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브게니 플루셴코
1. 소개
러시아의 前 피겨 스케이팅 선수이며 일리스 그라프스트룀(금 3/은 1)과 올림픽 메달 개수에서 타이를 이룬 선수이다.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은메달,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 금메달,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 은메달, 그리고 2014 소치 동계올림픽 단체전 금메달로, 역대 2번째로 올림픽 4회 연속 메달(금 2/은 2)를 획득한 선수'''가 되었다.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없을 ''''은반의 지배자', '빙판 위의 셰익스피어', '남성 피겨에 군림하는 황제' ''' 등의 수식어를 동반한다. '''러시아 남자 싱글 피겨 최후의 레전드'''.[7]
남자 싱글 부문에서 유럽선수권 7회 우승은 울리히 살코(9회), 카를 샤퍼(8회) 이후 최다 기록[8] 이다. 그러나 저 선수들이 유럽선수권을 우승한 시기는 싱글 점프가 갓 개발되기 시작하고 극소수의 선수들만이 참여하던 피겨 스케이팅 초창기에 이루어진 것임을 감안하면 그의 화려한 커리어는 피겨 역사상 비견될 선수가 없는 전무후무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인지도와 인기가 어마어마하지만 압도적인 온아이스의 존재감이나 직설적인 인터뷰들, 러시아 특유의 싸늘한 이미지 때문에 안티도 많다. 덧붙여 안티가 만들어지는 데엔 그에게 적대적인 북미 피겨계와 북미 쪽 언론이 크게 기여하고 있다. 대부분 북미 쪽을 통해 그의 소식을 얻는 한국 언론에서 곡해한 적도 많다.
피겨 선수로서는 드물게 현역 시절에 젊은 나이로 결혼을 2번 했으며 전처와의 사이에 아들 이고르, 지금 부인 사이에 아들 사샤를 얻었다.
2. 생애
볼고그라드 출신[9] 으로 워낙 잔병치레가 잦아 뭔가 운동을 시켜야겠다는 어머니의 결단으로 4살부터 피겨 스케이팅을 시작했다. 자서전에 우연히 같은 동네 여자아이로부터 스케이트를 받은 경위[10] 등이 자세하게 나와있다.
11세 무렵 볼고그라드의 스케이팅 시설이 재정 부족으로 문을 닫게 되자 당시 코치의 추천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혼자 떠나서 피겨를 계속했다. 얼마 안 가 어린 아들을 혼자 둘 수 없었던 어머니가 곧 따라오지만 본래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힘들었다고 한다. 당시 러시아의 피겨 교육은 국가에서 육성하여 무료였지만 그의 집은 너무 가난하여 허름한 공동 아파트에서조차 지내기 힘들었다. 어린 나이로 어머니와 함께 빈 병을 주워 팔아 빵을 사먹거나 사과 하나로 하루를 버티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역시 자서전에 실려있는데 팬이라면 안쓰러움 없이 볼 수 없는 대목이다. 그 와중에 시골 출신인 데다 어리다는 이유로 여러 선배들에게 집단괴롭힘도 당했던 듯하다.[11] 정작 본인은 '''“덕분에 나는 더 강해졌다”'''고 술회하고 있다.
'''11세에 이미 전 종류 트리플 점프를 마스터, 14세에는 쿼드러플 토룹을 마스터하였다.''' 당시 미쉰 코치 아래에는 워낙 많은 주니어 선수들이 있었기 때문에 주목의 대상이 되어 제대로 된 트레이닝을 받기 위해서는 그만한 실력을 쌓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결국 나중에는 코치가 관심을 기울이게 되어 같은 코치 아래에서 트레이닝을 받던 알렉세이 야구딘은 미쉰과 결별하고 타티아나 타라소바 코치 밑으로 들어갔다. 혹자는 코치의 편애라고 말하지만 사실 당시 미쉰 밑에는 많은 선수들이 경쟁 상태였고 그 중 플루셴코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미쉰의 취향이라는 의견도 있다. 사실 코치와 선수의 추구하는 방향이 맞지 않으면 서로 다른 길을 모색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현재에 이르기까지 미쉰이 가장 아끼는 애제자이기도 하다.
3. 선수 경력
3.1. 1995-96 시즌
1996 러시아선수권과 1996 주니어 세계선수권에서 6위를 기록했다.
3.2. 1996-97 시즌
핀란디아 트로피에서 7위를 하고 1997 컵 오브 러시아에서 4위를 하며 시니어 그랑프리에 데뷔했다. 1997 러시아선수권에서 4위를 기록했다. 블루 스워드 트로피와 유러피언 유스 올림픽 페스티벌에서도 우승하였다. 1997 주니어 세계선수권에서 '''14세의 어린 나이로 사상 최연소 우승'''을 하며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3.3. 1997-98 시즌
1998 세계선수권에서 동메달을 따내 '''만 15세 최연소 세계선수권 메달리스트'''가 되었다. 이 시즌 갓 시니어에 데뷔한 새내기라고는 믿을 수 없는 실력으로 1997-98 챔피언 시리즈 파이널을 제외한 모든 경기에서 포디움에 올랐다.
3.4. 1998-99 시즌
본격적으로 치고 올라오며 다른 대부분의 남자 싱글 선수들이 대부분 주니어에 머물 16세의 나이에 벌써 2년 8개월 위의 선배인 알렉세이 야구딘과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3.5. 1999-00 시즌
성인이 되기 전 17세가 된 해에 이르러서는 2000 세계선수권을 제외한 모든 대회에서 우승했다.[12]
3.6. 2000-01 시즌
전 시즌의 기세를 이어 모든 대회를 우승하였다. 이 시즌의 그는 프리 프로그램에서 두 번의 쿼드 콤비네이션을 구사하는 등(4-3 컴비네이션에 이어서 4-3-2 컴비네이션을 구사한다던가) 외계인 같은 기술 수준을 보여주며 연기 또한 나이가 믿기지 않는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뿜어내어 진정한 먼치킨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3.7. 2001-02 시즌
아직 성장이 끝나지 않은 몸으로 고난이도의 기술들을 구사한 부담이 터져 유럽선수권과 세계선수권을 스킵하고 수술하였다.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쇼트에서 거하게 넘어지는 실수를 범해 쇼트와 프리 모두 2위에 그쳐 은메달을 땄다. 당시 플루셴코에게 은메달은 곧 패배였는데, 19살인데다 처음 나간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따놓고 그것을 패배라고 정의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인식시킬 선수는 그밖에 없었다. 같은 나이의 남싱들과 성과를 비교해보면 극명하다.
