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신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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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때 일제가 조선 경기도 경성부 아사히초1초메[1] 에 세운 일본식 신사(神社). 1919년에 '조선신사(朝鮮神社)'라는 이름으로 신사를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1920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925년 신궁(神宮)으로 격상한 뒤 완공했으나, 1945년 광복이 되자 일본인들이 자진철거하였다. 남산에 있었기 때문에 '남산신사'라고도 부른다.
봉안한 신은 아마테라스와 메이지 천황이었고, 메이지 천황이 생전에 패용했던 검을 하사받아 신궁의 보물로 간직했다. 예대제 날짜는 10월 17일이었다.
위치는 오늘날 남산의 한양도성 유적전시관 일대이다. 남대문(숭례문) 옆 조선신궁 참배로로 조성된 소월로[2] 와 소파로가 만나는 도동삼거리[3] 남산공원 입구에서부터 백범광장을 거쳐 길게 계단과 광장이 있었다. 그 위쪽으로 서울시 교육청 교육연구정보원, 한양도성유적전시관, 분수대, 조선신궁 배전 터 일대가 본격적인 신궁의 경내였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과 남산도서관 부지도 일부 포함했다.[4] 정식 참배로의 계단만 380여 단에 이르는 위용이 인상적이었다. 경복궁 자리에 앉은 조선총독부 청사에서 정면(남쪽)을 바라보면 조선신궁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다만 조선신궁은 북서쪽 방향으로 터를 잡았기 때문에, 총독부는 신궁을 바라보지만 신궁은 비스듬히 선 모양새가 되어 서로 마주보지는 않았다.
정식 참배로 말고도 조선신궁으로 이어지는 길을 동서로 따로 냈는데, 오늘날 소파로와 소월로의 일부가 되었다.
본 문서명은 '조선신궁'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일제강점기 동안 조선에서 이루어진 일본 제국 국가신토의 침투에 관해 서술하였다.
일본에서는 오랜 세월 신토와 불교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아 불교 중심으로 두 종교가 반쯤 합쳐졌는데, 이를 신불습합(神佛習合)이라 한다. 불교의 부처나 보살들이 일본 땅을 교화하고자 신토의 신령들 형상으로 나타났다고 주장하는 본지수적(本地垂迹)이라는 관념이 이러한 신불습합을 잘 드러내었다. 꼭 신불습합만이 아니더라도 일본 민중들 사이에는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여러 가지 민간신앙적인 믿음과 관습들이 있었다.
그러나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에도 시대에 걸쳐 국수적인 지식인이나 권력자층에서는 민중이 (민간신앙이든 아니든) 종교에 기대는 것 자체를 불안하게 여기는 조류 또한 분명히 있었다. 그리스도교를 가장 위험스럽게 여기긴 했으나, 그 외에도 민중에게 인기를 끄는 민간신앙이나 일반 불교마저도 무도하다고 여겼다. 대중적인 종교행위 대부분을 음사(淫祀)[5] 로 간주하고, 국가권력이 인정한 소수 신령이나 신사만 올바르다고 주장했다. 국학이나 존황양이론이 이런 생각을 뒷받침하는 사상적 기틀이 되었다. 조슈번(長州藩: 오늘날 야마구치현 일대)에서는 1842년부터 이듬해까지 음사를 없앤다는 이유로 민중의 불만을 무시하고 신사나 사찰, 민간신앙의 성소를 대부분 파괴했다. 미토번(水戸藩: 오늘날 이바라키현 미토시 일대)에서도 1843년부터 45년까지 번에서 사찰을 뿌리 뽑고 신사는 전부 요시다 신토(吉田神道)[6] 의 시설로 바꾸고자 하였다. 권력자 이외의 다른 것으로 마음을 돌리게 할 일체의 요소를 적대시하고, 민중들이 죽든 살든 오로지 권력자만 바라보기를 원한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메이지 유신 이후 종교정책에 적극 반영되었다.
1868년, 일본 메이지 정부는 과거 요시다 가문[7] 에 부여했던 신토계를 관리감독하는 권한을 폐지하고 정식으로 신기관(神祇管) 제도를 복구했다. 이것은 국가가 직접 종교정책을 관리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신불분리령(神佛分離令)을 내려 불교와 습합된 신토를 떼어놓았다.[8] 이때 불교만이 아니라 불온한 여지가 있다 싶은 민간신앙도 크게 탄압받았다. 1871년에는 국내 신사들을 관리하고자 각 신사들에 격(등급)을 매기는 사격(社格)제도를 마련했다. 관폐사니 국폐사니 하는 용어나 신사에 격을 매기는 것 자체는 고대부터 있었지만, 제도의 구체적인 내용은 이전 일본 역사에서 전례가 없었다. 메이지 정부가 만들고 정비한 이 제도를 현대에는 근대사격제도(近代社格制度)라고 부른다.[9]
먼저 이세 신궁은 황조신(皇祖神) 아마테라스를 모시는 가장 존엄한 곳이라 하여 아예 사격을 매기지 않았다.
그 이하로는 크게 관폐사(官幣社)와 국폐사(國幣社)로 나누고, 그 안에서 大/中/小로 구분했다. 여기서 폐(幣)란 본디 폐백(幣帛)이라 하여 신에게 바치는 예물을 뜻하는데[10] , 일본 정부는 각 신사에 주는 유지비(+다른 예물)를 가리키는 뜻으로 썼다. 관폐사는 일본 천황가[11] 에서, 국폐사는 일본 정부에서 유지비를 지원했다. 관국폐사 간 서열은 다음과 같았다.
일부 관폐대사와 야스쿠니 신사에는 천황이 자신의 대리자 자격으로 따로 칙사를 파견하여 격식을 갖추어 각 신사의 신령에게 폐백을 바치도록 했는데, 이런 예우를 받는 신사를 따로 칙제사(勅祭社)라 불렀다. 조선신궁은 관폐대사이자 일본 본토 밖에 있던 유일한 칙제사로, 일본의 근대 사격제도 안에서는 최고 수준으로 대우받았다.[12]
1872년 메이지 정부는 따로 별격관폐사(別格官幣社)라는 등급을 신설하고 관폐소사에 준하여 대우하기로 했다. 별격관폐사는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자'를 주된 제신으로 모시는 신사 중에서 선별했다. 1946년 사격제도가 폐지되기 전까지 총 28개 시설이 별격관폐사가 되었는데, 그중 한국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곳이 바로 야스쿠니 신사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신으로 모시는 닛코 도쇼 궁(日光東照宮) 역시 별격관폐사였다.
관국폐사 등급 밑으로는 부(府)나 현(県)ㆍ번(藩)ㆍ향(鄕)ㆍ촌(村) 등 각 행정구역을 대표하여 부사ㆍ현사ㆍ번사ㆍ향사ㆍ촌사를 두었다. 그리고 아무 격도 받지 못한 작은 신사를 무격사(無格社)라 했는데, 일본 전체에 있는 신사들 중 절반 이상이 무격사였다. 무격사가 새로이 격을 받거나, 또는 이미 격을 받은 신사가 또다시 다른 격을 받는 것을 열격(列格: 렛카쿠)이라 하였다.
이러한 사격 매김은 일본 정부(또는 황실)의 입장에서 했기 때문에, 높은 사격을 받은 시설이라고 반드시 격에 비례해서 일본 민중에게도 인기 있던 것은 아니다. 그래서 오랜 세월 대대로 굉장히 인기 있는 신사인데도 인기에 비하면 사격이 낮은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정부 또한 약간은 민중의 인기를 고려했고, 민중 또한 정부가 높은 사격을 내린 신사라고 하면 좀 더 각별하게 여긴 것 같다.
식민지 조선에서 관폐대사는 조선신궁 하나, 국폐소사는 8곳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행정체계가 일본과 달랐으므로, 관국폐사 이하로는 조선총독부가 따로 도공진사(道供進社)ㆍ부공진사(府供進社)ㆍ읍공진사(邑供進社)를 지정하여, 각 도/부/읍이 공금으로 신사의 유지비를 지원하도록 했다.[13]
패전 이후 1946년 GHQ가 사격제도를 폐지하였다. 현대에는 일본의 신사들 중 과거에 격을 받았던 곳들은 홈페이지 등에서 '옛 사격(旧社格) 〇〇〇社' 하고 알려준다. 신사 도리이 앞 표석에 옛 사격을 새긴 곳도 많다. 비록 제도가 폐지되긴 했어도 과거에 높은 격을 받았던 신사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중요하게 대접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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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 처음 일본식 신사가 건립된 때는 17세기 후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혹시 그 이전에도 왜관에 일본인들이 거주했으니 그 일본인들을 위한 종교시설로서 왜관이나 그 주변에 신사가 있었을지 모르나, 이를 뒷받침할 기록이나 유물이 전무하므로 '그럴지도 모른다.' 하는 가설에 그칠 뿐이다. 임진왜란 이후 모든 왜관이 폐쇄되었으니, 설령 있었다 하더라도 흔적도 없이 파괴되었을 것이다.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 31년(1598)에 끝났고, 당연히 왜관은 모두 사라졌다. 일본은 조선에게 과거처럼 다시 왜관을 설치해달라고 요청했다. 조선 조정은 일본 측 사자가 머물 장소가 필요하지만 구 왜관 터를 쓸 수 없다고 판단, 선조 40년(1607) 부산 두모포[14] 에 새로이 왜관을 만들었다. 숙종 1년(1675)에 일본인들이 처음으로 두모포에 고토히라(金刀比羅)[15] 신사를 세웠다. 그런데 두모포왜관은 시설이 좋지 않고 좁아서 이미 숙종 1년부터 초량으로 옮길 준비를 하고 있었으므로, 이때의 고토히라 신사는 아마도 임시시설이었을 것이다. 숙종 4년(1678)에 초량왜관으로 옮겼는데, 오늘날 용두산공원과 복병산 일대이다.
1678년 왜관을 초량으로 옮길 때 쓰시마 번주 소 요시자네(宗義眞 1639-1702)가 용두산에 고토히라 신사를 새로이 짓도록 했다. 소 요시자네가 신사를 세운 것은 초량왜관에 거주하는 일본인 상당수가 쓰시마 사람이라서였고, 고토히라를 모심은 항해의 안전을 지켜주는 신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숙종 4년(1678)이 일본의 연호로는 엔포(延寳) 6년인데, 일본 측 기록에서는 엔포년간(1673-81)에 고토히라 신사를 비롯하여, 초량왜관의 용두산-용미산 근처에 신사들을 세웠다고 하였다. 고토히라 신사가 대표 격일 뿐 고토히라 신사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용미산에는 가토 기요마사를 모시는 신사도 있었다.
19세기 후반, 고종이 즉위한 후로 조선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고종 13년(1876)에 강화도 조약을 맺자 조선에 들어온 일본인들의 숫자는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대신 왜관이 해체되었다. 아무래도 부산이 일본에서 가깝고 과거에 왜관도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많았는데, 이런 와중에 고토히라 신사는 부산 일대 일본인들의 신사로 성격이 바뀌어 점차 일본인들에게 부산의 명소로 유명해졌다. 왜관 해체 직후에는 신사들이 버려져 폐사나 다름없었지만, 부산에 일본인 거류지가 생기자 다시금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러나 초량왜관 시절의 시설은 늘어난 일본인들을 감당하기에 너무나 낡고 협소했다. 고종 31년(1894)에 거류지신사(居留地神社)로 개칭하고, 이후에 일본인들이 돈을 모아 중창하여 광무 3년(1899)에 작업을 마치고 진구 황후나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 조선침략과 관계된 신을 합사했으며, 바로 그해에 ‘용두산신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용두산신사는 광복 이전까지 한반도에 있었던 모든 신사들 중 가장 역사가 깊었다.
광무 2년(1898)에는 서울 남산 왜성대공원(현 숭의여대 일대)에 모여 살던 일본인 거류민들이 아마테라스를 주된 제신(祭神)으로 모시고[16] 남산대신궁(南山大神宮)이란 이름으로 신사를 창건했는데, 1916년에 경성신사(京城神社)로 개칭했다.[17] 조선신궁이 완공되기 전까지는 경성신사에 총독부 관리들이 참배하기도 하였다.[18] 경성신사가 처음에는 현 리라아트고 자리에 있었는데, 1929년에 서쪽으로 약 50 m, 현 숭의여대의 운동장 쪽으로 이전했다.[19] 경성신사 터는 남산의 북면 아래턱, 일본인 거류지의 가운데로 통감관저나 남산총독관저와 매우 가까웠다. 경성신사는 조선신궁이 완공되기 이전까지는 행사에 총독이 참석하는 등, 조선의 신사들을 대표하는 역할도 했다.
그 뒤로도 1910년까지, 주로 일본인 거주지역을 중심으로 신시(神祠)[20] 가 꾸준히 생겼다. 본디 일본의 신사/신시들은 소재지와 관계가 깊은 신을 모시지만, 조선에 그런 신이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주로 아마테라스를 제신으로 삼았는데, 여기저기 출신이 섞인 일본인들이 공동의 조상신으로 인정할 만한 유일한 신이었기 때문이다. 일제시대에 건립된 신시들은 이름이 '신메이신시(神明神祠)'인 경우가 매우 흔한데, 여기서 신메이(神明)는 아마테라스를 주된 제신으로 모시는 신사/신시들이 상투적으로 사용하는 이름이다.[21] 또한 고토히라나 이나리 등 항해안전의 신이나 상업의 신을 모신 경우도 나름대로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도(道)마다 하나씩 국폐소사를 둘 계획이었으나 광복 때까지 이루지 못했다. 국폐소사로 지정되려면 모시는 제신 중에 국혼신이 있어야 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밑 항목을 참조하라.
1936년에 경성신사와 용두산신사가 국폐소사로 지정되었다.
