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사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63호

'''64호'''

65호
함평 구 학다리역 급수탑
'''군산 동국사 대웅전'''
제천 엽연초생산조합 구 사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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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해당 사진은 대웅전 보수 이전의 것으로 보이며, 지금과는 대웅전 문 등이 조금 다르다.
1. 개요
2. 역사
3. 건축물
4. 기타
5. 같이보기


1. 개요


東國寺
전라북도 군산시에 위치한 사찰. 국가등록문화재 제64호.
주소도 전라북도 군산시 ''동국사길 16''[1]으로, 길 이름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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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사(東國寺)란 이름은 해동(海東) 대한민국(大韓民國)을 줄인 것으로, 일본의 절이 아니라 이제 한국의 절이란 의미라고 한다.[2]
1909년 우치다 붓칸이라는 일본 조동종(曹洞宗)의 승려가 군산에 금강선사라는 포교당을 차린 것이 동국사의 뿌리다. 우치다는 군산에 사는 일본인들의 도움을 받아 절을 빠르게 성장시켰는데 일본인 부호들로부터 시주받은 거금과 땅을 바탕으로 1913년 군산시 금광동 현재의 동국사 자리에 금강사(錦江寺)라는 절을 공식적으로 허가받아 지었다. 금강사는 자신들의 나라 일본과 자국민들의 무운(武運)과 번영을 빌었다. 금강사 납골당에는 일본인들의 유골과 전사한 일본군의 위패도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식민지 조선에는 일본사찰 5백여 개가 있었다고 하는데, 동국사는 광복 이후로도 살아남은 몇 안 되는 건물이다.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일제시대 사찰건물들 중에서 유일하게''' 사찰이라는 본래의 기능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건축 당시의 원형을 가장 잘 보존하여 가치가 있다. 동국사를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일본식 사찰'이라고 흔히들 말하지만, 이는 명백히 사실이 아니다. 링크. 다른 일제시대 사찰들은 건물은 온전히 남았으되 더 이상은 불교사찰이 아니거나, 반대로 계속 사찰로서 기능하되 건물 형태가 많이 바뀌거나 기존 건물들이 사라진 경우가 많다.[3] 이전에는 동국사 주변에 일옥(日屋)들이 있었다고 하지만 1945년 광복과 1950년 6.25 전쟁 등을 겪으며 모두 없어졌다.
물론 광복 이후로는 한국불교의 로 바뀌었다. 이름도 동국사로 바꾸고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사 대장전에 있던 조선 중기에 제작된 소조여래삼존상을 동국사 대웅전으로 옮겼다. 동국사 소조여래삼존상과 불상 속에 있던 유물들은 보물 제 1718호로 지정되어있다.
동국사 종각 옆에는 2012년에 세워진 일본 조동종의 참회의 비석과 2015년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이 있다. 동국사는 일본 불교와 한국 불교의 인연과 악연을 보여주는 희귀한 공간이다. 불행했던 역사의 증거지만, 최근에는 이색적인 근대의 모습을 즐기는 군산 관광의 필수코스로 자리잡았다.

2. 역사


경술국치 1년 전인 융희 3년(1909), 우치다(內田佛觀)를 위시한 일본 조동종(曹洞宗) 승려들이 금강선사(錦江禪寺 긴코젠지)란 이름으로 군산에 포교소로 개창하면서 시작되었다. 현 동국사 부지를 기증받아 건물을 신축, 1913년에 완공하여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일제강점기 동안은 조동종 소속 사찰로서 기능했는데, 정식명칭은 '금강선사'였지만 흔히 '금강사(錦江寺 긴코지)'라 불렀다.[4] 군산시에 일본인들이 많이 모여 살았으므로, 이들 일본인 신자들을 위한 사찰로 기능하였다.
1대 주지 우치다(內田佛觀, 1832-1916)는 1836년 호키국(伯耆国, 오늘날 돗토리현)에서 태어났다. 출가 이전의 성이 우치다(內田), 법명이 佛觀, 법호가 善應이다. 1845년(13세)에 천태종에 입문하였으나 1848년(16세)에 조동종으로 종파를 바꾸었다. 1860년(28세)엔 고메이 천황을 만나 교지를 받는 등 승승장구하였으며, 이후 돗토리현주부(中部) 지방 사찰 4곳의 주지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1902년(70세)에 마지막으로 구마모토현의 사찰 주지가 되었고, 이후 어느 시점에서 직무를 내려놓고 은퇴하였다.
그런데 1909년, 만77세의 노구를 이끌고 도항하여 군산에서 금강선사(錦江禪寺)란 이름으로 포교소를 개창하였다. 절 이름은 군산을 거쳐 굽이쳐 흐르는 금강에서 따왔다. 포교소를 연 지 한 달 만에 당시 군산 지방의 일본인 부호 미야사키 케이타로(宮崎佳太郞)를 만나 현 동국사 부지 3백 평을 기증받았다. 그 부지에 사찰 건물 신축을 시작했다. 1910년(78세)에 한일 합방이 되었다. 1913년(81세)에 현 동국사를 완공하고, 일본의 조동종 본산으로부터 정식 사찰로 인정받아 금강사(錦江寺)란 이름을 내걸었다. 1916년(84세)에 조선총독부로부터 사찰로 인가를 받고 며칠 지나지 않아 입적하였다.
(연령은 생일이 지났다고 간주하고 전부 만나이로 표기함. 즉 한국식 나이 - 1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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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후반의 모습.
하지만 광복 이후 승려들을 포함하여 일본인들이 본국으로 돌아가고 사찰은 미군정에 의해 압수되었다. 곧 대한민국 정부로 이관되었다가 1955년에 전라북도 종무원에서 매입하였다. 1970년에 당시 주지였던 승려 남곡(南谷)이 이름을 동국사로 개명하고,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로 증여하였다.
그 후 1990년대 조선총독부 건물을 식민지 잔재 청산을 위해 철거한 김영삼 정부는 일본식으로 건축된 사찰들이 아직 국내에 남아있음을 확인하고, 그 중 동국사를 철거할지 검토하였다. 그러나 이 절은 조계종의 사유재산이라서 철거보상을 해줘야 했는데 비용 3억 원 때문에 하지 못하였고, 그 이후로는 철거여론도 잠잠해졌다. 2003년에 등록문화재 제64호로 지정되었다.