3.7.1. 라이벌 알렉세이 야구딘
한때 같은 코치 아래에서 훈련하기도 했던 두 러시아 선수의 라이벌 관계는 피겨 팬들의 엄청난 흥미를 불러 일으켰다. 러시아 선수끼리 치고박고 하는 통에 북미 언론들은 러시아의 플루셴코, 미국에서 훈련받는 야구딘의 대결로 자극적으로 포장하기도 했다.(일명 '닥빙')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때에 이르러서는 플루셴코에 대한 반감이 북미 언론을 장악했다.[13] 마침 여자 싱글 쪽에서도 미셸 콴과 이리나 슬루츠카야의 라이벌 구도가 조성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피겨에서의 라이벌리는 카르멘 전쟁, 브라이언 전쟁과 같이 아주 흔한 이야기였다.
두 선수의 라이벌 관계는 1998-99 시즌은 야구딘의 압승, 1999-00 시즌은 호각지세(유럽선수권은 플루셴코, 세계선수권에선 야구딘), 2000-01 시즌은 플루셴코의 압승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플루셴코의 우위로 기울어지는 듯 했다.
3.8. 2002-03 시즌
알렉세이 야구딘과의 라이벌리 시대인 10대 시절을 마치고 20대를 맞이하며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빙판 위의 황제로써 홀로 군림하시며 무차별적 양민학살을 저질렀다. 당시 남성 피겨에 있어 플루셴코가 어떤 존재였는가는 '''2002-03 시즌부터 2005-06 시즌까지 출전한 모든 대회에서 2번을 빼고 전부 우승했다.''' 4년 동안 출전한 대회에서 2번 빼고 우승이라는 것은 정말 압도적인 성과였다.
3.9. 2003-04 시즌
이전부터 계속 이어진 부상이 한계를 넘어서기 시작했을 때로 심한 무릎 부상이 시즌 내내 영향을 미쳤다.[14]
하지만 2004 세계선수권에서는 프리 수행 중 한 번 넘어진 걸 제외하고 훌륭한 경기력으로 심판 전원 만장일치 1위를 하며 우승했다.
3.10. 2004-05 시즌
그랑프리 시리즈에서는 컨디션 조절차 시리즈 경기 중 한 경기만 나갔으나 포인트 꼴찌로 그랑프리 파이널에 진출하여 쇼트와 프리 모두 1위로 우승하였다! 다른 선수들은 정말 얄미웠을 듯하다. 2005 유럽선수권에서도 우승하며 4번째 유럽선수권 우승을 차지했다.
2005 세계선수권에서는 양쪽 서혜부 탈장으로 쇼트 프로그램을 마쳤으나 결국 프리는 하지 못하고 기권했다.[15] 무릎 부상도 심각한 수준이라 이미 여러 번 수술을 받은 바 있다.[16] 한편 이 대회 기권 이후 자국 연맹과 언론에게 심한 비난을 받았고 복귀하지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대다수였다.
3.11. 2005-06 시즌
2005 컵 오브 러시아와 2006 러시아선수권에서 모두 우승했다. 2006 유럽선수권에서 통산 5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3.11.1.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
압도적인 점수차로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올림픽 때도 역시 식중독으로 제 컨디션이 아니었음에도 쇼트, 프리, 총점에서 모두 세계신기록을 수립했다. 그러나 이때의 프리 프로그램 연기를 두고 성의 없이 대강대강 했다고 안티들은 두고두고 까고 있다. 성의 없이 대강대강 한 걸로 세계신기록 수립에 올림픽 금메달이라면 성의 있게 할 경우 어떤 점수가 나온다는 건지 알 수 있다.[17] 당시 올림픽에서의 프리 프로그램이 플루셴코의 다른 경기에 비해 비교적 심심한 연기였다는 것은 팬들도 동의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완벽한 쇼트 경기에 이어 프리도 당시 식중독으로 며칠동안 링거를 맞은 상태였음에도 시즌 중 시도하지 않았던 자신의 4-3-2 점프를 시도하여 성공했고 하나의 실수를 제외한 모든 요소를 클리어하는 여전히 괴물같은 경기력을 보였다.
당시 점수는 '''쇼트 90.66점, 프리 167.67점, 총점 258.33점'''으로[18] 플루셴코가 휴식기를 가졌다가 3년 후 다시 복귀할 때까지 이 점수를 깬 사람은 2008 사대륙선수권에서의 다카하시 다이스케 뿐이며[19] '''쇼트 90.66점을 깬 다른 선수는 없다.'''[20] 또한 2009년 12월 ISU의 총점 기록에선 2위부터 5위까지는 싹 다 플루셴코가 차지했다.
올림픽이 끝난 후, 플루셴코는 선수생활 잠정 휴식에 들어갔다.
