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하시 다이스케
1. 소개
2. 선수 경력
2.1. 2000-01 시즌
2.2. 2001-02 시즌
2.3. 2002-03 시즌
2.4. 2003-04 시즌
2.5. 2004-05 시즌
2.6. 2005-06 시즌
2.7. 2006-07 시즌
2.8. 2007-08 시즌
2.9. 2009-10 시즌
2.10. 2010-11 시즌
2.11. 2011-12 시즌
2.12. 2012-13 시즌
2.13. 2013-14 시즌
2.14. 2018-19 시즌
2.15. 2019-20 시즌
3. 평가
4. 기록
4.1. 득점 이외의 기록
5. ISU 공인 최고 점수
6. 커리어
7. 니콜라이 모로조프와의 관계
8. 기타
1. 소개
일본의 前 남자 싱글 피겨 스케이팅 선수이며, 現 아이스 댄스 선수이다.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 남자 싱글 동메달리스트이다.'''
일본 남자 싱글의 간판스타 자리를 근 10년 가까이 유지해 오면서 일본이 남자 싱글에서도 강국으로 떠오르는데 선두주자 역할을 해왔다. 오랜 시간 동안 싱글 선수 생활을 하면서 세계선수권, 사대륙선수권, 그랑프리 파이널 등에서 우승 경험이 있고 세계신기록도 몇차례 경신하는 등 유럽과 북미 선수들 가운데 경쟁력 있는 선수로서 활약했다.
2019-20 시즌, '''아이스 댄스로의 전향'''을 발표하였다. 이후 커리어는 무라모토 카나 / 다카하시 다이스케 문서 참조.
2. 선수 경력
거의 20년에 달하는 싱글 선수 생활을 하였으며, 이 항목은 다이스케의 싱글 선수 경력을 정리한 것이다.
2.1. 2000-01 시즌
2000 JGP 우크라이나에서 8위를 하며 주니어 그랑프리 데뷔를 했다. 이어진 2000 JGP 중국에서는 9위를 했다. 2000 전일본 주니어선수권에서는 4위를 기록했다.
2.2. 2001-02 시즌
2001 JGP 불가리아에서 은메달, 2001 JGP 일본에서 금메달을 따며 2001-02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에 진출해 4위를 기록했다. 2001 전일본 주니어선수권에서 동메달, 2001 전일본선수권에서는 5위를 기록했다.
2002 주니어 세계선수권에서 '''우승'''하였으며 이는 '''일본 남자 싱글 역사상 최초의 사례'''이다.
2.3. 2002-03 시즌
만 16세의 나이로 시니어에 데뷔하여 그랑프리 3차 보프로스트 컵 11위, 그랑프리 6차 NHK 트로피 8위를 하였다.
전일본선수권에서 8위, 2003 동계 아시안게임에서 6위, 2003 사대륙선수권에서 13위를 했다.
2.4. 2003-04 시즌
그랑프리 2차 스케이트 캐나다 7위, 그랑프리 4차 트로피 랄리크 5위를 했다.
전일본 선수권에서는 동메달을 따며 처음으로 포디움에 들었고, 2004 사대륙선수권 6위, 2004 세계선수권에서 11위를 했다.
2.5. 2004-05 시즌
그랑프리 4차 컵 오브 차이나에서 11위를 했다. 전일본선수권에서는 6위를 했다. 2005 동계유니버시아드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2005 사대륙선수권에서는 동메달을 따며 시니어 데뷔 이후 ISU 공인 대회에서 첫 메달을 획득했다.
내셔널은 6위였으나 사대륙선수권 동메달의 실적을 인정받아 내셔널 우승자인 혼다 다케시와 함께 2005 세계선수권에 출전했으나, 혼다 다케시가 부상으로 경기 중 낙마하였고 결국 다이스케 혼자 출전한 셈이 되었다. 이에 다음 시즌 열릴 세계선수권과 토리노 동계올림픽의 출전권을 지켜야 했지만, 15위에 머무르며 일본 남자 싱글의 올림픽 출전권은 '''한 장으로 줄어버리고 말았다.'''
2.6. 2005-06 시즌
그랑프리 1차 스케이트 아메리카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그랑프리 6차 NHK 트로피에서는 동메달을 따며 처음으로 그랑프리 파이널에 진출하였다.
2005-06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동메달을 땄다.
