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촨성

 



[image] '''중화인민공화국
四川省(Sìchuān Shěng'''
쓰촨성 | Sichuan Province

[image]

'''성정부 소재지'''
청두시 진장구 두위안로 30
(成都市 锦江区 督院路 30)
'''지역'''
시난
'''면적'''
485,000km²
'''하위 행정구역'''
18지급시(1부성급시) 3자치주 52구 17현급시 110현 4자치현
'''인구'''
8,302만명
'''인구밀도'''
198명/km²
'''시간대'''
UTC+8
'''한국과 시차'''
1시간
'''서기'''
펑칭화(彭清华)
'''성장'''
인리(尹力)
'''HDI'''
0.711 (2017)
'''GRDP'''
$6,560억 672만 (2019)
'''1인당 GRDP'''
$8,085 (2019)
'''행정구역 약칭'''
'''川 | 蜀'''
'''ISO 3166-2'''
'''CN-SC'''
홈페이지
1. 개요
2. 역사
3. 지리와 기후
4. 언어
6. 관광
8. 여담
9. 행정 구역
9.1. 면양(綿陽)
9.2. 남충
9.3. 낙산
9.4. 수녕
9.5. 아바 티베트족, 강족 자치주
9.6. 간쯔 티베트족 자치주
9.7. 량산 이족 자치주
10. 출신인물
10.1. 고대, 중세
10.2. 근대
10.3. 현대(1949년 ~)
10.3.1. 연예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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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쓰촨(Sichuan)''' | '''사천(四川)'''
국립국어원
과시보다 실속 지위보다 여유...川 '하늘의 곳간'
쓰촨성은 중국 중북부에 위치한 성급 행정구역이다. 한국에서는 흔히 한국식 독음으로 사천성이라고 부른다. 중국 대륙 보았을 때 이 성은 중국의 딱 중남부에 위치해 있다.
과거의 익주라고 불리던 곳은 쓰촨성의 영역을 포함한다. 성도청두시이다.
중국 내에서 쓰이는 약칭은 천(川) 혹은 옛부터 이 일대를 가리키던 명칭인 (蜀).
쓰촨(四川)이라는 이름은 성 내에 장강, 민강, 타강, 가릉강 이 4개의 강이 흐른다고 해서 이런 명칭이 붙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천(川)이란 선비족이 말 달리며 불렀다는 칙륵가에 나오는 칙륵천(敕勒川)이나 고국천왕의 '천(川)'처럼 강이 아니라 '평원' 혹은 '땅'의 뜻이라는 설이 더 유력하다. 사천은 처음부터 사천이 아니라 양천(兩川), 삼천(三川)을 거쳐 사천(四川)이 되었다. 진시황의 통일 이후 이 지역을 파군과 촉군으로 양분하며 양천의 시대가 시작되었고, 당나라 태종 이세민의 통치 시기에 검남동도, 검남서도, 산남서도의 세 곳으로 나뉘면서 삼천이 되었다. 송나라 진종 시기에 익, 재, 이, 기 등의 4주를 둠으로써 '사천'이 처음 등장했다. 이렇듯 쓰촨(四川)은 송대 행정구역인 천협사로(川陝四路)의 줄임말이고 원나라 시대에 이 만들어지면서 천협사로 일대가 사천성이 되었다. 그러나 이름이 지어지고 보니 장강(長江), 민강(岷江), 타강(陀江), 가릉강(嘉陵江)의 4개의 큰 강이 이곳에서 발원한다는 해석이 그럴듯해서 상식으로 퍼져서 중국인들도 그렇게 아는 사람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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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중국의 인구 밀도, 상하이-난징 일대, 화북지역의 인구밀도에 필적할 만한 중국의 다른 지역은 쓰촨성-충칭시를 아우르는 넓은 쓰촨 분지 지역이나 푸젠성 극히 일부 지역, 홍콩에 인접한 광둥성 일부 지역밖에 없다.
인구는 81,100,000명인데 위로는 광둥성, 허난성, 산둥성에 이은 4위이며 1997년 성 동부가 충칭시로 독립하기 이전까진 유일하게 성 인구가 1억을 넘겨 압도적인 1위였고 지금도 한반도 인구를 넘는다. 면적도 485,000 km2로 대한민국과 일본의 면적을 합친 것과 비슷하다. 농업공업이 매우 번성한 성 중 하나이다.

2. 역사



2.1. 고대


원래 이곳은 황하 문명의 발흥지인 황하 유역과는 진링 산맥, 다바 산맥 등의 험한 산맥 지형으로 따로 떨어져 있던 곳인데다가 황하 문명을 세운 한족과는 다른 이민족들이 주 거주민이었기에 황하 문명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러나 그 안의 장강을 비롯한 4개의 강을 끼고 있는, 거대하고 비옥한 분지 지형으로 인해 높은 농업 생산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 결과 삼성퇴 청동기 유적으로 대표되는 황하 문명과는 다른 독특한 문명이 쓰촨 분지 내에서 생겨났다.
그리고 이 사천 문명은 (고)촉나라를 낳는다.
또 사천의 주목할 만한 나라에는 파나라도 있었다. 전국책(戰國策)은 말한다. "전답이 비옥하고 좋으며, 백성이 많고 재물이 풍부하며, 만 승의 전차를 구비해 떨쳐 일어나면 백만대군을 일으킬 수 있고, 비옥한 광야가 천 리나 뻗어 있고, 축적된 재물이 넉넉하며, 지세가 편안한 곳을 일러 천부(天府)라고 할 수 있다."
촉의 삼성퇴 도성은 상나라의 초기 도성보다 크고 중기 도성과 비슷하다. 삼성퇴의 유물은 중원의 유물과 판이하다. 상의 유물이 추상화한 기하학적 문양의 제기(祭器)인 데 반해 촉의 유물은 사람, 새 등의 모습을 생생하게 표현했다. 높이 2.6m, 무게 180kg의 청동상 등 규모도 크고 조형미도 뛰어난 삼성퇴 유물을 보면 촉의 탁월한 예술과 정교한 기술에 감탄하게 된다. 부리부리한 눈의 청동상은 중원보다는 오히려 북아메리카에 존재하던 마야 문명을 연상케 한다.
이를 종합해보면 촉의 국력은 중원을 능가할 정도였고, 독창적 문명을 이룩했음을 알 수 있다. “잠총과 어부, 나라 세운 지 얼마나 아득한가. 그로부터 사만팔천 년 동안 진나라와 서로 왕래하지 않았네.” 이백의 노래가 과장되기는 했지만, 촉이 독자적인 긴 역사를 가진 것은 사실이다.
중원을 제패하고 춘추전국시대 이후 황하 문명으로 대표되는 한족 문화가 주변의 이민족 영역으로 퍼져나가는 과정 속에서 쓰촨 또한 이 흐름을 피할 순 없었고, 진나라에게 밀리게 된다.
비록 중원의 중심이 아닌 이민족이 우글거리는 변방 이미지였지만 쓰촨 분지의 높은 경제력 그리고 침공하기 어려운 험난한 지형으로 이 일대의 제후국들은 평화로우면서도 풍요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자 천하 제패를 노리는 주변의 강대국들, 특히 관중진나라가 이 곳을 노리기 시작했다. 진은 험난한 지형을 바탕으로 한 파나라와 촉나라의 격렬한 저항으로 인해 정복 자체에 크나큰 애를 먹었다. 특히 지형이 큰 문제였는데 검각은 지금도 사람 지나다니기 힘든길이라는 악명이 자자할 정도이다. 그러나 를 써서 어찌어찌 이 둘을 정복한 이후부터는 180도 달라져[1][2] 이후 진나라는 크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다른 6국을 국력으로 압도하기 시작한 것도 파촉 일대를 정복하여 관중의 경제력에 파촉의 경제력이 합쳐진 시기였으니 말이다. 결과적으로 쓰촨 문명 또한 중원한족 문화에 흡수되었다.
아무튼 파촉을 위시로 한 쓰촨 분지의 경제력은 관중과 더불어 진이 최초로 천하를 통일할 수 있게끔 한 원동력이 되었다.
시황제 사후 진이 항우에 의해 멸망한 이후[3] 파촉은 이 일대를 분봉 받은 한나라 왕, 즉 영주였던 유방의 세력권이 되었다.
이후 유방이 관중을 정복할 때 이 일대는 관중 정복을 위한 후방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으며 동진하여 천하를 재통일하고 한을 세울 때까지 관중과 더불어 배후지로서 기능하였다. 이는 장안전한의 수도가 세워진 이후에도 계속된다.
이렇게 이미 한나라 건국기부터 수백년간 꾸준히 개발된 덕분에 나중에 삼국시대에도 촉한이 비록 땅은 나머지 둘에 비해 한참 작지만 위나라에 비해서 질적[4]으로는 떨어지지 않고 특히 옆동네 오나라 늪지대에 비하면 많이 개발된 땅이었기 때문에 그나마 익주 하나만 가지고도 오랫동안 위, 오와 대치구도가 가능했다.