3.12. 2009-10 시즌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 이후 사실상 은퇴 상태였으나 잊을 만하면 복귀 떡밥을 뿌리며 팬들의 원성을 사고 있다가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진짜로 복귀하여 다른 의미로 충격을 안겨주었다. 전통적으로 대립 관계인 북미에서는 '''“그만 좀 해먹어”''' 라는 반응이 대다수다. 플루셴코는 오랜 기간 동안 모든 북미 선수들을 금메달 꿈도 꾸지 못하게 했던 소비에트 엘리트 중 마지막 세대로 러시아가 남성 피겨에서 '''알렉세이 우르마노프–일리야 쿨릭–알렉세이 야구딘–예브게니 플루셴코''' 라인으로 장장 16년 간 동계 올림픽 남자 싱글 금메달을 독차지한 것을 생각하면 그럴 반응이 나올 법도 하다. 소련 시대[21] 의 빅토르 페트렌코부터 세면 더 길어진다.
현역에서 물러나 있을 때 몸무게가 불어나버렸고 트리플도 되지 않는 상황이라 팬들조차 복귀에 회의적이었으나 무릎 수술과 다이어트를 감행하며 2009 로스텔레콤 컵으로 복귀하였다. 이 대회에서 전성기 못지않은 4차원적 점프들을 선보이며 우승하며 싱글 선수로서는 역사상 유래 없는 복귀에 성공하여, 황제의 귀환을 선포하여 많은 선수들을 긴장 타게 만들었다.
2010 러시아선수권 쇼트 프로그램에서 100.09점이라는 괴악한 점수를 기록했다.[22] 플루셴코는 현역 시절 거의 매 시즌마다 수술을 받았고 현재는 무릎에 '''반월판이 없다.''' 수술 당시 여러 차례 잘라내고 찢어진 곳을 꿰맨 반월판은 떡이 져서 제거하기도 힘들었다고 한다. 현재 열흘이나 짧으면 사흘에 한 번 무릎에 주사를 주입하고 이틀 동안 걷지 못하고 다시 연습하는 비인간적인 생활을 반복 중이었다. 2009 러시아선수권 쇼트 경기 후 인터뷰에서는 진통제에 맛이 가 '''“고통은 신의 소명”'''이라는 마조히스트스러운 말을 하여 팬들을 충격과 슬픔에 빠뜨렸다.
4년 만에 돌아와 2010 유럽선수권의 쇼트 프로그램에서 '''91.30점'''이라는 점수를 세우며, 그동안 아무도 깨지 못했던, 4년 전 토리노 올림픽에서 '''자신이 세운 90.66점의 신기록을 자기가 깨는 기염'''을 토하며 여유롭게 통산 6번째 유럽선수권 우승을 차지했다. 이때 피겨 팬들은 제냐의 미친 컨시의 4-3 점프에 경이로움을 넘어선 두려움을 호소했다. 하지만 쇼트 프로그램의 정줄 놓은 음악 편집과 함께 빈 안무는 두고두고 까였다고 한다.
3.12.1.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
2010년 2월 17일 쇼트 프로그램에서 90.85점을 받아 1위를 차지했으나, 19일 프리 스케이팅에서는 기술점에서 가산점 차이로 쇼트 2위였던 에반 라이사첵에게 역전을 당해 총점 1.31점 차이로 '''은메달'''을 땄다.
미국은 브라이언 보이타노 이후 22년 만에 나온 동계올림픽 남자 싱글 금메달인지라 무척 기뻐했으나 1994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알렉세이 우르마노프(러시아) 이후 처음으로 '''4회전 점프를 전혀 시도하지 않은 금메달리스트 탄생'''이라는 결과는 피겨계에 논란을 가져왔다.
예브게니 플루셴코는 밴쿠버 올림픽에서 쇼트와 프리 경기에서 쿼드를 넣어 모두 클린한 유일한 남자 싱글 선수였으며, 출전한 남자 싱글 선수 중 가장 나이가 많았던 선수였다.
3.12.1.1. 논란
자세한 내용은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피겨 스케이팅 판정 논란 문서 참조.
정작 플루셴코는 시상식 직후의 인터뷰에서 "은메달을 받아들인다" 고 말했다. 플루셴코가 주장한 것은 신채점제에서 채점 방식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었다.[23] 그러나 북미 언론의 기사가 널리 알려진 나라들에선 마치 금메달을 못 받은 게 부당하다고 말한 걸로 퍼졌다. 신이 나서 몰아붙이는 북미 언론들에 당황한 다른 남싱 선수들이 "제냐는 그런 뜻으로 한 말 아닌 것 같다" 라고 말해도 한동안 수그러들지 않았다. 덧붙여 플루셴코가 금메달을 받아야 했다고 말한 건 푸틴이다. 또한 플루셴코가 "우리 마눌님이 이건 플래티넘 메달이랬어여~" 라며 러시아 기자들 앞에서 귀엽게 은메달을 척 내밀었던 것이 은메달을 못 받아들이고 플래티넘 메달 운운한다는 오해의 발단이 되었다.
여성 싱글 경기가 끝난 뒤 그의 입장과 명성에 호가호위하려던 일본에서 아사다 마오와 관련 프로그램을 위해 그에게 인터뷰를 청했고 그때 한 말이 일본의 절륜한 인터뷰 편집 신공으로 인해 특정 부분만 부각되었다. 이에 한일 양국의 피겨팬들이 낚였다. 그는 이때 신채점제에 대한 불만과 함께 여자 싱글에 대해 말하며 아사다의 트리플 악셀엔 좀 더 많은 점수를 줘야했다고 말했다. 아사다의 트리플 악셀이 가진 문제점을 생각해보자면 사실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신채점제하에서 선수들이 어려운 기술은 시도하지 않고 안전한 기술과 안무만으로만 점수를 따려는 경향을 질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 방송의 편집으로 인해 점프 하나만으로 아사다를 옹호하는 발언이 되었다. 이로 인해 한동안 일본 피겨 팬들은 환호하고 한국 피겨 팬들은 그를 엄청 깠다.