3. 건축물


대웅전은 1932년 다시 지어진 것인데 정면 5칸 측면 5칸의 건물로, 정방형 단층팔자지붕 홑처마 형식의 에도시대(江戶時代)양식이다. 외관이 화려하지는 않지만 색이 차분해서 정갈한 느낌을 준다. 지붕의 기울기인 물매(경사,slope)가 75도 급경사이기 때문에, 기와는 못질을 해서 고정한다.
건물 외벽에 미서기(미닫이)문이 많은데 습한 일본기후의 특성이 반영된 일본 건축기술로 건축되었기 때문이고, 용마루는 일직선으로 전통 한옥과는 구조나 외형에서 차이가 상당하다. 처마 밑만 보더라도 서까래는 그저 평행하고 한국 사찰 건물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공포(栱包,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기 위하여 기둥 위에 짜 맞추어 댄 나무 구조물)가 매우 단순하여 밋밋한데, 에도시대 건물에서 서까래와 공포는 거의 장식이고 실제 구조와 분리되기 때문이다. 실제 구조는 법당 천장 위에 있기 때문에 볼 수 없다. 또한 한국의 사찰 건축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단청이 없다.
공간구조 역시 다르다. 한국 사찰과 달리 '법당'과 승려들이 생활하는 건물인 '요사채'가 회랑으로 연결되어있다. 법당에 들어갈 때는 대웅전의 문이 아니라 회랑 쪽 문을 통해 들어간다. 법당 내부는 신발을 신고 들어올 수 있는 정면의 현관과 절을 할 수 있는 외진, 불상이 놓이는 내진으로 구분되는 일본식 절의 공간구조대로이다. 외진과 내진 사이에는 란마(欄間)라는 통풍창이 있는데, 그 아래에는 미닫이문틀이 남아 있으므로 원래는 미닫이를 설치했던 듯하다.
동국사 대웅전을 수리하면서 일본식 기와가 필요했기에 수입하려고 했다. 그러나 문화재청이 수입은 안된다면서 제동을 걸었기 때문에 결국 한국에서 일본식 기와를 만들 수 있는 곳을 수소문하여 전남 강진에서 만들어 가져왔다. 비용은 수입의 두 배가 들었다고 한다.
원래 지붕 용마루 양 끝에 있던 것으로 보이는 샤치호코상[5]이 지금은 동국사 현관 옆 밖에 놓여 있다.
법당 옆에는 1919년 일본에서 만든 종을 들여와 지었다는 종각이 하나 있는데, 종각을 둘러싼 석불들[6] 역시 일본에서 가져온 것이다. 종 역시 전형적인 일본식 종인데 교토에서 만들어 가져왔다. 종의 명문에 따르면 다이쇼 8년(1919)에 제작했는데, 금강선사라고 씐 것을 확인할 수 있다.[7]

