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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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보이는 군복을 입지 않은 수염을 기른 사람은 러시아 대표 '아돌프 아브라모비치 요페'이다. 이 사람은 유명한 트로츠키파 정치인으로, 소련 초기 외교관계에서 인도네시아의 혁명세력을 조직하고 주중국전권대표로 파견하여 중동로 문제와 외몽골에 대해서 협상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1] 1920년대, 후견인인 레프 트로츠키가 실각하고 이오시프 스탈린의 압박이 계속되자 자살한다.
1. 개요
독일어: Friedensvertrag von Brest-Litowsk
러시아어: Брестский мир
우크라이나어: Берестейський мир
리투아니아의 영토를 좀더 넓게 그린 지도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과 러시아의 단독강화조약.
1918년 2월 9일, 독일 제국과 우크라이나 민족 대표들이 브레스트-리토프스크(지금의 벨라루스 브레스트)에서 맺고, '''3월 3일''', 신생 소비에트 러시아[2] 정부가 추후에 인정한 조약으로, 소비에트 러시아는 전쟁 종결의 대가로 독일 제국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약조하였다.
- 소비에트 러시아는 폴란드, 우크라이나, 핀란드, 캅카스, 발트 3국(정확히는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 등 약 70만 ㎢의 영토에 대한 지배를 완전히 포기할 것[3][4]
- 소비에트 러시아는 독일 제국에게 60억 마르크의 배상금을 금으로 지불할 것
- 소비에트 러시아는 적위군을 해체할 것[5]
2. 초기 협상
러시아 혁명의 여파는 제국 전역에 퍼졌다. 블라디미르 레닌이 4월 테제에서부터 주장했던 '무병합 무배상의 민주적 강화' 논리에 따라 1917년 12월부터 소비에트 러시아는 독일과 협상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제국 곳곳에서 러시아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있던 민족들은 제정이 무너지기가 무섭게 독립을 외치기 시작했다. 사실 러시아도 1917년 11월 '전 러시아 내 민족의 권리 선언'을 통해 민족들의 자결권[6] 및 자치권을 인정하기는 했으나 이만큼 일이 커지리라고 예상하지는 못했다.
독일 제국은 이러한 독립 운동을 도와 러시아의 힘을 완전히 빼 놓으려고 했다. 그리고 소비에트 러시아는 공산 정권 수립 이후 레닌의 저서 『국가와 혁명』의 원칙에 따라 군대의 동원을 해제하고 이를 자발적인 '민병대' 조직으로 재편하겠다는 계획을 실현했는데 당연하게도 군인들은 참전보다는 전쟁에서 빠져나가기를 원해서 군대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당시 소비에트 러시아가 굴리는 군대 중 그나마 쓸만한 것이 라트비아 소총 연대[7] 정도였다.
특히 주요한 철강과 석탄 산지였던 우크라이나의 의회가 독립을 선언하자 소비에트 러시아와 독일은 다시 충돌하게 된다. 독일은 우크라이나의 풍부한 자원이 필요했기에 적극적으로 우크라이나를 도운 반면 소비에트 러시아는 자기네 영토가 멋대로 떨어져 나가는 꼴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소비에트 러시아 내에서도 입장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레닌은 15만㎢ 정도의 영토와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한 초기 조약을 받아들여 한 숨 돌릴 여유를 가질 것을 요구했으나, 니콜라이 부하린과 레프 트로츠키 등은 전쟁의 종결은 노동자들의 세계 혁명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오죽하면 트로츠키가 "우리는 인민들 앞에서 몇 건의 성명서만 발표한 후, 이따위 곳(외무부)은 폐쇄해버릴 것이다.'' 라고까지 했을까... 말 그대로 이상에 젖어있던 상황.
마침내 트로츠키는 '''무전쟁-무평화'''라는 유명한 선언을 하며 독일의 최후협상 요구를 거부했고, 최후 통첩일인 2월 10일까지 끝내 소비에트 러시아는 협상에 응하지 않았다. 그 동안 독일은 우크라이나와 이미 조약을 맺고 있었고, 전쟁은 재개되었다. 2월 21일 레닌은 「위험에 처한 사회주의 조국!」이라는 선언을 발표하며 적군의 소집을 요구했고, 2월 23일 적군이 곳곳에서 소집되었다.