1910년 8월 29일, 한국강제병합이 되어 대한제국이 망국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같은 해 9월, 일본 전국신직회(全國神職會)[22] 회원들이 모여 식민지 조선에서 어떻게 신토를 정착시키고 민중들을 동화시킬지 논하였다. 이 자리에서 참석자들은 '일본 민속의 중심인 신사(神社)제도를 조선에도 실행하여 빨리 동화시키고 싶지만, 쉽지 않을 테니 먼저 당국이 (조선의) 신사제도를 조사할 것을 희망한다.'는 주장에 힘을 실었다.
그뿐 아니라 신토가[23] 들은 조선 전체를 대표할 신사에 어떤 신을 모셔야 마땅할지도 함께 논하였다. 후보로 오른 신격들은 매우 다양했으나, 국혼신(國魂神)[24] ㆍ오쿠니누시(大國主)[25] ㆍ스쿠나히코나(少名毘古那)[26] 를 모셔야 한다는 주장과 아마테라스ㆍ스사노오를 모셔야 한다는 주장이 유력했다. 그러나 신토가들끼리도 서로 의견이 극명하게 대립하여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일본의 신토가들, 신토 신관들은 조선을 그냥 내두면 유교ㆍ불교ㆍ그리스도교 세력에게 빼앗긴다고 많이 불안해 하였다. 유교는 병합 이후로 힘을 크게 잃었고, 불교야 기존의 일본 불교계와 스리슬쩍 합치면 그만이었지만,[30] 그리스도교는 서양인 선교사들이 포교하며 세계적으로 퍼진 선교 네트워크를 활용해 세계주의와 반일사상을 선동하는 매개가 될 것이라고 특히 적대하였다.
당시 조선 천주교에서는 항일적인 조선인 신학생 및 평신도들이 일제에 반발하곤 했지만, 경성대목구장 뮈텔 주교 등이 이를 억누르고 친일적으로 행동하며 총독부와 타협하고자 했다. 그런데도 조선총독부는 프랑스인 성직자들을 끝내 믿지 못하여 구금하거나 추방하고, 일본인 주교를 경성대목구장 자리에 앉히려고 했다. 개신교는 반일적인 선교사 등이 더 많아서 더욱 격하게 탄압받아 30년대 말기 이후로는 굴복 직전이 되었다.[31]
일본의 신토가들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려면 조선인들에게 신토를 어서 포교해야 하고, 그 일환으로 먼저 총독부가 조선신사를 건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신사를 먼저 세우고 그 뒤 각 도(道)마다 신사 하나씩 세워, 마침내는 마을마다 신사가 하나씩은 들어서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이런 와중에도 천리교나 금광교 같은 교파신토, 일련종 등 불교 종파들은 열광적인 신자들이 개인적으로 조선으로 건너와 포교를 시도했다. 대부분은 일본인을 대상으로 했지만 조선인 포교를 시도한 경우도 없지 않았고, 그중 천리교는 일본계 종교 중에서는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교파신토가 아닌 국가신토의 관련자들은 국가의 정책을 무시하고 개인적으로 활동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조선총독부를 다그쳐야 했지만, 종교가가 아닌 총독부 관리들은 별로 급하지 않았다. 1912년부터 조선총독부는 조선신사를 지을 땅과 비용을 계산했지만 예산을 확보하지 못해 미루었다. 1917년에는 돈을 모았는데 의회가 해산하는 바람에 건설허가를 받질 못했다. 하지만 1913년에 일본 각지의 여러 주요 신사들의 구조를 살피고 건설부지를 검토하는 등, 예산확보와 별개로 작업을 진행하였다.
조선 전체를 대표할 '조선신사'는 마땅히 경성(서울)에 있어야 했다. 경성 이외의 선택지는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경성 안에서도 구체적으로 어디에 만들어야 할지는 논의가 따로 필요했다. 조선총독부는 일본에서 메이지 신궁 등을 건축한 바 있는 유명한 건축가 이토 주타(伊東忠太 1867-1954)를 초빙하여 조선신궁 터를 잡고 건축하도록 했다.
이때 논의된 후보지는 다음과 같다.
이토 주타는 조선신궁 자리를 잡으면서 아래와 같은 조건에서 평가했다.
최종적으로 조선신궁을 한양공원 자리에 짓기로 결정했다. 이토 주타의 위 평가기준과 비교하면, 한양공원/왜성대 자리는 남산의 북쪽 면이기 때문에 감점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예산 문제가 있었다. 남산의 남쪽 면이나 다른 지역은 사유지가 많아서 보상비를 따져보니 예산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래서 국유지가 많아 보상비 걱정이 없는 곳을 찾으니 한양공원 자리가 낙점된 것. 또한 한국강제병합 이전부터 일본인들이 남산 일대에 많이 살았고, 조선인들도 남산을 영험하게 여겼음도 남산 자락 한양공원 자리를 낙점한 이유인 듯하다.
한양공원 자리는 보상비가 덜 들어 좋긴 한데 방향이 문제였다. 일본의 신사는 남향이 기본인데, 한양공원 터는 북서향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예산이라는 현실적인 벽을 넘을 수 없었으므로, 1916년 4월 7일자 매일신보 2면에 실린 '조선신사신조영계획(朝鮮神社新造營計劃)'이라는 기사에서는 이렇게 변명했다. 일본의 유서 깊은 신사들 중에도 하코자키 하치만 궁(箱崎八幡宮)이나 이쓰쿠시마 신사처럼 남향하지 않은 곳들이 있고, 장차 일본 민족이 북서쪽으로도 발전할 것이며, 왜성대 일대는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으니 북서쪽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예산 문제로 북서쪽으로 지을 수밖에 없으니 그래도 괜찮다고 억지로 이유를 갖다 붙였다. 조선신궁 건물은 이세신궁과 마찬가지로 신메이즈쿠리(神明造) 양식을 따랐는데, 이 또한 '제일 돈이 덜 들기' 때문이었다.
당시 서울 남산에는 국사당(國師堂)이 있어 우리나라 무당들이 기도처로 여겼는데, 일제는 국사당이 조선신궁을 짓기로 한 자리보다 높이 있다는 이유로 트집을 잡았다. 결국 국사당은 인왕산으로 이전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현재 남산 국사당이 있던 자리에는 팔각정이 들어섰다.
위에서 언급한 '조선신사신조영계획' 기사에 흥미로운 구절이 있다. 원래 조선신사에 모실 신을 두고 진구 황후 외 11위 신령을 모시려는 논의가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궁내성이나 내무성 등 관계기관의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는데,[35] (1912년에) 메이지 천황이 죽자 그를 신격으로 모시기로 했다고 매일신보에서 여러 번 언급하므로 1912년 - 1916년 사이 어느 시점부터 총독부는 내부방침으로 메이지 천황을 모신다고 결정한 듯하다. 하지만 이후로도 시간을 끌다가 1918년이 되어서야 조선총독부는 조선신사에 모실 신을 아마테라스와 메이지 천황으로 하겠다고 내각에 보고하여 허가를 구했다.
1917년에는 조선총독부령 제21호로 <神祠에 관한 件>이라는 규정을 발표했다. 당시 일본어에서도 신시(神祠)란 단어는 '신령을 제사 지내는 건물'이란 뜻인 보통명사였다. 하지만 조선총독부는 신사(神社)보다는 간소하고 격이 떨어지는 신토적 간이종교시설을 '신시'란 이름으로 허가를 받도록 정했는데, 일본 본토에는 없는 제도였다. 이는 총독부가 일본 본토에서 신사들을 관할하는 신사국(神社局)과 별개로, 조선총독부가 조선의 종교시설들을 직접 장악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그런데 조선총독부가 더 이상 느긋하게 있지 못하게 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1919년에 3.1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그제서야 조선인들을 좀더 강하게 동화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는 조선신사 건설을 서둘렀다. 결국 일본 정부는 그해 7월 18일자 내각고시 제12호로 남산 아래에 조선신사(朝鮮神社)란 이름으로 신사를 지을 것이고 사격은 관폐대사이며 제신은 아마테라스와 메이지 천황이라고 확정하였다.
한편 전국신직회는 조선에서 천도교와 개신교가 활발히 활동함에 불안감을 느꼈다. 전국신직회는 총독부가 얼른 신토로써 조선 민중을 동화시키라고 요구하는 한편, 내부의 반대의견을 묵살하였다. 이민족을 동화시키기란 불가능하다고 보거나, 또는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신사 건설이 진행되는 와중에서 꽤 재미난 논의도 있었다. 조선총독부가 조선신사의 제신(祭神)은 아마테라스와 메이지 천황이라고 정했지만, 신토가들 중에는 조선인들의 시조인 단군이나, 조선왕조의 건국자 이성계도 함께 모셔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종교적으로 내선일체를 이루자면 일본 신격만 일방적으로 모시지 말고, 조선인들도 인정하는 대표자 격인 신격을 함께 봉안해야 한다고 의식한 것이다. 그뿐 아니라 건물 자체에 대해서도 순 일본식 신사 양식으로 짓지 말고, 조선의 전통적인 건축양식을 혼합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이런 주장들은 모두 조선신사를 통해 '내선일체'의 이념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조선총독부는 이러한 주장을 모조리 무시했다.'''
1920년부터 공사비 156만 엔을 들여 남산에[36] 총면적 12만 7900여 평(약 42헥타르), 경내 면적 7천 평(약 2.3헥타르)을 닦아 건물을 지었다.
하지만 신토계는 모시는 신격이 신격인 만큼 신사가 아니라 '신궁'으로 격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7] 당시 일본 정부도 이런 주장을 납득하고는 1925년 6월 27일자 내각고시 제6호로 명칭을 '조선신궁'으로 바꾸었다.
신토학자 오가사와라 쇼조(小笠原省三 1892-1970)는 조선총독부의 조선신사 건립 방침에 반대하였다. 오가사와라는 '적화방지단'이라는 반공단체의 회원이기도 했는데, 그 때문에라도 조선의 사상적 동향에 관심이 많았다. 오가사와라는 자신이 창간한 잡지 ≪신토평론(神道評論)≫에 글을 실었다.
오가사와라는 아마테라스가 일본 민족의 주신이기 때문에 이세 신궁 외에서는 모시면 안 되고, 그 대신 조선의 시조신 단군을 모셔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뿐 아니라 건축양식도 순일본식이 아니라 조선 전통을 섞어야 하고, 제례 때 쓸 음악도 조선의 것을 어느 정도 사용해야 한다고 썼다. 오가사와라의 주장에 다른 일본의 재야 지식인들도 동조했는데, 조선의 시조신인 단군을 무시함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단군을 모셔야만 일본과 조선, 양 민족이 화합할 수 있다고도 했다.
오가사와라의 주장에 반대하는 신토가들도 조선의 시조를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 자체를 배격하지는 못했다. (조선신궁의 초대 궁사[주지]가 된) 다카마쓰 시로(高松四郎)는 '조선의 시조신을 모셔야 한다는 데에는 동감하나, 그 시조신이 꼭 단군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래서 한반도 국가들의 역대 건국자들을 합쳐 '국혼신'이란 이름으로 봉안하자는 의견을 내각에 제출했다.
당시 일본의 조선통치 관계자들에게 조선신사의 신으로 누굴 모실지는 첨예하고 중요한 정치적 문제로 부각되었다. 조선총독부는 '경성일보로 오가사와라의 주장이 알려졌지만, 조선인들은 이 문제에 관심이 없다. 오가사와라가 현지를 모르고 탁상공론을 했을 뿐'이라고 판단했다. 조선총독부는 내부 문서에서 조선인에게는 신과 신사의 관념이 없다고 설명하며[38] 조선에는 마땅히 합사할 만한 신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특히 단군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존재 자체가 의심스럽다.'고 주장하며 강하게 부정했다. 어이없는 점은 아마테라스에 대해서는 '존재하는 분이 틀림없다.'고 했다는 것. 아마테라스는 실존하는 존재로 인정하되, 단군은 비실재의 허구라고 몬 것이다. 그야말로 총독부가 이중잣대를 들이댔지만, 아마테라스도 허구의 존재라거나 단지 신화일 뿐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단군이 반일의 상징이 되었다고 보아 억지로 부정하려 했다고 보는 시선도 있다.
결국, 단군은 고사하고 국혼신마저도 봉안되지 못했다. 또한 조선총독부는 이 문제에 관해서 일본 본토 신토가들의 주장에 휘둘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신토가들이 신토를 명백히 '종교'로 인식하는 반면, 총독부는 '국가신토 비종교론'에 합세하여 조선신궁 등은 종교시설이 아니며, 황국신민의 문화라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신사참배 강요로도 이어졌다. 결국 일본 내에서도 '신토' 관련 전반 개념에 대한 철학이 종교 대 문화로서 크게 달랐던 듯.
조선신궁을 건설하느라 당시 남산에 있던 한양도성 일부가 크게 훼손되었다. 또한 터를 닦는 와중에 바위를 깨트리고자 폭약을 썼는데, 당시 경성에 살던 조선인들이 이 소리에 크게 놀랐다고 한다. 발파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어서 그랬던 듯. 또한 일본인 인부들이 임금을 올려달라며 태업하는 일도 있었다. 이해(1925) 7월부터 9월까지 한반도 전역에 을축년 대홍수가 덮치는 재해가 일어났지만, 조선신궁은 별 영향을 받지 않고 작업을 진행했다. 일본 정부는 9월 24일자 내각고시 제9호로 조선신궁의 진좌제는 같은해 10월 15일이고, 예대제 날짜는 매년 10월 17일이라고 결정했다.
조선신궁으로 개칭한 지 3개월이 지나 1925년 10월, 소노이케 사네야스(園池実康) 장전차장(掌典次長)[39] 이 칙사로서 이세 신궁으로부터 미타마시로(御靈代)[40] 로 거울을, 황실로부터 메이지 천황이 패용하던 검을 받고 조선으로 건너와 13일에 경성에 도착했다. 그리고 내각이 정한 날짜에 맞추어 그달 15일, 조선신궁에서 진좌제(鎭座祭)를 거행했다. 진좌제란 신령이 내려와 미타마시로(신체)에 깃들게 하는 제사로, 이 의례를 거행해야 신사가 비로소 '신사(神社)'가 되는 것이다.