2.2. 한 ~ 삼국시대


전한후한 시대에는 이 곳에 익주 자사부가 설치되었고 황건적의 난 이후 군웅 할거 시대가 펼쳐지면서 익주유장의 세력권이 되었다가 제갈량천하삼분지계에 따라 형주를 지배하던 유비가 유장을 축출하고 익주 일대에 자리를 잡는다. [5]
그리고 유비는 이 곳에 삼국지 팬들에게 익숙한 바로 그 나라, 촉한을 세운다.'''[6] 이곳의 성도(省都)가 바로 삼국지 팬들에게 성도(成都)라는 이름으로 친숙한 ''''청두시'였다. 청두는 그때 성도와 이름이 한번도 바뀐 적 없다. 그래서 청두 근교에 제갈공명의 무덤인 무후사가 있으며, 그 옆에 유비의 무덤도 만들어져 있다. 촉나라에 대한 여론은 당대에도 지역 주민들에게 좋았으며, 현대에 이르기까지 변함이 없다. 덕분에 이러한 유적들이 2천여년 가까이 잘 남아있는 것.[7]
한중 공방전 초반 장합과 격돌한 장비가 장합을 격파한 후 '한나라 장군 장비가 정예병사 1만 명을 이끌고 팔몽에서 적의 수괴인 장합을 크게 격파했으니 이에 말을 세우고 글을 새기노라.(漢將軍飛, 率精卒萬人, 大破賊首張合于八蒙, 立馬勒銘)'라는 친필이 류징현 절벽에 새겨져 있는데, 명나라 때 발견되어 지금까지 관광지가 되고 있다.
한편 이 시대의 대표적 인물인 제갈량은 현재까지 쓰촨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오늘날 쓰촨인들이 실속을 중시하는 것과 제갈량 사랑은 무관하지 않다. 그는 천재 전략가 이전에 명재상이었다. 도강언과 각종 수리시설을 보강하고 세워 "평년만 돼도 다른 곳의 풍년이요, 흉년도 다른 곳의 평년"이 되도록 했다. 제갈량은 촉의 특산물인 비단 생산을 장려하고 염색 공정을 개량했다. 적대국인 위마저 촉금(蜀錦)을 수입했으니, 위의 돈이 위를 치는 군자금으로 흘러들어간 셈이다. 제갈량의 사당인 무후사(武侯祠) 바로 옆이 비단 직조공들이 모여 살던 비단마을 진리(錦里) 거리인 것도 제갈량과 비단의 각별한 사이를 보여준다.
또한 제갈량은 제염, 제철업[8]을 육성해 경제를 발전시켰고, 공평무사한 법집행을 통해 상을 줘도 시기하는 이가 없고 벌을 받아도 억울해하는 이가 없었다. 제갈량이 군사 천재이기만 했다면 결코 오늘처럼 뭇사람의 사랑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현대에도 촉한의 향수를 느끼려는 삼국지 팬들이 관광객으로 찾아오고 있을 정도니, 당연히 제갈량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촉한에 대한 인식이 나쁠 수가 없다.
그래서 쓰촨 사람들은 제갈량이 죽은 이후 지금까지 무려 1800년간 제갈량을 기리며 제사를 지낸다. 청나라 철학자 왕부지(王夫之)의 평가대로 "군사를 잘 통솔할 수 없을 때 오직 그만이 이를 통솔했고,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없을 때에도 오직 그만이 이를 다스렸다. 정치가 편안하지 못할 때 오직 그만이 이를 편안케 했고, 나라의 살림살이가 어려울 때 오직 그만이 이를 풍족하게 했다."라고 했다.

2.3. 남북조 시대


촉한등애종회의 공격으로 에게 멸망하고 다시 위가 서진에게 멸망하고 서진이 천하를 재통일하나 팔왕의 난 이후 흉노, 선비족, 강족 등 주변의 이민족들이 중원으로 밀고 들어와 각자 나라를 세우는 오호십육국시대의 대혼란이 펼쳐진다. 익주 또한 그 영향을 피해가지 못했는데 저족의 족장 이특이 익주 일대를 점거하여 성한이라는 나라를 세운다. 하지만 얼마 못가 서진 황실이 강남으로 도망가 다시 세운 동진환온이 '촉 지역은 부유하고 호구가 번성하니 제갈량이 이를 이용해 중원에 맞섰다'는 원교의 의견을 들어 성한을 정벌해 멸망한다.
이민족들이 날뛰던 중원 일대가 하나의 왕조로 재편되고 천하가 남북으로 갈린 남북조 시대엔 남조의 마지막 왕조인 진이 북주에게 빼앗길 때까지 이곳은 줄곧 남조의 영역에 속했다.

2.4. 수나라/당나라


이후 남북조 시대가 끝나고 수나라, 당나라 대에 들어서면서 이 지역은 수대에는 양주, 당대에는 검남이란 이름으로 불린다.
당대 중엽 안사의 난으로 중원이 혼란에 빠지자 당 조정이 이 곳으로 옮겨가 10년 가까이 임시 수도로서 기능한 적도 있었고 당대 말엽 황소의 난으로 수도 장안이 함락되자 또다시 당 조정이 이곳으로 옮겨간 적도 있었다.

2.5. 송나라


당이 멸망한 이후 중원은 다시 오대십국시대라는 혼란에 빠지는데 이 일대에는 십국에 속하는 전촉, 후촉이라는 지방 정권이 잠시 들어선다. 하지만 얼마 못가 더 강대한 세력에게 멸망하는 지방 정권 특성상 곧 중원 통일에 나선 조광윤의 송(북송)으로 편입된다.
북송 대에는 이주로, 성도부로 등의 행정 구역이 설치되어 운영되었다.
정강의 변여진족이 세운 화북 전역을 점령한 이후 강남으로 도망간 송 황실이 재건한 송(남송)을 완전히 멸망시키려 강남으로 침공할 때 이 지역도 금에게 넘어갈 위기에 처했다. 남송 관군과 의병들의 활약으로 금군이 철수하면서 이 지역은 송의 지배 하에 그대로 남게 되었다.

2.6. 원나라


몽골 제국중국 대륙을 정복하기 위해 오고타이 칸서하금나라를 멸망시키고 뭉케 칸남송으로 밀고 내려올 당시 이 지역은 뭉케 칸이 직접 지휘하는 몽골군 정예 부대가 침공해 왔다.
하지만 뭉케 칸의 몽골군은 이 곳의 조어성[9]에서 6개월이나 가로막혀 정복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뭉케 칸 본인도 조어성 공략 도중 병사한다.
하지만 후임인 쿠빌라이 칸은 기어이 남송을 멸망시켜 이 지역을 정복하는데 성공했고 중국의 몽골 울루스가 재편되어 세워진 왕조 은 이 일대에 '''사천행중서성'''이라는 행정 구역을 설치하는데 바로 이 사천행중서성이라는 이름이 오늘날 이 일대의 행정 구역인 '''쓰촨'''이라는 이름의 기원이다.

