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폴란드 원정
1. 개요
나폴레옹 전쟁의 5번째 국면. 제4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War of the Fourth Coalition)이라고도 한다.
2. 배경
1806년 7월, 나폴레옹은 친나폴레옹 성향의 서남부 독일 연방국가들을 모아 라인 동맹을 결성하게 했다. 이로 인해 나폴레옹의 세력은 독일 중부까지 미치게 되었고 이는 북독일의 강자였던 프로이센 왕국에게는 위협으로 다가왔다.
원래 프로이센은 프랑스에 적대적인 국가가 아니었다. 프랑스 혁명전쟁 때도 상황이 프랑스 편으로 기우는 게 보이자 가장 먼저 프랑스 혁명정부를 인정하고 전쟁에서 빠진 후 하노버를 병합하고 분할한 폴란드 지역에 대한 지배를 확고히 하는 등 오히려 세력을 확장했다. 이후로도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대프랑스동맹에 가담해 프랑스와 전쟁을 치루는 동안 참전하지 않고 조용히 있었는데 나폴레옹이 차츰차츰 동진하면서 자신들의 세력권을 침범해오자 위기감을 느끼게 된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프로이센은 러시아 제국과 동맹을 맺고 반나폴레옹 전선에 동참하게 되었다. 그러나 프로이센 내부에선 나폴레옹과 싸울 것인가를 놓고 국론이 일치된 것도 아니었다. 강력한 나폴레옹의 면모를 지켜보던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당시 막 전성기를 누리던 나폴레옹과의 전쟁을 부담스러워 했다. 그러나 루이제 왕비와 루트비히 페르디난트 왕세자의 강력한 설득으로 결국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전쟁을 결심하게 된다.
문제는 프로이센군의 처지가 나폴레옹과 싸울 상황이 아니었다. 전쟁을 결행하긴 했지만 지휘권의 소재가 불분명했고 딱히 어떻게 싸우겠다는 작전 계획도 수립되지 않은 상태였다. 게다가 1806년 9월 26일, 프로이센은 독일 내에서 모든 프랑스군이 철군하지 않으면 프랑스와 전쟁을 감행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냈지만 이미 나폴레옹은 9월 25일에 파리를 출발한 상황이었다(...).
3. 전개
결국 10월 9일, 프로이센은 프랑스에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통보하고 15만의 병력을 튀링겐 지역에 집결시켰다. 나폴레옹은 즉시 20만의 병력을 이끌고 바이에른에서 작센방면으로 진군해 10월 10일, 잘펠트에서 장 란의 제5군단이 프로이센의 선봉인 루트비히 페르디난트 왕세자가 이끄는 군대와 충돌했다(잘펠트 전투). 이 전투에서 프로이센은 패배했고 루트비히 페르디난트 왕세자는 전사했다.
잘펠트의 패배와 왕세자의 전사로 기가 꺾인 프로이센군은 철수를 생각했지만 작전회의에서는 철수냐 원군을 기다리느냐를 놓고 격론이 벌어져 어느 것도 결정하지 못한 채 시간만 흘렀다. 이런 가운데 다부의 군단이 나움부르크를 장악하자 더이상 있다간 포위될 것을 우려한 프로이센의 브라운슈바이크 공이 철수를 결심했고,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도 이를 승인하여 프로이센군은 철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0월 14일, 퇴각하던 프로이센군의 후위부대 약 6만 명이 예나에서 나폴레옹이 이끄는 4만 명의 프랑스군과 맞닥뜨렸고 나폴레옹군은 프로이센군을 격파했다. 나폴레옹은 자기가 물리친 부대가 프로이센의 본군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정작 프로이센 본군은 아워슈테트에서 궤멸적인 타격을 당하고 말았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와 브라운슈바이크 공이 이끄는 6만 명의 프로이센 본군이 다부의 프랑스군 2만 7천 명에게 대파당한 것이다(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17일에는 할레에서 베르나도트의 프랑스군이 뷔르템베르크 공의 프로이센군을 격파하면서 승기를 굳혔다(할레 전투).
아워슈테트에서의 패배로 브라운슈바이크 공이 전사하고 가까스로 도망친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수도 베를린을 포기하고 동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오늘날 러시아의 칼리닌그라드)로 도망쳤다. 그리고 10월 25일, 나폴레옹은 베를린에 입성했다.[1] 그리고 프리드리히 대왕의 묘소를 방문한 뒤 "그(프리드리히 대왕)가 살아있다면 오늘 우리는 여기에 있지 못했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11월 6일에는 마그데부르크의 수비대가 항복해 사실상 프로이센 국내의 병력은 동프로이센으로 도망간 일부를 제외한 전군이 무력화 되었다.[2]
삽시간에 프로이센이 패망 위기에 몰리자, 위기를 느낀 러시아는 10만의 원군을 급파했다. 나폴레옹은 동쪽으로 도망친 프로이센군을 추격하고 러시아군을 격파하기 위해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에 의해 3분할된 폴란드로 진격했다. 이때 폴란드인들은 나폴레옹의 동진에 호응해 반란을 일으켰고 나폴레옹이 바르샤바에 입성하기 전에 프로이센과 러시아령 폴란드 대부분을 장악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바르샤바에 입성하자 폴란드인들은 나폴레옹을 민족의 해방자로 추앙했다.
