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짐머
1. 소개
메이저리그에서 활동한 야구 선수이자, 감독 및 코치.
불같은 승부욕으로 유명했으며, 근육질의 체형으로 인해 뽀빠이라는 별명이 붙었었다.
2. 선수시절
오하이오 주의 신시내티에서 태어나서 고등학교 졸업 이후 1949년 브루클린 다저스와 자유 계약을 맺고 프로에 입단한다.[1] 하지만 메이저리그에 진입하기도 전인 1953년에 큰 시련이 닥친다. 상대편 투수가 던진 빈볼에 머리를 맞고 그대로 두개골이 골절된 채 혼수상태에 빠진 것. 짐머는 뇌압을 낮추기 위해 두개골에 구멍을 뚫는 대수술을 받은 끝에 2주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다. 다행히 야구선수로의 커리어는 지속할 수 있었지만, 당연히 후유증은 막심했고 특히나 동체시력의 저하가 심각했다. 짐머는 나중에 두고두고 '나의 야구 커리어는 22살에 끝이 났다.'라고 아쉬움을 표했다.
그래도 사고 전까지 마이너리그에서 홈런, 타점 선두를 달리던 유망주였던만큼 짐머는 다음해인 1954년 메이저리그에 콜업된다. 하지만 주전으로 자리를 잡는 듯 보였던 1956년 다시 한 번 빈볼이 그의 발목을 붙잡는다. 고향팀 신시내티 레즈와의 경기에서 광대뼈가 함몰되는 큰 부상을 입은 것. 1960년 다저스는 짐머를 시카고 컵스로 트레이드했고, 이후로는 저니맨의 연속이었다. 컵스에서 딱 1년을 뛴 뒤, 뉴욕 메츠가 드래프트 1라운드 픽을 넘기는 댓가로 짐머를 얻어왔으며 그후로도 신시내티 레즈, 다저스로의 귀환, 워싱턴 세네터스, 심지어 일본까지 거쳐간 끝에 1966년 선수 생활을 마친다.
짐머의 메이저리그 통산 기록은 1095경기, 타율 .235, 91홈런 352타점 45도루였다. 타율은 낮지만 확실한 한 방을 갖추고 있었으며, 강력한 어깨를 바탕으로 준수한 수비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내야 유틸로 활약했다.
3. 지도자 시절
은퇴 직후 신시내티 레즈와 샌디에이고 파드레즈 산하 마이너리그 팀의 감독으로 재직하던 짐머는 1971 시즌을 앞두고 몬트리올 엑스포스의 3루 코치로 활동한다. 다음해에는 샌디에이고 파드레즈의 3루 코치로 스카우트되는데, 감독 프레스턴 고메즈가 시즌 개막 후 20경기만에 잘리면서 엉겁결에 감독으로 임명된다.하지만 이 시기 파드레즈는 워낙 약체여서 성적은 바닥을 기었고, 결국 1973 시즌 종료 후 해고된다.
이후 보스턴 레드삭스의 3루 코치로 재고용되었다가, 파드레즈에서 그랬듯이 원래 재직중이던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경질되면서 감독으로 임명된다. 레드삭스에서 짐머는 1977년부터 1980년까지 4시즌[2] 동안 감독으로 재직하였으며, 3시즌 모두 90승 이상을 기록하면서[3] 괜찮은 성적을 기록한다. 하지만 이 시기 아메리카리그 동부지구에는 (90년대 지터 등의 4인방이 이끄는 양키스 르네상스 이전)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라이벌 뉴욕 양키스가 있었기 때문에 지구 우승에는 늘 한끝 차이로 모자랐으며, 특히 1978년에는 양키스에게 14경기 반 게임차로 앞선 지구 선두를 달리다가 후반기에 급격히 부진에 빠져, 플레이오프 진출권을 놓고 벌인 최종전에서 지면서 열혈 보스턴팬들의 원성을 한몸에 받아야 했다.
텍사스 레인저스 감독을 거쳐[4] 이 팀 저 팀 코치를 맡았는데, 1989년에는 시카고 컵스의 감독으로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5] 컵스를 마지막으로 감독으로서 그의 경력은 통산 906승으로 끝났다.[6]
그리고 1995년 뉴욕 양키스의 수석 코치로 들어가면서 양키 르네상스의 일원으로 맹활약한다. '영원한 파트너' 조 토레 감독과의 환상적인 호흡을 바탕으로 2003년까지 짐머는 '''8년동안 6차례의 월드 시리즈 진출(96, 98, 99, 00, 01, 03)과 4번의 우승(96, 98, 99, 00)'''을 경험한다.[7] 특히나 2003 ALCS에서는 빈볼을 던진 페드로 마르티네즈 vs. 카림 가르시아의 난투극 때 페드로와 드잡이를 벌인 것으로 국내 팬들에게도 많이 유명해졌다.[8]
짐머와 페드로의 영상은 1분 10초부터 보면 된다.