미타마시로를 신설되는 신사로 옮길 때에는 조용히 함이 통례인데, 조선신궁에 미타마시로를 모셔올 때에는 거창하게 격식을 갖추었다. 자발적인 행위인지 아니면 압력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당시 신문을 보면 '조선신궁에 봉축하는 뜻을 표하고자' 시장들이 하루 영업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는 기사가 있다.
조선총독부는 미타마시로나 메이지의 검을 불령선인들이 빼앗거나 파괴할까 봐 매우 걱정했다. ≪시대일보≫는 1925년 9월 25일자 기사로 임시정부가 조선신궁 낙성을 기회로 폭탄특공대를 들여보냈다는 내용을 실었다가 해당 일자 기사를 내보내지 못했다. 경기도 경찰부는 10월 초부터 각 경찰서장들을 모아 경계구역을 할당하고 사복경찰을 매복시켰고, 미타마시로를 모신 칙사가 경성역에 도착하는 10월 13일, 진좌제를 거행하는 15일에는 경성의 경철관 전원을 총출동시켜 경계하고, 조금만 수상해 보이는 자가 있다면 모조리 잡아들였다. 그뿐 아니라 칙사가 행렬하는 와중에 호위대를 붙였는데, 당시 행렬의 선두에 섰던 일본인은 폭탄이 날아오지 않을까 걱정했다고 한다. 조선인 고보 학생들이 조선신궁 건립에 반대하는 시위를 계획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실행되지 않았다.
진좌제 당일에는 군대와 학생들을 동원하여 옷을 갖춰 입고 거창하게 소노이케 일행을 맞도록 하였다. 의친왕 또한 이왕가의 대리 자격으로 행사에 참석했고, 조선 전체 관공서 및 학교는 특별휴일을 받았다.
조선신궁 제신 논란을 주도한 오가사와라 쇼조도 진좌제에 참석하여 한 시간 넘게 조선인들의 반응을 관찰했다고 한다. 오가사와라는 저서 『海外の神社』(神道評論社, 1933)에서 이때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예대제 날짜는 매년 10월 17일이었다. 그 외에도 기년제(풍년기원제)는 3월 15일, 신상제(추수감사제)는 11월 23일로 정하여 정규 대제일로 삼았다. 또한, 메이지 천황이 생전에 패용했던 검을 하사받아 보물로 간직했다.
조선신궁은 완공 이래 광복되는 때까지, 조선에서 실제 종교시설로 기능하는 유일한 관폐대사였다.
조선신궁의 초대 궁사(宮司)[42] 로는 다카마쓰 시로(高松四郎 1874-1958)가 취임했다. 그러나 총독부 관리들과 조선신궁의 신관들은 상당히 거리를 두었다. 신토를 '통치의 수단'으로 보는 관리들과 종교로서 보는 신관들의 시각 차이 때문인 듯하다. 총독부에서 신토비종교론[43] 에 입각하여 신사 결혼식을 좋지 않게 여기자, 조선신궁의 궁사로서 다카마쓰가 직접 사이토 총독과 담판을 벌이기도 했다.
이듬해(1926)에는 조선인 아이들을 대상으로 수신서(修身書)를 제작하여 무료로 배포했다. 유료로 판매해야 하지만 손해를 감수하고 무료로 나누어주었는데, 이는 조선신궁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일본에서와 달리 조선신궁은 조선에선 이질적인 외래의 시설이다. 게다가 건물의 위엄을 강조하느라 산 중턱에 세웠기 때문에, 편안하게 참배하기 불편하여 조선인들은 조선신궁에 잘 오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신궁에 사람들, 특히 조선인들이 찾아오게 하려면 총독부가 도와주어야 했지만 총독부는 신궁에 무관심했다. 따라서 책을 무료로 받기 위해서라도 조선인 학생들이 신궁에 찾아오게 하려는 고육지책을 선택했다.
조선신궁의 예대제에도 총독부의 통감 등이 제대로 찾아오지 않았으므로 궁사가 항의하고 나서야 비로소 겨우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1930년대 들어서는 일제가 조선인들에게도 의무적으로 신사에 참배하라는 훈령을 공포함에 따라 참배객 수가 늘어났다. 1941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일제는 조선인들도 개인 또는 단체로 신사에 참배하라고 강요했다. 조선의 유일한 관폐대사인 조선신궁으로 당연히 그러한 인파들이 물 밀 듯 찾아왔다.
조선신궁은 남산 중턱에 기다란 계단을 타고 올라가는 등 위치나 건물이 매우 위압적이었다. 심지어 당시 경성에 사는 일본인들 중에도 조선신궁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었을 정도였다.
아래는 당시 조선신궁에 참배했던 일본인의 말이다.
정규 제일(祭日) 이외에도 무운장구(武運長久) 기원제나 요배식, 국민대회 등 동원행사를 열곤 했다. 야스쿠니 신사에서 전사자들을 합사시키는 임시대제를 여는 날에 맞추어 조선신궁은 일본 요배식을 실시하였다. 그 외에도 조선 총독이 바뀌는 등 정치적 변동사항이 있을 때마다 봉고제(奉告祭)[45] 를 열었다. 무운장구 기원제는 이름대로 일본군의 승리를 기원하는 의례지만, 정치적으로는 조선인과 일본인들에게 국가에 충성하라고 강요하는 의미가 있었다. 패전의 기색이 짙어질수록 사람들이 동요하기 쉬우므로 무운장구 기원제 또한 더욱 잦아졌다. 무운장구 기원제는 일본 신사들이라면 다 하던 것이지만, 조선신궁은 조선의 신사 전체를 대표하므로, 조선신궁에서 행하는 의례는 고위층이 참여하는 등 관제 동원행사적인 면이 더욱 강했다.
조선신궁을 포함하여 광복 직전 조선에는 신사 82군데, 신시 913군데, 총 995군데가 있었다.[46]
일제는 조선신궁 외에도 1939년 6월 15일자 척무성(拓務省)[47] 고시 제2호로 부여군에 관폐대사 부여신궁(扶餘神宮)을 짓기로 결정하고 공사를 시작했다.[48] 옛 일본이 백제와 관계가 밀접했기 때문에, 옛 백제의 수도 부여에 (한반도의) 삼국과 관계가 깊은 천황들을 신으로 모시는 신궁을 세우겠다는 계획이었다.[49] 백제 사비시대(538-660)의 왕성 가까이 있는 부소산성 안쪽에 터를 닦았지만 워낙 시골이라 공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총독부는 부여신궁을 중심으로 아예 부여군을 광역도시로 만들고자 '신도(神都) 건설'이라고 칭할 정도로 야심차게 공사를 시작했지만, 시대의 흐름은 부여신궁이 완공되도록 놓아두지 않았다.
1945년 8월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을 투하하고, 일본 정부는 그 위력에 놀라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을 발표, 한반도 또한 일제로부터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다음날 16일, 당시 조선신궁의 궁사 누카가 히로나오는 권궁사[50] 다케시마 요시오(竹島榮雄), 경성신사의 궁사와 함께 총독부 지방과장 혼다 다케오(本多武夫)와 협의하여 한반도의 각 신사ㆍ신궁들은 저마다 신령을 돌려보내는 '승신식(昇神式)[51] 을 거행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또한 신령을 돌려보내고 남은 신체(미타마시로)는 일본으로 가지고 가거나 한국인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처분하라고 했다 한다. 각 신사들에 일일이 전화를 걸어 지침을 알렸다고... 각 신사의 신체와 거기 깃든 신령이 한국인들의 손으로 파괴되고 모욕받느니,[52] 차라리 일본인들의 손으로 경건하게 돌려보내고 처리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신궁을 제외하고 이런 지시가 얼마나 잘 전파되고 시행되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조선신궁의 지시를 받고 경성신사ㆍ인천신사ㆍ대구신사 등 경성과 지방 주요도시의 신사 일부는 저마다 승신식을 거행했지만, 당시 한반도에 있는 신사들 중 승신식을 거행할 여유(?)가 있던 곳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른다. 한반도 각지에 신사들은 방화 등으로 신속하게 부서지고 없어지는 상황이었다. 특히 총독부의 행정력이 크게 약화되거나 아예 소멸된 농촌 지역 일부와 38선 이북 전체 신사들은 광복 당일 승신식조차 하지 못하고 파괴된 그날 밤 불태워진 평양신사를 비롯하여 다수가 자진해체하지 못한 채 파괴되었을 것이다.
제2의 조선신궁을 목표로 한창 공사 중이던 부여신궁은 진좌식도 하지 않았으므로 승신식 없이 바로 해체되었다. 오늘날 부소산 삼충사(三忠祠) 터가 부여신궁을 짓던 자리이다. 현 부산 용두산공원 자리에 있던 용두산신사는 광복 후 일본인들이 눈치 빠르게 승신식을 하고 신체를 바다 속에 던졌으며 본전 건물을 해체했으나, 남은 건물들은 광복 후 일본으로 귀환하려는 조선 잔류 일본인들의 거점 역할을 하면서 예외적으로 몇 달 더 존속했다. 그러나 1945년 11월 17일 일제시대 신사참배 강요에 앙심을 품은 개신교 장로교 신학생이자 집사인 민영석이 방화하여 완전히 전소되었다.
서울에서는 아직 행정력이 유지되었으므로, 누카가 궁사는 자신이 뜻한 대로 조선신궁 해체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승신식 결정을 내린 당일(1945년 8월 16일)에 승신식을 거행하고 밤에 비행기로 (신궁이 보물로 간직했던) 하사품 '메이지 천황의 검'을 일본으로 돌려보내 황실에 반납했다. 24일에는 조선신궁에서 경배의 대상이었던 미타마시로를 비행기에 실어 궁내성(宮内省)으로 반납했다. 다른 보물, 제문(祭文), 도구 등은 19일 밤부터 25일 밤 사이에 모두 불태웠고 9월 7일부터는 일본인들 손으로 건물을 해체했다. 해체 도중에 미 군정이 작업중지를 명령했다고 하는데, 어떻게 설득했는지 그대로 진행하여 10월 6일에 신사의 시설들을 철거하고 7일엔 남은 시설을 소각함으로써 끝을 맺었다. 하지만 일본인들이 모든 시설을 남김없이 철거하진 않아서, 1952년에 찍은 사진에 아직도 건물 상당수가 남아 있다. 아마도 일본인들은 신전과 배전 등 중요하다고 생각한 본전 건물만 없애고 나머지는 그냥 내버려둔 듯하다.
1948년 1월 조선신궁 참배로 계단에 눈을 깔아 스키장으로 사용한 장면을 찍은 사진이 있다. (관련 포스트)
1955년에는 이승만 당시 대통령의 만 80세 생일 기념으로 조선신궁 터에 이승만 동상을 만들기로 했다. 약 10개월간 공사하여 이듬해(56년) 광복절에 (기단부를 포함) 높이 약 24 m에 달하는 동상을 세웠다. 58년에는 국회의사당을 짓기로 하고 59년에 성대히 기공식까지 열었다. 하지만 1960년 4.19 혁명 와중에 시위대가 이승만 동상을 끌어내려 파괴하고 이승만이 망명하면서, 국회의사당 건축도 혼란에 빠진 차에 1961년 5.16 때문에 중지되었다. 오늘날 이 자리의 지형이 조선신궁 시절과 크게 달라진 이유가 국회의사당을 짓는다고 땅을 다지는 과정에서 산 자락을 많이 잘라서이다.
1968년에는 조선신궁의 본전 터에 남산식물원을 열었다. 1970년에는 남는 본전 터에 남산 어린이회관,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차례로 개관했다. 어린이회관이 이용자에 비해 너무 비좁았는지 74년에 해당 건물을 국립중앙도서관이 사용하기로 하고, 어린이회관은 현 위치로 이전했다. 1988년에는 국립중앙도서관 역시 서초동으로 이전하고 건물에는 서울시 교육연구정보원이 들어와 지금까지 사용한다. 남산식물원도 2009년 폐쇄했다.
일제가 남산 전체를 공원으로 삼으려고 하면서, 광복 이전부터 흔히 남산 일대를 '남산공원'이라 부른 듯하다.[53] 한양공원과 왜성대공원을 포함하여 서울특별시 남산공원으로 이름을 변경하였다.[54]
안중근 의사 기념관 아래쪽에는 백범광장이 조성되어 참배로의 일부 계단을 제외하면, 당시의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2014년에는 한양도성 발굴작업 중에 조선신궁의 배전 터와 이승만 동상이 있던 자리가 발견되었다.(#)
2020년 11월에는 한양도성유적전시관을 개관하였다. 2013년부터 시작한 분수대 근처의 한양도성유적 발굴작업을 완료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추가로 신전 뒤 옹벽에서 1941년 일제가 전쟁에 대비하는 일환으로 만들었던 방공호도 발견되어 같이 전시한다.
한때 국내 사이트에 '조선신궁에서 삼종신기를 전시했다가 패전 이후 일본으로 되돌려 보냈다.'는 주장이 퍼졌지만 사실이 아니다. 위에서 설명했듯 조선신궁은 메이지가 쓰던 검을 하사받아 보물로 간직했다가 패전 이후 천황가에 반납했는데, 이것이 와전된 듯하다. 미타마시로로 쓰던 거울도 나중에 따로 반납했기 때문에 '삼종신기'라고 더 쉽게 왜곡되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서울이 아닌 지방도시에 창건된 신사도 광복 이후 모두 없앴지만, 개중에는 희미한 흔적이 남은 곳들이 있다. 창원시 마산합포구(舊 마산시) 제일여고[57] 군산시 월명공원[58] 등등 일본인들이 거주했던 곳이라면 전국적으로 산재했다. 그 중 당시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은 3% 미만이라고 한다.
광복 직전을 기준으로 국폐소사 8곳, 도공진사 9곳, 부공진사 7곳, 읍공진사 19곳이 있었는데, 그중 국폐소사가 있던 자리는 다음과 같다.