1807년 1월, 프랑스군은 프로이센의 임시수도 쾨니히스베르크로 진격했다. 그리하여 2월 7일, 아일라우에서 프로이센-러시아 연합군과 전투를 치루게 된다(아일라우 전투). 이 전투는 혹한의 눈보라 때문에 양측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나폴레옹이 결정적인 순간에 제국 근위대 정예기병인 기마척탄병 부대를 투입하면서 프랑스가 승기를 잡자 러시아군이 먼저 철수하면서 나폴레옹이 신승했다. 프랑스군은 일단 철수한 뒤 전열을 가다듬고 르페브르가 지휘하는 군대가 3월 18일, 단치히로 쳐들어가 5월 27일 단치히 수비대의 항복을 받아냈다.
러시아군도 전열을 재정비한 후 6월부터 활동을 재개하여 하이에스부르크에서 프랑스군에게 전술적인 승리를 거둔 후 후퇴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군과 싸우기보다는 거점을 타격하는 방식을 택해 쾨니히스베르크로 향했다. 러시아군은 다시 란의 군단에게 전투를 걸었으나 이로 인해 나폴레옹의 주력군에게 동향이 포착되었고 6월 14일에 프리틀란트에서 러시아군은 나폴레옹에게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퇴각했다(프리틀란트 전투).[3] 프리틀란트 전투 이틀 후인 6월 16일, 쾨니히스베르크가 함락되어 전쟁은 마무리되었다.
4. 결과
프로이센은 나폴레옹과 강화협상을 진행하여 쾨니히스베르크 근처의 틸지트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하였다(틸지트 조약). 이 조약에서 프로이센은 엘베강 서편의 영토를 내놓고 폴란드내의 프로이센령을 러시아에게 할양하며 프로이센 육군은 4만명으로 제한하고 1억 2천만 프랑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배상금이 완납될 때까지 프랑스군이 프로이센 내에 주둔하게 했다.[4]
프로이센이 잃은 엘베 강 서편의 영토에는 베스트팔렌 왕국이 새로 생겨 나폴레옹의 동생 제롬이 왕으로 등극했다. 또한 폴란드는 바르샤바 대공국으로 부활해 작센의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가 대공이 되었다.[5] 그리고 나폴레옹은 러시아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이는 친영국가인 스웨덴을 견제하려는 목적이 강했다) 러시아의 핀란드 영유를 허용했다.
5. 평가
많은 역사가들이 나폴레옹이 전쟁에서 명예롭게 발을 빼고, 외교적 타협 등을 통해서 자신의 세력을 다질 수 있었던 최적이자 최후의 시점으로 꼽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 이후 나폴레옹은 이어진 전쟁에서 큰 이득도 보지 못하면서 전력을 차차 소모하면서 몰락의 길로 나아갔다.
[1] 나폴레옹이 베를린에 입성하면서 프로이센은 한가지 굴욕을 남기게 되었는데 베를린의 랜드마크인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처음으로 개선식을 진행한 사람이 나폴레옹이라는 것이다.[2]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직후 나폴레옹은 도망가는 프로이센군을 전례가 없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추격했고 그 속도가 너무 빨라서 따라잡힌 프로이센군 부대와 그 지휘관들은 곳곳에서 포위된 후 항복했고 심지어 나폴레옹 전쟁 후기에 활약했던 게프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도 이때는 어쩔 수 없이 항복했다. 분석상으로는 프러시아군의 포로만 10만이 넘었다고 한다. 멀리 후방에 있던 약 2만 명의 수비대 만이 왕실과 귀족들을 호위해서 동프로이센과 러시아 제국으로 도피했다.[3] 프리슬란트가 아니라 현재의 러시아 프라브딘스크에서 일어난 전투이다.[4] 이 금액은 프로이센의 몇년치 GDP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게다가 프랑스 혁명 이래 프랑스군의 전통이자 나폴레옹의 특기인 현지조달 을 생각했을 때 독일의 문화재 보물은 다 뜯기고 서민들도 탈탈 털려 절대 재기 불능으로 만들어놓은 거다. 참고로 나폴레옹도 약탈대열의 선봉에 서서 몇가지 물건을 챙겼는데, 바로 평소에 존경하던 장군 중 가장 가까운 시대의 인물이었던 프리드리히 대왕의 칼과 회중시계였다. 나폴레옹은 이 두 가지가 자기 최고의 전리품이라며 히히덕거렸다고. [5] 그 덕분에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는 전선에서 죽기살기로 나폴레옹을 위해 싸웠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