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란덴부르크 문
[image]
2차 세계 대전, 베를린 장벽, 1990년의 통일과 같은 격동의 독일사를 함께한 건축물로, 오늘날에는 유럽의 단결과 평화를 상징하는 건물로 인식되고 있다.
[image]
1734년부터 1860년까지 존재한 베를린 관세벽과 그에 속한 18개의 문의 위치. Brandenburger Thor가 지금의 브란덴부르크 문이 있는 바로 그 자리이다.
브란덴부르크 변경백령의 수도였던 베를린은 면적 891km2, 인구 400만에 달하는 지금의 모습과 달리 지금의 미테(Mitte) 구 중에서도 슈프레 강에 떠 있는 작은 섬과 그 주위만 별모양 요새벽으로 둘러싼 작은 도시였다. 이후 브란덴부르크 변경백령이 프로이센 왕국으로 승격되고 베를린이 왕국의 수도로 지정되면서 도시가 점점 성장해나감에 따라 1734년 당시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기존의 요새벽을 허물고 몇 배로 커진 베를린 시가지를 완전히 둘러싼 새로운 성벽[1] 을 건설하였다. 이 새로운 성벽에는 시가지와 외곽을 연결하는 총 18개의 문이 존재하였는데 지금 브란덴부르크 문이 있는 자리가 바로 그 문들 중 하나가 있던 자리로 예전 브란덴부르크 변경백령의 수도였던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 an der Havel)로 향하는 문이기 때문에 브란덴부르크 문(Brandenburger Thor)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후 1780년대 당시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북유럽의 강국으로 성장한 프로이센의 국력을 과시하고 평화의 상징으로서 베를린에 새로운 관문이자 랜드마크를 건설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새로운 관문의 자리는 당시 존재하던 브란덴부르크 문 자리로 결정되었으며 원래 있던 브란덴부르크 문을 허물고 계획에 따라 새로 세운 결과물이 바로 지금의 브란덴부르크 문. 카를 고트하르트 랑한스(Carl Gotthard Langhans)가 그리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를 참고하여 설계한 이 문은 1788년에 착공되어 3년만인 1791년에 완성되었다. 건설 당시에는 평화의 문(Fridenstor)이라는 이름이 붙었던 브란덴부르크 문 위에는 평화를 상징하는 그리스 여신 에이레네와 그녀를 이끄는 4두 마차가 조각됐다. 신고전주의의 대표적인 걸작이기도 한 이 건물은 12개의 도리스 식 기둥이 받치고 있었으며, 베를린으로 향하는 5개의 도로가 건립 당시부터 뻗어있었다[2] .
[image]
하지만 브란덴부르크 문이 건립되기 직전에 발발한 프랑스 혁명의 물결이 곧 유럽을 휩쓸었고,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 군을 박살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베를린에 입성한다. 그리고 프로이센 입장에서는 굴욕적이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브란덴부르크 문을 통한 첫 개선식의 주인공이 바로 나폴레옹이었다. 더불어 개선문 위의 4두 마차 상까지 파리로 들고 갔다(...). 1814년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프로이센 군이 역으로 파리를 점령하면서 조각상은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브란덴부르크 문과 조각상은 이제 평화가 아니라 프로이센의 승리를 상징하게 됐고, 여신상 역시 평화의 여신이 아니라 승리의 여신 빅토리아로 바뀌었다. 이에 발맞춰 기존의 여신상에는 없었던 독수리와 참나무 잎으로 둘러싸인 철십자 깃발[3] 이 추가된다. 이후로 브란덴부르크 문은 개선문의 역할을 맡아 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 혹은 독일군이 반드시 지나가는 장소가 되었다.
다만 여전히 평민들에게는 양 끝의 도로만을 이용하는 것이 허용됐으며 가운데 도로는 왕족만 사용할 수 있었다.[4] 이처럼 신분에 따라 각각 다른 도로를 이용해야만 하는 규정은 훗날 1차 세계대전이 종전될 무렵 독일 제국이 붕괴될 때까지 유지된다.
1차 대전 종전 이후 독일군도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개선식을 열었으며[5] 1933년 집권한 나치는 자신들의 상징인 하켄크로이츠를 이 브란덴부르크 문에 덕지덕지 붙여놓기도 했다. 히틀러는 독일이 전쟁에서 승리할 경우 베를린을 세계수도로 탈바꿈시키려는 게르마니아 계획에서 브란덴부르크 문을 뒤덮는 새로운 초거대 개선문을 세우려 했으나 꿈으로 끝났다. 이후 2차 대전의 베를린 공방전을 거치면서 브란덴부르크 문은 심하게 파손된다. 기둥 곳곳이 총알과 포탄 파편으로 손상된 것은 물론 가장 중요한 부분인 4두 마차 상에서 한 마리를 제외한 세 마리의 말이 모두 머리가 날아간 것. 이러한 손상은 전쟁 이후로도 몇년간 그대로 유지된다. 물론 대충 복구를 하긴 했는데 그래도 숭숭 뚫린 구멍을 육안으로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image]
브란덴부르크 문 앞의 T-34-85 전차. 참고로 저 T-34/85전차 옆에 달린 철망은 현재 슬랫아머의 기초가 되는 물건이다. 판처파우스트로 숨펑숨펑 부서지는 T-34/85를 위해 임시방편으로 설치한 물건.
