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하르트 하데겐
'''라인하르트 하데겐 (Reinhard Hardegen : 1913년 3월 18일~2018년 6월 9일)'''
1933년 4월 1일에 바이마르 공화국 해군에 입대한 라인하르트 하데겐은 처음부터 잠수함에 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가 되고 싶었던 건 전투기를 모는 조종사였지만, 그가 입대했을 때만 하더라도 나치가 정권을 잡기 전이어서 루프트바페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기 전이었고, 러시아에서 비밀리에 훈련을 받던 소수의 선발된 인원을 제외하면 전투조종사가 되기는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그나마 가능성이 높은 편법이라면 해군에 들어가 해군항공대(Marineflieger)에서 복무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청년 하데겐은 2년 반 동안 해군항공대에서 관측장교로 복무하다가 조종 면허를 따서 파일럿이 되지만 얼마 후 비행 사고로 인해 다리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 6개월 동안이나 병원 신세를 지면서 조종 자격을 잃게 된다. 이에 한동안 실의에 빠졌던 그는 심기일전하여 잠수함 장교로 직별을 바꿔 1939년 11월에는 잠수함대에 합류했다.
26척 169,709톤을 격침시킨 탁월한 함장 헤르베르트 슐체(Herbert Schultze : 1909~1987) 대위가 이끄는 U-124에서 사관으로 근무하던 그는 1940년에는 2형 유보트 U-147의 함장으로 임명되어 이듬해인 1941년 3월부터 초계 임무를 나가서 전과를 거두기 시작한다. 5월 16일부터는 9형 유보트인 U-123으로 갈아타게 되었는데, 하데겐 대위는 훨씬 커진 배수량을 바탕으로 긴 항해거리가 보장되며 중무장된 신형 유보트를 이끌면서 전과가 급상승 그래프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해 여름의 서아프리카 해안 방면의 초계 임무에서 적함 5척을 격침시킨 그는 21,507톤의 스코어를 기록했고, 10월에는 영국 해군의 13,984톤급 무장상선 오라니아(HMS Aurania)도 수장시켰지만 근처에서 지원을 위해 달려온 구축함 2척의 협격에 걸려 U-123은 극심한 손상을 입고 간신히 죽을 고비를 넘겼다.
이즈음부터 좁고 비위생적인데다 규칙적인 생활을 하기 힘든 잠수함 생활이 하데겐이 비행 사고를 겪었을 때 입은 부상의 후유증과 겹쳐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1936년 항공단에서 근무할 때의 사고로 다리에 입은 골절상과 만성적인 출혈, 위장 및 소화기관 장애로 말미암아 제대로 된 음식 대신 유동식을 먹어야 하는 그로써는 장시간 초계는 무리였다. 그로 인해 잠수함대 사령관 카를 되니츠 제독의 함정 초계 지역 할당 분배에서 U-123은 걱정거리가 되기도 했지만 4회의 초계를 무사히 끝낼 수 있었다.
3월에 두 번째로 북치기 작전에 재차 출격한 그는 10척 57,170톤의 적함을 격침시켜 총통 히틀러와 함께 식사를 하며 직접 백엽 기사철십자장을 수여받고 5월에는 잠수함 수리를 위해 킬 항구에 머무른다. 이 시기쯤 되자 군의관은 하데겐의 신체 상태가 더 이상의 오랜 항해를 견뎌낼 수 없다고 진단을 내렸다. 이제 유보트에 타서 직접 적함을 쫓는 대신 부대를 지휘하기 위해 보직을 바꿔야만 하게 된 것이다. 7월 31일에 고텐하펜(Gotenhafen)에 위치한 제27훈련 전단(27. Unterseebootsflottille) 본부에서 함대 지도자 교육을 받은 하데겐은 1943년 3월부터는 소령(Korvettenkapitän) 계급장을 달고 잠수함 교육대의 어뢰 교관으로 근무했다. 1945년 2월이 되자 제3제국의 운명은 바람 앞의 촛불과도 같은 신세가 되었고, 히틀러는 해군 장병들을 모두 배에서 내리게 하여 소총을 쥐어주곤 육상에서 최후의 항전을 하라고 명령했다.