2.7. 명나라


원나라의 지배층 몽골인들이 중원에서 만리장성 너머 내몽골 고비 사막 일대로 쫒겨나 북원으로 쪼그라든 이후 쓰촨은 한족 명나라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어 지금의 '''쓰촨성'''이라는 행정 구역이 설치되었다.
명나라 말 북방지역인 만주 남부와 연해주에서 만주족이 세운 이 내려오고 각지에서 농민군이 일어나 명 사회가 혼란해질 무렵 농민군 지도자 중 한 사람인 장헌충이 쓰촨을 정복하고 지방 정권인 서를 세우나 명을 멸망시킨 이자성대순을 격파하고 중원으로 내려온 청에 의해 간단히 멸망한다. 이때 장헌충이 쓰촨 원주민들에 대한 대규모 학살을 자행해, 쓰촨을 장악한 청 조정은 북부지방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켜 쓰촨 땅을 채울수 밖에 없었다.

2.8. 청나라


중원을 정복한 청은 이전 왕조인 명의 행정 구역 제도를 그대로 존속시켜 쓰촨성이라는 행정 구역은 그대로 이어갈 수 있게 되었고 삼번의 난 당시엔 오삼계가 이끄는 반란군에 의해 정복당한 적도 있으나 곧 탈환되었다. 건륭제 통치 당시에는 준가르 제국 정복 과정에서 신장 위구르 자치구티베트 그리고 칭하이성[10] 정복을 위한 후방 기지 역할을 수행했다.[11]
가경제 통치 당시에는 비밀 결사인 백련교도들이 일으킨 백련교도의 난으로 인해 혼란에 빠졌었고 태평천국 운동 당시에는 강남의 태평천국에 호응해 쓰촨에서도 태평천국군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의 사건 또한 있었다.
19세기 말부터 중국에도 근대화의 바람이 불어닥쳐 충칭, 청두 등의 도시가 개항되어 근대 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1911년 우창 봉기로 인해 촉발된 신해혁명 발발 당시 강남의 여러 성들이 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할 때 쓰촨 또한 독립을 선언해 중화민국에 가담했으며 중화민국 편을 들어 청에 대항하는 '보로운동'이 가장 격렬하게 터진 곳 역시 이 곳, 쓰촨성이었다.

2.9. 중화민국


중화민국 총통 위안스카이가 사망한 이후 중화민국 각지에서 군벌들이 난립, 각 지방이 사실상의 독립 정권으로 전락할 때 쓰촨에서도 여러 군벌들이 세운 독립 정권들이 난립했었다.
그러다 장제스의 북벌로 중화민국이 형식상 재통일되어 모든 지역이 장제스난징 국민정부 아래로 들어오자 쓰촨의 군벌들 또한 형식상 국민 정부 아래로 들어왔다. 그러다 장제스에 대항해 군벌 연합 세력이 중원대전을 일으키자 쓰촨 또한 군벌 연합에 가담했으며 중원 대전이 국민 정부의 승리로 끝나자 쓰촨은 다시 국민 정부에 충성하기로 한다. 하지만 국민 정부 아래로 다시 들어왔음에도 여전히 쓰촨을 실제로 다스리고 있던 자는 국민 정부가 아닌 토착 군벌 세력들이었다.
1937년 7월에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동년 12월 수도 난징이 함락되자 장제스는 수도를 한커우로 옮기고 이듬해 8월 한커우마저 함락되자 장제스는 수도를 충칭으로 옮겨 일본군에 대해 결사 항전한다. 이후 일본이 항복하는 1945년 8월까지 쓰촨의 대도시 충칭은 중화민국의 임시 수도로서 기능했으며 쓰촨은 아직 일본에게 함락되지 않은 중화민국 서남부, 이른바 '대후방'의 핵심 지역으로서 전쟁 기간 내내 항일 전선의 후방기지 역할을 수행했다. 이 기간 동안 충칭 대공습과 같은 참혹한 전쟁범죄도 있었다.
중일전쟁일본 제국의 항복으로 중화민국의 승리로 종결되나 전쟁이 끝나기가 무섭게 중일전쟁 이전부터 지겹도록 싸워댄 두 세력, 장제스중국 국민당마오쩌둥중국 공산당 간에 국공내전이 발발한다. 국공내전 말엽 중국 국민당의 패색이 짙어져 1949년 4월 수도 난징이 공산군 손에 떨어지고 임시수도 광저우마저 동년 10월 공산군이 화남을 석권하면서 함락되자 장제스는 중일전쟁 당시처럼 정부를 쓰촨으로 옮겨 계속 저항할 생각이었으나 쓰촨 내부의 토착 군벌들이 장제스를 배신하고 공산군 측에 붙자 쓰촨마저 포기하고 결국 타이완으로 떠났다.
쓰촨에선 11월에 충칭, 12월에 청두가 공산군에게 넘어가고 1950년 4월 쓰촨성 시창의 국부군 잔존 세력마저 완전 소탕된 뒤 쓰촨은 중국 공산당이 세운 중화인민공화국 통제 하에 든다.

2.10. 중화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시기엔 1950년대대약진운동의 피해가 매우 큰 지역이었다.
195 ~ 60년대 중소결렬소련과의 사이가 나빠지고 전쟁 위기가 닥치자 중국 정부는 이곳에 쳐박혀 지구전을 펼쳐 끝내 승리한 중일 전쟁의 전훈에 따라 이곳에 엄청난 수의 산업 지대를 건설해 놓았다. 그리하여 항공 회사인 청두항공[12] 및 철강제조회사, 로켓을 쏠 수 있는 우주기지 [13]도 건설되었다. 그리하여 1970년대까지는 이곳의 공업 성장율이 중국의 상위권이었다.
1980년대 덩샤오핑이 주석으로 취임하면서부터 중국 공산당이 흑묘백묘론[14]으로 대표되는 개혁개방 정책을 펴면서 동남부 임해지역인 최대도시 상하이나 주변부의 항저우, 난징, 그리고 푸젠성 및 동부 광동성 등은 크게 발전하지만 서남부 내륙지역이던 쓰촨은 상대적으로 발전이 더딜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동서간의 경제 불균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90년대부터 '''서부대개발''' 정책이 시작되었다. 이 프로젝트로 쓰촨과 간쑤성, 칭하이성, 신장 위구르 자치구, 티베트 자치구 등의 소외된 서부 내륙지역들의 개발이 시작되었다.
1996년에 성 동부에 위치한 최대도시 충칭이 직할시로 독립한다.
그리고 2010년대 들어 성도이자 새 최대도시 청두(成都)는 인구가 1200만 명으로 매년 13% ~ 15%대의 고성장을 이어가 서부내륙의 성장 엔진으로 불린다.
2008년 쓰촨성 대지진이 발생한 후 크고 작은 지진이 종종 발생하고 있다. 이 지역이 히말라야 산맥 근처의 판의 경계이기 때문이다. 히말라야의 동쪽 끄트머리인 윈난성 역시 마찬가지로 지각이 불안정하고 해발고도가 높다.
2017년 6월 24일에는 산사태가 일어나 한 마을이 매몰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2017년 8월 8일에 또 다시 '''규모 7.0''' 지진이 발생했다. 19명이 사망하고 300여명 가까이 부상당했다.#
2019년 6월 17일 오후 10시 55분 이빈(宜賓)시에서 '''규모 6.0'''의 지진이 발생했다. 13명이 사망하고 200명이 부상당했으며 산사태로 고속도로가 소실되었고 72개 건물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고 12개 건물은 크게 파손됐다.#