3. 소비에트 러시아의 참패와 굴욕적 협상
그러나 러시아 혁명 자체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지쳐버린 군대와 국민들의 항명으로 벌어진 사건인 데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아직 제대로 성립되지도 않은 국가라[8] 힘이 너무나 부족했다. 독일은 훗날 2차 대전 당시의 전격전을 연상시키는 속도로 우크라이나 등 러시아의 지배 하에 있던 동구권 국가들을 세력권 내로 넣으며 파죽지세로 동쪽을 향해 진군했다. 당시 독일군의 전략은 '''기관총병을 기차에 태운 후 수시로 내려서 해당 지역의 공산당 간부들을 사로잡고 다시 기차 타고 진군'''하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철도 진군. 소비에트 러시아는 이 정도의 군대(?)조차 요격해 섬멸하기는 커녕 당장 수도를 지킬 군대도 없었다.
이 결과 소비에트 러시아는 '''약 220만 ㎢의 영토를 상실했다'''. 참고로 한반도가 약 22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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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계획된 독일령. 막돼먹은 이 레벤스라움은 가히 독소전쟁 전성기와 맞먹는다. 사실 캅카스 지역까지 독립시킨 것을 생각하면 사실상 이를 반쯤은 실현했다고 봐도 된다. 그게 독일 통제 안에 있던 건 아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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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계공세에 상당수의 병력을 동원해야 했기 때문에 캅카스 지역을 지배한 적은 없다. 핀란드도 마찬가지.[9]
독일은 동유럽에 완충지대를 만들 것인가, 소비에트 러시아를 최대한 약화시키고 동유럽을 관할할 것인가 고민한 끝에 결국 후자를 선택하여 소비에트 러시아에게 굴욕적인 조약을 강요했다. 그러는 동안 레닌을 위시한 즉시 강화파가 소비에트 러시아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소비에트 러시아는 독일의 요구 조건을 모두 수용하는 조약을 맺게 되었다. 그러나 워낙 조약 내용이 치욕적이였던지라 볼셰비키 중 트로츠키 같은 고위 인사들은 조약에 자신들의 이름을 넣는 것을 거부해 실제 조약에 서명한 러시아 인물들은 급이 낮은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볼셰비키들은 여전히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뒤에서 몰래 전 세계를 향해 공산주의 홍보 활동을 벌였고 전쟁이 길어지면서 지친 사람들이 속출해 당시에는 러시아 뿐만 아니라 유럽에 전체적으로 사회주의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던 때였다. 이에 고무된 볼셰비키들은 '''어차피 우리가 혁명 일으킨 걸 보면 다른 나라들에서도 공산 혁명이 일어날 테니 이 조약은 금방 무효가 될 것'''이라 생각하였다.
이 조약이 얼마나 가혹한 것이었냐면, 러시아 유럽 영토의 절반[10] , 인구는 5600만[11] , 석탄 산업의 90%, 철강 산업의 70% 이상, 산업의 54%, 철도의 26%를 넘기는 것이었다. 산업 비중이 석탄과 철강에 비해 적다고는 하지만 저 정도면 나라 하나 망하는 수준인데다가 근대의 핵심인 석탄과 철강이 대부분 빠진다는 것은 그냥 '''너 망해라'''라는 소리와 다름 없었다. 독일 패전 뒤 베르사유 조약에서 협상국이 독일에게 강요한 조건도 가혹하다지만 이 조약은... [12]
사실 트로츠키 등의 예상이 아주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독일의 국력도 당시 거의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으며, 결과적으로 제1차 세계 대전 말기에 이르면 독일이나 헝가리에서도 혁명이 일어나 각지에서 러시아 식의 소비에트가 생겨나게 된다. 문제는 그게 조약 이후 반 년 후라는 것이고, 또 얼마 안 가 실패했다는 것이다.
정작 독일은 이 조약으로 동부전선에서 많은 것을 챙겼지만 이 과정에서 동맹국들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불가리아 왕국의 협의 없이 독단적인 조약을 맺은 데다 조약 내용도 독일에게만 콩고물이 떨어지는 내용이 많아서 오히려 동맹국의 결속에는 악영향을 가져왔다. 게다가 군 수뇌부가 생각없이 동유럽에 영향력을 확대하려 한 결과로 독일군은 동부 유럽의 광대한 영토의 치안까지 책임져야 했고, 원래 계획했던 것보다 많은 병력이 이 지역에 묶였다.[13] 이 모양이니 동부전선을 정리한 후 남는 잉여병력으로 서부전선을 보강하려는 계획도 크게 틀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정작 춘계 공세에서는 병력들을 제대로 동원하지 못했다.
4. 조약 파기, 그러나...
바로 그 해 독일 제국이 패망하면서 11월 13일 소비에트 러시아는 조약의 무효화를 선언했다. 그러나 협상국은 볼셰비키가 주동이 된 러시아 혁명정부를 인정하길 거부했다. 당시 협상국은 볼셰비키들의 정부 전복과 선동활동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으며 혁명 이전 레닌이 독일의 지원으로 러시아에 온 것 때문에 이들이 독일의 첩자라고 의심하고 있었다. 게다가 러시아 항만에는 철도가 마비되어서 수송되지 못한 엄청난 군수물자가 쌓여 있었기 때문에 협상국은 이것이 볼셰비키나 독일군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했다.