하데겐 소령은 제6해군 보병연대(Marine Infanterie Regiment 6)라는 응급 편성된 소총 부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고, 3월에는 새로 창설된 제2해군 보병사단(2.Marine-Infanterie-Division)의 지휘하에 들어가게 된다. 하데겐의 연대는 브레멘 지역에서 후퇴 작전을 벌이던 중, 1945년 5월에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서 진격해온 영국군에게 패하고 남은 생존자는 모두 포로가 되었다. 사실 이들은 1945년 4월 말에 펠릭스 슈타이너 SS 대장의 지휘 하에 들어가 제7기갑사단과 제25기갑척탄병 사단과 함께 베를린 구원을 위한 최후의 반격에 참가할 예정이었는데, 만일 그랬다면 분노한 소련군에게 의해 남김 없이 전멸당했을 것이다.
다른 장교들과 마찬가지로 하데겐 소령도 이 전투에서 고향 브레멘에 뼈를 뭍을 뻔 했지만, 전투 도중 인은 부상으로 인해 디프테리아에 감염되어 고열과 환상에 시달리며 야전병원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느라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다. 종전 며칠을 남겨두고 하데겐 소령은 자살한 히틀러의 뒤를 이어 제3제국의 총통으로 지명된 카를 되니츠 제독의 부관이 되었으나, 며칠 후 항복 절차를 모두 끝내고 영국군에게 연행되었다.
패전을 맞은 후 하데겐은 연합국 전범재판소로부터 자신과 같은 성을 가진 SS 장교로 오인되었고, 심문관에게 자신이 확실히 친위대 장교가 아닌 잠수함장이었다는 진정한 정체성을 확신시켜줄 증거를 모으느라 필사적이었는데, 받았던 훈장들은 연합군 장교가 압수해버린데다 항복이 임박한 독일군이 관련 서류와 문건들을 죄다 불태워버려 그 소명에는 1년 반이나 걸렸다. 간신히 전범 혐의를 벗은 그는 1946년 11월에야 고향 브레멘으로 돌아와 사업을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자전거를 타다가 곧 수입이 안정되면서 중고차를 구해 운전을 하게 된다.
1952년에 그는 자그마한 석유 무역회사를 차렸고 이 사업이 잘 풀려 꽤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라인하르트 하데겐은 브레멘 시민들의 탄탄한 지지를 바탕으로 32년 동안이나 고향에서 기독민주당 국회의원(Bürgerschaft)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과거에 소속 선박을 침몰시켰던 텍사코(Texaco)를 대표하는 난방 석유 사업에 뛰어들었고, 이 비즈니스 관계로 인해 서독과 미국을 오가는 해외출장이 잦아졌다.
그는 이번에는 잠수함 대신 록히드 수퍼 컨스텔레이션(Lockheed Super Constellation)을 타고 여러 차례 미국을 방문하여 전쟁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와 참전 용사들과 정기적으로 모임을 열면서 친분을 다졌으며, 심지어 유보트 함장으로 복무할 때 그를 죽일 뻔 했던 미 해군의 베테랑 군인들과도 친구가 되었다. 2012년에 그는 독일연방공화국으로부터 과거 자신의 해군 복무 기록과 무공을 다시 인정받았다. 장수 체질이었던 그는 100세를 넘긴 2013년 3월까지도 건강에 아무런 문제가 없이 좋아서 아마추어 골프 대회에서 우승해 트로피를 따낼 정도였다. 라인하르트 하데겐은 100세를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자동차를 손수 운전하고 다닐 정도였으나, 2017년 말부터 차차 건강이 나빠지다가 2018년 6월 9일에 105세 3개월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 해군 입대
1933년 4월 1일에 바이마르 공화국 해군에 입대한 라인하르트 하데겐은 처음부터 잠수함에 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가 되고 싶었던 건 전투기를 모는 조종사였지만, 그가 입대했을 때만 하더라도 나치가 정권을 잡기 전이어서 루프트바페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기 전이었고, 러시아에서 비밀리에 훈련을 받던 소수의 선발된 인원을 제외하면 전투조종사가 되기는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그나마 가능성이 높은 편법이라면 해군에 들어가 해군항공대(Marineflieger)에서 복무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청년 하데겐은 2년 반 동안 해군항공대에서 관측장교로 복무하다가 조종 면허를 따서 파일럿이 되지만 얼마 후 비행 사고로 인해 다리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 6개월 동안이나 병원 신세를 지면서 조종 자격을 잃게 된다. 이에 한동안 실의에 빠졌던 그는 심기일전하여 잠수함 장교로 직별을 바꿔 1939년 11월에는 잠수함대에 합류했다.