한편, 다카하시 외에 오다 노부나리가 이번 시즌 올림픽 출전권 도전자로 급부상했다. 오다와 다카하시 둘 다 매우 좋은 그랑프리 시즌을 보냈기에, '''한 장''' 뿐인 올림픽 출전권은 '''전일본 선수권의 우승자'''가 가져가게 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경기 결과 오다가 우승하며 올림픽 출전권을 따내는 듯 했지만, 충격적이게도 컴퓨터 시스템의 오류로 점수 계산이 잘못되었음[2] 이 밝혀져 '''다카하시가 금메달을 받게 되었다.''' 이에 일본 빙상연맹은 다카하시에게 올림픽 출전권을, 오다에게는 세계선수권 출전권을 부여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출전한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은 종합 8위로 마쳤다. 쇼트는 5위로 마쳐 포디움권에 도전할 수 있었으나 프리에서 부진하여 9위에 머물렀다.
2.7. 2006-07 시즌
그랑프리 2차 스케이트 캐나다에서 2위, 그랑프리 6차 NHK 트로피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작년에 이어 그랑프리 파이널에 진출했다.
2006-07 그랑프리 파이널에서는 작년보다 한단계 높은 은메달을 땄다.
2006 전일본선수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2연패를 달성한 데 이어 2007 동계 유니버시아드에서도 우승하며 피겨 남자 싱글 부문 2연패를 달성했다. 시즌 마지막 대회로 2007 세계선수권에서 은메달을 따면서 정상권에 입지를 굳혔다.
2.8. 2007-08 시즌
그랑프리 두 대회에서 모두 우승하고 1순위로 그랑프리 파이널에 직행하였다.
2007-08 그랑프리 파이널에서는 작년에 이어 은메달을 땄다. 이어 전일본 선수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3연패를 달성했다.
2008 사대륙선수권에서 남자 싱글 선수 중 최초로 프리 170점/총점 260점을 돌파하며 우승했다. 점수는 프리 '''175.84점''', 총점 '''264.41점'''으로 종전 예브게니 플루셴코의 기록들을 경신하였다.[3] 그러나 2008 세계선수권에서는 4위에 그쳤다.
이 시즌의 쇼트 프로그램 '힙합백조'[4] 는 다카하시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이렇듯 승승장구하던 다카하시는, 다음 시즌을 준비하던 중 불의의 부상을 당해 2008-09 시즌을 통째로 스킵했다.
2.9. 2009-10 시즌
B급 대회인 핀란디아 트로피에서 우승하며 복귀하였다.
컨디션이 다 돌아오지 않았는지 그랑프리 4차 NHK 트로피에서 4위에 머물렀다. 그렇지만 그랑프리 6차 스케이트 캐나다에서는 2위에 올라, 가까스로 그랑프리 파이널 진출에 성공했다. 2009-10 그랑프리 파이널에서는 5위를 기록했다.
전일본 선수권에서 우승하며 통산 4번째 우승을 달성, '''밴쿠버 동계올림픽 출전을 확정지었다.'''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 쇼트 프로그램에서 '''90점대'''에 오르며 3위[5] 를 기록하면서, 프리 스케이팅에서 4회전에 도전했다가 넘어지고 러츠 점프 두 개에서 모두 에지 문제로 감점을 받는 등의 부진을 보였음에도 쇼트 점수의 우위를 바탕으로 '''동메달'''을 획득했다. 이는 '''아시아 남자 선수로는 최초의 기록'''이다.
그 후 2010 세계선수권에서는 시즌 최고 기록을 세우면서 아시아 남자 선수로는 최초의 세계선수권 우승을 차지했다.[6]
2.10. 2010-11 시즌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 이후에 4회전 점프 능력이 어느 정도 돌아오긴 했으나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4회전 점프를 장착한 패트릭 챈에게 밀리는 모습을 보였다.
그랑프리 두 대회에서 모두 우승하며 그랑프리 파이널에 직행하였다. 그러나 2010-11 그랑프리 파이널에서는 최종 4위에 머물렀다.
2010 전일본선수권에서 동메달을 따는 데 그치며 2005년 대회 이후 처음으로 우승에 실패했다. 2011 사대륙선수권에서 우승하며 반등하는 듯 했으나, 2011 세계선수권은 5위로 마무리했다.
2.11. 2011-12 시즌
그랑프리 2차 스케이트 캐나다에서 3위, 그랑프리 4차 NHK 트로피에서 우승하며 그랑프리 파이널에 진출했다.
