득롱망촉

 

'''고사성어'''
'''得'''
'''隴'''
'''望'''
'''蜀'''
얻을 득
땅이름 롱
바랄 망
땅이름 촉
1. 출전
2. 유사 사례


1. 출전


출전은 후한서 광무제기로, 농 땅을 얻고나니 촉 땅도 원하게 된다는 뜻의 고사성어. 쉽게 말해 말타니 경마잡히고 싶다는 뜻이다. 끝이 없는 사람의 욕심을 비유할 때 쓴다. 여기서의 농은 진한(秦漢)시대의 지역 이름인 농서(隴西)로 지금의 간쑤성 린타오 부이다. 촉은 쓰촨성으로, 이 둘은 지금도 줄여쓸 때 룽(陇), 수(蜀)로 쓰인다.
전한왕망에게 망하고, 그 왕망이 세운 신나라도 내란으로 무너진 후 혼란스러운 천하를 제패한 것은 광무제 유수였다. 유수가 적미와 유영(劉永), 장보(張步), 이헌(李憲) 등의 세력을 모두 격파, 병합하자 남은 세력은 농서의 외효(隗囂)와 촉 땅의 공손술(公孫述) 뿐이었다. 여러 장수들이 군을 몰아쳐 남은 두 세력을 멸하자 주장하였으나 유수는 군이 피로한데다 그들이 중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원정이 어렵고, 대군으로 침범하면 두 세력이 연합하여 죽기로 저항할 것이라는 점, 그리고 이미 천하의 대부분을 점했으니 시간이 흐를 수록 천하의 귀퉁이를 유지하고 있는 그들이 대항할 방법이 없을 것이라며 군을 쉴 것을 명하고, 외효와 공손술에게 항복을 권고하였다. 실제로 사천의 풍부한 생산력을 바탕으로 나름 강성했던 공손술과 달리 외효는 양대 세력에 끼어있는 형국인지라 등거리 외교로 자국을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었으므로, 유수가 만일 원정을 시작했다면 두 세력의 결속이 강화되었겠지만, 후한의 군이 움직이지 않자 두 세력은 내부 균열로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그의 예측대로 유수가 광무제로 등극한지 9년 후인 서기 33년, 외효가 죽고 후사를 이은 아들 외구순(隗寇恂)이 항복해왔다. 농서땅을 무혈점령한 유수는 좌우를 돌아보며 "두 성을 함락하였으니 다시 군을 남으로 보내 촉의 도적을 쳐라. 사람은 옛부터 족함을 알지 못하여 농 땅을 평정하자 다시 촉 땅을 원하게 되는구나. 매번 군을 일으킬때마다 그 때문에 머리카락이 하얗게 샌다(兩城若下 便可將兵南擊蜀虜 人固不知足 '''旣平隴復望蜀''' 每一發兵 頭髮爲白)."고 말하였다. 공손술은 2년에 걸쳐 맹렬하게 저항하였지만 결국 패망했으며, 광무제 유수는 공손술이 만들어놓은 궁정 집기들을 줏어다(...)가 재활용했다.[1]
보면 알겠지만 고사성어 자체는 끝없는 욕심을 나타내는 말이라 뭔가 부정적이지만 정작 고사성어의 주인공인 광무제 유수는 그 욕심을 성공적으로 성취했다(...)