이후 세계는 냉전의 시기로 돌입하고 그 가운데에 서있던 독일과 그 수도, 베를린 역시 둘로 나뉘게 되었으며 브란덴부르크 문은 동/서 베를린을 나누는 경계선의 기점이 되었다.[6] 양 측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었다. 그런데 1961년 동독 측은 일방적으로 베를린 장벽을 세워서 통행을 막아버렸다. 물론 아예 막혀버린 것은 아니지만, 동베를린에서 서베를린으로 이 문을 통해 건너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됐다. 특히나 동독 측이 베를린 장벽 중간중간에 세운 8곳의 검문소 중 하나가 이 브란덴부르크 문이었는데, 그것으로 인해 이 문은 냉전과 독일 분단의 상징으로 자리잡는 불운을 겪는다. 하지만 1989년 독일이 재통일을 이루면서, 다시 통일의 상징으로 바뀌었다. 헬무트 콜 서독 수상이 한스 모드로우 동독 수상과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서로 만난 것이 대표적.
통일 이후에는 냉전으로 인해 소홀했던 건물 관리에 몰두하고 있는데, 2000년 12월부터 2002년 10월까지 6백만 유로 이상의 엄청난 비용을 들여서 재단장을 하기도 했다. 2009 베를린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는 마라톤과 경보 경기의 출발점과 결승점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2014년에서는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이 브라질 월드컵 우승 기념식을 이 곳에서 열었다.
낮이건 밤이건 관광객들이 엄청나게 많은 곳중 하나이다. 독일 국회의사당은 사실상 바로 옆이고 베를린 중앙역이랑 포츠담 광장도 충분히 걸어갈만한 거리에 있다. 문 바로 앞엔 러시아 대사관과 프랑스, 미국, 영국, 등 주요국 대사관들이 위치해 있으며 티어가르텐 방면으로 가면 바로 부근에 소련군 전승기념비(!)[7] 도 있다. 대사관 바로 옆에는 홀로코스트 기념비 공원이 조성되있다. 영화 언노운의 주요 무대인 아들론 호텔도 바로 앞에 있다.
베를린 지하철 U5, 베를린 S반 브란덴부르거 토어역이 인근에 있다.
문의 양쪽을 보면 바로 붙어있는 건물이 있는데, 그중 한쪽에는 고요의 방이라는 명칭이 붙은 방이 있다. 여행객들이 잠시 쉬거나 종교를 막론하고 누구나 기도도 할 수 있는 작은 방이다. 방음처리가 잘 되어있어 항상 관광객이 많아 떠들썩한 광장의 바로 옆이지만 조용하게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입장료는 자율.
1. 개요
2차 세계 대전, 베를린 장벽, 1990년의 통일과 같은 격동의 독일사를 함께한 건축물로, 오늘날에는 유럽의 단결과 평화를 상징하는 건물로 인식되고 있다.
2. 역사
2.1. 건립
[image]
1734년부터 1860년까지 존재한 베를린 관세벽과 그에 속한 18개의 문의 위치. Brandenburger Thor가 지금의 브란덴부르크 문이 있는 바로 그 자리이다.
