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폰 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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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폰 젝트[1]
Hans von Seeckt
1866년 4월 22일 ~ 1936년 12월 27일
1. 개요
2. 생애
2.1. 초기이력
2.3. 바이마르 공화국
2.4. 예편 후
3. 기타


1. 개요


제1차 세계 대전바이마르 공화국시기에 활약한 독일의 군인이다. 베르사유 조약의 제한에 묶인 독일군(Reichswehr) 육군의 잠재력을 보존하여 아돌프 히틀러 집권시기에 급격히 확장할 수 있도록 초석을 놓았다. 그래서 제2차대전 독일 육군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최종계급은 상급대장.

2. 생애



2.1. 초기이력


가문은 포메른[2] 지방 하급귀족 출신이지만 출생지는 슐레스비히. 아버지는 프로이센 왕국 육군의 장군이었다. 아버지를 따라 군인의 길을 걷기로 다짐하고 1885년에 18세의 나이로 군대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육군 "카이저 알렉산더 친위 척탄병 연대"에 들어갔다가 후에 육군총참모부(Generalstab)에 들어갔다. 젝트는 야전 지휘보다 참모직에서 더 능력을 발휘하였다.

2.2. 제1차 세계 대전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질 때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August von Mackensen) 휘하 육군 제3군단참모장이었으며 계급은 대령이었다. 마켄젠 휘하에서 젝트 대령은 발칸반도 전역에 참전, 세르비아 왕국루마니아 왕국을 상대로 엄청난 전과를 올렸고, 이때 "마켄젠 있는 곳에 젝트가 있고, 젝트가 있는 곳에 승리가 있다." 는 말까지 군내에서 돌 정도였다. 이 전과로 젝트는 소장으로 승진했고, 후에 독일 제국의 동맹국인 오헝 제국, 오스만 제국에 파견되어 전쟁을 지도했다.

2.3. 바이마르 공화국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하고 제정이 폐지되어 바이마르 공화국이 들어섰다. 독일 육군은 협상국과 맺은 베르사유 조약 때문에 10만 명으로 제한되었고, 그 중에서도 장교는 4천여 명으로 제한되었다. 이밖에도 총참모본부를 못 두고 잠수함전차도 못 만드는 등 여러 제약이 따랐다. 고위장성들이 모두 예편했기 때문에 젝트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최선임자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젝트는 젊고 유능한 장교들을 선발하여 엘리트 군대로 재편성했다. 젝트의 지휘 하에선 귀족, 군인 가문 출신, 평민 출신을 가리지 않고 실력이 인정된다면 장교로 유임될 수 있었다. 또한 모든 장교부사관들은 각각 자신들이 맡고 있는 부대에서 편제상 최소한 1단계 높은 부대의 직무를 맡을 수 있도록 훈련받았다. 이러한 젝트의 개혁은 큰 성과를 거두었는데,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맹활약한 독일 육군 장성의 대부분이 1919~20년 사이에 젝트가 군대에 남겨놓은 장교들이었다.
젝트는 육군부 총감(Chef der Heeresleitung)이라는 직위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실질적인 육군총사령관이었다. 젝트는 군대의 특권을 내세워서 육군 내부인사에서 공화정부의 간섭을 전혀 받지 않았고, 육군은 왕정시절의 귀족이 지배하게 되었다. 이런 인사 때문에 한편으로는 독일 육군 수뇌부는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했을 때도 어느 정도 독립적인 위치를 가지고 있었으며, 군은 정권에 개입하면 안 된다는 젝트의 사상은 한편으로 공화국에 사형선고를 내리는 히틀러의 집권을 은근히 방조하게 된다.
젝트는 육군 총참모본부의 이름만 바꿔서 군사국(Truppenamt)을 만들고, 조약의 제한을 최대한 피해서 정규군과 비슷한 조직을 만들었다. 전차나 전투기를 만들지 못하게 한 조약을 피해서 캔버스로 만든 모형을 쓰거나 혹은 양철판을 댄 승용차로 전차 전술연습을 한 것은 좋은 예.
젝트는 반공적이었고, 독일 공산주의자들을 철저히 탄압했으나 1920년 비밀리에 소련의 국방장관 레프 트로츠키와 동맹을 맺고 소련과의 군사협력을 모색하였다. 소련과 독일은 모두 신생 폴란드에 엄청난 영토를 할양했으므로, 둘은 모두 폴란드를 없애고 싶어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었다. 당시 폴란드에 대한 독일의 반감은 고위층부터 하류층까지 매우 심각한 것이었는데, 당장 동프로이센과 독일 본토가 폴란드 회랑 때문에 차단되었고, 그단스크는 폴란드의 간섭을 받는 단치히 자유시로 남았기 때문. 또한 그 이전까지 독일 점령 하의 폴란드 서부에서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던 독일인들이 폴란드 제2공화국 이후 폴란드 서부 지역의 소수민족으로 전락했고 대(大)폴란드[3]와 상(上) 슐레지엔[4]을 놓고 폴란드와 전쟁까지 치뤘기 때문에 독일의 폴란드에 대한 태도는 거의 민족적 히스테리에 가까웠을 정도였다. 심지어 사회주의자들마저 독일-폴란드 사이의 국경 조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정도.[5] 소련 또한 폴란드에 벨로루시우크라이나의 절반을 떼어주었기 때문에 이를 간 것은 마찬가지.
그리하여 소련은 장소를 제공하고, 독일은 무기를 제공하는 협약을 맺었다. 루프트바페 조종사들은 소련 땅에서 몰래 훈련했고, 드넓은 소련 땅에서 전차전술 연습도 실시하였다. 이 협력은 히틀러 집권 직전까지 계속되었으며, 히틀러가 집권한 후에는 이런 협력이 끊겼지만 독소 불가침조약 후에는 다시 소련이 원자재를, 독일은 공작 기계를 서로 원조하면서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런 협력은 독소전쟁에 이르러 깨졌다.
젝트는 적극적으로 공화국을 지지하지도 않았으나,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공화국을 비방한 것도 아니었다. 아마도 대안부재의 심정으로 현재 정부 체제의 존속을 바랐을 것이다. 많은 장교들은 왕당파였지만, 호엔촐레른 왕조의 복고는 협상국 측에서 용인하기 힘들었을 것이고, 공산주의자들은 보수파인 장교단이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거기에 나치를 비롯해서 당시 난립하고 있던 극우 파시즘 세력은 반공이나 영토확장 주장에 있어서 일부 성향이 일치했으나 반자본주의나 기득권에 대한 증오 성향 때문에 그리 입맛 맞는 세력도 아니었고 돌격대 수장인 에른스트 룀은 군부에서 매우 적대시한 인물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1920년대에는 엘리트인 보수파 장교들이 지지할 만한 세력이 아니었다.
제정이 폐지되고 생긴 공화국은 젝트가 감독하고 있는 공화국군(Reichswehr)을 전혀 통제하지 못했으며, 각지의 반란이 일어날 때마다 젝트에게 진압을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부탁'''을 해야만 했다. 1923년 히틀러의 뮌헨 폭동을 포함해서 전국 각지에서 다발적으로 반란이 일어났을 때, 바이마르 공화국 각료회의는 전국을 쉽쓰는 소요사태에 공화국군이 무관심하자 젝트를 출석시켜서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국방군은 도대체 누구의 편입니까?" 그러자 젝트는 성가시다는 듯이 말했다. "바로 저의 편입니다..." 다만 젝트도 1923년의 폭동을 방조하다가는 독일이 사분오열하여 독일 제국의 영광을 되찾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정부의 '''부탁을 받고''' 반란진압에 적극 나섰다.
젝트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군 지휘체계를 변화시켜 후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육군과 해군의 작전권을 내각과 국방부가 아닌 대통령 직속으로 만든 것이 그것이다. 과거 독일 제국은 황제가 명목상 육군 최고사령관, 해군 최고사령관을 맡았고 그에 따라 육군과 해군은 황제 직속이었다. 그 시절로 돌아간 것이다. 젝트 나름대로의 프로이센 군부 전통의 '작전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조치였다.