일본이 혼슈, 시코쿠, 규슈 등 전통적인 일본 영토 이외의 땅을 점령, 또는 식민지로 삼자, 일본인들은 해당지역에도 신사를 지었다. 그중 관폐대사의 목록을 창건년도에 따라 나열한다.
조선신궁 창건 이전까지는 해외 관폐대사들이 기본적으로 개척3신을 모셨다. 조선신궁이 아마테라스와 메이지 천황을 주된 제신으로 모신 첫 사례인데, 이후 다른 해외 관폐대사의 전례가 된 듯하다.
<스사노오 신화해석의 문제: 한반도와의 연관성을 중심으로>, 박규태, 종교와 문화 19호(2010), 29-64쪽
<일제의 神社 설립과 조선인의 神社 인식>, 윤선자, 역사학연구 42권 42호(2011), 107-140쪽
≪제국 일본과 식민지 조선의 근대도시 형성≫, 박진한 등 6명, 인천대학교 일본문화연구소, (심산출판사 2013)
<일제의 식민지 지배전략과 神社>, 박경수, 일본어문학 제72호(2016) 501-522쪽
<日帝下 서울 南山 地域의 日本 神道・佛敎 施設 運營과 儀禮 硏究>, 비온티노 유리안(BIONTINO Juljan), 서울대학교 교육학박사학위논문(2016)
<식민지 조선의 국폐소사(國幣小社)에 관한 일고찰- 국폐소사의 운영 및 제의 양상을 중심으로>, 문혜진, 로컬리티 인문학 15(2016), 159-193쪽
≪國體神祇辞典≫, 小倉鏗爾, (錦正社 1940)
<敗戦直後の海外神社 ─朝鮮の神社を例に─> 山口公一. アジア学科年報 巻8 (2014) 43-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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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 때 일제가 조선 경기도 경성부 아사히초1초메[1] 에 세운 일본식 신사(神社). 1919년에 '조선신사(朝鮮神社)'라는 이름으로 신사를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1920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925년 신궁(神宮)으로 격상한 뒤 완공했으나, 1945년 광복이 되자 일본인들이 자진철거하였다. 남산에 있었기 때문에 '남산신사'라고도 부른다.
봉안한 신은 아마테라스와 메이지 천황이었고, 메이지 천황이 생전에 패용했던 검을 하사받아 신궁의 보물로 간직했다. 예대제 날짜는 10월 17일이었다.
위치는 오늘날 남산의 한양도성 유적전시관 일대이다. 남대문(숭례문) 옆 조선신궁 참배로로 조성된 소월로[2] 와 소파로가 만나는 도동삼거리[3] 남산공원 입구에서부터 백범광장을 거쳐 길게 계단과 광장이 있었다. 그 위쪽으로 서울시 교육청 교육연구정보원, 한양도성유적전시관, 분수대, 조선신궁 배전 터 일대가 본격적인 신궁의 경내였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과 남산도서관 부지도 일부 포함했다.[4] 정식 참배로의 계단만 380여 단에 이르는 위용이 인상적이었다. 경복궁 자리에 앉은 조선총독부 청사에서 정면(남쪽)을 바라보면 조선신궁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다만 조선신궁은 북서쪽 방향으로 터를 잡았기 때문에, 총독부는 신궁을 바라보지만 신궁은 비스듬히 선 모양새가 되어 서로 마주보지는 않았다.
정식 참배로 말고도 조선신궁으로 이어지는 길을 동서로 따로 냈는데, 오늘날 소파로와 소월로의 일부가 되었다.
본 문서명은 '조선신궁'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일제강점기 동안 조선에서 이루어진 일본 제국 국가신토의 침투에 관해 서술하였다.
2. 일러두기
- 고유명사 음역은 국립국어원 일본어 표기법을 따랐다.
- 일본 신사 시설의 이름은 지명이나 신명(神名)에 해당하는 부분만 일본어를 음역하고, 그 외에는 한국식 한자음으로 표기하여 띄어쓰기했다.(예: 熱田神宮→아쓰타 신궁) 단, 한국식 한자음으로만 쓸 때 더욱 이해가 잘 된다면 한국식 한자음으로만 붙여 썼다.(예: 朝鮮神宮→조선신궁) 다만 신사(神社)와 신사(神祠)를 구분하고자, 후자는 예외적으로 일본식 발음을 음역하여 '신시'라 하고 붙여 썼다.
3. 근대사격제도와 배경
일본에서는 오랜 세월 신토와 불교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아 불교 중심으로 두 종교가 반쯤 합쳐졌는데, 이를 신불습합(神佛習合)이라 한다. 불교의 부처나 보살들이 일본 땅을 교화하고자 신토의 신령들 형상으로 나타났다고 주장하는 본지수적(本地垂迹)이라는 관념이 이러한 신불습합을 잘 드러내었다. 꼭 신불습합만이 아니더라도 일본 민중들 사이에는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여러 가지 민간신앙적인 믿음과 관습들이 있었다.
그러나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에도 시대에 걸쳐 국수적인 지식인이나 권력자층에서는 민중이 (민간신앙이든 아니든) 종교에 기대는 것 자체를 불안하게 여기는 조류 또한 분명히 있었다. 그리스도교를 가장 위험스럽게 여기긴 했으나, 그 외에도 민중에게 인기를 끄는 민간신앙이나 일반 불교마저도 무도하다고 여겼다. 대중적인 종교행위 대부분을 음사(淫祀)[5] 로 간주하고, 국가권력이 인정한 소수 신령이나 신사만 올바르다고 주장했다. 국학이나 존황양이론이 이런 생각을 뒷받침하는 사상적 기틀이 되었다. 조슈번(長州藩: 오늘날 야마구치현 일대)에서는 1842년부터 이듬해까지 음사를 없앤다는 이유로 민중의 불만을 무시하고 신사나 사찰, 민간신앙의 성소를 대부분 파괴했다. 미토번(水戸藩: 오늘날 이바라키현 미토시 일대)에서도 1843년부터 45년까지 번에서 사찰을 뿌리 뽑고 신사는 전부 요시다 신토(吉田神道)[6] 의 시설로 바꾸고자 하였다. 권력자 이외의 다른 것으로 마음을 돌리게 할 일체의 요소를 적대시하고, 민중들이 죽든 살든 오로지 권력자만 바라보기를 원한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메이지 유신 이후 종교정책에 적극 반영되었다.
1868년, 일본 메이지 정부는 과거 요시다 가문[7] 에 부여했던 신토계를 관리감독하는 권한을 폐지하고 정식으로 신기관(神祇管) 제도를 복구했다. 이것은 국가가 직접 종교정책을 관리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신불분리령(神佛分離令)을 내려 불교와 습합된 신토를 떼어놓았다.[8] 이때 불교만이 아니라 불온한 여지가 있다 싶은 민간신앙도 크게 탄압받았다. 1871년에는 국내 신사들을 관리하고자 각 신사들에 격(등급)을 매기는 사격(社格)제도를 마련했다. 관폐사니 국폐사니 하는 용어나 신사에 격을 매기는 것 자체는 고대부터 있었지만, 제도의 구체적인 내용은 이전 일본 역사에서 전례가 없었다. 메이지 정부가 만들고 정비한 이 제도를 현대에는 근대사격제도(近代社格制度)라고 부른다.[9]
먼저 이세 신궁은 황조신(皇祖神) 아마테라스를 모시는 가장 존엄한 곳이라 하여 아예 사격을 매기지 않았다.
그 이하로는 크게 관폐사(官幣社)와 국폐사(國幣社)로 나누고, 그 안에서 大/中/小로 구분했다. 여기서 폐(幣)란 본디 폐백(幣帛)이라 하여 신에게 바치는 예물을 뜻하는데[10] , 일본 정부는 각 신사에 주는 유지비(+다른 예물)를 가리키는 뜻으로 썼다. 관폐사는 일본 천황가[11] 에서, 국폐사는 일본 정부에서 유지비를 지원했다. 관국폐사 간 서열은 다음과 같았다.
일부 관폐대사와 야스쿠니 신사에는 천황이 자신의 대리자 자격으로 따로 칙사를 파견하여 격식을 갖추어 각 신사의 신령에게 폐백을 바치도록 했는데, 이런 예우를 받는 신사를 따로 칙제사(勅祭社)라 불렀다. 조선신궁은 관폐대사이자 일본 본토 밖에 있던 유일한 칙제사로, 일본의 근대 사격제도 안에서는 최고 수준으로 대우받았다.[12]
1872년 메이지 정부는 따로 별격관폐사(別格官幣社)라는 등급을 신설하고 관폐소사에 준하여 대우하기로 했다. 별격관폐사는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자'를 주된 제신으로 모시는 신사 중에서 선별했다. 1946년 사격제도가 폐지되기 전까지 총 28개 시설이 별격관폐사가 되었는데, 그중 한국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곳이 바로 야스쿠니 신사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신으로 모시는 닛코 도쇼 궁(日光東照宮) 역시 별격관폐사였다.
관국폐사 등급 밑으로는 부(府)나 현(県)ㆍ번(藩)ㆍ향(鄕)ㆍ촌(村) 등 각 행정구역을 대표하여 부사ㆍ현사ㆍ번사ㆍ향사ㆍ촌사를 두었다. 그리고 아무 격도 받지 못한 작은 신사를 무격사(無格社)라 했는데, 일본 전체에 있는 신사들 중 절반 이상이 무격사였다. 무격사가 새로이 격을 받거나, 또는 이미 격을 받은 신사가 또다시 다른 격을 받는 것을 열격(列格: 렛카쿠)이라 하였다.
이러한 사격 매김은 일본 정부(또는 황실)의 입장에서 했기 때문에, 높은 사격을 받은 시설이라고 반드시 격에 비례해서 일본 민중에게도 인기 있던 것은 아니다. 그래서 오랜 세월 대대로 굉장히 인기 있는 신사인데도 인기에 비하면 사격이 낮은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정부 또한 약간은 민중의 인기를 고려했고, 민중 또한 정부가 높은 사격을 내린 신사라고 하면 좀 더 각별하게 여긴 것 같다.
식민지 조선에서 관폐대사는 조선신궁 하나, 국폐소사는 8곳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행정체계가 일본과 달랐으므로, 관국폐사 이하로는 조선총독부가 따로 도공진사(道供進社)ㆍ부공진사(府供進社)ㆍ읍공진사(邑供進社)를 지정하여, 각 도/부/읍이 공금으로 신사의 유지비를 지원하도록 했다.[13]
패전 이후 1946년 GHQ가 사격제도를 폐지하였다. 현대에는 일본의 신사들 중 과거에 격을 받았던 곳들은 홈페이지 등에서 '옛 사격(旧社格) 〇〇〇社' 하고 알려준다. 신사 도리이 앞 표석에 옛 사격을 새긴 곳도 많다. 비록 제도가 폐지되긴 했어도 과거에 높은 격을 받았던 신사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중요하게 대접받는다.
4. 조선신궁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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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조선신궁의 역사
5.1. 경술국치 이전 일본 신사
한반도에 처음 일본식 신사가 건립된 때는 17세기 후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혹시 그 이전에도 왜관에 일본인들이 거주했으니 그 일본인들을 위한 종교시설로서 왜관이나 그 주변에 신사가 있었을지 모르나, 이를 뒷받침할 기록이나 유물이 전무하므로 '그럴지도 모른다.' 하는 가설에 그칠 뿐이다. 임진왜란 이후 모든 왜관이 폐쇄되었으니, 설령 있었다 하더라도 흔적도 없이 파괴되었을 것이다.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 31년(1598)에 끝났고, 당연히 왜관은 모두 사라졌다. 일본은 조선에게 과거처럼 다시 왜관을 설치해달라고 요청했다. 조선 조정은 일본 측 사자가 머물 장소가 필요하지만 구 왜관 터를 쓸 수 없다고 판단, 선조 40년(1607) 부산 두모포[14] 에 새로이 왜관을 만들었다. 숙종 1년(1675)에 일본인들이 처음으로 두모포에 고토히라(金刀比羅)[15] 신사를 세웠다. 그런데 두모포왜관은 시설이 좋지 않고 좁아서 이미 숙종 1년부터 초량으로 옮길 준비를 하고 있었으므로, 이때의 고토히라 신사는 아마도 임시시설이었을 것이다. 숙종 4년(1678)에 초량왜관으로 옮겼는데, 오늘날 용두산공원과 복병산 일대이다.
1678년 왜관을 초량으로 옮길 때 쓰시마 번주 소 요시자네(宗義眞 1639-1702)가 용두산에 고토히라 신사를 새로이 짓도록 했다. 소 요시자네가 신사를 세운 것은 초량왜관에 거주하는 일본인 상당수가 쓰시마 사람이라서였고, 고토히라를 모심은 항해의 안전을 지켜주는 신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숙종 4년(1678)이 일본의 연호로는 엔포(延寳) 6년인데, 일본 측 기록에서는 엔포년간(1673-81)에 고토히라 신사를 비롯하여, 초량왜관의 용두산-용미산 근처에 신사들을 세웠다고 하였다. 고토히라 신사가 대표 격일 뿐 고토히라 신사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용미산에는 가토 기요마사를 모시는 신사도 있었다.
19세기 후반, 고종이 즉위한 후로 조선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고종 13년(1876)에 강화도 조약을 맺자 조선에 들어온 일본인들의 숫자는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대신 왜관이 해체되었다. 아무래도 부산이 일본에서 가깝고 과거에 왜관도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많았는데, 이런 와중에 고토히라 신사는 부산 일대 일본인들의 신사로 성격이 바뀌어 점차 일본인들에게 부산의 명소로 유명해졌다. 왜관 해체 직후에는 신사들이 버려져 폐사나 다름없었지만, 부산에 일본인 거류지가 생기자 다시금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러나 초량왜관 시절의 시설은 늘어난 일본인들을 감당하기에 너무나 낡고 협소했다. 고종 31년(1894)에 거류지신사(居留地神社)로 개칭하고, 이후에 일본인들이 돈을 모아 중창하여 광무 3년(1899)에 작업을 마치고 진구 황후나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 조선침략과 관계된 신을 합사했으며, 바로 그해에 ‘용두산신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용두산신사는 광복 이전까지 한반도에 있었던 모든 신사들 중 가장 역사가 깊었다.