2. 유사 사례


후한 말엽 조조가 215년에 한중을 칠 당시에 이 말이 다시 쓰인다. 당시는 익주를 차지한 유비손권익양대치를 하고 있을 무렵으로 유비는 형주 남군 공안에 있었다. 조조는 211년에 마초의 관서 연합군을 물리쳤고, 이후 기성을 중심으로 재기한 마초가 양부의 반란으로 한중으로 패퇴하자 하후연으로 하여금 관서를 평정하게 했다. 또 농서를 잃고 나서도 한중에 의지해 농서를 끈질기게 공략하는 마초를 후원하며[2] 농서를 위협하던 장로의 본거지 한중을 쳐서 장로가 파중으로 달아나니[3] 사실상 농서 땅[4]을 조조가 완전히 확보한 셈이 되었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이렇게 장로가 도망가고 조조가 한중의 중심지 남정에 들어왔을때 승상주부 사마의가 지금 한중을 점령해 익주가 진동하고 있다며 기세를 몰아 촉까지 진격하면 저들은 기와 깨지듯이 무너질 것이라며 건의했다. 그러나 조조는 "(나는 광무제가 아닌 고로)사람이 고통스러운것은 만족함이 없기 때문인데 이미 농을 얻었으니 다시 촉까지 바라겠는가?" 라며 그 제안을 기각했다.
조조가 득롱망촉을 말하자 이번엔 유엽이 다시 권한다. 유엽은 유비는 인걸(人傑)로서 헤아림이 있지만 그러나 더디며[5], 촉나라를 수중에 넣은 지 얼마 안 되므로 촉나라 사람들은 아직 믿고 의지하지는 않고 있다. 이제 한중을 깨뜨렸으므로 촉나라 사람들은 놀라고 두려워하며 하는데 만일 그들을 조금이라도 느슨하게 두어 제갈량은 다스리는데 밝아 재상이 되고 관우장비는 삼군(三軍)을 뒤덮을 만한 용맹으로 장군이 되고, 촉나라 백성들이 이미 안정되었다면, 험준한 곳을 거점으로 하여 요충지를 지켜면 이길 수 없다. 지금 공격해서 취하지 않으면 나중에 반드시 근심거리가 될 것이라며 공격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조조는 이 말도 거절한다. 이렇게 조조의 군대가 머문 지 7일이 되었는데, 촉에서 항복해 온 자가 촉에서는 하루에도 수십 번의 놀랄일이 있어, 수비하는 장군들이 그들을 베었지만 안정시킬 수 없었다고 보고한다.[6] 이 때서야 조조가 미련이 남았는지 다시 물어봤는데 유엽은 투항자를 보고 이미 유비가 안정되었으니 불가능하다고 진언한다. 결국 조조는 촉을 치는것을 그만둔다.
자치통감의 음주자 호삼성은 이 사건을 논평하면서 유엽을 깐다. 어떻게 그 7일이라는 짧은 시간에 갑자기 안정되었다고 말할수가 있느냐고, 호삼성은 유엽이 유비가 촉 지역을 지키고 있는 것을 살펴보고 범접할 수 없는 면이 있어서 (그제서야) 이런 말로 조조에게 대답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호삼성의 말은 즉, 익주는 사실 안정되었으며 유비의 반군세력에 대한 진압이 확실히 이루어졌다는 것을 유엽이 알았을 것이라는 말이라고 보여진다.
한편 정사 삼국지 법정전에 따르면 법정은 이때 조조가 진군하지 않은것을 조조가 멍청해서가 아니라 조조군 내부의 사정이 있었지 않았을까로 추정했다.

조조는 한번의 행동으로 장로를 항복시키고 한중을 평정하였는데, 이 형세에 의지하여 파와 촉을 취하지 않고 하후연과 장합을 남겨 주둔하며 지키게 하고 자신은 돌아갔습니다. 이는 그 지혜가 충분하지 않고, 힘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틀림없이 속으로 급박한 걱정거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법정의 말대로 조조는 당시 상황에서 촉으로 들어가기에는 내부 사정상 여력이 모자라고 그 까닭에 익주로 진공하기엔 무리가 있다고 판단한 듯하다. 그리고 어쨌든 당시 유비 진영에서는 생각보다 장로가 쉽게 무너지자 놀랐기 때문에 유비는 바로 손권과 상수를 경계로 영토를 나누는 협상을 하고 돌아왔고 그 전에도 제갈량이 남아 익주를 수비하고 있었다. 또 파군에서는 파서태수 장비가 대비하고 있었고 검각의 지세가 험난했으므로 사마의의 말대로 공격에 나섰어도 성공은 어려웠을 것이다. 조조가 남정을 얻고 바로 진격하지 않은건 후일 제갈량이 북벌할때 그랬듯 한중을 중간기지로 삼고 지배권을 공고히 할 생각에 그랬을 것이다. 만약에라도 입촉 후에 장로의 잔당이나 이 지역의 강, 저족의 반란이 일어나면 보급이 끊기는 치명적 상황에 처할수도 있으니까.
한편 익주로 돌아온 유비는 바로 황권의 조언을 받아 파중으로 달아난 장로를 받아들일 생각을 하지만 황권을 호군으로 보내 제장을 거느리고 장로를 맞이하기도 전인 215년 11월에 장로가 휘하 가신들인 염포, 정은, 후선, 방덕과 함깨 조조에게 끝내 항복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대신 황권은 장로와 있던 박호, 두호, 임약 등을 공격하여 격파했다.

[1] 사실 그럴 목적으로 제위에 오른 후에도 궁정용 집기들을 갖추지 않고 있었다. 새로 만드려면 돈이 많이 드니까, 공손술이 만들어 놓은걸 갖다 쓰면 된다나...[2] 다만 마초는 214년에 유비에서 귀부하여 더 이상 장로가 농서를 칠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3] 사실 장로는 염포가 파족의 이민족인 두호에게 의지하면서 박호에게 가서 서로 대치하면서 훈공을 높이라는 조언을 하자 바로 항복하려던 생각을 버리고 파중으로 간 것이었다. 이는 자신의 힘이 상당히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어 자신의 몸값을 높이는 뜻이라고 권중달 교수는 국역 자치통감 주석에서 서술한다.[4] 사실 농서는 장로의 근거지인 익주 북부보다는 더 북쪽에 있다. 삼국지/지명에서 '양주' 문단을 참고하라.[5] 유엽전에서는 '유비는 인걸(人傑)로서 도량이 있고 계략도 있다'라고 평가한다.[6] 유엽전 주석 부자에 따르면 유비가 베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