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미 라소다
1. 소개
LA 다저스의 전설적인 감독이자 명장으로 선수 시절에는 필라델피아 필리스, 브루클린 다저스(현 LA 다저스), 캔자스시티 어슬레틱스(현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서 뛰었다. 프런트로서는 다저스의 단장을 1년 역임한 후, 부사장까지 올랐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미국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활약했다. 이탈리아계다.[2]'''내 몸에는 푸른 피가 흐른다'''[1]
2. 일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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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시절 경력은 별볼일없다. 마이너리그에서는 최다 탈삼진 기록도 세우면서 제법 괜찮게 던지는 투수였다고 하지만, 정작 메이저리그에서는 단 1승도 거두지 못했다. 통산 성적이 4패, 평균자책점 6.48에 그쳤다. 사실 마이너리그에서는 특히 다저스의 산하 구단인 몬트리올에서 맹활약하면서 캐나다 야구 명예의 전당에 오를 정도였지만, 메이저리그에서는 제 모습을 보이지 못했으니 할 말이 없다. 1960년 한 선수의 자리를 만들어 주기 위해 다저스에서 마이너로 강등당한 후 방출당하면서 현역 은퇴를 하게 됐는데, 그 선수의 이름은 샌디 코팩스다. 그래서 '코팩스같은 명 투수만이 자기를 밀어낼 수 있었다'고 농담한 적도 있다.
이후 다저스의 스카우트와 마이너리그 코치를 거쳐 1973년 메이저리그 코치로 합류했다. 그리고 1976년 23년간 감독을 지낸 월터 앨스턴 감독이 은퇴하자 그 뒤를 이어 감독으로 부임했다. 감독으로 다저스에서 엄청난 업적을 일궜는데, 다저스에서만 20년을 집권하면서 통산 1,599승을 기록했다. 무엇보다 PO에 자주 진출했고, 꾸준히 전력을 강하게 만들었다. 20년 간 집권하면서 7번 PO에 올라갔고, 이 중 두 번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만들었다. 1981년에는 뉴욕 양키스를 제압했고, 1988년에는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를 꺾었다.
당시 구단주였던 피터 오말리는 FA 영입보다 신인 중용을 더 중시했던 타입이었는데, 그에 맞춰 라소다도 신예들을 중용하면서 꾸준히 팀 전력을 강화시켰다. 이는 1992년부터 1996년까지 신인왕을 모두 로스앤젤레스 다저스가 독식하는 결과를 만들었던 것에서 잘 증명된다.[3][4] 전력에 비해 월드시리즈 우승이 너무 적다는 평도 있지만, 지금과 달리 와일드카드가 없고 오로지 지구우승만이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던 시기라 지금보다 플레이오프 진출이 어려웠던 시절에 감독을 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아깝게 PO에 못 올라간 적도 많으니 능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지구 2위만 5차례를 기록했을 정도. 1994년에는 8월까지 디비전 선두를 달리다가 선수노조 파업으로 시즌이 중단되며 아쉽게 우승을 놓쳤다. 다시 말하면 감독생활 20년 중 13년을 지구 1위 아니면 2위였다는 얘기다.
다만 투수 혹사에서는 많이 비판받고 있다. 오렐 허샤이저나, 페르난도 발렌수엘라같은 선수들은 그때 기준으로도 정말 무식할 정도로 많이 던졌고, 이 때문에 전성기가 상대적으로 짧게 끝났다. 말년에는 다소 꼰대 기질도 엿보였는데, 현장 감독 때는 아주 심한 것은 아니었지만, 후에 다저스 원로로서 세이버메트리션 출신으로 빌리 빈의 보좌역을 지냈던 단장 폴 디포데스타와 갈등을 빚는 것에서 잘 드러났다. 결국 라소다 쪽이 이겨서 PDP는 쫓겨나게 되었다.[5] 대신 선수들을 믿고, 기를 살려주는 것에는 탁월한 감독이다. 대표적으로 오렐 허샤이저가 도망가는 피칭을 하자 불독이라는 별명을 붙여주며 자신감을 키워준 것이 유명한 일화.
다저스 감독 은퇴 후에는 1997년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였고 감독 시절 등번호였던 2번이 다저스에서 영구결번되었다. 2000년에는 2000 시드니 올림픽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아 금메달을 차지했다. 감독직을 떠난 후에도 다저스에서 꾸준한 영향력을 발휘하였고,[6] 다저스의 원로로서 존경받았다.