2. 비행기에서 잠수함으로
26척 169,709톤을 격침시킨 탁월한 함장 헤르베르트 슐체(Herbert Schultze : 1909~1987) 대위가 이끄는 U-124에서 사관으로 근무하던 그는 1940년에는 2형 유보트 U-147의 함장으로 임명되어 이듬해인 1941년 3월부터 초계 임무를 나가서 전과를 거두기 시작한다. 5월 16일부터는 9형 유보트인 U-123으로 갈아타게 되었는데, 하데겐 대위는 훨씬 커진 배수량을 바탕으로 긴 항해거리가 보장되며 중무장된 신형 유보트를 이끌면서 전과가 급상승 그래프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해 여름의 서아프리카 해안 방면의 초계 임무에서 적함 5척을 격침시킨 그는 21,507톤의 스코어를 기록했고, 10월에는 영국 해군의 13,984톤급 무장상선 오라니아(HMS Aurania)도 수장시켰지만 근처에서 지원을 위해 달려온 구축함 2척의 협격에 걸려 U-123은 극심한 손상을 입고 간신히 죽을 고비를 넘겼다.
이즈음부터 좁고 비위생적인데다 규칙적인 생활을 하기 힘든 잠수함 생활이 하데겐이 비행 사고를 겪었을 때 입은 부상의 후유증과 겹쳐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1936년 항공단에서 근무할 때의 사고로 다리에 입은 골절상과 만성적인 출혈, 위장 및 소화기관 장애로 말미암아 제대로 된 음식 대신 유동식을 먹어야 하는 그로써는 장시간 초계는 무리였다. 그로 인해 잠수함대 사령관 카를 되니츠 제독의 함정 초계 지역 할당 분배에서 U-123은 걱정거리가 되기도 했지만 4회의 초계를 무사히 끝낼 수 있었다.
3. 북치기 작전
1942년 초부터 다시 임무에 나간 그는 1월 12일에 캐나다 근해에서 영국 화물선을 격침시켰다. 캐나다 해안에서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수행한다는 것은 미국도 이미 유보트의 공격 대상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유명한 "북치기 작전(Operation Drumbeat)"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때 유보트 부대가 선단 호위 경험이 없는 미 해군과 미국 상선들을 상대로 2주간 거둔 전과는 상당했다. 귄터 헤슬러(Günther Hessler : 1909~1968 / 118,822톤 격침) 함장의 U-107 같은 경우는 10만톤을 거뜬히 넘기는가 하면, 하데겐 대위만 해도 9척 합계 53,173톤을 격침시킨 것이다. 1월 20일에 되니츠 사령관은 하데겐 함장의 공로를 치하하면서 다음과 같은 전문을 송신한다.'''"밤이 되자 잠수함을 부상시켜 전망탑으로 올라갔습니다. 거기서 미국 동해안을 보고 있자니, 코니 아일랜드의 회전관람차가 서서히 돌고 있었고 수많은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강처럼 흘러가고 맨해튼의 고층 빌딩들이 눈부신 빛을 내며 매혹적인 스카이라인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무어라 말로 그 느낌을 묘사할 수는 없지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훌륭했습니다. 우리는 유보트 대원 중에서 처음으로 이곳에 왔고, 이 전쟁에서 독일 군인이 미국 해안을 바라본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지요."'''
3일 후 U-123의 통신장교는 함장에게 기사 철십자훈장이 수여되었음을 알리는 전문을 추가로 수신했다.'''"북치기꾼 하데겐의 훌륭한 연주였음"'''
4. 쓰러져가는 제3제국에서
3월에 두 번째로 북치기 작전에 재차 출격한 그는 10척 57,170톤의 적함을 격침시켜 총통 히틀러와 함께 식사를 하며 직접 백엽 기사철십자장을 수여받고 5월에는 잠수함 수리를 위해 킬 항구에 머무른다. 이 시기쯤 되자 군의관은 하데겐의 신체 상태가 더 이상의 오랜 항해를 견뎌낼 수 없다고 진단을 내렸다. 이제 유보트에 타서 직접 적함을 쫓는 대신 부대를 지휘하기 위해 보직을 바꿔야만 하게 된 것이다. 7월 31일에 고텐하펜(Gotenhafen)에 위치한 제27훈련 전단(27. Unterseebootsflottille) 본부에서 함대 지도자 교육을 받은 하데겐은 1943년 3월부터는 소령(Korvettenkapitän) 계급장을 달고 잠수함 교육대의 어뢰 교관으로 근무했다. 1945년 2월이 되자 제3제국의 운명은 바람 앞의 촛불과도 같은 신세가 되었고, 히틀러는 해군 장병들을 모두 배에서 내리게 하여 소총을 쥐어주곤 육상에서 최후의 항전을 하라고 명령했다.