3. 지리와 기후


대체로 서쪽이 해발 고도가 높고 동쪽이 낮은 편인데 서부는 티베트 고원의 동부로 히말라야 산맥의 일부에 해당되고 중부/동부는 분지 지형이며, 동북 쪽으로는 산시성(陕西省)과 접해 있는데 산시성과의 경계를 또 산맥이 가로지르는 형태다.
이렇게 고립된 지형인지라 쓰촨성 밖에서 쓰촨성 안의 동부 분지로 들어오려면 서쪽과 북쪽의 산맥, 산지를 통과해야 한다.
그리고 남쪽에는 윈난성과 이웃해 있는데 쓰촨 성 대부분의 분지 지역보다 윈난성 중북부가 해발고도가 더 높다.
그래서 고대부터 쓰촨성 지역을 오가려면 한중 지역을 통과하거나, 검각(!!!)을 통과하여 잔도로 다니거나, 장강 중류의 험준한 계곡인 '장강삼협'을 배를 타고 거슬러 올라야 했다. 그 외에는 사실상 길이 없었다. 물론 오늘날엔 여객기가 생기고 고속철도가 뚫려서 예전과 같은 고립된 곳은 아니다.
성내 최고봉은 티베트와 쓰촨 분지를 나누는 다쉐 산맥에 위치한 궁가산(贡嘎山)으로, 높이가 무려 '''해발 7,556m'''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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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동그란 모양의 분지가 바로 삼국지에서 "파촉"으로 불리는 지역. 현재의 충칭시청두시 인근을 포함하는 부근이다. 한국에서는 함경도강원도쯤에서나 볼 수 있는 해발 1500m ~ 2500m대의 험준한 산맥이 동그란 모양으로 감싸고 있는 가운데 양쯔강 즉 장강이 관통하며 넓은 평야 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사천 분지 내의 완전한 평지 지역은 청두 시 인근을 비롯한 일부이고 그 외에는 언덕들이 있는 구릉 지대에 가깝다.
초한전쟁기나 삼국지에는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변두리 세력'으로 묘사되기에 첩첩산중에 있는 조그마한 촌구석인 이미지지만 현실은 '''남한 면적의 1.6배에 달하는''' 거대한 분지[15]다. 연의에서 서촉을 정복하겠다고 온 주유가 돌아가자 제갈량이 보낸 편지에서 '그곳 사람들은 굳세고 요새는 바위와 같은데 어찌 정벌하시려 하시겠습니까?' 라고 했는데 실제로 유비는 이곳을 정복하는데 애를 많이 먹어야 했다.
아래에 언급할 이백의 시 '촉도난'에서는 '촉으로 가는 길이 하늘을 오르는 것보다 더 어렵다'(蜀道之難難于上靑天)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촉으로 가는 길이 대단히 험난함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촉으로 갈려면 험한 산 여럿을 넘어야 하고 비행기가 없던 중세시대에는 일일이 암벽등반(...)을 하거나 위험하게 잔도로 가야했기에 촉으로 가다가 진짜 하늘로 오를 수도(...) 있었다.
유라시아 판과 인도 판이 충돌하는 지역이라 지진이 잦다. 이 일대는 히말라야 산맥 동쪽 끄트머리에 해당하여 판의 경계선에 있다.
중국 지질연구소는 관측이 시작된 지난 백 년간 진도 5.0 규모 이상 지진만 150회 이상 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리히터 규모 8.0 이상의 초 거대 지진이 바로 2007년 있었다.[16] 공식 피해액만 27조원에 달했다.
셴수이허 단층대가 깨어난 것으로 중국 지질당국은 파악하고 있으며 이후 2008년 대지진부터 해서 진도 6.0 이상의 대지진이 1년이 멀다하고 이어지는 중이다.
기후는 습하고 더운 편이며, 지구온난화가 많이 진행된 지금에는 겨울에도 평균기온이 영상일 정도로 온화하다.[17]
그리고 일조량이 중국에서 가장 적은 지방이다. 1985년-2014년 29년 간 평년값을 기준으로 청두의 일조 시간은 연간 925시간 정도로 날씨 흐리기로 유명한 런던의 절반 수준으로, 북극권에 위치한 아이슬란드의 레이캬비크보다도 적은 수준이다. 서울과 비교했을때 우기인 7월 ~ 8월에는 일조 시간이 비슷하지만 가을에서 봄까지는 거의 서울의 1/3일 수준이다. 분지라는 지리 조건 때문에 이 지역에는 구름안개가 많이 끼는데 더운 공기들이 쓰촨성 쪽으로 올라오거나 내려올 때 차가운 산맥을 거치면서 쉽게 구름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4. 언어


북방 관화 + 광동어 + 파촉
쓰촨 지역은 고립되어 있는 지리적 특성에 맞지않게 보통화가 속해있는 북방어인 관화를 사용한다. 이는 쓰촨 지방이 명나라-청나라 교체 시절 장헌충이라는 군벌이 조직적으로 살생을 일으킨 탓에 사회적, 인구학적으로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이 여파로 고대부터 이어지던 사천의 파촉 문화와 파촉어 역시 단절되었다. 일부 지역은 인구의 1~2%만이 살아남았다는 기록도 존재한다.[18]
이후 청나라 정부는 구 형주 일대인 후베이성/후난성과 주변 윈난성, 간쑤성 등 주변 지역의 인구를 사천으로 이주시켰고, 이 지역 대부분이 관화를 쓴데다 서로 다른 지역 이주민들이 마구 섞여서 결과적으로 사천은 관화의 사용 권역이 된다. 게다가 광동성에서 온 유이민들이 광동어를 쓰는 사람들까지 올라오는 통에 언어가 더 복잡해져서 이것 때문이라도 보통화를 쓸 수 밖에 없었다.
다만 장헌충의 학살 뒤에도 여전히 고대 파촉문화는 남았다. 그가 대학살을 일으키고 인구가 감소한 것은 맞겠지만, 진짜로 1~2%만 남았다기보다 행정력이 붕괴해 인구 파악조차 제대로 못하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파촉 문화는 이 지역에서 여전히 우세를 점했고, 쓰촨으로 대구 이주한 관화 사용자들과 뒤섞여 그 후손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여기에 광둥성에서 온 이민자들의 언어까지 뒤섞인다. 그래서 쓰촨 지역의 사투리는 다른 북방의 관화와 판이하게 다른 이질적인 특성을 가지게 되었다.
현대에는 보통화가 강력하게 보급되어 쓰촨 방언 역시 크게 타격을 입었다.
국토가 넓디 넓고 지역마다 판이한 문화를 보이는 중국의 특성상 대다수의 중국인들은 자기 지역의 말에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는데, 쓰촨성도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지역말을 보존하자는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다. 문제는 그 쓰촨어가 무엇이었는지 토박이들도 잘 모른다(...). 홍콩/마카오라는 강력한 기반이 있는 광동어, 역시 대만이라는 강력한 기반이 있는 민남어에 비해 상황이 나쁜 편이다.

5. 요리



픽션이긴 해도 요리왕 비룡이 이곳 출신이다.
쓰촨성의 사천 요리호남 요리와 더불어 매운 것으로 유명한데 원래 중국은 더워도 비교적 건조한 편이지만 사천은 남중국 일대마냥 습하게 더운 편이라 땀을 뻘뻘 흘리면서 먹는 매운 요리가 발달했다. 마파두부도 이곳 쓰촨에서 기원한 음식이다. 그래서인지 쓰촨성 20대 이상 성인 70%가 대장염 초기 증세를 보인다는 카더라도 있다.
쓰촨성 음식 중에서 2018년 이후 마라탕, 마라샹궈 등이 한국에서도 유행중이다.
예로부터 천부지국(天府之國), 즉 '하늘이 곳간을 내려준 땅'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쓰촨성은 농업이 발전한 곳이었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1999년에는 을 포함한 곡물의 생산량이 중국에서 1위를 차지했다. , 사탕수수, 고구마, 복숭아, 포도 등도 풍부하게 생산되고 있다. 게다가 전통적으로 돼지고기 생산량이 매우 많았다. 소, 양과 달리 돼지는 인간의 먹고남은 것을 줘야 한다. 쓰촨의 풍요로움을 대변하는 대목. 이러다보니 음식이 자연스럽게 발전하게 되었다. 외식 문화도 중국 내 타지역에 비해 빨리 발전했다.
한국에서 마파두부마라탕, 마라샹궈가 유명하다보니 사천 요리를 친숙한 맛으로 오해할 수 있으나, 사실 한국인이 알고 있는 칼칼하고 얼큰한 매운 맛은 후난 요리에 가깝고[19], 사천 요리는 고추는 물론 산초를 비롯한 향신료의 얼얼한 매운 맛이기 때문에[20] 호불호가 극명히 갈리는 경우가 많다. 마파두부가 이닌 마라탕(麻辣烫)의 맛이 사천 요리다. 현재까지 한국의 '사천 XXX' 라고 이름을 붙여 파는 음식들을 대부분 그저 한국식으로 맵게한 음식일 뿐이다. 대부분의 한국 마파두부에도 "마"한 매운맛은 별로 없고 그냥 한국인에게 익숙한 "라"한 매운 맛만 있는 상황. "마"한 맛은 주로 화자오, 마자오를 먹었을때 오는데 한국에서 둘 다 잘 안쓰는 재료로, 추어탕에 그나마 화자오와 비슷한 초피가 들어가나 이마저도 보관 문제로 향과 맛이 다 사라진 상태로 들어가는게 대부분이다.
전통 음식 중에 파오차이라는 음식이 있다. 사실 김치가 중국에 수출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파오차이는 중국 전체에서 보면 거의 듣보잡에 가까운 향토 음식이었는데, 사쓰 이후 김치를 수출하면서 우리 나라가 많은 돈을 벌어들이기 시작하자, 쓰촨성에서는 김치는 파오차이를 베낀 것이라며 파오차이가 원조라는 헛소리를 시작했다. 자세한 내용은 중국의 김치 왜곡 참조.
중국은 금새 파오차이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위생법을 제정, 적용하면서 김치를 비위생적인(?) 식품으로 규정하여 수출이 막히고, 파오차이가 김치가 개척했던 시장을 천천히 잠식하기 시작했다.
근래들어 중국 - 일본의 관계 악화로 인해 반사적으로 한중 간의 관계가 급진전하면서 김치를 포함한 한국으로터 수입하는 물품들에 대한 견제가 크게 완화되어 곧 다시 수출이 가능해질 예정이라고 한다.
쓰촨성의 술 역시 구이저우성과 함께 유명한 편인데 백주 우량예(五粮液, 오량액), 수이징방(水井坊, 수정방)등의 술이 유명하다. 중국 10대 명주 중 4개 ~ 5개가 이곳에 있는데 중국에서도 알아주는 좋은 술들이 나오는 이유는 중국에서도 중국 농산물 생산량 1위를 차지할 만큼 토지도 비옥한데다가 수질이 좋은 편이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윈난 성의 보이차만큼 알려지진 않았지만 차도 유명한 편이다.

