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 캄파넬라

 

'''로이 캄파넬라의 수상 경력'''
[ 펼치기 · 접기 ]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
'''1955'''



'''명예의 전당 헌액자'''
[image]
'''로이 캄파넬라'''
헌액 연도
1969년
헌액 방식
기자단(BBWAA) 투표
투표 결과
79.41% (5회)

'''1951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MVP'''
짐 콘스탄티
(필라델피아 필리스)

'''로이 캄파넬라
(브루클린 다저스)'''

행크 사우어
(시카고 컵스)
'''1953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MVP'''
행크 사우어
(시카고 컵스)

'''로이 캄파넬라
(브루클린 다저스)'''

윌리 메이스
(뉴욕 자이언츠)
'''1955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MVP'''
윌리 메이스
(뉴욕 자이언츠)

'''로이 캄파넬라
(브루클린 다저스)'''

돈 뉴컴
(브루클린 다저스)


<colbgcolor=#005a9c>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No. 39'''
'''로이 캄파넬라
(Roy Campanella)
'''
'''생년월일'''
1921년 11월 19일
'''사망'''
1993년 6월 26일 '''(향년 71세)'''
'''국적'''
[image] 미국
'''출신지'''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
'''포지션'''
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46년 자유계약 (BRO)
'''소속구단'''
'''브루클린 다저스 (1948~1957)'''
'''수상'''
'''8회 올스타 선정 (1949~1956)'''
'''월드시리즈 우승 (1955)'''
'''3회 NL MVP (1951, 1953, 1955)'''
NL 타점왕 (1953)
1. 소개
2. 유년 시절
3. 선수 시절
3.1. 니그로리그
3.1.1. 메이저리그
4. 뜻밖에 찾아온 불운, 그리고 제2의 인생
5. 기타
6.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7. 관련 문서


1. 소개


'''"뛰어난 야구선수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가 휠체어에 있었던 35년이 더 기억에 남을 것이다"'''

빈 스컬리

메이저리그 역대 최고의 포수 중 하나로 꼽히는 선수로 브루클린 다저스(현 LA 다저스)에서 활동했으며 다저스의 역사상 두 번째 흑인 선수다.[1]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통사고로 인해 일찍 은퇴했다. 비록 니그로 리그에서 시간을 보내 통산 성적은 높지 못하지만, 내셔널리그 MVP를 3회 수상했으며 요기 베라와 함께 당대 최고의 포수였다.
별명은 이름을 딴 '''Campy'''

2. 유년 시절


캄파넬라는 1921년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다. 캄파넬라의 아버지는 이탈리아 출신 백인이었으나, 캄파넬라의 어머니는 흑인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캄파넬라는 백인 아이들에게 흑인이라는 이유로 따돌림 당했고 흑인 아이들로 부터도 백인의 피가 섞여 있다는 이유로 따돌림당했다. 집이 가난했던 캄파넬라는 새벽에 일어나 우유배달을 하고 아버지를 도와 트럭에 야채를 실은 후에야 학교를 갈 수 있었고, 학교가 끝난 이후에는 신문배달과 구두닦이를 했다.
이러한 힘든 상황 속에서도 캄파넬라는 필라델피아 어슬레틱스에 입단하려는 꿈을 키웠으나 인종차별이 심했던 당시 미국에선 캄파넬라의 꿈은 불가능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캄파넬라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대신 16살에 니그로리그에서 프로선수생활을 시작했다.

3. 선수 시절



3.1. 니그로리그


당시 니그로리그 볼티모어 엘리트 자이언츠의 감독이자 주전 포수인 비즈 매키의 눈에 띄어 입단한 캄파넬라는 비즈 매키의 혹독한 훈련과 당대 최고의 포수였던 조시 깁슨의 조언등으로 점차 뛰어난 포수로 성장해갔다.

3.1.1. 메이저리그


1945년,브루클린 다저스의 단장 브랜치 리키가 그를 찾아왔다. 당시 재키 로빈슨을 데뷔 시키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리키는 캄파넬라에게 다시 돌아올때 까지 어떤 팀과도 계약하지 말라고 당부를 전한 뒤 떠났다. 이후 시즌이 끝나고 캄파넬라는 다저스와 계약을 맺은뒤 1948년 개막전 로스터에 포함되어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 포수가 되었다.
그러나 캄파넬라는 선발로 1경기 밖에 출전하지 못하고 벤치만 달구다 마이너리그로 보냈으나, 1달 뒤 다시 메이저에 콜업되어 주전포수로 뛰게 되었다. 캄파넬라는 데뷔 시즌인 1948년 .258 9홈런 45타점을 기록했다.
풀타임 첫 해인 1949년에는 .287 22홈런 82타점을 기록해 팀동료인 재키 로빈슨,아메리칸 리그 최초의 흑인선수이자 메이저리그 두번째 흑인선수인 래리 도비와 함께 메이저리그 올스타에 선정되었다.
1950년에는 .281 31홈런 89타점을 기록하고 1951년에는 .325 33홈런 108타점을 기록하며 그해 내셔널리그 MVP를 수상하며 1949년 재키 로빈슨에 이어 2번째로 MVP를 수상한 흑인 선수가 되었다.
1952년에는 부상에 시달리며 .269 22홈런 97타점에 그쳤다. 그러나 다음해인 1953년에는 .312 41홈런 142타점을 기록하며[2] 흑인선수로는 최초로 2번째 MVP를 수상했다.
그러나 1954년에는 왼손골절상과 함께 신경이 다쳐 .207 19홈런 51타점에 그쳤으나 필사적으로 노력해서 1955년 .318 32홈런 107타점을 기록하며 개인통산 3번째 MVP를 획득했다.
그러나 이후 하향세가 시작되어 1956년 .219 20홈런 73타점,1957년 .242 13홈런 62타점에 그쳤다. 니그로리그 시절에 너무 많은 경기에 출장한탓에 무릎이 일찍 망가졌고,1952년부터 햄스트링 부상에 시달렸다.