광무 2년(1898)에는 서울 남산 왜성대공원(현 숭의여대 일대)에 모여 살던 일본인 거류민들이 아마테라스를 주된 제신(祭神)으로 모시고[16] 남산대신궁(南山大神宮)이란 이름으로 신사를 창건했는데, 1916년에 경성신사(京城神社)로 개칭했다.[17] 조선신궁이 완공되기 전까지는 경성신사에 총독부 관리들이 참배하기도 하였다.[18] 경성신사가 처음에는 현 리라아트고 자리에 있었는데, 1929년에 서쪽으로 약 50 m, 현 숭의여대의 운동장 쪽으로 이전했다.[19] 경성신사 터는 남산의 북면 아래턱, 일본인 거류지의 가운데로 통감관저나 남산총독관저와 매우 가까웠다. 경성신사는 조선신궁이 완공되기 이전까지는 행사에 총독이 참석하는 등, 조선의 신사들을 대표하는 역할도 했다.
그 뒤로도 1910년까지, 주로 일본인 거주지역을 중심으로 신시(神祠)[20] 가 꾸준히 생겼다. 본디 일본의 신사/신시들은 소재지와 관계가 깊은 신을 모시지만, 조선에 그런 신이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주로 아마테라스를 제신으로 삼았는데, 여기저기 출신이 섞인 일본인들이 공동의 조상신으로 인정할 만한 유일한 신이었기 때문이다. 일제시대에 건립된 신시들은 이름이 '신메이신시(神明神祠)'인 경우가 매우 흔한데, 여기서 신메이(神明)는 아마테라스를 주된 제신으로 모시는 신사/신시들이 상투적으로 사용하는 이름이다.[21] 또한 고토히라나 이나리 등 항해안전의 신이나 상업의 신을 모신 경우도 나름대로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도(道)마다 하나씩 국폐소사를 둘 계획이었으나 광복 때까지 이루지 못했다. 국폐소사로 지정되려면 모시는 제신 중에 국혼신이 있어야 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밑 항목을 참조하라.
1936년에 경성신사와 용두산신사가 국폐소사로 지정되었다.
5.2. 망국 이후 조선신궁 창건까지
1910년 8월 29일, 한국강제병합이 되어 대한제국이 망국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같은 해 9월, 일본 전국신직회(全國神職會)[22] 회원들이 모여 식민지 조선에서 어떻게 신토를 정착시키고 민중들을 동화시킬지 논하였다. 이 자리에서 참석자들은 '일본 민속의 중심인 신사(神社)제도를 조선에도 실행하여 빨리 동화시키고 싶지만, 쉽지 않을 테니 먼저 당국이 (조선의) 신사제도를 조사할 것을 희망한다.'는 주장에 힘을 실었다.
그뿐 아니라 신토가[23] 들은 조선 전체를 대표할 신사에 어떤 신을 모셔야 마땅할지도 함께 논하였다. 후보로 오른 신격들은 매우 다양했으나, 국혼신(國魂神)[24] ㆍ오쿠니누시(大國主)[25] ㆍ스쿠나히코나(少名毘古那)[26] 를 모셔야 한다는 주장과 아마테라스ㆍ스사노오를 모셔야 한다는 주장이 유력했다. 그러나 신토가들끼리도 서로 의견이 극명하게 대립하여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일본의 신토가들, 신토 신관들은 조선을 그냥 내두면 유교ㆍ불교ㆍ그리스도교 세력에게 빼앗긴다고 많이 불안해 하였다. 유교는 병합 이후로 힘을 크게 잃었고, 불교야 기존의 일본 불교계와 스리슬쩍 합치면 그만이었지만,[30] 그리스도교는 서양인 선교사들이 포교하며 세계적으로 퍼진 선교 네트워크를 활용해 세계주의와 반일사상을 선동하는 매개가 될 것이라고 특히 적대하였다.
당시 조선 천주교에서는 항일적인 조선인 신학생 및 평신도들이 일제에 반발하곤 했지만, 경성대목구장 뮈텔 주교 등이 이를 억누르고 친일적으로 행동하며 총독부와 타협하고자 했다. 그런데도 조선총독부는 프랑스인 성직자들을 끝내 믿지 못하여 구금하거나 추방하고, 일본인 주교를 경성대목구장 자리에 앉히려고 했다. 개신교는 반일적인 선교사 등이 더 많아서 더욱 격하게 탄압받아 30년대 말기 이후로는 굴복 직전이 되었다.[31]
일본의 신토가들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려면 조선인들에게 신토를 어서 포교해야 하고, 그 일환으로 먼저 총독부가 조선신사를 건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신사를 먼저 세우고 그 뒤 각 도(道)마다 신사 하나씩 세워, 마침내는 마을마다 신사가 하나씩은 들어서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이런 와중에도 천리교나 금광교 같은 교파신토, 일련종 등 불교 종파들은 열광적인 신자들이 개인적으로 조선으로 건너와 포교를 시도했다. 대부분은 일본인을 대상으로 했지만 조선인 포교를 시도한 경우도 없지 않았고, 그중 천리교는 일본계 종교 중에서는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교파신토가 아닌 국가신토의 관련자들은 국가의 정책을 무시하고 개인적으로 활동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조선총독부를 다그쳐야 했지만, 종교가가 아닌 총독부 관리들은 별로 급하지 않았다. 1912년부터 조선총독부는 조선신사를 지을 땅과 비용을 계산했지만 예산을 확보하지 못해 미루었다. 1917년에는 돈을 모았는데 의회가 해산하는 바람에 건설허가를 받질 못했다. 하지만 1913년에 일본 각지의 여러 주요 신사들의 구조를 살피고 건설부지를 검토하는 등, 예산확보와 별개로 작업을 진행하였다.
조선 전체를 대표할 '조선신사'는 마땅히 경성(서울)에 있어야 했다. 경성 이외의 선택지는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경성 안에서도 구체적으로 어디에 만들어야 할지는 논의가 따로 필요했다. 조선총독부는 일본에서 메이지 신궁 등을 건축한 바 있는 유명한 건축가 이토 주타(伊東忠太 1867-1954)를 초빙하여 조선신궁 터를 잡고 건축하도록 했다.
이때 논의된 후보지는 다음과 같다.
이토 주타는 조선신궁 자리를 잡으면서 아래와 같은 조건에서 평가했다.
최종적으로 조선신궁을 한양공원 자리에 짓기로 결정했다. 이토 주타의 위 평가기준과 비교하면, 한양공원/왜성대 자리는 남산의 북쪽 면이기 때문에 감점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예산 문제가 있었다. 남산의 남쪽 면이나 다른 지역은 사유지가 많아서 보상비를 따져보니 예산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래서 국유지가 많아 보상비 걱정이 없는 곳을 찾으니 한양공원 자리가 낙점된 것. 또한 한국강제병합 이전부터 일본인들이 남산 일대에 많이 살았고, 조선인들도 남산을 영험하게 여겼음도 남산 자락 한양공원 자리를 낙점한 이유인 듯하다.
한양공원 자리는 보상비가 덜 들어 좋긴 한데 방향이 문제였다. 일본의 신사는 남향이 기본인데, 한양공원 터는 북서향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예산이라는 현실적인 벽을 넘을 수 없었으므로, 1916년 4월 7일자 매일신보 2면에 실린 '조선신사신조영계획(朝鮮神社新造營計劃)'이라는 기사에서는 이렇게 변명했다. 일본의 유서 깊은 신사들 중에도 하코자키 하치만 궁(箱崎八幡宮)이나 이쓰쿠시마 신사처럼 남향하지 않은 곳들이 있고, 장차 일본 민족이 북서쪽으로도 발전할 것이며, 왜성대 일대는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으니 북서쪽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예산 문제로 북서쪽으로 지을 수밖에 없으니 그래도 괜찮다고 억지로 이유를 갖다 붙였다. 조선신궁 건물은 이세신궁과 마찬가지로 신메이즈쿠리(神明造) 양식을 따랐는데, 이 또한 '제일 돈이 덜 들기' 때문이었다.
당시 서울 남산에는 국사당(國師堂)이 있어 우리나라 무당들이 기도처로 여겼는데, 일제는 국사당이 조선신궁을 짓기로 한 자리보다 높이 있다는 이유로 트집을 잡았다. 결국 국사당은 인왕산으로 이전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현재 남산 국사당이 있던 자리에는 팔각정이 들어섰다.
위에서 언급한 '조선신사신조영계획' 기사에 흥미로운 구절이 있다. 원래 조선신사에 모실 신을 두고 진구 황후 외 11위 신령을 모시려는 논의가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궁내성이나 내무성 등 관계기관의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는데,[35] (1912년에) 메이지 천황이 죽자 그를 신격으로 모시기로 했다고 매일신보에서 여러 번 언급하므로 1912년 - 1916년 사이 어느 시점부터 총독부는 내부방침으로 메이지 천황을 모신다고 결정한 듯하다. 하지만 이후로도 시간을 끌다가 1918년이 되어서야 조선총독부는 조선신사에 모실 신을 아마테라스와 메이지 천황으로 하겠다고 내각에 보고하여 허가를 구했다.
1917년에는 조선총독부령 제21호로 <神祠에 관한 件>이라는 규정을 발표했다. 당시 일본어에서도 신시(神祠)란 단어는 '신령을 제사 지내는 건물'이란 뜻인 보통명사였다. 하지만 조선총독부는 신사(神社)보다는 간소하고 격이 떨어지는 신토적 간이종교시설을 '신시'란 이름으로 허가를 받도록 정했는데, 일본 본토에는 없는 제도였다. 이는 총독부가 일본 본토에서 신사들을 관할하는 신사국(神社局)과 별개로, 조선총독부가 조선의 종교시설들을 직접 장악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그런데 조선총독부가 더 이상 느긋하게 있지 못하게 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1919년에 3.1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그제서야 조선인들을 좀더 강하게 동화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는 조선신사 건설을 서둘렀다. 결국 일본 정부는 그해 7월 18일자 내각고시 제12호로 남산 아래에 조선신사(朝鮮神社)란 이름으로 신사를 지을 것이고 사격은 관폐대사이며 제신은 아마테라스와 메이지 천황이라고 확정하였다.
한편 전국신직회는 조선에서 천도교와 개신교가 활발히 활동함에 불안감을 느꼈다. 전국신직회는 총독부가 얼른 신토로써 조선 민중을 동화시키라고 요구하는 한편, 내부의 반대의견을 묵살하였다. 이민족을 동화시키기란 불가능하다고 보거나, 또는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신사 건설이 진행되는 와중에서 꽤 재미난 논의도 있었다. 조선총독부가 조선신사의 제신(祭神)은 아마테라스와 메이지 천황이라고 정했지만, 신토가들 중에는 조선인들의 시조인 단군이나, 조선왕조의 건국자 이성계도 함께 모셔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종교적으로 내선일체를 이루자면 일본 신격만 일방적으로 모시지 말고, 조선인들도 인정하는 대표자 격인 신격을 함께 봉안해야 한다고 의식한 것이다. 그뿐 아니라 건물 자체에 대해서도 순 일본식 신사 양식으로 짓지 말고, 조선의 전통적인 건축양식을 혼합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이런 주장들은 모두 조선신사를 통해 '내선일체'의 이념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조선총독부는 이러한 주장을 모조리 무시했다.'''
1920년부터 공사비 156만 엔을 들여 남산에[36] 총면적 12만 7900여 평(약 42헥타르), 경내 면적 7천 평(약 2.3헥타르)을 닦아 건물을 지었다.
하지만 신토계는 모시는 신격이 신격인 만큼 신사가 아니라 '신궁'으로 격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7] 당시 일본 정부도 이런 주장을 납득하고는 1925년 6월 27일자 내각고시 제6호로 명칭을 '조선신궁'으로 바꾸었다.
신토학자 오가사와라 쇼조(小笠原省三 1892-1970)는 조선총독부의 조선신사 건립 방침에 반대하였다. 오가사와라는 '적화방지단'이라는 반공단체의 회원이기도 했는데, 그 때문에라도 조선의 사상적 동향에 관심이 많았다. 오가사와라는 자신이 창간한 잡지 ≪신토평론(神道評論)≫에 글을 실었다.
오가사와라는 아마테라스가 일본 민족의 주신이기 때문에 이세 신궁 외에서는 모시면 안 되고, 그 대신 조선의 시조신 단군을 모셔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뿐 아니라 건축양식도 순일본식이 아니라 조선 전통을 섞어야 하고, 제례 때 쓸 음악도 조선의 것을 어느 정도 사용해야 한다고 썼다. 오가사와라의 주장에 다른 일본의 재야 지식인들도 동조했는데, 조선의 시조신인 단군을 무시함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단군을 모셔야만 일본과 조선, 양 민족이 화합할 수 있다고도 했다.
오가사와라의 주장에 반대하는 신토가들도 조선의 시조를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 자체를 배격하지는 못했다. (조선신궁의 초대 궁사[주지]가 된) 다카마쓰 시로(高松四郎)는 '조선의 시조신을 모셔야 한다는 데에는 동감하나, 그 시조신이 꼭 단군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래서 한반도 국가들의 역대 건국자들을 합쳐 '국혼신'이란 이름으로 봉안하자는 의견을 내각에 제출했다.
당시 일본의 조선통치 관계자들에게 조선신사의 신으로 누굴 모실지는 첨예하고 중요한 정치적 문제로 부각되었다. 조선총독부는 '경성일보로 오가사와라의 주장이 알려졌지만, 조선인들은 이 문제에 관심이 없다. 오가사와라가 현지를 모르고 탁상공론을 했을 뿐'이라고 판단했다. 조선총독부는 내부 문서에서 조선인에게는 신과 신사의 관념이 없다고 설명하며[38] 조선에는 마땅히 합사할 만한 신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특히 단군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존재 자체가 의심스럽다.'고 주장하며 강하게 부정했다. 어이없는 점은 아마테라스에 대해서는 '존재하는 분이 틀림없다.'고 했다는 것. 아마테라스는 실존하는 존재로 인정하되, 단군은 비실재의 허구라고 몬 것이다. 그야말로 총독부가 이중잣대를 들이댔지만, 아마테라스도 허구의 존재라거나 단지 신화일 뿐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단군이 반일의 상징이 되었다고 보아 억지로 부정하려 했다고 보는 시선도 있다.