나중에야 플루셴코가 "이번 올림픽에서 경의를 표할 만한 선수는 김연아 뿐이다. 압도적인 여유로 이겼다." 라는 호평을 남겼으며 일본 방송이 그의 아사다에 대한 발언을 미묘한 뉘앙스로 의역했다는 게 알려지자[24] 일본 피겨 팬들은 공황상태에 빠졌다. 딱히 여자 싱글 자체만 놓고 말한 게 아니었던 플루셴코의 말 한마디에 양국 여자 싱글 팬들이 낚였던 셈. 하지만 이전에도 딱히 플루셴코는 아사다가 금메달을 받았어야 했다는 말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신채점제와 남싱의 다른 피겨 종목과의 차별화 문제와, 북미와 유럽간의 오랜 대립, 북미-유럽 간의 입장차가 뒤섞인 이 복잡한 문제로 인해 피겨팬들 사이에선 이번 남싱의 결과와 채점제의 문제에 대해 의견이 갈렸고 여기에 여자 싱글도 관련되면서 김연아–아사다 마오란 라이벌 구도가 부각되는 바람에 복잡한 양상을 띠었던 것이다. 기술 선도의 책임을 지고 있던 남자 싱글에서의 쿼드러플과 여자 싱글에서의 트리플 악셀은 역사와 의미에서 큰 차이가 있다. 오랫동안 남싱에서 챔피언의 상징이었던 쿼드러플과 달리 프로그램 자체의 예술성이나 완성도를 더 중시하며 한 번도 일반화된 적이 없던 여자 싱글에서의 트리플 악셀은 피겨 선수들에게 있어 차지하는 위치가 다르다.
첨언하자면 결과적으로 남자 싱글 피겨 스케이팅은 지난 십수년간 그러했듯이 쿼드 전쟁의 시대로 복귀했다. 현재 거의 모든 탑싱들이 쿼드를 시도하고 있고 한 때는 반 쿼드 진영의 선두 중 한 명였던 캐나다의 패트릭 챈 선수마저 쿼드와 쿼드 콤비네이션을 장착하는 등 2008 세계선수권부터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까지의 쿼드의 필요성 논란은 불과 2년 만에 결국 신채점제 과도기의 한 현상이 되어 과거로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이다. 어쨌든 논란에도 불구하고 남자 피겨 선수로서 현역에서 은퇴했다가 3년 만에 돌아와서 다시 공식 경기에서 우승을 하거나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전례가 없는 만큼 플루셴코의 복귀는 그의 운동 선수로서의 능력과 흥행 보증수표임을 증명했다고 볼 수 있다.
3.12.2. 2010 세계선수권
세계선수권에 출전하기 위해 연습하다가 무릎 부상이 악화되어 2010 토리노 세계선수권은 기권했다. 몸 상태와 ISU의 징계[25] 때문에 2010-11 시즌을 건너뛰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쉬게 되었던 이 시즌에 수술도 하고 휴식도 취했다..
3.13. 2010-11 시즌
시즌은 스킵했지만 재팬 오픈에 유럽 팀으로 출전해 개인 3위, 팀 3위를 기록했다.
3.14. 2011-12 시즌
'''두번째 컴백을 했다.''' 2011년 말 부상 악화로 골골대서 팬들을 정신고문하더니 정작 나온 2012 러시아선수권에서 우승했다.
2012 유럽선수권에 출전해서 프리 록산느의 탱고로 경기장 전체 기립박수를 이끌어내고 '''우승'''을 했다. 이것이야말로 시니어 데뷔 15년 차 대선배의 연기인가 싶은 여유만만함과 2009-10 시즌보다 더욱 유려해진 스케이팅과 카리스마가 인상적인 2012 유럽선수권 프리 프로그램 "록산느의 탱고"다. 2008년 이후 무릎을 안 깎아내고 넘어간 해가 없는 거 같은데 경기에선 훌륭한 퀄리티의 쿼드, 트악을 뛰는 게 이젠 불가사의의 경지에 이른 거 같다. 팬들이 봐도 괴물이다. 그러나 부상이 악화되어 다시 세계선수권은 포기. 그리고 '''또''' 수술을 받으러 갔다.
2014 소치 동계올림픽에 도전한다는 말을 남겨 지금도 피겨 스케이터로서는 많은 나이에 무너지기 직전의 유리몸이 2014년까지 버텨줄 지 많은 우려와 의심의 목소리가 있었으나 2012 유럽선수권에서의 화려한 컴백으로 대부분 불식되었다.[26]
3.15. 2012-13 시즌
재팬 오픈에 유럽 팀으로 참가해 개인 4위, 팀 3위를 기록했다.
2013 러시아선수권에 출전하여 '''전무후무한 10번째 내셔널 우승을 차지했다.''' 경기 한 달 전에 척추 시술을 받아 완전하지 않은 몸 상태로 진통제를 맞아가며 해낸 결과. 그러나 이후로 허리 부상은 계속 악화되어 2013 유럽선수권은 쇼트를 마친 뒤 기권하고 만다. 기권 직후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이스라엘에서 인공추간판 삽입술을 받은 뒤 회복하였다. 척추에 인공디스크를 넣는 대수술 후 6개월 만에 트리플 악셀을, 7개월 만에 쿼드를 뛰는 연습 영상을 공개했다.
3.16. 2013-14 시즌
올림픽 기술점 최저 한도를 충족시키기 위해 B급 대회인 볼보 오픈 컵에 출전하여 우승했다.
2014 러시아선수권 쇼트에서 98.41점으로 1위에 올랐으나 프리에서 예전이라면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후반 점프를 연달아 더블링하여 결국 '''1999년 이후 처음으로''' 2위에 그쳤다.[27] 마침 2014 소치 동계올림픽에 나가게 되더라도 자신은 단체전에 참가하고 개인전에는 다른 선수가 나갔으면 좋겠다고 말했지만 규칙상 불가능하다는 지적을 받아서 취소했다.