4. 기타


  • 대웅전 뒤로 돌아가면 일제시대 때부터 사찰에서 조성한 대나무 숲과 요사채 안쪽의 아주 작은 정원 등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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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국사 경 내 북쪽에 해우소가 있고 해우소 바로 옆에 ‘100년 왕대숲 길’ 푯말이 있는 통로가 있어 동국사 뒷편 대나무 언덕으로 올라갈 수 있다. 굵은 대나무들과 죽순들 사이로 난 길이 있다.
  • 대웅전 뒤에는 눈이 허연 개도 한마리 있는데, 이름은 동백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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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국사 진입로에는 돌을 쌓아서 만든 석축이 있는데, 지그재그형으로 쌓여져 있다. 이는 일본식의 석축 쌓기로, 군산 시내에서는 종종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일본의 성에서도 발견되는 모습으로 한국과 달리 일본의 건축물에는 이렇게 다이아몬드처럼 석축을 엇갈리게 쌓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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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 조동종은 1993년 과거 침략에 앞장섰던 조동종의 과오를 인정하는 ‘참사문(懺謝文)’을 발표했는데 “일본 불교는 국가권력에 영합해 태평양전쟁에 가담하고 수많은 아시아인들에게 인권침해, 문화멸시, 일본문화 강요 등 커다란 상처를 남긴 점을 참회하면서 사죄드린다”라는 참사문 발췌 내용이 2012년 종각 옆에 세워진 비석에 새겨져 있다. 건립비용은 이치노헤 쇼코(一戶彰晃) 일본 아오모리 운상사 주지의 주도로 일본 불교계가 모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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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각 옆에 소녀상이 위치해 있다. 전국에서 11번째, 전라북도에서는 처음으로 2015년 세워졌다.
  • 우리나라가 해방된 이후, 조계종에서 이 절을 인수할 때만 해도 군산에 살던 일본인들이 조상들의 뼈를 모신 납골당이 경내에 있었다. 그런데 이를 철거하면서 그곳에 있던 수많은 일본인들의 유골을 인근 강에다가 산골(散骨)해버렸다.[9] 이후 1965년 한일기본조약으로 양국의 국교가 정상화되자, 과거에 군산에 살던 일본인들이 이 소식을 듣고 울면서 찾아와 절 마당의 흙을 유골가루 대신 퍼간 실화가 있다.
  • 입구 좌측 석주에 새겨진 쇼와(昭和) 덴노의 연호가 파내여진 흔적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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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산시 출신 시인 고은이 승려로 출가한 사찰로도 잘 알려져 있다.#

나는 일본식 담을 두르고 있는 동국사의 정문까지 갔다. (…) 마당은 정결했다. 본당이 웅장했다. 서쪽으로 종각이 있고 거기에 큰 범종이 달려 있었다. (…) 정문 문짝에는 차문불문(此門不門)이라는 큰 글씨가 붙어 있었다. 이 문은 문이 아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드나들지어다라는 뜻이었다.

시인 고은의 자전적 소설 '나, 고은' 中


5. 같이보기



[1] 지번 주소는 금광동 135-1이다.[2] 동국대학교의 교명 역시 1946년에 양주동 박사의 의견에 따라 '우리나라'란 뜻에서, 한자까지 똑같은 동국(東國)이라고 정하였다.[3]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다른 일본식 사찰 건물로는 목포의 구 동본원사 목포별원과 경주시의 구 서경사가 있다. 전자는 해방 후 '''개신교 교회'''로 사용되었다가 현재는 지자체의 문화센터로, 후자는 정리가 힘들 정도로 이래저래 다용도로 쓰이다가 현재는 정가 전수관으로 사용 중. 큰 훼손없이 아직도 사찰로 기능하고 있는 일본식 사찰로는 대구 중구 삼덕동의 관음사가 있다.[4] 지금도 동국사 입구 석주에 금강사(錦江寺)라는 명문이 한자로 남아 있다. 이외에도 ○○ 9년이라는 연호 표기와 시주자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일본과 관련된 부분은 모두 끌로 깎아 파내서 지워버렸다. 시기상 연도는 쇼와 9년으로 1934년이고, 시주자도 한국인 노 아무개의 이름만 남아 있고 일본인 이름은 지워진 상태다.[5] 몸은 물고기, 머리는 호랑이 모양의 상상의 동물. 화재를 제압한다는 의미. 한국의 치미와 비슷하다.[6] 32면 관세음보살상과 12지 수본존 석불상이다. 맨 앞에는 아이를 안은 자안 관세음 수본존불상이 있으며, 그 뒤로 관세음보살이 중생교화를 위해 근기에 따라 나타난다는 서른두 가지 모습을 형상화한 상들이 있다. 밀교에 기반한 풍습이라고 한다.[7] 명문에는 금강선사가 창건된 이래 천하가 태평하고 만민이 즐거우며 모든 시주자들의 복이 늘어나기를 조석으로 태만함 없이 기원한다는 내용이 있다. 또한 일한병합 및 세계대전(1차 대전)의 평화를 구하고, 월명산 앞 금강사에 새로 범종을 만들어 거니 나라와 백성들이 복을 받는다고 씐 한시, 일본인 시주자들의 명단이 있다. 당시 군산 지역의 쟁쟁한 일본인 부호들 이름이 여럿 보인다.[8] 2020년 부처님 오신 날에 포착된 동백이[9] 동국사에 위치한 안내판은 해당 유골들을 모두 바다에 뿌렸다고 설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