한국에서도 박찬호가 메이저리그에서 데뷔할 당시의 다저스 감독이자, 박찬호의 양아버지로 통했다.[7] 박찬호는 이 인연으로 코로나19로 인한 왕복 4주 자가격리를 각오하고, 일생의 은인이었던 라소다의 장례식까지 참여하여 입관까지 뒤에서 따랐다.
2020년 11월, 심장 질환으로 병원에 입원하였다가, 2021년 1월 6일에 상태가 호전되어 퇴원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졌지만, 다음 날, 심폐정지 증세로 병원으로 이송 중 별세하였다. 향년 93세. 다행히도 다저스가 불과 2개월 전 2020년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그의 감독 재임 후 무려 30여년만에 팀의 우승을 다시 보고서 세상을 떠난 것이 위안이었다.
3. 감독 성적
4. 쇼맨십
말이 엄청 많고, 입담이 좋아서 떠벌이라는 별명이 있다[17] . 덕분에 상당수의 명언들을 남겼다. 라소다가 남긴 명언의 특징은 스스로가 골수 야빠로서 관련 팬들이 공감하게 하는 말이 많다는 것이다.
'''일년 중 가장 슬픈 날은 야구 시즌이 끝나는 날이다.'''[18]
'''내 몸에는 푸른 피가 흐른다. '''(I bleed Dodger Blue)[19]
'''내가 죽거든 다저스의 홈 경기 일정표를 묘비에 올려달라.''' #
'''이긴 날에는 이겨서 행복해 많이 먹고 진 날에는 슬퍼서 많이 먹으며 비가 와서 경기가 취소되면 실망해서 많이 먹는다.'''[20]
'''아무리 잘 하더라도 3게임을 하면 한 게임은 지기 마련이고, 아무리 못하더라도 한 게임은 이기기 마련이다. 나머지 한 게임에서 순위는 갈린다.'''[21]
'''투수는 투구 횟수가 아니라 뺏어낸 아웃 카운트로 급료를 받는다.'''
'''내가 가장 기쁠 때는 게임에서 이겼을 때이고, 두번째로 기쁠 때는 게임에서 졌을 때다.'''[22]
'''나는 더블헤더를 좋아한다. 유니폼을 더 오래 입고 있으니까.'''
명언 제조기일 뿐만 아니라 쇼맨십도 남달랐다. 다저스의 오랜 맞수인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원정경기를 갔을 때 일인데, 경기 전 치어리더 복장처럼 입고 그라운드에 나가 자이언츠의 선수들과 팬들을 약올리는 행동을 했다. 다저스-자이언츠는 두팀이 뉴욕에서 뛰던 시절부터 서로 앙숙 사이어서 자칫 잘못하다가 신변에 위협을 당할 수도 있었으나 자이언츠 팬들은 라소다 감독이라 저러려니 하고 넘어갔다고.
최근에 쇼맨십은 2001년 올스타전에서 3루 코치로 코치박스에서 서 있었는데 게선생의 부러진 배트에 가슴을 맞고 뒤로 엉덩방아를 찧고 쓰러졌다. 자칫 위험할 수 있었으나 라소다의 쇼맨십을 알고 있는 선수들이 포수장비를 가져다 주기도 했다.
2011년에는 시즌 막판 84세 생일에 라이벌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의 홈경기에서 명예 감독으로서 돈 매팅리와 함께 팀을 지휘했고 다저 스타디움에 모인 팬들에게 생일축하 노래를 듣기도 했다. 1996년 감독직에서 물러난 이유가 심장 부분의 이상이었고 체형만 보면 흔히 얘기하는 오래 못 살 체형이지만 나름대로 건강관리의 비법이라도 있는지[25] 정말 장수하면서 고령에도 정력적으로 활동하다가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떴다.
4.1. 전설적인 입담
인터뷰중에 기쁘거나 화나거나 욕을 정말 많이 하는걸로 유명했다. 그리고 몇개는 캡쳐되어 지금까지도 다저스 올드팬들의 향수를 자극한다(...).