어쨌든 원래 러시아 올림픽 대표는 러시아선수권과 유럽선수권을 통틀어 평가 후 최종확정되는데 2014 유럽선수권을 불참하고 대신 비공개 테스트를 받기로 했다.[28] 그런데 플루셴코를 러시아선수권에서 이기고 챔피언이 되었던 막심 코브툰이 막상 유럽선수권 프리를 거하게 말아먹으며 5위를 하는 바람에 출전이 불투명해졌고, 플루셴코는 비공개 테스트를 성공적으로 완수하면서 '''소치 올림픽 출전이 확정'''되었다.
3.16.1. 2014 소치 동계올림픽
단체전 쇼트에서 91.39점으로 '''2위'''를 했다! 특히 단체전 금메달의 가장 강력한 경쟁국인 캐나다[29] 의 가장 강력한 선수 패트릭 챈을 3위로 밀어내면서 러시아의 초반 기선제압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단체전 남자 싱글 프리에서는 168.20점으로 캐나다, 일본을 제치고 '''1위'''를 함으로써 차르의 건재함을 보여주었다!! 러시아의 단체전 우승에 크게 기여하며 자신의 2번째 올림픽 금메달이자 4번째 올림픽 메달을 목에 걸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4번이나 포디움에 오른 '''유일무이한 선수이다.'''
그러나 개인전에서 컨디션 문제인지 오전 연습에도 불참하고 이후 워밍업 때 착지 이후 무릎이 안 좋은 듯한 모습을 보이더니 결국 자기 순서 직전에 기권을 선언했고 갑자기 현역 은퇴를 선언하고 만다. 경기장을 찾은 러시아 국민들은 갑작스런 기권에 멘붕했지만 기립박수를 보냈다.[30] 나중에 알려진 바로는 개인전 연습에서 등에 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왔고 경기를 수행할 수 없어서 관계자에게 기권의 의사를 밝혔으나 대기 선수가 아픈데다 행방을 찾을 수 없다는 통보에 웜업까지 나오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역시 경기를 수행할 수 없는 상태라 기권하게 되었다. 아쉽지만 러시아 남자 싱글 출전권이 1장밖에 없어 단체전에서 쇼트와 프리를 모두 수행해야 했던 탓에 수술한지 1년도 안 된 인공디스크에 부담이 가중된 결과였다. [31]
직후 가진 인터뷰에서[32] 이젠 아마추어 스포츠와는 이별이라고 해 곧 정식으로 은퇴할 것임을 시사했다. 워밍업을 할 때 첫 번째 트리플 악셀를 한 직후 심한 통증을 느꼈고 두 번째 트리플 악셀을 한 뒤에는 아예 오른쪽 다리에 감각이 없었다고 한다. 결국 더 이상 현역으로 활동하기엔 한계가 왔음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수술만 12번에 허리 디스크를 인공 디스크로 갈아끼우고 충격을 흡수하는 무릎 반월판조차 없는 상황에서 부담 가는 쿼드 점프를 팡팡 뛰었다. 아내는 그가 장애인이 될까봐 두려웠다고 인터뷰하기도 했다.
혹시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불태우는 갈라는 보여줄 지 모른다고 기대하는 팬들도 있었지만 상태가 생각보다 더 심각했다. 허리에 있는 '''인공 디스크의 나사 하나가 부러져 있었다'''고 한다. 결국 2014년 3월 3일 다시 이스라엘에서 척추 수술을 받았다.[33] 마지막 갈라를 보지 못한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당연히 갈라보단 사람 목숨이 먼저이므로 팬들은 아쉬움보다는 격려와 응원을 보냈다.
허리수술 후 3달 동안 휴식한 뒤 6월 일본 아이스 쇼에 참가해 수술 후 3개월, 연습재개 약 2주일 만에 첫 트리플 악셀을 뛴다. 쇼를 무사히 마치고 러시아로 돌아온 뒤 2014년 7월 2일자 인터뷰에서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을 준비한다고 밝혔으며 2014년 7월 10일부터 훈련에 돌입했다.
그러나 앞으로 2시즌 정도 쉴 예정이며 자신도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출전이 꿈같은 얘기인건 알지만 그건 밴쿠버 나 소치 때도 마찬가지였으므로 어떻게 될 지 자신도 확신할 수 없다고 하였다.
3.17. 은퇴
2017년 3월 31일 건강 문제로 공식 은퇴를 선언했다.
4. 기록
4.1. 세계신기록
- 2003-04 시즌 신채점제가 그랑프리 시리즈에 도입되고 난 후부터의 기록들.
4.2. 그 밖의 기록
- 1999 NHK 트로피에서 세계 최초로 4-3-2(쿼드러플 토룹-트리플 토룹-더블 룹) 랜딩에 성공하였다. 공식 경기에서 총 26회 이상 성공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 컴비네이션 점프를 경기에서 모두 성공한 선수는 극히 드물다.
- 2002 컵 오브 러시아에서 세계 최초로 4-3-3(쿼드러플 토룹-트리플 토룹-트리플 룹) 랜딩에 성공하여 공식 경기에서 총 4회 이상 성공했다. 이 콤비네이션은 아직까지 플루셴코 이외에 아무도 성공한 적이 없다.[34]
- 남성 스케이터 최초로 비엘만 스핀에 성공하였다. 시니어 데뷔 이후에도 8시즌 동안 비엘만 스핀이 가능했던 유일한 남성 스케이터였으나 2005 세계선수권에서 기권한 이후로는 고질적인 부상 문제 때문에 하지 못하게 되었다.[35] 또한 남자 싱글 스케이터 최초로 베이글 스핀에 성공하였다. 웬만한 여자 싱글 선수보다 아름답게 도넛을 구웠으며 시니어 데뷔 이후에도 9시즌 동안 선보였다.