결국, 단군은 고사하고 국혼신마저도 봉안되지 못했다. 또한 조선총독부는 이 문제에 관해서 일본 본토 신토가들의 주장에 휘둘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신토가들이 신토를 명백히 '종교'로 인식하는 반면, 총독부는 '국가신토 비종교론'에 합세하여 조선신궁 등은 종교시설이 아니며, 황국신민의 문화라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신사참배 강요로도 이어졌다. 결국 일본 내에서도 '신토' 관련 전반 개념에 대한 철학이 종교 대 문화로서 크게 달랐던 듯.
조선신궁을 건설하느라 당시 남산에 있던 한양도성 일부가 크게 훼손되었다. 또한 터를 닦는 와중에 바위를 깨트리고자 폭약을 썼는데, 당시 경성에 살던 조선인들이 이 소리에 크게 놀랐다고 한다. 발파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어서 그랬던 듯. 또한 일본인 인부들이 임금을 올려달라며 태업하는 일도 있었다. 이해(1925) 7월부터 9월까지 한반도 전역에 을축년 대홍수가 덮치는 재해가 일어났지만, 조선신궁은 별 영향을 받지 않고 작업을 진행했다. 일본 정부는 9월 24일자 내각고시 제9호로 조선신궁의 진좌제는 같은해 10월 15일이고, 예대제 날짜는 매년 10월 17일이라고 결정했다.
조선신궁으로 개칭한 지 3개월이 지나 1925년 10월, 소노이케 사네야스(園池実康) 장전차장(掌典次長)[39] 이 칙사로서 이세 신궁으로부터 미타마시로(御靈代)[40] 로 거울을, 황실로부터 메이지 천황이 패용하던 검을 받고 조선으로 건너와 13일에 경성에 도착했다. 그리고 내각이 정한 날짜에 맞추어 그달 15일, 조선신궁에서 진좌제(鎭座祭)를 거행했다. 진좌제란 신령이 내려와 미타마시로(신체)에 깃들게 하는 제사로, 이 의례를 거행해야 신사가 비로소 '신사(神社)'가 되는 것이다.
미타마시로를 신설되는 신사로 옮길 때에는 조용히 함이 통례인데, 조선신궁에 미타마시로를 모셔올 때에는 거창하게 격식을 갖추었다. 자발적인 행위인지 아니면 압력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당시 신문을 보면 '조선신궁에 봉축하는 뜻을 표하고자' 시장들이 하루 영업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는 기사가 있다.
조선총독부는 미타마시로나 메이지의 검을 불령선인들이 빼앗거나 파괴할까 봐 매우 걱정했다. ≪시대일보≫는 1925년 9월 25일자 기사로 임시정부가 조선신궁 낙성을 기회로 폭탄특공대를 들여보냈다는 내용을 실었다가 해당 일자 기사를 내보내지 못했다. 경기도 경찰부는 10월 초부터 각 경찰서장들을 모아 경계구역을 할당하고 사복경찰을 매복시켰고, 미타마시로를 모신 칙사가 경성역에 도착하는 10월 13일, 진좌제를 거행하는 15일에는 경성의 경철관 전원을 총출동시켜 경계하고, 조금만 수상해 보이는 자가 있다면 모조리 잡아들였다. 그뿐 아니라 칙사가 행렬하는 와중에 호위대를 붙였는데, 당시 행렬의 선두에 섰던 일본인은 폭탄이 날아오지 않을까 걱정했다고 한다. 조선인 고보 학생들이 조선신궁 건립에 반대하는 시위를 계획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실행되지 않았다.
진좌제 당일에는 군대와 학생들을 동원하여 옷을 갖춰 입고 거창하게 소노이케 일행을 맞도록 하였다. 의친왕 또한 이왕가의 대리 자격으로 행사에 참석했고, 조선 전체 관공서 및 학교는 특별휴일을 받았다.
조선신궁 제신 논란을 주도한 오가사와라 쇼조도 진좌제에 참석하여 한 시간 넘게 조선인들의 반응을 관찰했다고 한다. 오가사와라는 저서 『海外の神社』(神道評論社, 1933)에서 이때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조선총독부 내무국장 이쿠타 기요사부로(生田淸三郞 1884-1953) 역시 "신사로 사상을 선도한다고 하는 것은 시대착오이고, 조선신궁의 창건 역시 시대착오인데 이에 이르렀으므로 그만둘 수 없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한다.[41]일본인도 조선인도 속속 돌계단을 오른다. 그러나 배전(拜殿)의 앞까지 가자, 일본인은 탈모(脫帽)하고 절을 하고, 조선인은 획 발길을 돌려 돌아간다. 나는 한 시간 이상 배전 앞에 우뚝 서 있었다. 그러나 단 한 사람의 조선인도 '참배'하는 자는 없었다. 우리들의 상식으로 하면 '참배'라는 것을 예배하고 기원하는 일이다. 조선인은 '참배'하지 않고 '참관'하고 있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 이것은 무슨 원인이 있는 것일까. 조선신궁은 결국 일본인만의 신궁으로 끝나는 것인가?
번역문은 참고자료 중 윤선자(2011)의 129쪽에서 2차 인용하되, 한자에 한글을 병기함.
예대제 날짜는 매년 10월 17일이었다. 그 외에도 기년제(풍년기원제)는 3월 15일, 신상제(추수감사제)는 11월 23일로 정하여 정규 대제일로 삼았다. 또한, 메이지 천황이 생전에 패용했던 검을 하사받아 보물로 간직했다.
조선신궁은 완공 이래 광복되는 때까지, 조선에서 실제 종교시설로 기능하는 유일한 관폐대사였다.
5.3. 창건 이후
조선신궁의 초대 궁사(宮司)[42] 로는 다카마쓰 시로(高松四郎 1874-1958)가 취임했다. 그러나 총독부 관리들과 조선신궁의 신관들은 상당히 거리를 두었다. 신토를 '통치의 수단'으로 보는 관리들과 종교로서 보는 신관들의 시각 차이 때문인 듯하다. 총독부에서 신토비종교론[43] 에 입각하여 신사 결혼식을 좋지 않게 여기자, 조선신궁의 궁사로서 다카마쓰가 직접 사이토 총독과 담판을 벌이기도 했다.
이듬해(1926)에는 조선인 아이들을 대상으로 수신서(修身書)를 제작하여 무료로 배포했다. 유료로 판매해야 하지만 손해를 감수하고 무료로 나누어주었는데, 이는 조선신궁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일본에서와 달리 조선신궁은 조선에선 이질적인 외래의 시설이다. 게다가 건물의 위엄을 강조하느라 산 중턱에 세웠기 때문에, 편안하게 참배하기 불편하여 조선인들은 조선신궁에 잘 오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신궁에 사람들, 특히 조선인들이 찾아오게 하려면 총독부가 도와주어야 했지만 총독부는 신궁에 무관심했다. 따라서 책을 무료로 받기 위해서라도 조선인 학생들이 신궁에 찾아오게 하려는 고육지책을 선택했다.
조선신궁의 예대제에도 총독부의 통감 등이 제대로 찾아오지 않았으므로 궁사가 항의하고 나서야 비로소 겨우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1930년대 들어서는 일제가 조선인들에게도 의무적으로 신사에 참배하라는 훈령을 공포함에 따라 참배객 수가 늘어났다. 1941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일제는 조선인들도 개인 또는 단체로 신사에 참배하라고 강요했다. 조선의 유일한 관폐대사인 조선신궁으로 당연히 그러한 인파들이 물 밀 듯 찾아왔다.
조선신궁은 남산 중턱에 기다란 계단을 타고 올라가는 등 위치나 건물이 매우 위압적이었다. 심지어 당시 경성에 사는 일본인들 중에도 조선신궁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었을 정도였다.
아래는 당시 조선신궁에 참배했던 일본인의 말이다.
물론 어떤 일본인들은 조선신궁 건축의 위압적인 면을 성(聖)과 속(俗)을 가르는 상징으로 보아 매우 좋게 여겼다. 이 점은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개개인마다 받아들이는 방법이 상당히 달랐다.여학교 3학년이 되면, 매월 한 번씩, 아마 초하루였지. 학교에서 조선신궁에 참배하도록 되어 있었어. …… 높은 곳에서 위압적으로 사람을 지배하는 느낌이 들어 어쩐지 싫었어. 형식만 중요시된 것 같아 정말로 좋아지지 않았어. 하여튼 매월 가야 하는 참배는 우울했고, 도대체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는지 갈 때마다 생각했어. 신사 경내에 들어가서는 친구들과 수다만 떨었지. 학교 성적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말이야. …… 참배하는 의미나 의의 같은 것은 정말로 관심이 없었어. 학교부터 나란히 줄지어 조선신궁에 가는 중에도 친구들과 이야기만 했어.
위 내용은 박진한 등 6명(2013) 220-221쪽에서 2차 인용함. 원문은 ≪母の「京城」ㆍ私のソウル≫, 澤井理惠, (草風館, 1996)[44]
정규 제일(祭日) 이외에도 무운장구(武運長久) 기원제나 요배식, 국민대회 등 동원행사를 열곤 했다. 야스쿠니 신사에서 전사자들을 합사시키는 임시대제를 여는 날에 맞추어 조선신궁은 일본 요배식을 실시하였다. 그 외에도 조선 총독이 바뀌는 등 정치적 변동사항이 있을 때마다 봉고제(奉告祭)[45] 를 열었다. 무운장구 기원제는 이름대로 일본군의 승리를 기원하는 의례지만, 정치적으로는 조선인과 일본인들에게 국가에 충성하라고 강요하는 의미가 있었다. 패전의 기색이 짙어질수록 사람들이 동요하기 쉬우므로 무운장구 기원제 또한 더욱 잦아졌다. 무운장구 기원제는 일본 신사들이라면 다 하던 것이지만, 조선신궁은 조선의 신사 전체를 대표하므로, 조선신궁에서 행하는 의례는 고위층이 참여하는 등 관제 동원행사적인 면이 더욱 강했다.
조선신궁을 포함하여 광복 직전 조선에는 신사 82군데, 신시 913군데, 총 995군데가 있었다.[46]
일제는 조선신궁 외에도 1939년 6월 15일자 척무성(拓務省)[47] 고시 제2호로 부여군에 관폐대사 부여신궁(扶餘神宮)을 짓기로 결정하고 공사를 시작했다.[48] 옛 일본이 백제와 관계가 밀접했기 때문에, 옛 백제의 수도 부여에 (한반도의) 삼국과 관계가 깊은 천황들을 신으로 모시는 신궁을 세우겠다는 계획이었다.[49] 백제 사비시대(538-660)의 왕성 가까이 있는 부소산성 안쪽에 터를 닦았지만 워낙 시골이라 공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총독부는 부여신궁을 중심으로 아예 부여군을 광역도시로 만들고자 '신도(神都) 건설'이라고 칭할 정도로 야심차게 공사를 시작했지만, 시대의 흐름은 부여신궁이 완공되도록 놓아두지 않았다.
5.4. 광복 이후
1945년 8월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을 투하하고, 일본 정부는 그 위력에 놀라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을 발표, 한반도 또한 일제로부터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다음날 16일, 당시 조선신궁의 궁사 누카가 히로나오는 권궁사[50] 다케시마 요시오(竹島榮雄), 경성신사의 궁사와 함께 총독부 지방과장 혼다 다케오(本多武夫)와 협의하여 한반도의 각 신사ㆍ신궁들은 저마다 신령을 돌려보내는 '승신식(昇神式)[51] 을 거행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또한 신령을 돌려보내고 남은 신체(미타마시로)는 일본으로 가지고 가거나 한국인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처분하라고 했다 한다. 각 신사들에 일일이 전화를 걸어 지침을 알렸다고... 각 신사의 신체와 거기 깃든 신령이 한국인들의 손으로 파괴되고 모욕받느니,[52] 차라리 일본인들의 손으로 경건하게 돌려보내고 처리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신궁을 제외하고 이런 지시가 얼마나 잘 전파되고 시행되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조선신궁의 지시를 받고 경성신사ㆍ인천신사ㆍ대구신사 등 경성과 지방 주요도시의 신사 일부는 저마다 승신식을 거행했지만, 당시 한반도에 있는 신사들 중 승신식을 거행할 여유(?)가 있던 곳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른다. 한반도 각지에 신사들은 방화 등으로 신속하게 부서지고 없어지는 상황이었다. 특히 총독부의 행정력이 크게 약화되거나 아예 소멸된 농촌 지역 일부와 38선 이북 전체 신사들은 광복 당일 승신식조차 하지 못하고 파괴된 그날 밤 불태워진 평양신사를 비롯하여 다수가 자진해체하지 못한 채 파괴되었을 것이다.
제2의 조선신궁을 목표로 한창 공사 중이던 부여신궁은 진좌식도 하지 않았으므로 승신식 없이 바로 해체되었다. 오늘날 부소산 삼충사(三忠祠) 터가 부여신궁을 짓던 자리이다. 현 부산 용두산공원 자리에 있던 용두산신사는 광복 후 일본인들이 눈치 빠르게 승신식을 하고 신체를 바다 속에 던졌으며 본전 건물을 해체했으나, 남은 건물들은 광복 후 일본으로 귀환하려는 조선 잔류 일본인들의 거점 역할을 하면서 예외적으로 몇 달 더 존속했다. 그러나 1945년 11월 17일 일제시대 신사참배 강요에 앙심을 품은 개신교 장로교 신학생이자 집사인 민영석이 방화하여 완전히 전소되었다.