하데겐 소령은 제6해군 보병연대(Marine Infanterie Regiment 6)라는 응급 편성된 소총 부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고, 3월에는 새로 창설된 제2해군 보병사단(2.Marine-Infanterie-Division)의 지휘하에 들어가게 된다. 하데겐의 연대는 브레멘 지역에서 후퇴 작전을 벌이던 중, 1945년 5월에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서 진격해온 영국군에게 패하고 남은 생존자는 모두 포로가 되었다. 사실 이들은 1945년 4월 말에 펠릭스 슈타이너 SS 대장의 지휘 하에 들어가 제7기갑사단과 제25기갑척탄병 사단과 함께 베를린 구원을 위한 최후의 반격에 참가할 예정이었는데, 만일 그랬다면 분노한 소련군에게 의해 남김 없이 전멸당했을 것이다.
다른 장교들과 마찬가지로 하데겐 소령도 이 전투에서 고향 브레멘에 뼈를 뭍을 뻔 했지만, 전투 도중 인은 부상으로 인해 디프테리아에 감염되어 고열과 환상에 시달리며 야전병원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느라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다. 종전 며칠을 남겨두고 하데겐 소령은 자살한 히틀러의 뒤를 이어 제3제국의 총통으로 지명된 카를 되니츠 제독의 부관이 되었으나, 며칠 후 항복 절차를 모두 끝내고 영국군에게 연행되었다.
5. 장수를 누리다
패전을 맞은 후 하데겐은 연합국 전범재판소로부터 자신과 같은 성을 가진 SS 장교로 오인되었고, 심문관에게 자신이 확실히 친위대 장교가 아닌 잠수함장이었다는 진정한 정체성을 확신시켜줄 증거를 모으느라 필사적이었는데, 받았던 훈장들은 연합군 장교가 압수해버린데다 항복이 임박한 독일군이 관련 서류와 문건들을 죄다 불태워버려 그 소명에는 1년 반이나 걸렸다. 간신히 전범 혐의를 벗은 그는 1946년 11월에야 고향 브레멘으로 돌아와 사업을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자전거를 타다가 곧 수입이 안정되면서 중고차를 구해 운전을 하게 된다.
1952년에 그는 자그마한 석유 무역회사를 차렸고 이 사업이 잘 풀려 꽤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라인하르트 하데겐은 브레멘 시민들의 탄탄한 지지를 바탕으로 32년 동안이나 고향에서 기독민주당 국회의원(Bürgerschaft)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과거에 소속 선박을 침몰시켰던 텍사코(Texaco)를 대표하는 난방 석유 사업에 뛰어들었고, 이 비즈니스 관계로 인해 서독과 미국을 오가는 해외출장이 잦아졌다.
그는 이번에는 잠수함 대신 록히드 수퍼 컨스텔레이션(Lockheed Super Constellation)을 타고 여러 차례 미국을 방문하여 전쟁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와 참전 용사들과 정기적으로 모임을 열면서 친분을 다졌으며, 심지어 유보트 함장으로 복무할 때 그를 죽일 뻔 했던 미 해군의 베테랑 군인들과도 친구가 되었다. 2012년에 그는 독일연방공화국으로부터 과거 자신의 해군 복무 기록과 무공을 다시 인정받았다. 장수 체질이었던 그는 100세를 넘긴 2013년 3월까지도 건강에 아무런 문제가 없이 좋아서 아마추어 골프 대회에서 우승해 트로피를 따낼 정도였다. 라인하르트 하데겐은 100세를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자동차를 손수 운전하고 다닐 정도였으나, 2017년 말부터 차차 건강이 나빠지다가 2018년 6월 9일에 105세 3개월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