2003 시즌 이후 짐머는 양키스를 떠나 탬파베이 데블레이스의 기술 고문으로 활동하다가 2014년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양키스의 주장 데릭 지터는 "힘들다. 짐머가 어떤 의미였는지 모두 알고 있다. 우리 팀뿐만 아니라, 야구 전체에 큰 의미였다."라고 애도했으며, 레이스의 부사장 앤드류 프리드먼 또한 "(짐머는) 정말 좋은 친구이자, 멘토이자, 인재였다. 그는 선수들이 해보지 못한 것을 했던 사람이고, 가보지 못한 길을 걸어본 사람이다. 정말 슬픈 일이다."라면서 그의 죽음을 추모했고, 레이스 구단 측도 66번[9] 을 영구결번함으로써 그를 기렸다.
4. 기타
- 개요 항목에 적혀있듯이 별명이 뽀빠이인데, 1955 시즌 도중 한 경기에서 홈런 두 개를 치자 팀 동료 로이 캄파넬라가 짐머에게 "팔뚝 굵기가 뽀빠이만하니, 딱히 놀라운 일은 아니네."라고 한 마디 해서 붙은 별명이라고 한다.
- 수차례 머리에 빈볼을 맞고도 선수 생활을 지속해서 팬들 사이에서는, '1953년 빈볼 이후 뇌수술을 받는 과정에서 의사 양반이 짐머의 두개골에 철판을 심었다.'라는 루머가 돌기도 했으나 어디까지나 루머. 다만 뇌압을 낮추기 위해 두개골에 뚫은 구멍을 탄탈로 매우기는 했다고 전해진다.
- 본인도 빈볼이 지긋지긋했던지, 훗날 사구를 맞은 다음 타석에 철모를 쓰고(...) 나타나기도 했다. 또한 컵스로 트레이드될 당시, 다저스 시절 동료이자 빈볼로 악명높았던 돈 드라이스데일에게 '나중에 만났을 때, 사구 던지면 죽여버린다.'라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하기도 했다고..
- 상술한 1953년의 빈볼 사건 때까지도 메이저리그에서는 타격시 헬멧 착용이 의무가 아니었다. 42 같은 영화를 봐도 나오지만 이 당시 메이저리그에서는 타격 시에도 그냥 일반적인 야구 모자를 착용했다. 짐머 역시도 사고 당시 일반 모자를 쓰고 있었다. 짐머의 사고 이후에야 사무국은 헬멧 착용을 의무화하게 된다.
- 양키스 수석코치로 재직하던 시절, 양키스의 감독 조 토레는 경기 시작 전 짐머의 머리를 쓰담쓰담하는 징크스를 갖고 있었다(...).
5. 관련 문서
[1] 이 시기는 메이저리그에 아직 드래프트가 도입되기 전이었다.[2] 다만 1980 시즌 중간에 해고된다.[3] 베이브 루스 트레이드 이후,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3시즌 이상 90승을 기록한 감독은 짐머가 최초였다.[4] 이 때 그냥저냥 평범한 성적을 거두고 있었는데, 갑자기 해고당해서 짐머가 황당해 하면서 이유가 뭐냐고 묻자 구단주의 답이 '그냥 뭔가 마음에 안든다.'였다고 한다(...)[5] 그러나 챔피언십 시리즈에서는 자이언츠에 패해 월드시리즈 진출은 실패했다.[6] 1999 시즌 중간에 조 토레 감독이 전립선 암으로 자리를 비우면서 일시적으로 감독 대행을 맡기도 했지만, 이건 조 토레 감독의 승수로 기록된다.[7] 드래프트, 사치세, FA 이적시 드래프트 상위 지명권 양도 등 온갖 장치로 팀 간 전력의 균형을 위해 애쓰는 오늘날 메이저리그의 구조를 고려하면, 이 시기 양키스 정도의 강팀은 다시 나오기 힘들 것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8] 이 때 이미 짐머는 72세의 고령이었는데, 페드로가 짐머를 그대로 내팽겨쳐버려서 상당히 말이 많았었다.[9] 1948년 브루클린 다저스와 계약하고 그가 MLB에서 활동한 기간을 의미한다.(6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