협상국은 러시아 국민들이 전쟁에 지쳐 전쟁의 중단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무엇보다 공산 혁명을 두려워했던 건 협상국이나 동맹국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14] 나중에는 러시아를 자신들의 영향력 안에 넣기 위해 러시아 내전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러시아는 내전으로 몸살을 앓았으나, 다시 세력 확장에 나서 외국의 간섭과 백군의 내란을 진압하는 데 성공하고 우크라이나(소러시아)와 벨로루시(백러시아)를 병합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1920년 폴란드에서 참패하며 중부유럽으로의 진군이 멈추고, 핀란드와 발트 3국은 이 때를 기점으로 완전히 독립했다. 결국 제2차 세계 대전의 시대까지 러시아는 1920년에 얻은 선에 만족해야 했다.
그래도 캅카스 일대의 국가들은 회복하는 데 성공해서, 이 지역의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등을 묶어 캅카스 지역에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을 성립시키고 소련의 구성원 중 하나로 편입하는 데 성공한다.
5. 의의
이 조약의 가장 큰 의의는 폴란드와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가 독립하는 계기였다는 것. 이들은 1919년(폴란드), 1920년(핀란드)과 1921년(발트 삼국)에 차례로 국제 연맹에 가입한다.
당 내부와 정치적인 여파로도 이 협정을 통해 독일에게 당장의 팔 한쪽을 내주고, 당장의 백군을 격파하는데 집중하여 혁명을 굳힌다는 전략을 완전히 침몰시켰다. 다른 곳도 아니고 협정에 들어간 키예프 등의 우크라이나 드네프르 강 동쪽, 벨라루스 동부 등은 그 당시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1500년대부터 수 백년 간 확장해 온 자국의 영토였는데 이걸 조약 하나로 내준다니 이데올로기적 문제를 넘어 감정적 차원에서 수많은 러시아인들이 못 받아들였다.
좌파 사회혁명당, 아나키스트 등 러시아의 많은 비-볼셰비키계 좌익 혁명 세력들이 10월 혁명 때만 하더라도 '볼셰비키들 하는 것은 마음에 안 들지만 일단 혁명은 같이 싸워야 한다'라는 입장으로 볼셰비키와 협력했으나, 이 조약 때문에 결정적으로 반목이 극에 달해 이제까지 볼셰비키의 우당으로서 행보를 같이 하던 사회혁명당 좌파와 아나키스트들이 반-볼셰비키 세력에 가담해 레닌은 이제 멘셰비키, 왕당파, 공화주의자, 등의 '우익' 백군 뿐만 아니라 볼셰비키식 수직적인 국가 주도의 사회주의 자체에 반발하는 좌익 또한 세력을 적으로 돌렸다. 사회혁명당 좌파와 아나키스트들은 이전부터 도시 내부의 테러 활동과 선동, 침투 등에는 이골이 굳은 전문가들이라[15] 많은 수의 볼셰비키 핵심 당원들이 이런 저런 식으로 암살을 겪고, 레닌 본인 또한 사회혁명당 좌파의 암살 공작으로 죽을 뻔하다가 중상을 입어 골골거리며 비교적 단명하는데 가장 핵심적인 원인을 제공했다.
또한 이 사건과 러시아 내전을 겪으면서 신생 소련은 '''우리는 자본주의자들에게 포위당하고 있다'''는 편집증에 시달린다. 동맹국이나 협상국이나 공산주의를 타도하고 러시아로부터 콩고물을 떼어먹겠다는 데에는 의견이 비슷했다. 끝내 이러한 이미지는 냉전 종결까지 소련에 계속 남았고, 지금도 그 잔재가 있다.
러시아가 동유럽의 NATO 가입에 민감하게 반응함은 다 까닭이 있다. 사실 러시아 입장에서는 현재 러시아의 국경선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내줄 거 다 내준 영역과 가까우니 당연히... 러시아가 친러 반서방 국가인 걸로도 모자라 사실상 문화적으로 러시아나 다름없는[16] 벨라루스와의 재통합을 주저하는 이유 중 하나도, '''벨라루스와 합치는 순간 NATO 소속인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가 바로 코앞에 국경을 맞대고 대치'''하는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냉전 당시에 동독과 폴란드를 WP 최전방의 범퍼로 삼았듯[17] 벨라루스라는 범퍼가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는 논리인 셈이다.