2.4. 예편 후


1926년 젝트는 육군상급대장(Generaloberst)으로 예편하지만, 그의 영향력은 여전히 군에 남아서 젝트가 확장을 염두에 두고 개편해놓은 육군 조직은 1933년 히틀러 집권 이후 기하급수적인 규모로 확장할 수 있었다. 은퇴 후에는 정치적으로 크게 나서진 않았지만 재무장을 추진한다는 점에서 나치에 호의적이었다.
퇴임후 1933년 5월 22일, 젝트는 난징 국민정부의 군사위원장 장제스의 초청으로 중화민국을 방문하여 국민혁명군 개혁에 관한 비망록을 작성해주었으며 중화민국과 독일이 무역협정을 체결하여 독일의 선진 무기와 공장을 도입하여 중화민국의 전쟁 수행능력을 개선하고 국군을 감축하여 개혁하라고 조언한 후 6월에 귀국했다. 이후 1934년에 3대 주중 독일 군사고문단 단장으로 취임하여 중화민국의 군사 개혁과 공산당 토벌에 협조했다. 젝트는 국민당군을 번번히 패퇴시키던 공산군의 기동전 능력에 주목했고, 이런 기동력을 분쇄하기 위해서는 진지전을 펼쳐야한다고 주장했다. 제5차 초공작전부터는 젝트의 조언대로 토치카를 만들어가면서 서서히 압박하는 방식으로 중화소비에트공화국 해방구를 조여들어갔다. 그리하여 공산군은 해방구를 잃고 중국을 반바퀴 돌아 걸어서 산시성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바로 대장정이다. 자세한 것은 제5차 초공작전대장정 문서 참조.
1년간 군사고문단장으로 재직하며 많은 영향을 남긴 젝트는 건강상의 이유로 1935년 귀국했고 후임으론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으로 정해졌다.[6] 젝트는 친소련-친중국의 입장이었기 때문에 소련 침공의 야심과 중국과 일본 중 동맹체결을 고민하고 있는 히틀러의 외교방침을 위험하게 생각했다. 이후 1936년에 베를린에서 사망했다.
젝트의 후배들은 젝트가 남겨놓은 유산을 가지고 후에 프랑스와 영국과의 전투에서 크게 승리를 거두지만... 히틀러는 젝트가 그토록 우려했던 소련과의 전쟁을 일으켰다가 망하고 만다.

3. 기타


장교의 4가지 유형에 대한 명언을 남겼다고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다.
[1] 외래어 표기법을 원칙대로 적용하면 '폰젝트'가 되지만 '젝트'로 더 많이 알려졌기에 관용적 예외가 인정된다.[2] 현재는 폴란드 영토이지만, 당시는 프로이센령이었다. 폴란드어 명칭은 포모제(Pomorze).[3] 폴란드명은 비엘코폴스카(Wielkopolska).[4] 폴란드어로 구르니 실롱스크(Górny Śląsk).[5] 폴란드 측에서는 독일과 분쟁을 벌인 지역이 폴란드 분할 이전에는 대부분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영토였고 숫적으로도 폴란드인들이 다수를 차지했기에 이 지역을 먹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6] 이후 팔켄하우젠은 3년 간 군사고문단장으로 재직하며 최장기 고문단장이 되었고 중화민국에 엄청난 군사적 영향을 남겼다. 그러다가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한 히틀러의 명령으로 소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