6. 관광


중국에서 관광으로 유명한 곳이다. 자연경관 뿐만 아니라 역사적 고적도 상당한 편이다.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을 5개나 지닐 만큼 풍광 또한 빼어나 사시사철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
동네 여기저기에 삼국지 관련 관광지가 있다. 방통이 최후를 맞은 낙봉파 같은 정사 삼국지하고는 상관 없는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유적지도 있는데 당연히 관광용이다. 국내 여행사들 단체 투어 상품 가운데는 아예 삼국지 관광 투어로 청두부터 검각까지 둘러볼 수 있는 코스도 있으니 잘 찾아보고 가는게 좋다.
청두 여행에 대해 팁을 쓰자면 인천국제공항에서 아시아나항공이 매일 밤 8시에 출발하고 청두에서는 새벽 0시 30분[21]에 출발해 3시간 30분 ~ 4시간 정도 걸린다. 다른 항공사들, 특히 중국 항공사들은 가격은 싸지만 갈아타는 게 많아 최장 17시간이나 걸린다.
청두 여행은 날씨가 덥기도 하지만 현지인들이 몰리는 시간에 가면 인파에 밀려 관광하기가 힘들어진다. 될 수 있으면 아침 일찍 시작하거나 오후 늦게 움직이고 더울 땐 쉬는 게 상책이다.
그리고 중요 관광지 입장이나 열차를 타려면 여권을 보여줘야 해 늘 소지하는 게 편하다. 참고로 중국은 주요 관광지의 일일 입장객 숫자를 제한하는 경우가 많은데 특히 자연보호지구는 이게 아주 심하다.
그리고 '''판다'''의 주 서식지이기도 하다. 판다 공원 같은 곳에서 직접 관람도 가능하다. 청두 도심에서 북쪽으로 40분 ~ 1시간 정도 거리에 청두판다생태공원(成都大熊猫繁育硏究基地)이 있다. 한화로 약 17만 원 정도의 돈을 지불하면 새끼 판다들을 직접 안은 채 사진도 찍을수 있다 카더라.
이곳에는 덩치 큰 자이언트 판다 뿐만 아니라 붉은색 레드판다들이 서식한다. 특히나 이곳에 일부 구역은 레드판다들이 사람들 다니는 계단 옆을 지나다니는 모습까지 바로 옆에서 관찰 할 수 있다., 자이언트 판다와 레드 판다들이 대나무 죽순을 먹는 모습과 재롱을 볼 수 있는데 크기별로 방을 분류해 놓은 게 이채롭다.
이 공원에선 백학, 고니, 원앙새, 공작들도 볼 수 있다.
여기서 판다의 서식지라는데서 알 수 있듯이 대나무 숲이 많은데 촉남죽해(蜀南竹海)라고 해서 영화 와호장룡의 촬영지로 유명한 아름다운 대나무숲이 있다. 중국 하면 떠오르는 대나무숲은 사실 쓰촨의 이미지에 가깝다.
또 흥문석해(興文石海)라고 하여 웅장한 암석과 동굴 그리고 카르스트 지형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관광지도 있다. 촉금이라고 불리는 비단이 예로부터 유명한 곳이었으며 지금도 누에 고치가 활발하게 생산되어 비단을 직조하고 있는 만큼 가서 구경하다가 비단 제품을 쇼핑할 수도 있다.
보통 관광객들이 찾는 곳으로는 유비의 무덤이 있는 무후사같은 삼국지 관련 유적이나 무후사바로 옆에 있는 인사동 거리 같은 금리거리 곳 외에도 다른 자연경관이나 고적들도 적당히 있는 편이다.
기원전 2000년경의 한족이 아닌 티베트계로 보이는 이민족이 만든 삼성퇴 유적에서는 커다란 크기의 기괴한 인물상들이 수없이 출토되었는데, 중국에서 상당히 유명한 유적이다. 청두에서 버스 타고 가기 쉬우니 한번 쯤 가볼 만 하다. 시성 두보가 머물던 두보초당이나 도강언도 가서 볼만하고 낙산대불/여산대불(樂山大佛)도 유명하다.
낙산대불 혹은 여산대불[22]은 청두의 남쪽에 위치해 민강(岷江)과 다두하(大渡河)와 칭이강(靑衣江)이 합류하는 강변에 있다. 링윈산(凌云山·능운산) 서쪽 암벽을 통째로 깎아 새긴 마애석불로 713년 창건된 링윈사의 본존 미륵보살이다. 불상의 규모는 높이 71m, 머리 너비 10m, 어깨 너비 28m, 귀 길이 6.72m, 코 길이 5.33m다. 당나라 때 승려 해통(海通)이 배가 안전하게 지나다니기를 기원해 조각을 시작했고, 그가 세상을 떠나자 지앤난(劍南)의 절도사 위고(韋皐)가 90년에 걸쳐 완성했다고 전해진다. 조각 당시에는 금빛과 화려한 빛깔로 장식했고, 13층 목조 누각으로 덮어 보호했으나 누각은 명나라 말기에 불 타 없어졌다. 1994년 아미산과 함께 세계 문화 유산에 등재됐다. 링윈산은 멀리서 보면 스님이 누워 있는 형상이어서 신기함을 더한다. 대불 앞에 100여명 정도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이 있는데 링윈사에서 대불 아래로 내려갔다 다시 올라오는 길은 한 사람 정도만 통행할 수 있을 만큼 비좁고 경사가 심하다. 청두역에서 출발하면 낙산대불이나 도강언까지 쓰촨 분지 안에 촘촘히 깔린 고속 철도를 타고 몹시 쉽게 도착할 수 있다.
자연 경관은 구채구 및 황룡이 유명한데 청두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8시간 ~ 10시간 거리에 있다.
다만 6월 ~ 8월 사이엔 비가 많이 오는데 지형이 거의 깎아지는 듯한 절벽이라 산사태나 낙석사고가 굉장히 많이 일어나는데다가 모기 등 벌레가 많으니 주의. 툭하면 통행이 안되는 등의 문제가 있긴 하나 구채구와 황룡은 정말 가볼만 한 곳이다. 그리고 구채구 볼땐 장해 - 오채지 먼저 가는 코스랑 원시 삼림으로 가는 2가지 코스가 있는데 장해 - 오채지 코스는 제일 마지막 코스로 두는게 좋다. 오채지 먼저보고 나면 원시 삼림에서부터 내려오는 코스가 굉장히 심심해진다.
어메이산(峨眉山·아미산)은 중국의 4대 불교 명산 중의 하나로 보현보살의 도량으로 일컬어진다. 여인의 눈썹처럼 아름답다고 해서 붙여졌다. 산꼭대기에 있는 만불정(万佛頂)은 백두산보다 355m가 높아 3099m다. 바로 아래에 있는 금정(金頂)은 3077m로 그 다음이다. 금정에서 어메이산의 4대 절경인 운해와 일출, 성등(聖燈), 불광(佛光) 등을 볼 수 있다. 하지만 1년 중 250일 정도 비가 오고 산정은 늘 안개에 휩싸여 일출 보기는 하늘의 별따기다. 분지보다 약 2500m나 솟아 있어 예전에는 산 아래서 꼭대기까지 50여km를 걸어 올라야 했다.
먹거리에 관해 말하자면 사천 요리산둥 요리, 광둥 요리, 강소 요리와 더불어 중국의 4대 요리로 꼽히며, 매운 요리의 대명사인 훠궈(火鍋)로 유명하다. 시내 식당에서 파는 퓨전 훠궈는 쉽게 먹을 수 있지만 전통 훠궈는 매워서 먹지 못할 정도다.
베이징에서 경극(京劇)이 유명하다면 쓰촨에서는 천극(川劇)이 이름값을 한다. '천부촉운(天府蜀韵)'은 제갈량을 주인공으로 적벽대전이 중심인 이야기다. 많은 출연진과 함께 화려한 무대를 통해 춤과 무예를 보여준다. 한글로 자막도 나온다. 청두를 대표하는 '천극'인 '천부촉운'은 아주 화려하기 때문에 보지 않으면 후회한다.
쓰촨은 중국 한시계의 2대 네임드인 이백, 두보와도 연관이 깊은 고장이다. 이백은 쓰촨성에서 나고 자라다시피 했고[23] 여러 대표작 중 하나인 '촉도난'도 촉 지방으로 넘어가는 벼랑길을 소재로 쓴 시이다. 두보는 청두에 산 적이 있으며 이때 살았던 곳이 완화초당 즉 두보초당이다.[24] 지금도 청두 시에서는 두보 초당을 관광 자원으로 잘 써먹고 있다.
매우 아름다운 풍경을 가져서 유네스코 문화 유산으로까지 지정된 구채구 즉 주자이거우는 안타깝게도 2017년 쓰촨성 대지진으로 반파되어 상당히 파괴되었다. 그러나 이 지역의 지진이 하루 이틀은 아니었던만큼 완전히 망가진 수준까진 아닌 듯 하며중국 신문망 번역 기사,상당 부분은 어느정도 보존된 모양이다. 다만 규모 7.0의 지진이 일어난 곳이니 만큼 해당 지역의 안전 상황을 보아 관광 산업이 위축되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는 듯 하다. 한국에서도 자세한 이후 사정이 잘 알려져 있지 않아서 보통 주자이거우가 완파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7. 비단