브란덴부르크 변경백령의 수도였던 베를린은 면적 891km2, 인구 400만에 달하는 지금의 모습과 달리 지금의 미테(Mitte) 구 중에서도 슈프레 강에 떠 있는 작은 섬과 그 주위만 별모양 요새벽으로 둘러싼 작은 도시였다. 이후 브란덴부르크 변경백령이 프로이센 왕국으로 승격되고 베를린이 왕국의 수도로 지정되면서 도시가 점점 성장해나감에 따라 1734년 당시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기존의 요새벽을 허물고 몇 배로 커진 베를린 시가지를 완전히 둘러싼 새로운 성벽[1] 을 건설하였다. 이 새로운 성벽에는 시가지와 외곽을 연결하는 총 18개의 문이 존재하였는데 지금 브란덴부르크 문이 있는 자리가 바로 그 문들 중 하나가 있던 자리로 예전 브란덴부르크 변경백령의 수도였던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 an der Havel)로 향하는 문이기 때문에 브란덴부르크 문(Brandenburger Thor)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후 1780년대 당시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북유럽의 강국으로 성장한 프로이센의 국력을 과시하고 평화의 상징으로서 베를린에 새로운 관문이자 랜드마크를 건설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새로운 관문의 자리는 당시 존재하던 브란덴부르크 문 자리로 결정되었으며 원래 있던 브란덴부르크 문을 허물고 계획에 따라 새로 세운 결과물이 바로 지금의 브란덴부르크 문. 카를 고트하르트 랑한스(Carl Gotthard Langhans)가 그리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를 참고하여 설계한 이 문은 1788년에 착공되어 3년만인 1791년에 완성되었다. 건설 당시에는 평화의 문(Fridenstor)이라는 이름이 붙었던 브란덴부르크 문 위에는 평화를 상징하는 그리스 여신 에이레네와 그녀를 이끄는 4두 마차가 조각됐다. 신고전주의의 대표적인 걸작이기도 한 이 건물은 12개의 도리스 식 기둥이 받치고 있었으며, 베를린으로 향하는 5개의 도로가 건립 당시부터 뻗어있었다[2] .
2.2. 19세기
[image]
하지만 브란덴부르크 문이 건립되기 직전에 발발한 프랑스 혁명의 물결이 곧 유럽을 휩쓸었고,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 군을 박살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베를린에 입성한다. 그리고 프로이센 입장에서는 굴욕적이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브란덴부르크 문을 통한 첫 개선식의 주인공이 바로 나폴레옹이었다. 더불어 개선문 위의 4두 마차 상까지 파리로 들고 갔다(...). 1814년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프로이센 군이 역으로 파리를 점령하면서 조각상은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브란덴부르크 문과 조각상은 이제 평화가 아니라 프로이센의 승리를 상징하게 됐고, 여신상 역시 평화의 여신이 아니라 승리의 여신 빅토리아로 바뀌었다. 이에 발맞춰 기존의 여신상에는 없었던 독수리와 참나무 잎으로 둘러싸인 철십자 깃발[3] 이 추가된다. 이후로 브란덴부르크 문은 개선문의 역할을 맡아 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 혹은 독일군이 반드시 지나가는 장소가 되었다.
다만 여전히 평민들에게는 양 끝의 도로만을 이용하는 것이 허용됐으며 가운데 도로는 왕족만 사용할 수 있었다.[4] 이처럼 신분에 따라 각각 다른 도로를 이용해야만 하는 규정은 훗날 1차 세계대전이 종전될 무렵 독일 제국이 붕괴될 때까지 유지된다.
2.3. 20세기
1차 대전 종전 이후 독일군도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개선식을 열었으며[5] 1933년 집권한 나치는 자신들의 상징인 하켄크로이츠를 이 브란덴부르크 문에 덕지덕지 붙여놓기도 했다. 히틀러는 독일이 전쟁에서 승리할 경우 베를린을 세계수도로 탈바꿈시키려는 게르마니아 계획에서 브란덴부르크 문을 뒤덮는 새로운 초거대 개선문을 세우려 했으나 꿈으로 끝났다. 이후 2차 대전의 베를린 공방전을 거치면서 브란덴부르크 문은 심하게 파손된다. 기둥 곳곳이 총알과 포탄 파편으로 손상된 것은 물론 가장 중요한 부분인 4두 마차 상에서 한 마리를 제외한 세 마리의 말이 모두 머리가 날아간 것. 이러한 손상은 전쟁 이후로도 몇년간 그대로 유지된다. 물론 대충 복구를 하긴 했는데 그래도 숭숭 뚫린 구멍을 육안으로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image]
브란덴부르크 문 앞의 T-34-85 전차. 참고로 저 T-34/85전차 옆에 달린 철망은 현재 슬랫아머의 기초가 되는 물건이다. 판처파우스트로 숨펑숨펑 부서지는 T-34/85를 위해 임시방편으로 설치한 물건.
이후 세계는 냉전의 시기로 돌입하고 그 가운데에 서있던 독일과 그 수도, 베를린 역시 둘로 나뉘게 되었으며 브란덴부르크 문은 동/서 베를린을 나누는 경계선의 기점이 되었다.[6] 양 측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었다. 그런데 1961년 동독 측은 일방적으로 베를린 장벽을 세워서 통행을 막아버렸다. 물론 아예 막혀버린 것은 아니지만, 동베를린에서 서베를린으로 이 문을 통해 건너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됐다. 특히나 동독 측이 베를린 장벽 중간중간에 세운 8곳의 검문소 중 하나가 이 브란덴부르크 문이었는데, 그것으로 인해 이 문은 냉전과 독일 분단의 상징으로 자리잡는 불운을 겪는다. 하지만 1989년 독일이 재통일을 이루면서, 다시 통일의 상징으로 바뀌었다. 헬무트 콜 서독 수상이 한스 모드로우 동독 수상과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서로 만난 것이 대표적.