서울에서는 아직 행정력이 유지되었으므로, 누카가 궁사는 자신이 뜻한 대로 조선신궁 해체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승신식 결정을 내린 당일(1945년 8월 16일)에 승신식을 거행하고 밤에 비행기로 (신궁이 보물로 간직했던) 하사품 '메이지 천황의 검'을 일본으로 돌려보내 황실에 반납했다. 24일에는 조선신궁에서 경배의 대상이었던 미타마시로를 비행기에 실어 궁내성(宮内省)으로 반납했다. 다른 보물, 제문(祭文), 도구 등은 19일 밤부터 25일 밤 사이에 모두 불태웠고 9월 7일부터는 일본인들 손으로 건물을 해체했다. 해체 도중에 미 군정이 작업중지를 명령했다고 하는데, 어떻게 설득했는지 그대로 진행하여 10월 6일에 신사의 시설들을 철거하고 7일엔 남은 시설을 소각함으로써 끝을 맺었다. 하지만 일본인들이 모든 시설을 남김없이 철거하진 않아서, 1952년에 찍은 사진에 아직도 건물 상당수가 남아 있다. 아마도 일본인들은 신전과 배전 등 중요하다고 생각한 본전 건물만 없애고 나머지는 그냥 내버려둔 듯하다.
1948년 1월 조선신궁 참배로 계단에 눈을 깔아 스키장으로 사용한 장면을 찍은 사진이 있다. (관련 포스트)
1955년에는 이승만 당시 대통령의 만 80세 생일 기념으로 조선신궁 터에 이승만 동상을 만들기로 했다. 약 10개월간 공사하여 이듬해(56년) 광복절에 (기단부를 포함) 높이 약 24 m에 달하는 동상을 세웠다. 58년에는 국회의사당을 짓기로 하고 59년에 성대히 기공식까지 열었다. 하지만 1960년 4.19 혁명 와중에 시위대가 이승만 동상을 끌어내려 파괴하고 이승만이 망명하면서, 국회의사당 건축도 혼란에 빠진 차에 1961년 5.16 때문에 중지되었다. 오늘날 이 자리의 지형이 조선신궁 시절과 크게 달라진 이유가 국회의사당을 짓는다고 땅을 다지는 과정에서 산 자락을 많이 잘라서이다.
1968년에는 조선신궁의 본전 터에 남산식물원을 열었다. 1970년에는 남는 본전 터에 남산 어린이회관,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차례로 개관했다. 어린이회관이 이용자에 비해 너무 비좁았는지 74년에 해당 건물을 국립중앙도서관이 사용하기로 하고, 어린이회관은 현 위치로 이전했다. 1988년에는 국립중앙도서관 역시 서초동으로 이전하고 건물에는 서울시 교육연구정보원이 들어와 지금까지 사용한다. 남산식물원도 2009년 폐쇄했다.
일제가 남산 전체를 공원으로 삼으려고 하면서, 광복 이전부터 흔히 남산 일대를 '남산공원'이라 부른 듯하다.[53] 한양공원과 왜성대공원을 포함하여 서울특별시 남산공원으로 이름을 변경하였다.[54]
안중근 의사 기념관 아래쪽에는 백범광장이 조성되어 참배로의 일부 계단을 제외하면, 당시의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2014년에는 한양도성 발굴작업 중에 조선신궁의 배전 터와 이승만 동상이 있던 자리가 발견되었다.(#)
2020년 11월에는 한양도성유적전시관을 개관하였다. 2013년부터 시작한 분수대 근처의 한양도성유적 발굴작업을 완료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추가로 신전 뒤 옹벽에서 1941년 일제가 전쟁에 대비하는 일환으로 만들었던 방공호도 발견되어 같이 전시한다.
한때 국내 사이트에 '조선신궁에서 삼종신기를 전시했다가 패전 이후 일본으로 되돌려 보냈다.'는 주장이 퍼졌지만 사실이 아니다. 위에서 설명했듯 조선신궁은 메이지가 쓰던 검을 하사받아 보물로 간직했다가 패전 이후 천황가에 반납했는데, 이것이 와전된 듯하다. 미타마시로로 쓰던 거울도 나중에 따로 반납했기 때문에 '삼종신기'라고 더 쉽게 왜곡되었을지도 모른다.
- 신토에서 참배자들의 경배대상이 되는 신체(미타마시로)는 본전을 수리하는 등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옮기지 않고, 설령 동네 신사의 신체라 할지라도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가린다. 동네 신사의 신체도 옮기거나 사람이 보지 못하게 하는데, 하물며 천황가의 상징인 삼종신기를 조선까지 보내서 전시할 리 없다. 만약 삼종신기를 전시한다면 이세 신궁 내궁에서 경배받는 야타노카가미부터 조선으로 옮겨야 하는데, 숱한 일본인들 눈이 뒤집혀 난리가 났을 것이다. 만약 조선신궁 측이 일반 대중에게 보라고 전시한 물건이 있었다면 메이지의 검일 터인데, 조선신궁이 메이지 천황을 '신'으로 받드니 그 검은 당연히 '신기'라고 부를 만했을 것이다.
5.5. 역대 조선신궁 궁사
6. 다른 이야기 - 조선 곳곳의 국가신토 침투
당시 서울이 아닌 지방도시에 창건된 신사도 광복 이후 모두 없앴지만, 개중에는 희미한 흔적이 남은 곳들이 있다. 창원시 마산합포구(舊 마산시) 제일여고[57] 군산시 월명공원[58] 등등 일본인들이 거주했던 곳이라면 전국적으로 산재했다. 그 중 당시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은 3% 미만이라고 한다.
광복 직전을 기준으로 국폐소사 8곳, 도공진사 9곳, 부공진사 7곳, 읍공진사 19곳이 있었는데, 그중 국폐소사가 있던 자리는 다음과 같다.
- 명칭은 1945년 광복 시점을 기준으로 한다.
- 설립년은 일본인들이 사사로이든 공적으로든 종교시설을 처음으로 설치한 해를 뜻한다.
- 위치는 해당 시설이 있던 곳의 현재 지명으로 적었다.
7. 다른 이야기 - 일본 외 관폐대사들
일본이 혼슈, 시코쿠, 규슈 등 전통적인 일본 영토 이외의 땅을 점령, 또는 식민지로 삼자, 일본인들은 해당지역에도 신사를 지었다. 그중 관폐대사의 목록을 창건년도에 따라 나열한다.
- 명칭은 1945년 광복 시점 기준이다.
- 창건년은 건물을 완공하고 진좌제를 거행한 해를 뜻한다.
- 열격년은 일본 정부가 해당 시설을 관폐대사로 열격(列格)하겠다고 관보에 고시한 해를 뜻한다.
- 창건년보다 열격년이 앞서는 경우는 일본 정부가 해당시설을 관폐대사로 삼겠다고 미리 결정하고 공사를 시작한 것이다.
조선신궁 창건 이전까지는 해외 관폐대사들이 기본적으로 개척3신을 모셨다. 조선신궁이 아마테라스와 메이지 천황을 주된 제신으로 모신 첫 사례인데, 이후 다른 해외 관폐대사의 전례가 된 듯하다.
8. 주요 참고자료
- 제목을 <>로 묶은 것은 논문, ≪≫로 묶은 것은 단행본임.
<스사노오 신화해석의 문제: 한반도와의 연관성을 중심으로>, 박규태, 종교와 문화 19호(2010), 29-64쪽
<일제의 神社 설립과 조선인의 神社 인식>, 윤선자, 역사학연구 42권 42호(2011), 107-140쪽
≪제국 일본과 식민지 조선의 근대도시 형성≫, 박진한 등 6명, 인천대학교 일본문화연구소, (심산출판사 2013)
<일제의 식민지 지배전략과 神社>, 박경수, 일본어문학 제72호(2016) 501-522쪽
<日帝下 서울 南山 地域의 日本 神道・佛敎 施設 運營과 儀禮 硏究>, 비온티노 유리안(BIONTINO Juljan), 서울대학교 교육학박사학위논문(2016)
<식민지 조선의 국폐소사(國幣小社)에 관한 일고찰- 국폐소사의 운영 및 제의 양상을 중심으로>, 문혜진, 로컬리티 인문학 15(2016), 159-193쪽
≪國體神祇辞典≫, 小倉鏗爾, (錦正社 1940)
<敗戦直後の海外神社 ─朝鮮の神社を例に─> 山口公一. アジア学科年報 巻8 (2014) 43-51쪽
9. 같이보기
[1] 지금의 서울시 중구 회현동1가 남산 중턱[2] 지난 세월 많이 공사하여 일제시대의 지형에서 바뀐 부분이 많은 지역이지만, 도동삼거리로 올라가는 초입부에 조선신궁 참배로로 조성한 오리지널 일본 신사식 난간이 극히 일부가 남았다. 6.25 때 흔적인지는 모르나 총탄의 흔적이 많다.[3] 도동삼거리가 '관폐대사 조선신궁'이라고 새긴 표지석이 있던 하광장이었다.[4] 이 지역이 전부 남산공원의 일부이기 때문에, 조선신궁의 위치를 현 남산공원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5] 본래는 올바르지 못한 제사행위를 가리키는 유교용어이다. 올바른 제사대상이 아닌 귀신에게 올리는 제사, 또는 잘못된 방법으로 올리는 제사를 가리킨다.[6] 유일 신토(有一神道)라고도 불린다. 무로마치 시대 교토의 신직(신토의 성직자) 요시다 가네모리(吉田兼倶 1435-1511)가 주장한 신토 교설의 한 파. 본지수적을 반대로 뒤집은 반본지수적(反本地垂迹)을 주장했다. 본지수적설과 반대로 오히려 신토의 신령들이 불교의 부처나 보살의 형상으로 나타났다는 신토 우위적인 주장이다. 가네모리는 '정통 신토'를 표방하며 신토계에 퍼진 다른 교설들을 제압하고 유불선을 통합하는 신토 교파를 만들고자 하였다. 이런 주장이 마음에 들었는지 요시다 가네모리의 집안은 일본 전역의 신토를 관리감독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아 약 400년간 신토계에 군림했지만, 1868년 메이지 유신이 시작된 직후에 권한이 박탈되었다.[7] 요시다 가네모리(吉田兼倶) 이후 요시다 가문의 가주는 신토계를 관리감독할 권한을 받고 신기관령장상(神祇管領長上)이라는 칭호를 자임해 왔다.[8] 신불분리령 이후 일본의 많은 불상들이 파괴되고 불교가 공격을 받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신불습합된 상태를 당연하게 여겼기 때문에, 일본의 많은 민중들은 신불분리령을 두고 '나라가 종교를 없애려 한다.'고 생각했다 한다.[9] 근대사격제도란 용어에 대응하여, 19세기 이전에 몇몇 신사에 사격을 매긴 것을 중세사격제도(中世社格制度)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잘 쓰이는 용어는 아니다. 사실 19세기 이전에 매긴 '사격'이란 몇몇 신토 시설에 명예를 준 것이지, 사격제도라고 부를 만큼 체계적으로 위계를 만들어 관리한 것은 아니다.[10] 정확히 말하면, 폐(幣)란 한자는 본디 신령이나 높은 사람에게 예물로 바치는 비단을 뜻한다. 백(帛) 또한 비단을 가리키므로 '폐백'이란 단어는 예물로 바치는 비단을 더욱 명확히 가리킨다. 지금도 우리나라의 종묘제례에는 제사를 지내며 신령에게 폐백으로 비단을 올리는 절차가 있다. 일본에서는 폐(幣)를 '헤이', 또는 '누사'라고 읽는데, 비단만이 아니라 신령에게 바치는 종이나 무명 등도 포함했다. 후대에는 신령에게 바치는 모든 품목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한 것이다.[11] 구체적으로는 궁내성이 관할했다고 한다.[12] 이세신궁은 너무 존엄하기 때문에, 매년 칙사를 파견함에도 불구하고 따로 '칙제사'라는 이름으로 다른 신사와 묶어 부르지 않는다고 한다. 이세신궁은 그냥 이세신궁이라는 것. 일제시대에는 (이세신궁을 제외하고) 칙제사 17곳이 있었지만, 광복 이후 조선신궁이 사라져서 지금은 16곳만 남았다. 지금도 칙제사에는 천황의 칙사가 여전히 파견된다.[13] 공(供)은 '공물', 진(進)은 '진상'이란 뜻이다. 따라서 도공진사/부공진사란 명칭은 '도/부에서 공물을 진상하는 신사'란 뜻이다.[14] 지금의 부산광역시 동구 수정동 일대[15] 본래는 꿈비라(Kumbhīra)라고 하는데, 인도의 라즈기르(왕사성) 외곽 웨뿔라(Vepula)산에 사는 야차로 휘하에 야차 10만을 거느리며, 갠지스의 여신 강가(Ganga)의 탈것 노릇을 한다고 한다. 본디 갠지스강에 사는 악어를 신격화한 것이다. 한문 불경에서 음역하여 금비라(金毘羅)ㆍ금비로(金鞞盧)ㆍ궁비라(宮毘羅) 등으로 번역했다. 일본에선 가가와현에 있는 고토히라산(琴平山) 숭배와 습합되어 고토히라산을 곤피라산(金毘羅山)이라고도 부르고, 반대로 신 역시 고토히라, 혹은 곤피라(金毘羅)라고 불렀다. 에도시대까지는 부동명왕이나 비사문천 등이 고토히라 신의 형상으로 나타났다고 믿었고, 상인들이나 조운업자들은 (꿈비라가 강가 여신의 탈것이란 점에서) 고토히라ㆍ곤피라를 항해의 안전을 지켜주는 신으로 숭앙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신불분리가 되자 또다른 산신 오모노누시(大物主)와 동일시했다.[16] 나중에는 개척3신을 합사했다. 개척3신에 대해서는 아래 항목 참조.