4.1.1. 1977년 월드 시리즈 4차전
당시 경기 중 CBS 방송국 측에서는 라소다에게 달아준 마이크를 떼는 것을 잊어버렸다. 여기까지는 그렇게 큰 문제가 될 일 없지만 그 상태에서 라소다가 선발투수 더그 라우[26] 와 '''수십 번이나 욕을 하며 싸우는 꼴이 그대로 미국전역에 생중계''' 되는(…) 대참사가 일어난다.
이런게 생중계로 미국 전역에(...).
결과적으로 그 경기를 패하면서 다저스는 시리즈 전적 3대1로 몰리게 되고 결국 우승을 양키스에게 헌납한다. 더그는 2년뒤 5년 연속 198이닝+을 던진게 결국 탈이나서 은퇴.[27][28]
4.1.2. 1978년 5월 14일, 정규시즌 중 시카고 컵스와의 경기 후 인터뷰
이날 컵스의 타자 데이브 킹먼[29] 이 '''3홈런'''을 날리는 원맨쇼를 보이며 다저스를 패배시켰다. 폴 오그덴 기자의 인터뷰:
4.1.3. 1990년대 초반 촬영中
경기전에 촬영이 있었는데 카메라 오작동으로 계속 컷되는 상황이었다. 바쁜 와중에 참고 있던 라소다가 결국 폭발.
라소다: (카메라를 향해 억지로 웃고 있다)
기자: " - 소리 안나와?"
라소다: (급정색) " - 야이 씨발, 저 개새끼들(스태프)한테 전해, 내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참겠는데 또 찐빠내면 진짜 뒤진다고. 씨발 지겨워 돌아버리겠네."
기자: "준비 됐어요, 토미"
라소다: "그래, 나도 지금 당장 준비해야 한다고. 씨발, 정줄 똑바로 잡고 내 할일을 해야 한단 말야. ...씨발 개새끼들..."
기자: "지난 10월에 -"
5. 가족사
아들 중 1991년 AIDS 합병증으로 사망한 토미 라소다 주니어가 동성애자였다고 알려졌으나 이에 대해서는 부인하고 암으로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시절 지도했던 메이저리그 최초의 현역 커밍아웃 동성애자[30] 인 글렌 버크가 아들과 친하게 지내자 대노했다고 글렌 버크는 자서전에서 밝혔지만 라소다는 이에 대해서도 부인하였다.[32]
6. 관련 문서
[1] 이건 LA 다저스, 삼성 라이온즈, 세이부 라이온즈 등 대부분의 파란색 옷을 입는 구단의 레전드들이 하는 말이다. 배영수뿐만 아니라 양준혁, 강기웅 등 많은 파란 팀 레전드들이 이 말을 했는데, 이 말의 원조가 바로 라소다.[2] 그래서 스페인어를 하는 중남미 출신 선수들과 이탈리아어로 더듬더듬 의사소통을 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유럽축구 돌아가는 사이클에 익숙하다면 딱히 어색한 부분은 아닌데, 이 두 언어는 유사한 점이 많기 때문에 제한적으로나마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3] 92년 에릭 캐로스, 93년 마이크 피아자, 94년 라울 몬데시, 95년 노모 히데오, 96년 토드 홀랜스워스[4] 다만, 홀랜스워스는 아쉽게도 97 시즌에 지독한 소포모어 징크스에 걸린 뒤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2000 시즌 도중에 트레이드 되어 떠난 뒤로 저니맨 생활을 하다 2006년을 끝으로 선수생활을 마쳤다. 그래도 2003년에 말린스 소속으로 우승반지를 하나 얻긴 했다.[5] 이 과정에서 손해를 본 선수 중 한명이 바로 최희섭. 정교함은 떨어지지만 선구안과 파워에 가능성을 보였던 최희섭을 영입한 것이 당시 다저스 단장 PDP인데, 현장과 프런트 사이의 갈등으로 결국 PDP가 쫓겨나면서 최희섭도 다저스에서 입지가 약화되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본인의 실력이 모자라서였지만. 그래도 PDP는 이후 NFL 클리블랜드 브라운스의 사장으로 부임해서 길었던 브라운스의 암흑기를 끝내고 18년만에 브라운스의 포스트시즌을 이끌면서 명예를 회복하긴 했다.[6]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영향력을 발휘했다. 감독 퇴임한 1996년 구단 부사장, 1998년 단장, 1999년 총괄 부사장 등을 역임했다. 