위에서 나왔듯이 쓰촨성의 특산품 비단인 촉금(蜀錦)이 굉장히 유명하다.
촉금(성도촉금, 成都蜀锦)은 난징의 운금(南京云锦), 쑤저우의 송금(苏州宋锦), 광시 좡족 자치구의 장금(广西壮锦) 등 중국 4대 비단으로 하나로 중국에서 유명한데 이 중에서도 촉금의 역사가 상당히 오래되었고 가장 오래 명성을 떨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2000년의 긴 역사를 가진 촉금은 일찍이 서한(西漢)시대부터 짜기 시작하여 촉한(蜀漢) 시대에는 쓰촨을 대표하는 물건이 되었으며 촉한 정부는 비단을 매우 중요시 여겨 승상 제갈량의 지휘하에 촉금의 생산과 질을 높여 촉금을 명품으로 만들었다. 촉금은 쓰촨산(四川産) 꽃무늬 비단이라고도 하는데 전부 수공으로 만들고 그 공예가 복잡하며 높은 기교를 가지고 있다.
당나라 때 와서는 그 당시 가장 좋은 비단으로 소문났으며 당태종 이세민은 사천 비단을 무조건 황실에 보내야 한다고 명했다. 또한 사천 비단은 실크로드를 통하여 유럽에까지 팔려나갔으며, 남으로는 일본에도 나갔다. 하여 일본 사람들은 이 비단을 "촉강금"(蜀江錦) 라 불렀는데 지금도 일본의 쇼소인(正倉院), 호류지(法隆寺)에서는 당나라 때 보낸 촉금을 보관하고 있다.
사천 지역은 날씨가 온화하고 따스해서 누에를 기르기에는 아주 적합한 날씨로 근래에 와서 이 전통적인 촉금을 계속 발전시키기 위해 청두시 정부는 이에 관한 전문인재를 배양하고 투자하여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방방금(方方錦), 월화금(月花錦), 우사금(雨絲錦), 완화금(浣花錦) 같은 촉금은 가장 많은 내외 고객이 애용하는 품종이다.
옷감의 질이 좋은만큼 자수(刺繡) 역시 유명하다. 이는 바늘로 각종 색상의 실을 꿰매어 미리 설계한 무늬와 색갈에 따라 화려한 도안을 수놓는 것이다. 사천 자수를 촉수(蜀繡)라 부르는데 중국 4대자수인 쑤저우의 소수(蘇繡), 후난성의 상수(湘繡), 광동성의 월수 중의 하나이다. 한나라 말기 삼국 시기 때 촉금(蜀锦)의 발전과 함께 촉수(蜀繡)는 천하에 그 명성을 떨쳤고 이것으로 북방의 전마(戰馬) 등 필요한 물건을 교환하였으며 촉한 정권의 가장 중요한 재정 수입원이 되었다. 당나라 시기와서 이름이 더 날렸는데 각 지역 소수민족 두령들도 모두 촉수로 자기 몸을 장식했으며 송나라 때는 하늘 아래 최고의 품질이라는 찬사를 들었다.

1831년 청나라 도광제 시기에 자수업이 더욱 발전했는데 조정에서 자수업을 직접 관리하고 크게 지원했다. 이로서 더 많은 자수예인 (艺人)들이 모여서 작업소가 60여개나 되어 인재만 천여명이 되였으며 생산한 품종이 다양하고 공예의 품질이 좋았다고 한다.
청나라 말기에 와서는 촉수(蜀繡)가 더 높은 수준에 올라 1915년파나마에서 열린 전람회에서 금상을 받았으며 관련 상품이 멀리 유럽,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중동/인도, 동남아시아, 호주 등 여러 곳에까지 팔려나갔다.
중국 전통문화가 다 그랬듯이 문화대혁명 때 이것도 된서리를 맞았으나 1971년에 와서 저우언라이의 관심하에 예인들이 다시 복귀해 촉수(蜀繡) 생산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개혁개방정책 초기인 1982년 중국 공예품 회의에서 사천 촉수(蜀繡)는 2등상을 받으면서 다시 외국에 수출하기 시작했고, 1985년 프랑스 전시회 때도 우수 상품으로 평가받아 지금도 여러 지역으로 수출되고 있다.
현재의 베이징 인민 대회당 내 제 4회 의청에 "부용잉어" 라는 병풍이 있는데 이것은 쓰촨성 내 150명이나 되는 수공들이 18일 동안 만든 촉수(蜀繡)라 한다.
현대에도 이 비단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해서, 고우영이 쓰촨성의 중심지인 청두를 방문했을 때 청두의 관광 안내도에는 실크로드를 장안이 아닌 청두로 연장해서 그린 그림을 올려놨다고 한다. (고우영 십팔사략 후한 편 참조)

