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양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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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중종의 서5남으로 어머니 숙의 이씨에겐 장남이자 유일한 자녀이다. 전주이씨 덕양군파의 파시조이다.
2. 생애
태어난 지 불과 5일 만에 생모 숙원 이씨가[2] 산후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중종의 다른 후궁인 숙의 김씨의 손에서 자랐다. 1532년(중종 26년)에 덕양군에 봉해졌다. 이후 종친부와 종부시, 사옹원과 문소전 및 연은전 등에서 관직을 역임하였다.
1581년(선조 14년) 7월 22일에[3] 사망했다. 향년 56세.[4] 묘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궁내동 청계산 자락(산17-1)에 있으며 부인 권씨와 함께 합장되어있다. 또한 묘역에는 친어머니 숙의 이씨와 덕양군을 길러준 숙의 김씨의 묘도 함께 있다.
3. 여담
- 천성은 순수하고 소박하며 겸손했다고 한다. 또한 술을 잘 마셨고 음률에 해박했다고 한다.
- 1540년(중종 35년) 11월 5일에[5] 덕양군의 집에 도둑이 들었다. 이에 중종은 왕자의 집을 제대로 못 지켰다며 담당 관리를 파직했다.# 그러나 이는 거짓말이었다. 사실은 나이가 어렸던 덕양군을 그의 노비들이 꾀어내어 장난쳤던 것. 당시 대신들은 별 거 아닌 걸로 임금을 놀라게 했다며 덕양군에게 벌을 주라 중종에게 요청했고, 중종이 받아들여 덕양군과 그의 종들은 조사를 받았다.#
- 1547년(명종 2년) 7월 29일[6] 에는 덕양군 집의 노비였던 말년이와 다물사리가 덕양군 부부를 이간질한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당시 말년이는 바로 조사를 받았으나, 무슨 일인지 덕양군이 다물사리를 한사코 자신의 집 밖으로 못나가게 하는 바람에 종부시에서 다물사리를 조사할 수 없었다. 결국 대간들이 법을 무시하는 덕양군을 문초할 것을 청하여 명종이 윤허하였다.#
- 1574년(선조 7년) 4월 23일[7] 에는 종부시의 관원이 어떤 잘못을 한 종친에게 벌을 주려고 하자 덕양군이 막았다. 이에 대간들은 덕양군을 끈질기게 탄핵했으나 덕양군의 서조카인 선조는 끝까지 서숙부를 감쌌다.#
4. 가족과 후손
예조판서 권찬의 딸인 영가부부인 권씨와 혼인하여 슬하에 아들 1명을 두었고, 측실에게서는 3남 1녀를 두었다. 적장자는 풍산군 이종린(豊山君 李宗麟)이고, 서장남은 풍성군 이희린(豊山君 李希麟), 서차남은 풍천도정 이명린(豊川都正 李命麟)이며 서3남은 풍해수 이계린(豊海守 李季麟)이다.# 딸에 대해서는 정보가 알려져 있지 않다. 풍해수 이계린을 제외한 나머지 아들들의 자손이 번창하여 오늘날의 전주 이씨 덕양군파를 이루고 있다.
전 과학기술처 장관 이태섭과, 배우이자 요리 연구가인 이정섭이 덕양군의 후손이다. 특히 이정섭은 풍산군 이종린의 5남 귀흥군 이섬(龜興君 李睒)의 12대 종손이다.
5. 매체에서
- 조아라에서 연재되었던 대체역사소설 《환생군주》에 등장한다.[8] 조선의 종친세력을 대표하는 인물로, 종친들 사이에서 덕망이 높으며 오위도총부 도총관 및 종친부와 종부시 같은 관청들의 중요 직급을 모두 맡았을 정도로 높은 대우를 받은 것으로 묘사된다. 왕위계승서열도 높은 인물이지만 이균(선조, 작중 주인공)에게 대항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것으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