2011-12 그랑프리 파이널에서는 패트릭 챈에 이은 은메달을 땄다. 2010 전일본선수권에서는 우승하며 챔피언 자리를 탈환하였다.
2012 사대륙선수권, 2012 세계선수권에서도 모두 챈에게 우승을 내주고 2위를 차지하였다. 그래도 시즌 마지막 대회인 2012 월드 팀 트로피에서 쇼트 '''94.00점'''으로 '''세계신기록'''을 세우는 등 선전하여 챈을 제치고 개인 1위를 차지하였고, 일본 팀도 우승했다.
그래도 밴쿠버 올림픽 이후 패트릭 챈을 꺾어 본 몇 안 되는 선수에 속하며[7] , 전반적으로 이 시기의 커리어로는 패트릭 챈에 이은 2인자에 가장 가까운 선수였다.
2.12. 2012-13 시즌
하뉴 유즈루가 부상하면서 일본의 간판스타 자리를 위협받기 시작했다.
그랑프리 3차 컵 오브 차이나에서 2위를 한 데 이어 그랑프리 6차 NHK 트로피에서도 하뉴에 밀려 2위를 기록했다.
그렇지만 2012-13 그랑프리 파이널에서는 '''처음으로 우승에 성공하였다.''' 2012 전일본선수권에서도 하뉴에 이은 은메달을 땄다.
2013 사대륙선수권과 2013 세계선수권에서는 부진하며 각각 7위와 6위를 기록했다. 시즌 마지막 대회인 2013 월드 팀 트로피에서는 개인 1위, 팀은 동메달을 땄다.
2.13. 2013-14 시즌
그랑프리 1차 스케이트 아메리카에서 4위로 포디움에 탈락했다. 그랑프리 4차 NHK 트로피에서 우승하며 그랑프리 파이널에 진출하긴 했으나 부상으로 기권했다.
2013 전일본선수권에서 5위에 그쳤으나 그간의 실적을 인정받아 '''2014 소치 동계올림픽에 출전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 시기에 하뉴 유즈루가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역대 2위 기록을 세우며 패트릭 챈을 꺾고 우승한 데다가 전일본 선수권에서도 2연패를 달성하면서, 올림픽에서의 일본의 간판을 하뉴에게 사실상 내 준 분위기였다.
2014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쇼트와 프리 모두 쿼드를 시도했지만 다운 그레이드가 되고, 심지어 프리에서는 후반 트리플 악셀마저 시퀀스에 언더로테이티드 판정을 받는 깨끗하지 못한 경기를 펼쳐 결국 최종 6위에 그치고 말았다.
2014년 여름, TV 토크쇼에서 은퇴를 암시하는 멘트를 몇차례 남겼고 그 해 10월 14일 은퇴를 발표했다.
2.14. 2018-19 시즌
2018년 7월 1일, 소속사를 통해 은퇴한지 4년 만에 현역으로 복귀하겠다고 발표했다.
오랜만에 출전한 2018 전일본선수권에서는 우노 쇼마에 이은 2위를 하여 2019 세계선수권 출전권을 얻었으나 후배들에게 양보했다. 또한 다음 시즌 국제대회에 참가하고 싶다는 의견을 이야기했다.
2.15. 2019-20 시즌
2019년 9월 26일, 무라모토 카나와 팀을 결성해 아이스 댄스로 전향한다고 발표했다. 2019 전일본선수권에서는 12위를 하며 싱글선수로서의 커리어를 마감했다.
아이스 댄서로서의 커리어는 무라모토 카나 / 다카하시 다이스케 문서로.
3. 평가
일본 남자 싱글 선수 중에서는 패트릭 챈과 예술성에서 쌍벽을 이룬다는 평가를 받았었다.[8] 챈이 탄탄한 스케이팅 스킬을 바탕으로 유려함을 보여주는 스타일이라면, 다카하시는 퍼포먼스와 쇼맨십을 중심에 둔 스타일이다.[9] 스케이팅 스킬에 있어서도 챈이 더 뛰어나다는 거지, 다카하시의 스킬이 떨어진다는 것은 아니며 다카하시의 스케이팅 스킬이 당대 남자 싱글 선수 중에서도 탑급으로 스텝에서 최고점을 받는 선수였다. 챈이 등장하기 전까진 다카하시의 스텝이 가장 높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원래는 4회전 점프 능력도 꽤 좋았으나 2008-09 시즌의 부상 이후로는 4회전 점프 능력이 꽤 떨어졌다. 러츠를 거의 플러츠에 가깝게 뛰는데도 롱엣지 판정을 잘 받지 않았다.