4. 뜻밖에 찾아온 불운, 그리고 제2의 인생


캄파넬라는 시즌이 끝나면 부업으로 뉴욕 할렘에서 주류 가게를 운영했다. 그러던 1958년 1월 28일, 캄파넬라는 집으로 가던 도중 차가 빙판에 미끄러져 공중전화 부스를 들이받고 차가 전복되는 대형 교통사고로 목뼈와 척추 두 군데가 부러져 목 아래가 모두 마비되었다. 게다가 얼마 후, 캄파넬라의 아내는 그를 떠났다.
[image]
(당시 캄파넬라의 사진)
아내가 떠나고, 다시는 선수생활을 하지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게 됐음에도 캄파넬라는 절망하지 않았고, 팬들이 찾아오면 밝은 미소로 팬들을 위로했다. 의사는 캄파넬라가 평생 병상에 누워있어야 하며, 10년 이상 살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으나 캄파넬라는 피나는 노력 끝에 두 팔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1959년 5월 7일, 메모리얼 콜리세움에서 캄파넬라의 밤이 개최되어 시범경기임에도 93,103명이 모였다. 캄파넬라는 피 위 리즈가 끄는 휠체어를 타고 그라운드에 등장해 '내가 살아서 여기 있게 된 것에 신에게 감사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진심 어린 감사를 전합니다'라고 말했다.
[image]
(당시 장면)
이후 캄파넬라는 다저스의 단장 보좌역, 스카우트, 홍보대사를 맡으며 다저스에 헌신하고, 1964년 새 아내를 만나 살다가 1993년 6월 26일,우들랜드 힐스에서 심부전으로 향년 71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그의 시신은 포레스트 론에 화장되어 할리우드 힐스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5. 기타


1949 시즌이 끝나고 캄파넬라는 니그로리그 경기에서 한 흑인 선수를 발견하고 구단에 알렸으나 다저스가 파견한 스카우트는 1경기만 보고 부정적인 반응을 나타냈다. 캄파넬라가 발견한 그 흑인 선수는 '''윌리 메이스'''였다. 결국 메이스는 다저스의 뉴욕의 라이벌 구단에 넘어갔고, '''전설이 되었다.'''
영화 42#s-8 전반부에서 다저스의 첫 흑인 선수를 선정할 때에 사첼 페이지 등과 함께 잠깐 언급된다. 브랜치 리키(해리슨 포드 분)는 "좋은 선수지만 너무 물러. 그들이 산채로 잡아먹을 걸세." 라며 나가리.

한창 잘나갈 때 팀 동료들과 질레트 면도기 광고를 찍었었다. 정확히는 위에도 언급되는 피 위 리즈, 그리고 훗날 페드로 마르티네스와 몸싸움을 했던 걸로 유명했던 돈 짐머 등과 함께 나왔다.
휠체어에 탄 이후 전국을 돌며 강연으로 사람들에게 용기를 불어 넣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많은 사람들이 감동한 시로 알려진 유명한 연설이 있다.

나는 신에게 강하게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도록. 그러나 신은 나를 약하게 만들었다. 겸허함을 배울 수 있도록.

나는 건강을 부탁했다. 대단한 일을 할 수 있도록. 그러나 나는 병약함을 받았다. 더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나는 부자가 되길 원했다. 행복해질 수 있도록. 그러나 나는 가난함을 받았다. 더 현명해질 수 있도록.

나는 힘을 원했다. 사람들의 찬사를 받을 수 있도록. 그러나 나는 나약했다. 신의 필요성을 느낄 수 있도록.

나는 내 삶을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원했다. 그러나 대신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삶을 받았다.

나는 내가 부탁한 것들을 하나도 받지 못했지만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받았다. 신은 내 기도에 대한 대답을 들어줬다. 나는 가장 축복받은 사람이다.

원문과 번역

6.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블랙잉크
그레이잉크
HOF 모니터
HOF 스탠다드
로이 캄파넬라
4
65
108
39
HOF 입성자 평균
27
144
100
50
  • JAWS - Catcher (26th)

career WAR
7yr-peak WAR
JAWS
로이 캄파넬라
34.2
32.9
33.5
포수 HOF 입성자 평균
53.4
34.4
43.9

7. 관련 문서


[1] 첫 번째는 누구나 알다시피 등번호 42번의 선수이다.[2] 참고로 저 41홈런은 메이저리그 최초 포수 40홈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