이후 다저스 구단주가 바뀐 뒤에는 그야말로 온갖 잡다한 일을 다하는 특별 고문이 되었다.[7] 박찬호가 본격적으로 활동하던 시절에는 감독에서 물러나서 부사장, 단장직을 역임 중이었다. 구단에 왈가왈부하는 과거 인사 정도의 위치가 아니다.[8] 휴스턴 애스트로스와 타이브레이커 경기를 치렀다. 그래서 163경기.[9] 1981년 시즌은 선수 파업으로 전/후기 리그로 단축 진행되었다. 전기 리그 지구 1위와 후기 리그 지구 1위 팀이 각각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방식.[10]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전 무승부는 순위표에서 빠짐.[11] 시카고 컵스 전 무승부는 순위표에서 빠짐.[12] 연기 후 순위에 영향 없는 2경기는 취소됨.[13] 파업 여파로 시즌 중단.[14] 파업 여파로 포스트시즌 취소.[15] 1994년의 파업 여파로 인한 단축 시즌.[16] 무승부 2경기 포함.[17] 이쪽에서도 레전드인 요기 베라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요기 베라 정도 되면 야구의 범위를 넘어서서 명언 제조기로 통하니 아쉬워할 정도는 아닐 것이다.[18] 종목 명만 바꾸면 모든 팬들의 명언이 된다. 실제로 여러 곳에서 돌려 쓰인다.[19] 다저스를 상징하는 푸른색 이야기다.[20] 소싯적 어떤 메이저리거는 라소다와의 식사 자리를 9이닝 완투 경기에 비유했다. 왜냐하면 그러고 나서 5일은 쉬어줘야 해서(...)[21] 실제로 3연전 시리즈인 경우 2승1패나 1승2패로 끝나는 경우가 절반 이상이다. 시즌 전체로 봐도 승률이 6할 부근 혹은 6할대를 찍으면 리그 전체 1위를 다투고, 3할대에서 4할을 오락가락하면 꼴찌를 다투게 된다. 실제 통계적으로 보더라도 거의 모든 팀의 시즌 승률은 .666~.333 사이에 분포한다.[22] 이해가 안 가는 사람은 명언 중 첫번째를 보라.[23] 2000 시드니 올림픽 결승전에서 쿠바 대표를 꺾고 금메달을 딴 뒤, 슬퍼하는 쿠바 선수들을 도발하면서 내뱉은 망언이다. 참고로 라소다는 골수 공화당원이자 로널드 레이건이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지낼 때부터 형님 아우하던 사이였다고 한다. [24] 이 말은 2015년 3월 31일. 팀 이름이 천사이고, 같은 연고지인 LA 에인절스를 상대로 자신의 트윗에 남긴 말이다.[25] 2012년에는 심근경색으로 위험했다. 근데 의사가 식단조절 좀 하라고 하자 '스파게티를 못 먹느니 걍 죽지 뭐'라고 받아쳤다고(...). [26] Doug Rau. 1948년생. 다저스에서 1972년부터 1979년까지 활약. [27] 라소다 감독은 선수 관리 개념이 거의 없던 당대에도 투수를 혹사시킨다는 평을 들었다.[28] 그의 통산 기록: http://www.baseball-reference.com/players/r/raudo01.shtml [29] 통산 442홈런을 쳤던 공갈포의 대표적인 예시 선수로,메이저 역대 최저타율 홈런왕과 루그네드 오도어 이전 단일시즌 30홈런 타자 최저 OPS기록을 가진 선수다[30] 독립리그나 마이너리그에서 뛰다가, 또는 은퇴 후에 커밍아웃한 사례가 있긴 있으나 현역 메이저리거로는 유일무이한 사례다. 2016년 기준으로 가장 최근 사례는 2015년 밀워키 브루어스 마이너리거 데이브 덴슨이 커밍아웃한 일이 있는데, 덴슨은 이후 40인 로스터에 진입했다.[31] 오클랜드 시절 도루왕을 2번이나 했을 정도로 대도였다. 후에 다저스에 와서도 타격은 망해도 27도루를 기록하면서 발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였다.[32] 결국 버크는 라소다 감독과 다저스 프런트의 압박에 마음고생만 하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로 빌 노스[31] 를 대가로 트레이드되었지만 역시 홀대받다 은퇴해야 했다. 1995년 AIDS 합병증으로 별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