부상 전까진 원래 컨시가 나쁘지 않은데, 2005년까진 큰 대회에서 멘탈이 약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2006-07 시즌부터 극복한 모습을 보였고, 2007-08 시즌에는 완전히 극복하여 이 시즌 대회를 휩쓸었다. 쇼트 프로그램인 힙합풍 흑조도 반응이 매우 좋았고 이는 대표작으로 꼽힌다. 그래서 다카하시의 최고 기량이 2007-08 시즌으로 보는 사람들도 많다.
4. 기록
2017-18 시즌까지 진행된 채점제에서 3개의 세계신기록을 세웠다.
4.1. 득점 이외의 기록
- 아시아 최초의 동계올림픽 남자 싱글 메달리스트
- 일본 최초의 주니어 세계선수권 남자 싱글 우승자
- 2008년 사대륙선수권에서 세운 프리와 총점 세계신기록은 남자 싱글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세계신기록(약 3년 2개월)[10]
5. ISU 공인 최고 점수
6. 커리어
7. 니콜라이 모로조프와의 관계
피겨계의 유명한 코치 중 하나인 '''니콜라이 모로조프'''와는 그 관계가 깊은데, 모로조프를 만나기 이전만 해도 다카하시는 평범한 아시아 선수 중 하나로, 시니어 데뷔 후 꽤나 고전하고 있었다.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의 출전권이 걸린 2005년 세계선수권을 대차게 말아먹은 후 모로조프와 같이 일하게 됐고 그때부터 다카하시만의 특색이 생기기 시작한다. 처음으로 코치를 맡게 되었던 2005-06 시즌 모로조프가 다카하시에게 주문한 컨셉은 '섹시'였다.[11] 본래 수줍음이 많았던 성격의 다카하시는 굳은 결심을 하고 도전하였다. 그 결과 첫 그랑프리 시리즈 우승, 첫 시니어 내셔널 우승 등의 성과를 얻게 된다. 또한 2007 세계선수권 은메달을 획득하기도 하였다.[12] 또한 피겨 프로그램의 혁신이라고도 불리는 '힙합백조' 를 위해 다카하시에게 뉴욕 댄스스쿨을 4개월동안 다니게 하기도 했다.[13] 2008 세계선수권에서 4위로 아쉽게 시즌을 마감했지만 그 이후 인터뷰에서도 "니콜라이가 골라주는 곡은 대체로 좋다. 다음 시즌 곡은 모로조프가 좀 더 머리를 식힌 후에 알려줄 것 같다. 모로조프의 존재는 나에게 플러스가 된다." 라며 모로조프와 계속 함께할 것을 시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즌이 끝나고 얼마되지 않아 오다 노부나리가 모로조프의 밑에 들어가게 되고, "라이벌이므로 같은 코치 밑에 있는 것은 힘들다, 나에게 집중해줄 수 있는 사람 쪽이 좋다." 라며 모로조프를 떠나 선수 생활 시작을 함께 했던 나가미츠 우타코 코치 밑으로 돌아갔다.[14]
웃긴 것은 모로조프의 반응이다. 보통 선수가 코치를 찾아가는 관행과는 다르게 모로조프는 본인이 선수에게 컨택을 하는 타입이라고 한다. 다카하시와의 첫 컨택도 2001 주니어 세계선수권에서 본인이 먼저 제안했다고 했었고, 오다에게도 코치를 받기 1년 전부터 모로조프에게서 오퍼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결별 당시 모로조프는 다카하시와의 결별이 다카하시의 소속사의 트러블때문이라며, 다카하시에게 '''"나와 소속사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해"'''라는 주옥같은 명대사를 날려주었다. 이때 다카하시는 그 대신 소속사를 선택했고, 그때문에 오다와 사제 관계를 맺기도 전에 결별했다는 것이 모르조프의 주장이다.[15]
미묘한 것은 그 후 다카하시는 모로조프와 관련해 최소한의 언급만 했던것과는 반대로 모로조프는 마치 찌질한 구남친 마냥 틈만나면 다카하시를 언급했다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다카하시는 내가 키웠다.''' 드립이다. 실제로도 모로조프는 결별 이후에도 꽤나 오랫동안 다카하시를 신경쓰고 있었고, 보통 그가 맡았던 탑 스케이터와의 작별은 그들의 은퇴라는 자연스러운 결과였는데 다카하시만은 그러지 못했다며 '''그에 대한 미련으로 가득차 있었다'''라는 심정을 드러내었다. 또한 다카하시가 그의 제자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선수였으며, 그의 성공에 질투하기도 했었다는 말도 했었다.
