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자르족
1. 개요
헝가리인의 원류가 되는 우랄어계 부족. 기존에 우랄 산맥 남쪽에 모여살다가 기후 변화와 여타 유목민족들의 압박으로 점차 서쪽으로 이동하였다. 그 과정에서 인근의 불가르, 하자르, 슬라브족과 차별화하기 위해 'mon'(말하다)과 'er'(사람)가 합쳐져 '''마자르'''란 명칭이 생겼다고 한다. 여담으로 독일인은 헝가리어로 'Nemet'인데, 벙어리란 뜻이라고 한다.[1]A sagittis Hungarorum libera nos, Domine!
주여, 헝가리인의 화살로부터 우리를 해방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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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기 서유럽 수도원들의 기도문 중에서
2. 역사
1283년 헝가리 왕실에서 편찬된 역사책 <게스타후가로룸> (Gesta Hungarorum)에 의하면 훈족과 마자르족은 같은 뿌리라고 한다. 흑해 주변에 살던 한 부족장에게 후노르와 머고르라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사냥 중 신비한 사슴을 발견하곤 추적하였다. 추격 끝에 사슴은 사라지고 방어에 용이하고 목축에 적합한 옥토에 다다른 그들은 그곳에 정착하였다. 6년 후, 형제는 벨라르 족을 약탈한데에 이어 알란족의 왕 둘란의 두 딸을 납치한 후 각각 결혼하였다. 이후 '''후노르의 후손은 훈족, 머고르의 후손은 마자르족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해당 이야기는 사실상 설화로 훈족은 흉노족과 스키타이족의 혼혈민족으로 결론이 났다.[2]
그 외에 아르파드 왕가의 시조인 알모시의 모친이 817년경 투룰이란 신비한 새로부터 잉태하였다는 설화도 전해진다.
2.1. 정체성 형성기
기원전 4,000년경, 우랄 산맥 일대에는 우랄 조어 화자들이 살고 있었다. 그중 사모예드 족이 동쪽 시베리아로 떠나고, 핀-우구르 어족이 남았는데, 그들은 기원전 2,000년 경 핀-페르므 어족과 우구르 어족으로 나뉘었다. '''마자르족은 후자인 우그르 어족에 속했으며,''' 서북쪽 발트해 쪽으로 이동한 핀-페르므 어족과 달리 우랄 산맥 동쪽에 남았다. 이때 그들은 이란계 부족인 알란 인들과 접촉하며 기마 문화와 청동기 문화를 수용하였다. 그러던 기원전 1,500 ~ 1,000년, 지구 기온이 상승하자 우그르 어족 중 오스트야크, 보굴 인들은 침엽수림을 쫓아 북상하였고, 말 대신 순록을 숭배하는 유목민이 되었다. 이후 남은 자들이 바로 후에 마자르족이 되는 이들이었다.
기원전 800년경 소빙하기가 도래하자 그들은 유목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우랄 산맥 동남쪽으로 남하하였다. '''Magyar Oshaza'''(마자르 원거주지)라 불리는 그곳에서 이들은 스키타이 문화의 영향을 받아 철기를 수용하였고, 물오리 대신 독수리('''투룰''')를 숭배하게 되었다. 다만 이후의 역사는 알기 힘든데 기원전 400년 경에 서쪽으로 이주했다는 설, 4세기 말엽 훈족 혹은 6세기 중반 아바르 족의 압박으로 이주했다는 설 등이 있다. 확실한 것은 서기 600년경 볼가 강과 카마 강 사이에 위치한 바시키리아 지역에 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시기를 '''Magna Hungaria'''(대 헝가리)라 부르며, 이웃의 불가르(오노구르)족과 구분하기 위해 스스로 '마자르'로 부르기 시작했다.
2.2. 대헝가리와 국가 형성기
6~8세기의 대헝가리 시대에 마자르족은 알란 인으로부터 농경 문화를 수용하였고, 하절기에는 천막, 동절기에는 통나무집에 거주하는 반농반목 생활을 하게 되었다. 또한 잠깐이나마 고대 불가리아 연합에 속하며, 정치 체제를 습득한 마자르인들은 족장과 무사 계층을 바탕으로 한 부족 국가를 이루었다. 7세기 중반 하자르 칸국이 고대 불가리아를 멸망시키자 마자르는 그에 복속되었고 그들로부터 '''이중 군주제'''를 받아들였다. 제정분리 형태인 이중 군주제는 제사장인 '''켄데'''와 군사 지도자인 '''줄러'''로 권력이 양분되었으며, 행정을 맡은 '''허르커'''가 그들을 보좌하였다.
그러던 750년경, 대헝가리의 마자르인들 중 대부분은 '''레베디어''''라고 불린 돈 강 중류 일대로 이주하였다. 다만 일부는 대헝가리에 남았으며, 13세기까지 문화를 지키며 살다가 몽골 제국에 의해 소멸되었다.[3] 레베디어에서 마자르 부족은 볼가 불가르, 알란 등 다른 부족 출신의 이주민들을 수용하였다. 한편, 9세기 초엽 다른 튀르크계 민족인 페체네그족이 도래하며 하자르 칸국과 수십년간 이어질 전쟁을 벌이자 마자르인들은 재차 서쪽으로 향하였다. 드네프르 강과 드녜스테르 강 사이의 땅('''에텔쾨즈''')[4] 에 정착한 그들은 튀르크계인 카바르 족[5] 을 8번째 부족으로 수용, 헝가리 민족을 완성하였다. 이때가 바로 '''서기 830년경, 마침내 마자르인들은 하자르로부터 독립한 새로운 세력권을 형성하였다.'''