[17] 在조선 일본인들은 '대신궁' 같은 거창한 이름으로 신사나 신시를 세웠다가, 나중에 조선총독부로부터 허가를 받는 과정에서 평이한(또는 분수에 맞는) 명칭으로 바꾸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개칭한 해가 1913년이라고 설명한 우리말 자료도 있지만, 일본 자료와 비교하면 1916년이 정확한 듯하다.[18] 경성신사가 아마테라스를 모시거니와 통감관저에서 엎어지면 코 닿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19] 지금은 그 자리에 경성신사가 있던 곳이라는 안내판이 있다.[20] 제대로 신사를 유지할 만한 여건이 안 되는 곳에 설치한 간이시설을 말한다. 조선총독부는 신시를 설치하려면 신자가 될 사람 10명이 이름을 제출하여 허가를 받도록 했다.[21] 이세신궁식 신사건축양식을 신메이즈쿠리(神明造)라고 부를 정도. 오늘날 일본에서 '신메이 신사(神明神社)'라는 단어는 아마테라스를 모시는 신사들을 통칭하는 의미로도 쓰인다.[22] 1898년에 조직되어 일본의 관국폐사(官國幣社) 신관 1만 5천여 명이 소속되었던 단체이다. 형식상 민간조직이었으나 사실상 국영이었다. 1941년 대일본신기회(大日本神祇會)로 개칭했지만, 일본이 패전한 후 1946년에 해체되어 신사본청으로 흡수되었다.[23] 神道家. 신토의 신관들이나 사상가 등을 통틀어 부르는 말로 씀.[24] 일본 신토에서 각 지역의 기존 신격들을 통칭해 부르는 호칭이다. 신토의 교학(?)에 따르면, 천손의 자손(천황)이 새로운 지역을 통치하면 그 지역의 신이 나와 지역을 천황에게 바치고 자기는 제사를 받는다고 한다. 고사기ㆍ일본서기에 나온 국토이양 신화에서 나온 개념이다.[25] 이나바의 흰토끼 항목에 나온, 흰토끼를 낫게 해준 바로 그 신이다.[26] 일본신화에 등장하는, 몸집이 손가락만 하다는 신. 곡식의 신이기도 하다.[27] 오늘날 홋카이도 삿포로시 주오구에 있다. 1964년에 메이지 천황을 합사하며 이름을 삿포로 신사에서 홋카이도 신궁(北海道神宮)으로 바꾸었다.[28] '이소타케루'라고 읽기도 한다. 임업(林業), 조선(造船), 항해를 수호하고 역병을 물리쳐주는 신령이라고 한다. 고사기에 등장하는 오야비코(大屋毘古) 신과 동일시하기도 한다.[29] 보통은 소시모리를 서라벌과 연관지어 경주로 이해한다. 하지만 소시모리를 '소(牛)의 머리'란 뜻으로 생각하여 우두봉(牛頭峯)이란 산에 내려왔다고 보는 설도 있다. 특히 강원도 춘천의 우두봉이 바로 소시모리란 소리가 있어, 일본인들이 그곳에 스사노오를 모신 신사를 지으려고 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항목에 있는 '강원신사' 부분을 참조.[30] 물론 이에 반발한 항일적인 한국 불교인들도 있었다. 당장 만해 한용운 선생만 들어도...[31] 당장 무단통치기에 제암리 학살사건의 참상을 알린 주역 중에 장로교 선교사 스코필드가 있었다.[32] 만약 이 자리에 되었다면 구 조선의 왕궁에 종교적 지배를 뜻하는 조선신궁, 그 앞에 현실적 지배를 뜻하는 조선총독부가 들어서서 조선 식민지화의 이중적 상징이 완성되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신궁을 조성한다고 경복궁 일대를 대거 공사했을 테니, 문화재 보호 측면에서도 큰 손해가 되었을 것이다.[33] 왜성대공원은 현 숭의여대 자리인데, 이토 주타는 현 남산골한옥마을 근처를 후보지로 점찍으면서 '왜성대'라고 표현했다. 아마 왜성대 일본인 거류지와 가까워서 그렇게 한 듯하다. 한옥마을 자리는 당시에는 조선헌병대사령부가 있었다.[34] 상서롭지 못하고 더럽다는 뜻.[35] 당시 일본에서는 일본이 조선을 '문명화한다.'고 주장했다. 무력으로 한반도를 정벌했다는 진구 황후 등을 제신으로 모심은 이런 프로파간다에 맞지 않는다고 여겨 꺼렸을 가능성이 크다.[36] 당시 남산의 한양공원, 현재의 백범광장 일대였다.[37] 아마테라스와 천황을 제사지내는 신사는 신궁이라고 칭한다는 원칙이 있었기 때문이다.[38] 조선의 민간신앙과 사당들이 버젓이 존재하는데 '조선에 신과 신사의 관념이 없다.'는 주장은 이상하다 못해 해괴하게 들린다. 당시 조선에 온 서양인 선교사들은 유교는 종교가 아닌 철학이고, 불교는 숭유억불로 약해졌으며, 민간신앙은 종교도 못 되는 것이라고 보아 '조선에는 종교가 없다.'고 주장했다. 어쩌면 조선총독부도 똑같이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혹은 하술하겠지만 총독부는 일본 본토의 신토가들과 달리 신토를 종교로서 생각한 게 아니라 단순히 일본 고유의 문화라고 보았기에 나온 반응일 가능성도 있겠다.[39] 장전(掌典)을 일본어론 쇼텐(しょうてん)이라 읽는데, 천황가의 제사 관련 직무를 맡는 궁내부의 부서명이다. 원래 '장전'이란 한자어는 '맡아서 관리한다, 주관한다.'는 뜻이다. 일본에선 이 단어를 '(제례를) 관리한다.'는 뜻으로 사용한 것이다.[40] 일본 신토에서 신령이 깃드는 물건을 가리킨다. 여기에 신령이 깃들어야 비로소 신사에 봉안되어 사람에게 경배받을 수 있다. 신타이(神體, 신체)라고도 부른다. 거울은 미타마시로로 일본 신사에서 가장 널리 사용하는 물품이다.[41] 식민지 조선에서 신사 등 종교를 관할하던 곳이 조선총독부의 내무국이었다. 내무국장 이쿠타 기요사부로가 했다는 말의 원 출처는 오가사와라 쇼조(小笠原省三)가 편찬한 『海外神社史・上巻』(海外神社史編纂会, 1953)에 실린 「高松朝鮮神宮々司が某氏に寄せたる書翰」(다카마쓰 조선신궁 궁사가 모씨에게 보낸 서한)이란 부분이다. 이쿠타는 1925년부터 29년까지 내무국장을 역임한 뒤 퇴직했다.[42] 일본어로는 '구지'라고 읽는데 각 신사의 최고 책임자이다. 절이라면 주지 스님 격.[43] 신토는 일본의 문화일 뿐 종교가 아니라는 입장. 일제시대 일본 정부의 기본적인 시각이었고, 일본인들의 신토관에 짙게 영향을 주었다.[44] 한국에는 ≪엄마의 게이죠, 나의 서울≫이란 이름으로 2000년에 신서원에서 번역, 출판했다.[45] 신령에게 어떤 일을 알리는 제사. 우리나라의 유교예법에선 신령에게 알리는 제사를 고유제(告由祭)라고 불렀다. 봉고제는 주로 일본에서 쓰이는 표현이다.[46] 광복 직전에 조선에 신시가 866군데 있었다고 설명하는 자료도 있다. 이것은 공식적으로 허가받지 못한 신시까지 헤아린 듯하다. 그 외에도 신시의 숫자가 967군데였다고 하는 곳도 있는데, 신사에 비하면 신시는 잘 관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료에 따라 신시의 숫자가 다른 듯하다.[47] 1929년부터 42년까지 존속한 일본의 정부조직. 내각 아래에서 식민지 관련 업무를 전담했다.[48] 해당 고시가 실린 관보 3732호는 39년 6월 16일자이다.[49] 구체적으로는 진구 황후ㆍ오진 천황ㆍ고교쿠 천황ㆍ덴지 천황 등 4위였다. 이중 진구와 오진은 서기 200년에 있었다는 이른바 '삼한정벌' 때문이고, 고교쿠와 덴지는 663년 백촌강 전투 관련이다. 전부 한반도에 '군을 파병했던' 인물들이다.[50] 権宮司. 일본어로는 '곤구지'라고 읽는다. 일부 큰 신사나 신궁에만 있는 직책으로, 해당 신사의 2인자로서 궁사를 보조한다.[51] 신령을 하늘로 올려보내는 의식이란 뜻이다. 일본 신토에서는 신령의 본체가 따로 있고, 각 신사에서 모시는 신체나 부적 등에 그 영위의 일부가 강림한다고 여긴다. 승신식은 강림한 영위를 본체로 돌려보내는 의례이다.[52] 실제로 해방 직후인 8월 15일 밤에 평양 사람들이 평양신사에 불을 질러 없애버렸다.[53] 예를 들어 1936년 5월 26일자 동아일보에 남산공원에서 청년 두 명이 자살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또한 1940년 3월 13일자 동아일보 기사에는 '남산공원 왜성대정'이란 표현이 나온다. 남산공원이 왜성대보다 더 넓은 개념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54] 남산공원 분수대에서 안중근 의사 기념관으로 내려오는 계단의 좌우 축대가 조선신궁에 쓰였던 것이라고 한다.[55] 1617년 창건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신으로 모신 신사. 도쿠가와의 무덤도 신사 경내에 있다.[56] 1882년 일본이 설립한 국립신토학교(?)쯤 되는 기관. 정식 신쇼쿠(신토의 성직자)가 되려면 여기서 교육과정을 이수해야 했다. 패전 이후 해체되어 신사본청에 흡수되었다.[57] 이 곳은 구한말부터 일본인 조계지였기 때문에 굉장히 오래 전에 지어진 신사인데 기단부는 그대로 남아 있다. 현재의 제일여고 정문 자리에 도리이가 있었으나 뜯어내고 그 자리에 콘크리트 구조물을 올려놓은 것.(#)[58] 현재 독립운동가 춘고 이인식 선생의 동상이 있다.[59] 용두산 중턱 이순신 장군상 자리에 있던 신사를 산 정상으로 옮겼는데, 용두산이 말이 산이지 사실상 언덕이기 때문에, 이전했다고 해도 코 앞이나 다름없었다.[60] 원래 모셨던 주제신 고토히라가 오모노누시와 동일시되었다. 오모노누시는 오쿠니누시와도 동일시된다.[61] 우와쓰쓰노오(表筒男命)・나카쓰쓰노오(中筒男命)・소코쓰쓰노오(底筒男命) 세 신령을 가리키는데 항해를 보호한다고 한다. 세 신을 가리키는 말이라 스미요시 3신(住吉三神)이라고 쓰기도 한다. 일본서기에서는 신대기 상의 일서(5-6)에서 이자나기가 이자나미를 만나러 저승에 다녀온 후 여울에 몸을 씻을 때 스미요시 3신이 나왔다고 설명한다. 또한 일본서기의 진구기(神功紀)에서는 진구 황후에게 신라를 정벌하라고 신령들이 계시를 내릴 때, 진구 황후가 “이런 가르침을 내리시는 신들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고 묻자 다른 신들의 이름과 함께 언급된다. 이후 진구 황후가 정벌을 마치고 돌아온 뒤에도 자신들을 모시라는 신탁을 내렸다.[62] 여기서 산신사는 용미산신사를 뜻한다. 기록에 따르면 용두산신사와 마찬가지로 1678년, 초량으로 왜관을 옮겨온 해에 용미산에 세운 시설이었지만,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도로를 내느라 용미산을 평평하게 다지기로 결정하여 1932년에 용두산신사의 경내로 옮겨 부속시설로 삼았다. 제신은 타케우치노 스쿠네였지만 1819년에 가토 기요마사, 1868년에는 (근처에 있던 아사히나朝比奈 신사가 퇴락하여) 아나히나 요시히데(朝比奈義秀)를 합사했다. 가토 기요마사도 그렇고 타케우치노 스쿠네도 그렇고 다들 조선을 침략했다고 하는 일본의 무장/신하이다.[63] 1913년에 개칭했다고 설명하는 우리말 자료도 있지만, 일본 자료와 비교하면 16년이 맞는 듯하다.[64] 아마테라스를 향해 멀리서 절하는 장소라는 뜻이다.[65] 황기는 진무 천황이 즉위했다는 기원전 660년을 원년으로 하는 일본의 또다른 연호이며 이는 제로센이나 100식 전차, 100식 기관단총 등 구 일본군 병기 명명의 기준이기도 하다(육군과 해군간의 상세 명명법 차이는 존재). 1940년은 황기 2600년이라고 일본 제국 정부에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전체적으로 덴노 중심의 국가총화를 장려하였다. 이를 기념하여 노래나 체제부합적 클래식음악을 기획했고, 조선일보를 비롯해 친일로 완전히 길들여진 식민지 언론에서조차 일본 제국 황가를 애널써킹하는 광기 어린 신년사를 써주기도 했다.[66] 이런 주장을 한 대표적인 인물이 호시노 히사시(星野恒 1839-1917)였다. 호시노는 1890년 사학회잡지에 기고한 「本邦の人種言語に付鄙考を述て世の真心愛国者に質す」란 글에서 스사노오가 강림했다는 소시모리가 춘천시 우두산이라고 직접 언급했다.[67] 우두산으로부터 남쪽으로 직선거리 약 3.5 km쯤 되는 곳에 있었다.[68] 신사에서 참배 전 손과 입을 씻는 곳[69] 함흥은 그 당시 이미 함경북도 최북단에 진격해있던 소련군의 최우선 점령 목표였다.[70] 생몰년 1847-1895. 세습친왕가 후시미노미야(伏見宮)의 20대 가주 구니이에(邦家) 친왕의 9번째 아들. 1895년 육군중장으로서 대만정벌 근위사단장이 되어 대만으로 파병되었다가 말라리아에 감염되어 현지에서 향년 만 48세로 사망했다. 일본 황족으로서 처음으로 외국에서 공무 중 사망했기 때문에 신사에 모시자는 여론이 거세져 대만신사를 창건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