밴쿠버에서 동메달을 딴 다카하시는 은퇴 대신 소치를 목표로 현역을 지속하게 되는데, 2012 세계선수권 이후 모로조프를 그의 팀에 영입하게 된다. 동영상 당시 다카하시는 세계선수권 전 그 사실을 들었고, 대회가 끝나서야 느긋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매 시즌 안무가를 생각할 때 그의 이름을 떠올리긴 했지만 다시 일할 수 있을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고, 그랬기에 그 말을 들었을 때 굉장히 놀랬다고 밝혔다. 이번 모로조프와의 재결합은 이전의 풀 코치였던 것과는 반대로 어드바이저의 역할 정도로, 다카하시는 그와의 재결합을 '''승부같은 구석이 있다'''라고 표현했다. 반대로 모로조프는 앞으로 더 좋은 관계를 구축하고 싶다며, 소치에서는 그가 메달을 따도록 본인이 갖고 있는 온 힘을 다 주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이 둘의 사이가 남들이 보기에도 미묘했던 건지 한 기자는 대놓고 모로조프에게 "다카하시가 당신을 필요로 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당신쪽이 그를 더 필요로 하고 있었던 것인가?"라는 돌직구를 날렸었고, 모로조프는 "그도 나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라고 대답했다.
8. 기타
- 일본 선수 중 드물게 예술성을 겸비한 선수인데다 '힙합백조' 프로그램의 인기 등으로 한국 피겨팬 중에도 팬이 꽤 있었던 선수였다. 특히 2008 사대륙선수권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일본 선수라는 점 때문에 받게 되는 기본적인 비호감에서는 역시 자유롭지 않다.
- 한국 피겨팬들에게 통용되던 별칭은 닭이다. 다카하시 → 다카 → 닥 등으로 줄여서 부르다가 생긴 별칭인 듯 하다.
- 은근 콩라인 속성이 있는 선수이다. 앞에서 소개한 2011-12 시즌의 경우 말고도, 부상을 당하기 전의 2006-07, 2007-08 두 시즌 동안은 '힙합백조' 프로그램에서 보여지는 예술성과 프리 및 총점 세계 최고기록의 바탕이 된 점프 능력이 겸비되었으나 정작 이 두 시즌의 중요 대회 우승 기록은 2008 사대륙선수권 1회였고, 세계선수권에서는 2위와 4위였다. 그랑프리 파이널에서는 두 시즌 모두 2위를 차지하였다
- 나이가 비슷한 오다 노부나리[16] 와는 선수 생활 기간 내내 국내 라이벌 관계를 유지해 왔으나 전반적으로 다카하시가 우세했다. 경기에서의 라이벌 관계 말고도,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 출전권을 둘러싼 해프닝도 있었다. 또한 모로조프 코치 사건 등 오다와 얽힌 사연이 많은 편이다.
- 다카하시와 오다의 라이벌 관계는 일본이 남자 싱글의 강국이 되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2006 세계선수권에서 오다가 4위를 하며 일본의 남자 싱클 출전권을 두 장으로 늘렸고, 2007 세계선수권에서는 다카하시와 오다가 나란히 출전해 다카하시가 2위에 오르며 출전권을 3장으로 늘렸다. 그 후 이 두 선수의 후배인 코즈카 다카히코가 가세하면서 일본 남자 싱글 올림픽 및 세계선수권 출전권은 지금까지 계속 3장을 유지 중이며, 2014 소치 동계올림픽에서는 하뉴 유즈루가 결국 금메달을 땄다. 아사다 마오 이후로는 더 이상 유력 선수가 없어 보이는 여자 싱글[17] 에 비해 남자 싱글에서는 하뉴 유즈루를 필두로 하여 계속 강세를 보일 전망이다.[18]
- 일본의 여자 선수들과도 열애설이 심심찮게 돌았다. 모로조프 코치 밑에 있을 때는 안도 미키와도 열애설이 있었고, 2011년에는 아사다 마오와도 열애설이 돌기도 했다. 다만 후자는 전자에 비해 그리 신빙성은 없었던 편이었다.