8. 여담


'사천성'이라고 하면 중국의 지명보다 마작패를 일정한 룰 이내에서 짝맞춰 지우는 이른바 '상하이'류 '''마작 솔리테어''' 게임을 연상하는 사람도 있다. 사천성(게임) 참조.
한때 이런 마작 솔리테어를 기반으로 한 비디오 게임들 중 1990년대PC로 나오면서 잘 알려진 게 '사천성'이라는 제목을 달고 나온 한 대만산 마작 솔리테어 게임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개발된 이 게임의 룰을 차용한 마작 솔리테어류 게임도 '사천성'이라는 제목을 쓰는 경우가 있어서[25] 은근히 대명사화 되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의 현시창 희곡 '쓰촨의 착한 사람[26]'에서는 신들조차 GG치는 지역으로 나온다. gg친 신들이 '그래도 아직 착한 사람이 있도다'이라며 정신승리를 하려 쓰촨에 와서 천사표 윤락녀 셴테를 만나게 된다는 스토리로 시작된다.
중국에서 티베트 문제가 불거질 때 서쪽의 티베트 자치구, 칭하이성과 더불어 자주 등장하는 지역인데, 쓰촨성 서부가 전통적인 티베트의 세 영역[27] 중 하나라서 티베트계 주민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시노타이 인종인 태국인들과 라오스인, 미얀마인들도 원래는 쓰촨성 일대에서 살았다는 얘기도 있다. 타이족과 라오족, 버마족이 인도차이나 반도에 정착한게 생각보다 그리 오래되지 않았고 이들이 북쪽에서 이주해온 것으로 추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들은 한족과 생김새도 비슷하고 생활습관도 비슷하다. 서구화된 태국인만 포크/나이프를 쓸 뿐이며 미얀마계 종족 중 하나인 샨족은 젓가락을 쓰는 등 중국과 생활습관이 똑같다. 언어학적으로도 버마족 등 미얀마계 종족들은 중국티베트어족으로 한족과 사촌뻘이다.
동명의 도시로 대한민국경상남도 사천시가 있다. 다만, 한자는 '泗川'으로 다르다. 종종 "사천에서 왔다"고 하면 "중국?"이라고 하는 개그를 들을 수 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옛 지명인 '''삼천포'''로 설명하는 사람도 많다. 어린 세대에겐 오히려 삼천포라는 지명이 익숙치 않고 사천시가 익숙하지만, 반대로 기성세대는 사천시라는 지명보단 삼천포시가 익숙하고 사천=구 사천군으로 여긴다. 이게 다 1995년 도농복합시 정책의 산물이다.
중국 미녀를 뽑을 때 장쑤성 쑤저우, 저장성 항저우에 미인이 많다(杭出美女)고 하지만 중국인들이나 여행객들이 꼽는 미녀가 많은 지역엔 쓰촨성과 충칭직할시도 포함된다. '베이징에 가면 자신의 지위가 낮음을 알게 되고, 청두에 가면 자신이 너무 일찍 결혼했음을 알게 된다.'는 말도 있다. 쓰촨성 미인들은 피부가 깨끗하고 하얗다고 하는데 햇빛에 노출되기 어려운 기후 조건과 좋은 물이 영향을 주어서라는 얘기도 있다.
청두 사람들은 느긋한 것으로 유명하다. 바로 밑 윈난이 우리나라의 제주도처럼[28] 이국적인 분위기라면, 청두는 특유의 여유 있는 삶의 방식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 사람들은 '여유' 하면 쓰촨을 많이 떠올린다고 한다. 여행자들이 여행해 본 결과 불친절하기로 악명 높은 중국에서 그나마 친절한 사람들을 가장 많이 만날 수 있는 곳이었다는 평가가 많다.
이 때문에 '젊어서는 사천에 들어가지 말고 늙어서는 촉에서 나오지 말라'는 격언이 있다. 젊어서는 산전수전 다 겪어봐야 하기 때문에 이곳의 안일한 삶은 피해야 하며, 반대로 늙은이들은 여기에서 편하게 여생을 즐길 수 있다는 뜻이다.
쓰촨인들은 매우 평온하다. 오랜 세월 동안 산이 천하의 난리를 막아주고, 전쟁이 나더라도 후방 포지션이었기 때문인가. 쓰촨인은 먹고 마시며 수다 떠는 걸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사교적, 외향적, 낙천적인 성격도 가지고 있고 성실하고 약속도 잘 지키는 편이다.
2017년 11월 말 제갈량이 북벌 나가던 길을 따라서 청두에서 시안까지 가는 고속철도가 개통됐다. 시안까지 3시간, 베이징까지 8시간이면 간다.
쓰촨성 출신들은 타지역 출신들에 비해 키가 작은 편이다. 쓰촨성 광안 출신의 덩샤오핑이 가장 좋은 예. 그래서 타지역 출신들은 쓰촨성 출신들을 '''먀오쯔(苗子, 땅콩보다 훨씬 더 작은 종자)'''라고 부른다.[29]
2019년 3월 쓰촨성 네이장(內江)과 즈공(自貢) 일대에서 셰일가스 1247억㎥가 매장된 가스전이 발견되었다. 100만명이 거주하는 도시에서 100년 이상 쓸 수 있는 양이라고 추산된다.# 쓰촨과 티베트 일대에 엄청나게 많은 셰일가스가 매장된 걸로 추산되며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타림 유전 일대에도 셰일가스가 엄청 묻혀있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단지 고질적인 물 부족 문제 때문에 아직 개발을 못할 뿐 제대로 채굴하면 미국, 멕시코, 카타르 등 기존 셰일대국들과 맞먹는 양이 채굴될 수 있다.
공원에 있는 탁자에서 사람들이 차를 마시면 귀를 파주는 사람들이 돌아다니면서 돈을 받고 귀를 파주는 문화가 있다고 한다. 관련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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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중국 쓰촨성에서 '''버스폭발테러사건'''이 일어났다. 단순히 사회 복수를 위해서 직접 폭탄을 만들어 버스를 폭파 시켰다. 사망자는 한명도 없었다. 용의자는 현재 재판중이다. 쓰촨성 버스 폭발 사건

9. 행정 구역


[image]
성도(省都)는 청두시이다. 티베트족, 창족, 이족 등의 자치주가 있다.

9.1. 면양(綿陽)


본래 광한군 변두리에 해당하던 지역이었지만, 촉한이 최종방위요새인 면죽관을 세운 이래 장안과 성도를 잇는 교통의 요지라는 조건까지 잘 써먹으면서 청두의 위성도시+쓰촨 두번째 최대도시로 잘 나갔었다.
세계테마기행 찍으면서 여기에 간 적이 있는데, 거기에 따르면 여기에 있는 '저수'라는 마을에 무슨 거대한 다리를 밟고 지나가면서 액운을 떨쳐내고 한해의 평안을 기원한다고 다리에 돈 뿌리고 입다버린 옷을 뿌리는 축제가 있다고 한다.[30]
이 축제가 외국 관광객이나 외지인들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축제라 사천성 사람들만 오는 축제임에도 불구하고 대륙이라고 사람이 많아서 끼어들기도 못하는 수준이다. 이때 관광객들이 냅다버린 액운이 가득한 돈과 옷들은 가난한 이들이 들고 간다.

9.2. 남충


南充. 난충
쓰촨성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로 쓰촨 동부에 있다. 본래 파서군의 일부지역이었다. 이지역에 속현인 낭중시(廊中市)는 문화대혁명홍위병들에게 거의 당하지 않아 전통이 잘 유지되어 있는 '중국 4대고성'중 하나로 꼽힌다.
이렇게 잘 보존된 난충 지역의 전통 덕분에 뽕을 지대로 벌어먹고 있다.
그리고 장비가 파서태수로 있었던 경력이 있어서 이지역엔 '장비우육'이라는 소고기 요리가 있다.

9.3. 낙산


乐山
도교의 성지로 꼽히는 아미산(峨眉山)이 있다. 심지어 아미산시(峨眉山市)도 있다. 아미산이 도교의 성지이지만 불교에서도 중요한 지역인지 거대한 낙산대불이 있다.
그 유명한 마라탕이 처음 만들어진 곳이다.
과거 가정(嘉定)이라고 불렸으나 청나라 때부터 낙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9.4. 수녕


遂寧
환온이 성한을 멸망시키고 난 뒤 이곳에서 평화를 갈망하는 마음으로 '수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지금 스타로 올라온 쥐징이가 태어난 곳이다.