2.4. 최근
통일 이후에는 냉전으로 인해 소홀했던 건물 관리에 몰두하고 있는데, 2000년 12월부터 2002년 10월까지 6백만 유로 이상의 엄청난 비용을 들여서 재단장을 하기도 했다. 2009 베를린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는 마라톤과 경보 경기의 출발점과 결승점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2014년에서는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이 브라질 월드컵 우승 기념식을 이 곳에서 열었다.
3. 이모저모
낮이건 밤이건 관광객들이 엄청나게 많은 곳중 하나이다. 독일 국회의사당은 사실상 바로 옆이고 베를린 중앙역이랑 포츠담 광장도 충분히 걸어갈만한 거리에 있다. 문 바로 앞엔 러시아 대사관과 프랑스, 미국, 영국, 등 주요국 대사관들이 위치해 있으며 티어가르텐 방면으로 가면 바로 부근에 소련군 전승기념비(!)[7] 도 있다. 대사관 바로 옆에는 홀로코스트 기념비 공원이 조성되있다. 영화 언노운의 주요 무대인 아들론 호텔도 바로 앞에 있다.
베를린 지하철 U5, 베를린 S반 브란덴부르거 토어역이 인근에 있다.
문의 양쪽을 보면 바로 붙어있는 건물이 있는데, 그중 한쪽에는 고요의 방이라는 명칭이 붙은 방이 있다. 여행객들이 잠시 쉬거나 종교를 막론하고 누구나 기도도 할 수 있는 작은 방이다. 방음처리가 잘 되어있어 항상 관광객이 많아 떠들썩한 광장의 바로 옆이지만 조용하게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입장료는 자율.
4. 매체에서의 등장
- 게임 문명 5에서 불가사의로 등장한다. 완성 후 생산되는 유닛이 모두 15 경험치를 받고 나오며 위대한 장군 하나를 공짜로 주는 강력한 원더 중 하나이다.
- 도미네이션즈에서 산업 시대의 불가사의로 등장한다.
- 월드인컨플릭트소비에트 어썰트 첫째 미션 '서베를린 해방전'에서 볼 수 있으며 고증대로 1989년인지라 동독 관할 영역이라서 베를린 장벽 안쪽에 위치한 것을 알 수 있다. 때문에 말라센코 대위가 서베를린 침공 직전 일장연설할때 문 앞에서 '오늘 우리가 베를린을 해방한다'라는 연설 를 하고 미션이 시작된다. 더군다가 제일 가까이 있는 독일 제국의회 건물은 서독 관할 인지라 브란덴브루크 문 앞에서 서독 국기를 감상할 수 있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의회건물과 브란덴부르크 문 모두 광역 포격 2방에 날아간다. 이런 내용 때문에 당시 한정판을 구매하면 독일정부 보증서가 붙은 베를린 장벽 조각을 보내주기까지 했다.
[1] 방어상의 이유보다는 도시와 외곽의 경계를 구분하여 통행세를 걷기 위해 지은 것이다. 애초에 이름도 '베를린 관세벽(Berliner Zollmauer)'이다.[2] 처음에는 평민들에게는 양 쪽 맨 끝의 두 도로만을 이용하는게 허가됐다고 한다.[3] 독수리와 철십자는 게르만족의 상징으로 익히 알려져있고, 참나무 역시 마르틴 루터가 종교 개혁 당시 교황의 파문서를 참나무 아래에서 불살라버린 것 때문에 독일 민족의 상징이 된다. 독수리는 게르만족의 상징이 아니라 로마제국의 영향으로 인해 독일도 쓰게 된 것이며 철십자의 경우는 독일이 유난히 좋아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유럽 여기저기서 많이 쓰던 것이다. 이 시기 서서히 대두되기 시작하는 민족주의를 확인할 수 있는 부분.[4] 다만 프로이센 국왕을 알현하고자 하는 외국 외교관들과, 프랑스에게서 여신상을 되찾아 온 포일 장군의 후손들은 중앙 도로를 이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5] 패전했음에도 개선식을 열었으므로 정신승리라고 볼 수 있다.[6] 다만 동/서 베를린의 경계 자체는 문에서 서쪽으로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기 때문에 문 자체는 소련군 관할, 즉 동베를린 소속이었다. 때문에 통일 이전까지 브란덴부르크 문 위에는 동독의 국기가 걸려 있었다.[7] 게다가 러시아 대사관 건물이 가장 높은데, 독일을 점령하였으며 동부권의 맹주였던 소련의 위상을 보여주는 것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