2.3. 민족 대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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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자르족이 독립한 830년경 당시 켄데(제사장)는 레베드, 줄러(군사령관)는 알모시였다. 그리고 839년에 마자르 군대가 다뉴브 강 하류에 출몰한 것은 한 세기에 걸쳐 중부 유럽을 뒤흔들 마자르 인의 대이동의 서막이었다. 다만 1차 불가리아 제국의 중심부였던 다뉴브 강 하류에서 밀려난 마자르 인들은 몰다비아를 넘어 서쪽의 카르파티아 분지에 주목하였다. 그곳은 아바르 칸국의 해체 이후 불가리아와 모라비아의 접경으로 주인이 없었다. 따라서 862년부터 이 지역으로 마자르인들이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다만 이동은 소규모였고 조직적이지 못했다. 대규모 이주가 벌어진 것은 894년, 오랜 대립 끝에 결국 하자르 칸국에게 패배한 페체네그족이 마자르인의 본거지인 에텔쾨즈를 지나 몰다비아로 향하면서였다.
페체네그족에게 위협을 받은 마자르인들은 줄러로 알모시의 아들 아르파드를 선출하곤 본격적으로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어 트란실바니아 지역으로 집단 이주하였다. '''895~896년에 걸쳐 일어난 이 대이동을 'Honfoglalas'라 부른다.''' 이때 쿠르산을 마지막으로 켄데 직위가 없어지고 줄러, 즉 군사령관 직이 사실상 단독 군주로 행세하게 되어 중앙집권화로 나아가게 되었다. '''카르피티아 분지'''에 정착한 10만 가구의 마자르인들은 산맥을 동쪽 유목민들에 대한 방어선으로 삼고, 본격적으로 중부 유럽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900년경 다뉴브 강 동쪽의 영토를 접수한 마자르인들은 북으로는 발트해, 서로는 도버 해협, 남으론 이베리아 반도와 이탈리아 북부까지 군사 원정을 감행하였다. 프랑크 제국의 분열 이후로 약화되어 있던 서유럽은 이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마자르 군대는 전투 중 거짓 퇴각 후 반격하는 전술을 주로 사용하여 돌격에만 익숙한 게르만 기사들을 쉽게 격파하였다.
마자르인들은 족장(bo) 휘하에 군대(jobbagy)를 편성했고 그러한 족장 5~6명이 하나의 부대를 모았다. 948년 마자르의 하르카 불추는 직접 동로마 제국령을 방문하여 세례를 받고 오기도 하였다.
933년, 마침내 독일 왕 하인리히 1세가 마자르 군대를 패배시켰고, 955년 오토 1세가 아우크스부르크 인근의 레히펠트 전투에서 불추를 전사시키면서 마자르인들은 헝가리 평원에서 더이상 진격하지 않았다. 이후 마자르인들은 이전의 훈족, 아바르족, 노르만족 등의 선례들처럼 돌아가거나, 동화되거나, 영지를 얻거나, 혹은 정체성을 유지한 채로 정착하느냐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 이후의 역사는 헝가리 대공국 문서 참고
3. 참고 문헌
헝가리사 (이상협, 1996년)
[1] 원시 슬라브어로 '벙어리'를 뜻하는 '넴츠'(němьcь)에서 유래한 단어인데 슬라브족이 게르만족을 가리켜 '(슬라브어를 하지 못하는)벙어리'라고 부른 것이 의미가 확장되어 (자기네 말을 하지못하는)외국인, 슬라브족 옆에 이웃한 외국인인 게르만족, 나아가 게르만족의 대표격인 독일인을 가리키게 된 것. 슬라브족이 다수를 차지하던 판노니아 평원에 정착한 마자르인들이 마자르어에 슬라브 어휘들을 대거 받아들이면서 이렇게 된 것이다.[2] 물론, 당시 마자르족이 위치한 지역이 훈족의 지배를 받던 곳인 만큼, 어떤 식으로든 훈족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고 극소수나마 피도 섞였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이역만리 만주에서도 고대 한국인이 주축이 되어서 세워졌던 고구려와 발해가 멸망한 후에, 이들과 생판 관계없던 몽골계 민족인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가 지들이 고구려의 후예라고 자칭한 적도 있는데, 역시 거란족도 한때는 고구려의 지배를 받은 바 있었다. 유럽에서도 정통 로마 제국과는 1도 관련없는 주제에 자기가 멸망했다가 부활한 서로마 제국이라고 사칭한 신성 로마 제국이 독일에 세워지면서, '''진짜배기 로마 제국'''인(그러나 통일 로마 제국 및 서로마 제국과 달리 라틴족이 아니라 그리스인이 주류가 된) 동로마 제국의 어이를 날려버린 사례가 있다.[3] 1235년 헝가리의 수도사 율리언이 그곳으로 찾아가 그들과 헝가리어로 대화했다는 기록이 있다.[4] 현 우크라이나 서남부.[5] 후에 세케이족이라 불리며 헝가리 왕국의 동부 전선을 위임받아 트란실바니아 동부에 정착, 19세기 말엽까지 튀르크계 문자를 사용하며 정체성을 유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