-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 쇼트 프로그램 토스카의 서큘러 스텝에서 레벨 4를 받은 세계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 구채점제 시절, 16세의 나이로 만점인 예술점수 6.0점을 받아 최연소 6.0 획득을 기록하였다. 역시 구채점제 시절인 2003 러시아선수권에서 심판 전원으로부터 예술 점수 6.0점을 받은 바 있다. 자국 선수권 대회였다고는 하나 유례가 없는 대기록이었으며 신채점제로 바뀐 지금은 깨질 수 없는 기록이 되었다.
5. ISU 공인 최고 점수
6. 프로그램
'''보다시피 리스트 길이부터 장난이 아니다.''' 이 외에도 2003년부터 꾸준히 쓰지만 러시아 국내 대회에서만 선보였던 갈라 "Town Which Doesn't Exist" 등의 자투리 프로그램들까지 합치면 더 많다.
7. 커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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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말말말
'''"플루셴코는 큰 업적을 남겼고 현대 스케이팅에서 상상하지 못할 탁월한 수준에 도달했다. 3번의 올림픽 경기에서 연속으로 메달리스트가 된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성취다. 거기에 더해 최초의 단체전 우승은 피겨 역사에서 누구보다 우수한 챔피언으로서의 그의 위치를 공고히 할 것이다. 그는 영웅이고 나는 이 스포츠를 사랑하는 우리 모두에게 그가 이제까지 준 것들을 축하한다."'''
- 스캇 해밀턴(1984 사라예보 동계올림픽 남자 싱글 금메달리스트)
'''"러시아 국민들이 개인전에서 기권했다고 플루셴코를 비난하는 건 넌센스다. 시간이 지나면 오직 그의 훌륭했던 경기와 그가 어떻게 사랑하는 조국을 대표했는지만 기억하게 될 것이다."'''
- 브라이언 보이타노(1988 캘거리 동계올림픽 남자 싱글 금메달리스트)
'''"플루셴코의 긴 선수 생활은 피겨 스케이팅 뿐만 아니라 다른 스포츠들과 비교해도 믿어지지 않는다. 나는 그가 복귀하고 단체전 경기를 수행하고 결국 금메달을 획득한 것에 큰 감명을 받았다."'''
- 에반 라이사첵(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 남자 싱글 금메달리스트)
'''"플루셴코의 긴 커리어는 비현실적이고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나는 4번의 세계선수권에서 우승했지만 그것은 훨씬 짧은 기간이었다. 그는 4번의 올림픽에서 메달을 땄다. 각각의 올림픽 사이에는 4번의 크리스마스가 있는 (긴 시간인) 것이다. 그것이 그의 성취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이유이다. 거기에는 어떤 비난도 있을 수 없고, 설령 있다해도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새끼 고양이가 타이타닉에 흠집을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 커트 브라우닝(1989, 1990, 1991, 1993 세계선수권 남자 싱글 우승자)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면 경기장에서 플루셴코의 목에 메달 3개를 다 걸어준 다음 무릎을 꿇고 경의를 표했을 것이다. 그가 경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가 완벽한 모습으로 4번째 올림픽에 출전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격적이었다. 그는 이전보다 못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다른 수준이라고 말하겠다. 3번의 올림픽에서 그는 평범한 선수였다. 그가 토리노에서 우승했음에도 나는 그를 전문적이지 않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이제는 진정 전문적이다."'''
9. 연기
역대 최고라고 불리울 만큼 압도적인 점프 컨시[36] , 남자로서 하기 힘든 비엘만과 스파이럴, 도넛 스핀 등 유연성 겸비, 4-3-2, 4-3-3 같은 비인간적 콤비네이션 점프도 너끈히 소화하는 등 기술적인 면으로도 세계 최고의 기량을 보유한 선수지만 예술성도 결코 그에 뒤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진정한 먼치킨이다.
플루셴코의 연기는 주로 날카롭고 서늘하며 우아하며 힘이 있다. 음악을 타는 감각은 천부적이며 풍부한 표정 연기와 섬세한 신체적 표현력, 싸늘하고 압도적인 빙판에서의 존재감과 카리스마, 관중의 호응을 이끌어내는 빙판 장악력은 가히 차르라는 별명에 손색 없는 수준이다.
어린 시절 러시아 발레의 양대산맥 중 하나인 마린스키 국립극장에서 러브콜을 받고 진지하게 진로 고민을 했을 정도로 발레에 재능이 있는 플루셴코는 손끝에서 발끝까지 예리하게 라인이 살아있는 뛰어난 바디컨트롤과 아름다운 포지션을 자랑한다. 발레풍의 프로그램은 의외로 니진스키 헌정과 알비노니의 아다지오 정도로 많지 않지만 그 이외의 프로그램들에서도 그의 발레적 재능이 자연스레 발휘되어 동작 하나하나에서 섬세하고 우아한 발레의 풍취를 발견할 수 있다.
러시아의 전설적인 안무가 겸 발레리노 바슬라프 니진스키에게 헌정하는 프로그램이며 플루셴코의 프로그램 중 가장 완성도 높은 프로그램으로 평가받는다. 음악은 헝가리 바이올리니스트 에드빈 마르톤, 안무는 보리스 에이프만 발레단의 수석 발레리노 유리 스메카로프가 맡았으며 중간중간 니진스키의 오리지널 안무 동작들이 들어가 있다. 특히 절정 부분에 보여지는 '''장미의 정령'''은 니진스키에의 헌정 중에서도 백미. 플루셴코와 스메카로프는 이 프로그램을 위해 직접 박물관을 찾아 니진스키의 일생에 대해 조사했다.