- 2013-14 시즌 프로그램으로 일본의 유명 작곡가인 사무라고우치 마모루의 음악인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티네를 골랐다. 그런데 사무라고우치가 18년 동안 다른 작곡가에게 돈을 주고 대리 작곡을 시켰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일본은 큰 충격에 빠졌고, 다카하시 본인도 뜻하지 않게 곤혹스러운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하지만 다카하시는 작곡가가 아니라 곡이 마음에 들어서 선택한 것이라며 다른 곡으로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언론에 발표했다.
[1] 원래는 髙자를 쓰나 상용한자가 아니기 때문에 인터넷 등에서 글자가 깨지는 경우가 있는 듯 하다. 때문에 일본 위키피디아에서 髙橋大輔 라고 검색을 하면 高橋大輔로 리다이렉트 되고 기본정보 위쪽에 본래의 표기법은 髙橋大輔 입니다 라고 적혀 있다. 리그베다 위키에서는 이 선수의 성 高橋를 타카하시라고 표기하지만, 한국 기사에서 이 선수의 성을 보통 다카하시라고 표기하는 데다가 나중에 소개할 별명과도 연관이 되기 때문에 여기서는 다카하시라는 표기를 썼다.[2] 경기를 끝냈을 때는 오다의 점수가 가장 높아 우승자로 발표되었고 시상식까지 마쳤다. 그런데 시상식 직후 오다가 프리에서 자약룰을 어기고 같은 점프를 세 번 뛰었는데도 세 번째 점프가 무효 처리되지 않은 것이 발견되어 점수를 정정한 결과 순위가 뒤바뀌어 다카하시가 1위, 오다가 2위가 되었다. [3] 이 기록은 3년 간 지속된 후 2011 세계선수권에서 패트릭 챈에 의해 깨졌다. '''신채점제 이후 남자 싱글 세계신기록 중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기록.''' 참고로 밴쿠버 올림픽 시즌 이후 경기 제도가 바뀌고 또한 이론적 만점이 존재하는 아이스댄스를 제외한 피겨 스케이팅의 나머지 3종목 중 가장 오래 지속된 세계기록은 7년 간 깨지지 않은 김연아의 여자 싱글 총점 기록 228.56점이다.[4] 백조의 호수 음악 일부를 힙합 버전으로 편곡하여 선보인 작품이다.[5] 참고로 쇼트 90점대를 기록한 3명이 최종 포디움을 차지했다.[6] 그런데 이 대회에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에반 라이사첵은 불참하였으며, 은메달리스트 예브게니 플루셴코는 대회 직전에 기권을 했다. [7] 다른 선수들은 토마스 베르너, 하비에르 페르난데스, 하뉴 유즈루가 전부이다.[8] 물론 스케이팅 스킬은 챈이 훨씬 우위에 있다.[9] 다만 느끼하다는 평가를 종종 받기도 한다.[10] 참고로 전 종목을 통틀어 가장 오래 지속된 세계신기록은 약 7년 간 유지된 김연아의 총점 228.56점이다.[11] 쇼트 '록산느의 탱고'는 성인 남성의 윤기나는 섹시함, 프리인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은 애절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섹시함의 컨셉이였다.[12] 이 당시 다카하시는 인터뷰에서 "니콜라이가 나를 강하게 만들어주었다." 라며 고마움을 표시하기도 했다.[13] 심지어 비욘세 백댄서와의 만남을 주선해 댄스를 배우게 했다는 소문도 있었다.[14] 당시 오다 노부나리는 본인이 모로조프 밑에 들어가게 되어 좋은 사제 관계를 깨트린 것 같아서 미안하다는 글을 쓰기도 했다.[15] 그러나 모로조프가 그 후 결별의 진짜 원인은 재정적인 측면도 아니여서 미스테리가 되어버렸다.[16] 다카하시보다 1살 어리다.[17] 스즈키 아키코는 아사다 마오보다도 훨씬 나이가 많고, 무라카미 카나코도 2017년 4월에 은퇴하였다.[18] 그러나 남자 싱글도 장기적으로 보면 전망이 밝지만은 않다. 일본의 주니어 세계선수권 남자 출전권은 2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