9.5. 아바 티베트족, 강족 자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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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에 한족들이 아직 점령하지못했던 간쯔와는 달리 한나라가 일부를 촉군으로 두고 있었다.
본래 오호십육국 때 성한을 세웠던 저족이 살던 곳이었지만 저족은 동화되고 현재는 훗날에 강제이주로 들어온 강족들과 토번 이후 들어온 티베트인들이 많이 살고 있다. 어차피 강족, 저족, 티베트족, 탕구트족 모두 티베트계 종족들이기는 하다. 허나 저족은 일찍 한족에 동화되었고 탕구트족은 그들이 세운 서하가 망하면서 원나라에 방법당해 소멸했으며[31] 강족과 티베트족만이 남았다.
최근 중국 당국이 티베트족을 모든 능력을 총동원한다는 명목 아래 무자비로 탄압하면서 그들의 비폭력적주의를 기반으로 중국 정부에 항거하기 위해 '''분신자살'''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과격하게 테러를 벌이는 위구르와는 다른 점이며 이 때문에 위구르인들이 티베트인들을 유약하다고 까기도 한다.##

9.6. 간쯔 티베트족 자치주


티베트에서 캄이라고 말하던 지역.
역사적으로 이 지역은 대대로 티베트의 일부였고 토번의 전성기였던 송첸캄포 시절 당나라를 침공하는 주요 길목이 자리 잡았던 곳이다.
청나라 때 티베트를 점령하면서 캄 지방의 동부가 쓰촨성에 처음 편입되었다.
북양정부시절에 티베트가 점령했던 적이 있다. 중화민국 치하에서 티베트는 비록 중화민국의 영토인 서장성이라고 분류했으나 자치를 보장받아 사실상 독립된 달라이 라마의 왕국이었으며 쓰촨 군벌이 차지하던 캄 지방을 티베트가 되찾아 온 것이었다. 중화인민공화국1950년 티베트 자치 보장 약속을 깨고 티베트를 직접 지배하려 점령하기 전까지 티베트는 사실상 독립국으로 놀았고 캄과 암도 지방 중에서 캄 지방은 한족 군벌에게서 빼앗아 오기까지 했다.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다시 쓰촨성의 청나라 시절 행정구역을 복구했고 캄 지방은 쓰촨성에 다시 편입되었다. 더 나아가 티베트 자체를 중화인민공화국은 직접 지배하려 들며 점령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9.7. 량산 이족 자치주


한대부터 서남이라 불리던 남방 민족들이 많이 살았는데 티베트가 한때 여길 병탄하면서 티베트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덕에 티베트인들도 많이 살고 있다.
중화민국 시기 신설된 서강성의 성도였던 캉딩은 이곳의 도시.

10. 출신인물



10.1. 고대, 중세



10.2. 근대


  • 류샹
  • 류원후이
  • 다이지타오
  • 덩샤오핑 (1904년 ~ 1997년)
  • 주더
  • 류보청
  • 장아이핑
  • 리펑(1928년 ~ )
  • 양상쿤[32](1907년 ~ 1998년)
  • 범홍헌(1946년 ~)
  • 셰츠

10.3. 현대(1949년 ~)



10.3.1. 연예계


[1] 이 때 촉왕이 잔도를 구축하는 아둔한 행동으로 사직을 멸망시키기에 이렀다는 고사인 소탐대실이 나왔다.[2] 중일전쟁 기간 가장 아시아에서 가장 산업화된 일본군 마저도 너무 험준하여서 육군작전을 포기하고 공군 작전 위주로 할 수 밖에없었다.[3] 이 때 멍청한 2대 황제의 아둔함을 빗대 지록위마라는 한자성어가 나왔다. 결국 바보가 황제가 된 진은 오래 못 버티고 초나라 영주 항우에 의해 망한다.[4] 생산량, 인구밀도[5] 그리고 대신 형주오나라에 흡수당한다.[6] 작중 옥야천리(沃野千里), 천부지국(天府之國)으로 평가된다.[7] 반면, 조조의 묘는 발견되었다고는 하나 신뢰성이 의심되며 손권의 묘는 아예 현재로서 찾을길이 없다.[8] 오늘날에도 쓰촨은 중국의 10대 철산지다.[9] 현재의 충칭직할시이다.[10] 당시에는 코코노르라는 몽골어 명칭으로 불렀다. 이 칭하이와 신장이 언어도 민족도 전혀 상관없었던 지역인 외몽골과 티베트를 이어 주는 루트였다.[11] 청의 준가르 정복은 3대 째 이어져 강희제는 제일 먼저 외몽골을 점령하고 할하 부족들을 휘하에 편입시켰으며 할하의 세첸칸부나 투세투칸부 등 외할하 왕공족들이 반 독립상태로 청에 조공을 시작했다. 그리고 옹정제 때엔 코코노르에 진출을 시작해 이 지역을 칭하이라 칭하였으며 건륭제 때 신장과 티베트 정벌로 완전히 준가르의 숨통을 끊어버렸다.[12] J-10, J-20을 만드는 회사다.[13] 시창 우주기지. 중국의 우주기지는 이곳 말고도 간쑤성의 주취안 우주센터도 있으며 최근에 하이난 섬에 새 우주기지를 만들었다.[14]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를 잘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다'라는 실용 논리다.[15] 16.5만 평방킬로미터나 된다!!![16] 원촨 대지진으로 2008년 대지진의 전주곡이었다.[17] 그러나 남중국 일대처럼 겨울 기온이 13-14도의 봄/가을 수준으로 많이 높은 건 아니고 영상 0-1도 정도로 쌀쌀하다.[18] 자세한 것은 장헌충 문서 참고.[19] 라/辣라고 한다.[20] 마/麻라고 한다.[21] 한국시간 1시 30분[22] 樂山大佛·낙산대불이라고도 한다. 樂자를 여라고도 발음하는데 樂山樂水를 여산여수라고 하는 게 그 예이며 아주 희귀한 경우니 외워두는 게 좋다.[23]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정확히는 3세쯤에 집안이 촉 지방으로 이사한 것으로 보인다.[24] 이때 240여 수의 시를 지었다고 한다.[25] 예를 들어 한게임 사천성 등[26] Der gute Mensch von Sezuan; 번역에 따라 '쓰촨의 선인', '쓰촨에 사는 착한 사람'[27] 캄, 우창, 암도. 이중 캄지방의 동부가 쓰촨성 서부다.[28] 중국에서는 '생활이 힘들땐 떠나요~ 윈난으로~' 하는 노래도 있다! 실제로 윈난에서는 커피가 생산된다.[29] 단 쓰촨성 서부에 거주하는 캄족(Kham)은 평균 키가 180cm로 매우 크다. # 18세기, 20세기 중국이 티베트를 정복할 때 가장 저항이 심했던 지역 중 하나고 티베트인끼리도 캄족 부족민들은 호전적인데다가 덩치도 커서 싸움 잘하기로 유명했다고 한다.[30] 몇백년 이상 전통의 오래된 축제라고 한다[31] 칭기즈 칸이 여기 공략하다 말에서 떨어져 후유증으로 사망했을 정도로 서하 공략은 꽤 고전했다. 황하의 둑을 터뜨려 수공을 하는 방법 등으로도 소용없었다. 결국 이 갈린 칭기즈 칸이 죽으면서 '''탕구트족 놈들을 한 놈도 남기지 마라'''고 유언을 남기고 꼴까닥한 바람에 열받은 오고타이가 서하 수도 카라호토를 함락시킨 후 수레바퀴보다 큰 탕구트인 남자는 모두 죽여 버리고 여자와 어린이들은 노예로 사로잡아 갔으며 서하 휘하의 한족들은 몽골 제국에 알아서 귀부했다. 그 과정에서 탕구트인들이 몽골에 의해 강제로 한족과 섞여버려서 현재 부계 DNA로 탕구트는 절멸했고 탈출해 잔존한 이들은 티베트로 도망가 형제 민족인 티베트족에 동화되었다. 이슬람으로 개종한 탕구트인들은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유입되어 위구르에 동화되었다.[32] 지금의 충칭출신, 출생 당시 사천 - 중경 행정 구역 분할 전이라 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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