2003-04 시즌 연기된 많은 니진스키 중에서도 '가장 기술 및 예술적으로 완벽한 니진스키' 로 회자되었던 것이 2004 러시아선수권 니진스키였다. 실제로 '''예술점수 전원 만점'''이라는 피겨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으며 플루셴코 본인은 관중들의 기립박수에 답하느라 키스 앤 크라이 존에 가지도 못하고 빙판에 선 채로 점수 발표를 들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몇 년 전까지는 다 일그러진 저화질 영상으로밖에 구할 수 없어 피겨 팬들의 애간장을 태운 경기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발레리노 니진스키의 춤이 사진과 기록으로만 남아있듯 가장 아름다운 니진스키는 이런 화질로밖에 볼 수 없는 것' 혹은 '신이 가장 아름다운 것을 보는 것을 금지했다' 라는 이야기까지 있었다. 다행히 관대하게도 2008-09 시즌 러시아선수권 방송에서 남자 싱글 경기 후 재방송을 하여 지금의 그나마 개선된 화질로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37]
야구딘이 프리에서 3위 이하, 본인이 프리에서 1위를 하지 않으면 우승할 수 없는(즉 거의 게임 끝난) 상황이었으나 도리어 그런 상황에 버프를 받았는지 새파랗게 독 오른 열연을 펼쳤다. 팬들 사이에서는 '독기 카르멘' 으로 불리며 사랑받고 있다.
그것도 올림픽 무대에서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4-3-3을 시도한 데다[38] 한 프로그램 안에서 콤비네이션 포함 쿼드러플 토룹 두 번에 트리플 악셀-하프 룹-트리플 플립을 넣는 등 기술적으로 이미 인간 한계를 초월한 구성의 프로그램. 거기다 잘 보면 돈 호세와 에스카밀로에 이어 '''남자 주제에 카르멘까지 연기'''하고 있는데 그게 또 환상적으로 어울린다
일부 유명 프로그램에서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다른 프로그램에서도 플루셴코는 기술성과 예술성의 완벽한 조합과 특유의 오만함에 가까운 카리스마로 심판과 관객들을 열정적으로 사로잡는다.
니진스키와 카르멘 외에도 아다지오, 상트페테르부르크 300, 탱고와 플라멩고, 토스카, 대부 등 대부분의 쇼트와 프리 프로그램들이 팬들에게 두고두고 사랑받고 있다. 특히나 대부는 매 경기마다 다른 매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팬이라면 모든 경기는 필견이다.
9.1. 갈라
경기 때 압도적인 아우라를 내뿜던 모습과 비교하면 억만 광년의 괴리감이 느껴지는 4차원적 갈라쇼로도 유명하다. ''''갈라쇼 하려고 대회 나온다'''' 는 말이 있을 정도다. 사실 피겨팬이 아닌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갈라가 더 유명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플루셴코가 출전했다고 하면 피겨 팬들 중에도 갈라쇼가 어떨지를 더 기대하는 사람이 여럿 있었다.
만 18세의 나이로 인생 첫 세계선수권 우승 후 이런 짓을 했다. 이런 인간에게 금메달을 빼앗긴 다른 선수들이 살짝 불쌍해질 지경인데 쇼트와 프리에서의 차갑고 냉정한 모습은 어디가고 느끼한 살인미소와 천연덕스러운 개그 연기가 이미 초월자 수준인 데다 근육 수트에 황금 팬티 바람으로도 점프는 환상적이다.[39] 이건 뭔가 더욱 지못미하지 않은가?
이 프로그램은 첫 공개 이후 하도 센세이셔널한 인기를 끌어 2008년까지도 아이스 쇼에서 꾸준히 우려먹혔는데, 아기로 분장하고 나와 형언할 수 없는 퍼포먼스를 펼치는 변형판도 있다. 통칭 베베섹밤으로 피겨 스케이팅 갤러리의 3대 금지 영상 중 하나이다.[40] 2ch의 혹자는 '인간의 존엄성이란 무엇인가 묻는 프로그램' 이라는 평을 남겼다. 그를 니진스키로만 기억하고 싶다면 보지 않는 것이 좋다. 베이비 섹스밤 - 정신건강에 주의하면서 보도록 하자. [41]
언젠가 인터뷰에서 '단 하나의 프로그램으로만 기억된다면 '토스카가 좋겠다' 고 발언한 바 있다. 그러나 현실은 일반인은 대부분 섹스밤으로 기억하는 상황이다. 사실 '''처음부터 본인이 제일 즐기고 있었다'''는 것이 가장 문제다.
2001 세계선수권 우승 후 갈라인 섹스밤을 포함해 2003 세계선수권 우승 후 온리유, 2004년 세계선수권 우승 후의 아시사이 갈라는 모두 초연으로 충공깽을 선사하는 명작이다. 특히 아시사이의 자웅동체 연기는 압권으로 처음 노출시의 격뿜을 넘길 수만 있다면 플루셴코의 연기자로써의 재능에 감동하게 된다. 혹자는 미쉰의 취향이라는 사람도 있다.[42]
러시안컨트리 댄스이다. 그의 싹수를 미리 엿볼 수 있는 1998 세계선수권 갈라이다. 15세의 최연소 메달리스트, 월드 데뷔의 갈라 무대에서 무릎으로 기어 심판석 앞으로 들이댄 후 유사품으로 빙판 위에 엎어져 날갯짓을 하며 온몸으로 미친 새를 열연하는 이팔청춘 16세의 미친 새가 있다.
2010 유럽선수권에서 6번째 우승을 차지했을 때는 첫번째 우승처럼 좋아하고는 얼음 위에서 혼자 러시안 뽕짝에 미친 듯이 몰입해서 처절한 연기를 펼쳤는데, 가사의 번역이 스베차(촛불) 나오자 한국 팬들에게 ''''이번 시즌 끝나고 죽을 거냐'''' 란 원성 섞인 찬사를 들었다.
시청자들은 처음에 의외로 평범해서 실망했으나 그야말로 열연을 펼쳐서 화제가 되었다. 일단 곡 이름부터 ''''Je suis malade(나는 마음이 아파요)'''' 에 관중을 휘어잡는 타고난 아우라와 마음을 흔드는 처절한 연기력, 끝에 가서 빙판에 벌렁 자빠지는 것까지 예술적인 나 죽었뜸 마무리(가사에 따르면 죽은 새를 뜻한다)까지 빙판을 말 그대로 지배했다. 밴쿠버 올림픽 갈라쇼에서 플루셴코는 가장 큰 환호와 유일한 기립을 이끌어내며 적지의 심장인 북미 올림픽에서 갈라쇼를 지배해 버렸다.
