빡쳐서 요코에게 온갖 쌍욕을 퍼부었고 이것이 존과 조지의 싸움으로 크게 번졌다고 한다. 지금도, 외국의 뉴스사이트에서 요코와 관련 기사가 올라오면 '''"됐고 조지 다이제나 돌려줘라."'''같은 리플이 종종 달린다.

4.2. 야스쿠니 신사 방문 논란


'''존 레논과 야스쿠니 신사에 간 모습'''
특히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의 비틀즈 팬들에게 있어선 1971년 1월 야스쿠니 신사를 남편인 존 레논과 같이 방문해 논란이 되었다. # 다만 토리이 앞에서 촬영한 사진만 남아있어 실제로 참배를 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5. 수상



6. 기타



폴 매카트니와 나름 애증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작곡가 표기 문제로 법적 소송도 몇 번 치렀지만 비틀즈 관련 행사 때는 매번 같이 만나 함께 인증샷을 찍어주신다.
  • 언젠가부터 요코의 파파라치 사진에 30대의 젊은 남자와 같이 다니는 사진이 자주 포착되어 그 남자가 요코의 새로운 애인이라는 루머가 있었으나, 그 남자는 코너 모나한으로, 그냥 요코의 작업을 도와왔던 조수쯤 되는 사람이라고 한다.
  • 페이스북을 보면 요즘은 환경운동에 관심이 있는 듯하다.
  • 2017년 들어 건강이 악화되어 휠체어를 타고 다니며 치매까지 앓고 있다고 한다. 비틀즈 팬들에게는 철천지 원수같은 존재라 팬덤에서는 대놓고 축배를 드는 분위기지만, 아직 줄리아에게 갑질한 전적이 있는 션 레논이 잘 먹고 잘 사는 한 반쪽짜리 축배라 모자지간이 망하길 기도하는 중이다.
[1] 요코의 할아버지인 에이지로(小野英二郎)는 3남 1녀를 두었는데, 그 중에서 딸은 가세 도시카즈(加瀬俊一)라는 외교관과 결혼했고, 그 자식이 다름아닌 '추한 한국인'의 저자인 가세 히데아키다.[2] 존 레논의 바람 상대인 메이 팡은 요코와 달리 존과 신시아의 아들 줄리안 레논을 아버지인 레논과 만나게 해줬다. 요코 때문에 아버지를 못 만나던 줄리안은 이때 짧지만 아버지와의 시간을 보냈다.[3] 이건 요코가 지어낸 이야기다. 자세한 건 아래 항목 참조.[4] 대표적으로 Some Time In New York City의 곡인 Woman Is the Nigger of the World[5] 레논 또한 과거 부모님의 이혼으로 불행한 유년 시절을 겪었기 때문이다.[6] 두번째 남편 안소니(토니) 콕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쿄코 콕스가 있다.[7] 화장 후 센트럴 파크에 뿌렸다는 얘기도 있다.[8] 그래도 10%도 못 받았다. 상속법상으로는 25%는 받아야 했는데 그것의 반도 못 받은 셈이다. 그 돈도 존 레논이 죽고 난 뒤 10년이 훨씬 넘은 1996년에 가서야 받았다. 물론, 법정이자는 계산이 안 되었다.[9] 줄리안과 함께 요코에 의해 흩어진 존의 유품들을 사들였다.[10] 비틀즈가 7년이라는 짧은 활동기간 동안 수 많은 명곡들을 발표할 수 있었던 이유로 상대방보다 더 좋은 곡을 만들려는 의 경쟁심과 조지 마틴의 훌륭한 프로듀싱 덕분이라는 연구결과가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페퍼상사에 수록된 의 명곡 'A Day In The Life'다. 이 전체적인 곡을 작곡한 뒤 '아 이거 좀 밋밋한데' 싶어 망설이고 있던 곡에 이 즉흥적으로 작곡한 짧은 곡을 덧붙인 것.[11] 의 경우에는 아예 후기 앨범에서 멤버들끼리 저작권 문제로 싸우는 것을 막고자 명의를 통합해버렸다.[12] 폴 매카트니의 비틀즈 시절 연인이었던 제인 애셔도 훗날의 인터뷰에서 "당시 자신은 비틀즈의 음악과 멤버들의 LSD 트립 체험에서 늘 배제되어 있었다."며 서운함을 드러냈다. 이에 폴 매카트니는 "제인 애셔는 늘 그녀의 일과 인기에만 신경썼을 뿐 자신이나 비틀즈에 큰 관심을 두고있지 않았다."라며 응수했다.[13] 의외의 사실로 오노 요코는 처음에 비틀즈가 부담스럽기도 하고 대중 음악에도 그다지 큰 흥미가 없어서 비틀즈의 녹음실에 가는 것을 거부했다 한다. 오히려 존 레논이 계속 꼬드겨서 요코를 녹음실에 오게 만들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