그가 두 번째로 복귀한 2011-12 시즌에서는 아쉽게도 예전 갈라를 재탕하는 수준에 그쳤다. 'Je suis malade'가 명갈라긴 한데 너무 많이 우려먹는 것 같다.
10. 코치와의 관계
플루셴코와 미쉰 코치의 관계에 대하여 설명하자면 나무위키 페이지로는 부족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세상 어느 누구보다 절대적인 신뢰와 애정관계를 자랑하는 사제 관계이다. 이 두 사람의 인생에서 서로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는 절대 설명할 수 없는 사이이며 20년 간의 사제 관계는 뉴비들이 넘볼 수도 없는 어마어마한 유대관계를 자랑하고 있다. 어린 나이에 고향과 가족을 떠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훈련해야 했던 제냐에게는 미쉰이 아버지 같은 존재였고 미쉰 코치 역시 재능과 노력을 갖춘 그의 뮤즈에게 그만큼 사랑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팬들 사이에서는 부인인 야나보다 더 질투의 대상이다.
2011년 3월에는 미쉰 영감님의 칠순을 기념하는 아이스 쇼를 열었다. 미쉰 코치의 제자들이 모두 모여 영감님의 생신을 축하하는 자리였는데 정작 미쉰 영감의 가장 큰 제자인 제냐는 그날 감기에 걸려 열이 끓는 바람에 원래 세 개를 할 예정이었던 프로그램을 하나밖에 하질 못했다. 미쉰 코치를 향한 플루셴코의 애틋한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일명 미쉰쇼에서 보여준 카루소이다. 아다지오 스텝을 활용한 우아하면서 애절한 연기가 아름답다. 이 날 플루셴코는 그의 코치에게 한쪽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며 '당신을 아버지처럼 사랑합니다' 라고 말했고 미쉰 또한 '나도 너를 아들처럼 그 이상 사랑한다' 라고 화답했다고 한다. 2014년 5월 미쉰 코치의 손자가 태어났는데 플루셴코에게 누구보다 먼저 그 사실을 전했다고 미쉰이 인터뷰에서 말하기도 했다.
11. 기타
-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 이후 사실상 은퇴 상태로 대회에는 나오지 않고 주로 아이스 쇼를 하며 보냈다. 이 기간 중 피겨 학교를 세우기 위한 예산을 얻기 위해 잠시 정치계에 들어갔다가 갑자기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의원에 당선되어 가끔 농담 섞인 애칭으로 '의원님'이라고 불릴 때가 있다. 2011년에 복귀 준비에 집중하기 위해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 바이올리니스트 에드빈 마톤과는 니진스키 이후 그 이상 죽이 잘 맞을 수 없는 친구 사이가 된 듯 이후 모든 프로그램의 음악은 마톤이 맡았다. 휴식 기간 중에는 마르톤과 함께 아이스쇼 공연을 했으며 러시아의 국민 가수 지마 빌란과 그룹을 이루어 2008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 출전하기도 했다. 뭐 결국 유로비전 50년 역사상 처음으로 러시아가 우승하는 쾌거를 이룩하긴 했지만, 사실 진정한 플루셴코 금지 영상은 이쪽이래야 마땅할 정도로 손발이 오그라지는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역시 그를 니진스키로 기억하고 싶다면 결코 봐서는 안 될 영상이다.
- 점프, 스텝, 연기가 모두 초일류인 굇수지만 유일한 약점으로 지적받는 부분이 스핀인데 선천적으로 반고리관이 약했다고 한다. 어렸을 때에는 버스도 제대로 탈 수 없어서 중간에 내려가며 몇 번씩 갈아타야 했을 정도. 훈련을 거치며 많이 호전되었으나 역시 그 때의 영향인지 '조금만 사랑하는 요소' 로 스핀을 꼽았다. 그러나 구채점제부터 훌륭한 포지션의 비엘만 스핀과 베이글 스핀을 구사하였고 특히 카멜계 스핀을 아름답게 구사한다. 신체점제에서는 무릎이 영 좋지 않아 고난도 싯스핀 시전 불가에도 불구하고 엣지 체인징을 잘하고 센터링이 좋아 레벨을 챙긴다.복귀 후에도 꾸준한 연습 덕인지 스핀이 많이 좋아졌다.
- 2014 소치 동계올림픽 이후 하뉴 유즈루의 새로운 코치로 물망에 오르고 있다는 기사가 나왔다. 플루셴코 본인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고 답변했으나, 공식적으로 플루셴코는 아직 현역 선수이고 이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 2014년 10월 러시아 교육부의 요청으로 학교 체육수업에 쓸 교수법 프로그램을 만드는 중이며 또한 10월 23일 중국 하이난에서 개최하는 2014 미션힐스 월드셀러브리티 프로암 골프대회에 참가했다.
- 2015년 1월 16일 일본에서 열린 ISU 공인 프로 대회인 메달 위너스 오픈 경기에서 1위를 차지하였다. 이 대회 2위는 오다 노부나리, 3위는 제프리 버틀, 4위는 조니 위어, 5위는 에반 라이사첵, 6위는 혼다 다케시가 차지했다.
- 은퇴 이후에는 코치로서도 종종 모습을 드러냈으나 그동안 휘하에 있던 선수들의 실력이 뛰어나지 않아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2020년 여름 에테리 투트베리제 코치 휘하의 제자들이자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의 유력한 메달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알렉산드라 트루소바와 알료나 코스토르나야를 휘하 선수로 전격 영입하면서 브라이언 오서처럼 전직 선수 출신 코치로서 명성을 얻게 될지 주목을 받고 있다.[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