소련 시절에 외몽골(現 몽골국) 독립을 지원한 이유도 동일하다. 바로 몽골이라는 중국(당시 자본주의 국가인 중화민국)과의 범퍼가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로 인해 몽골은 사실상 러시아 영향권으로 편입되어, 역사적으로 자기네 권역이었던 동아시아가 아닌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같이 놀게 되었다. 글자를 키릴문자를 쓰게 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 외에도 북한도 한·일과의 범퍼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완충국 문서 참조.
6. 후일담
조약이 맺어진 브레스트-리토프스크는 폴란드 제2공화국의 영토로 들어갔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는 "리투아니아의 브레스트"라는 뜻이었기 때문에[18] 1920년대에 "브제시치 나드 부기엠"[19] 으로 개칭되었다. 그러다 소련과 독일이 폴란드를 나눠먹기로 한 1939년의 폴란드 침공 이후에는 독일과 소련의 세력의 경계지점이 되었다. 1939년에는 여기서 독소 양군이 합동 퍼레이드까지 벌이는 등 화기애애했으나,[20] 2년후에는 독소전쟁의 첫 포화가 터진 곳이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2차 대전 이후 브레스트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소련의 최서단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가, 지금은 벨라루스의 영역이 되었다. 브레스트는 소련의 영웅 도시 중 한 곳이다.
한편 훗날 이오시프 스탈린의 팽창 정책도 넓게 보면 결국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서 양보한 영토를 재건하기 위한 것에 가까우며, 루마니아 왕국에게 베사라비아 지역을 반환받은 것, 발트 3국을 강제 병합한 것 모두 그 일환이었다. 그 결과 소련은 2차 대전 후, 폴란드 절반과 핀란드 4/5를 제외하고는 제정 러시아의 영토를 거의 수복했다. 허나 나중에는...
[1] 이후에 중국으로 파견되어 쑨원과 회담하고 1차 국공합작의 결성에 큰 역할을 했다.[2] 어디까지나 "소비에트 러시아"다. 소련(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은 1922년 12월 30일에야 탄생했기 때문. 그 소련에 소비에트 러시아가 (주축으로서)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벨로루시, 소비에트 자캅카스와 함께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조약이 '''소련'''과 독일 제국 사이의 조약이라 칭한다면 엄밀히 따져 틀린 말이 된다. 소비에트와 독일 사이의 조약이라 하면 맞는 말이다.[3] 조약에 의하면 적어도 형식적인 독립을 보장 받은 우크라이나,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핀란드, 벨라루스 등과는 달리, 폴란드, 리투아니아, 쿠를란드 지역의 운명은 동맹국이 결정한다고 되어있었다. 하지만 전쟁에 패배하는 날까지 공식적인 영토 합병은 없었다.[4] 이 가혹한 조약의 명분은 민족자결주의였다. 훗날 협상국이 더 가혹한 조약들을 동맹국에게 강요할 때 내세운 명분이 민족자결주의인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5] 적위군(Red Guard)은 붉은 군대(Red Army)의 전신이다. 볼셰비키당의 사병이었다.[6] 독립을 포함한다.[7] 연대라고 하지만 규모는 일반적인 연대보다 훨씬 컸다. 이들은 나중에 러시아 내전에서 맹활약했다.[8] 소련은 볼셰비키의 내전 승리 이후 1922년에 건국되었다.[9] 다만 캅카스는 얼마 뒤에 오스만 제국이 캅카스 국가들을 침공하면서 일시적으로 점령한다.[10]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전쟁 전의 모든 영토와 비슷했다.[11] 전쟁 전 러시아 인구의 1/3[12] 그런데 베르사유 조약이 이 조약 보다 크게 관대하지 않은 것이, 베르사유 조약에서 독일은 러시아가 내야 했던 60억 마르크 보다 훨씬 많은 1320억 마르크를 내야 했다.[13] 조약 실행과 치안 유지를 위해 주둔시켜야 했던 병력이 약 110만 명으로 추정된다.[14] 이후의 나치 독일이 극렬한 반파시즘주의자였던 루즈벨트 대통령이 죽자 기뻐한 것도 연합국과 추축국이 손 잡고 소련을 견제하리라는 기대를 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처칠은 독일을 다 패고 나서 언싱커블 작전으로 소련을 공격하려고 했다. 대일전선에 소련 도움이 필요했고, 유럽 반을 먹은 소련을 상대로 또 싸우는건 골골거리는 다른 유럽 국가가 아닌 미국이 해야 한다는 소리였으므로 기각됐지만.[15] 이 때만 하더라도 볼셰비키, 멘셰비키로 대표하는 러시아 사회민주당, 즉 정식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 세력들은 이러한 테러 활동과 산발적 혁명 활동을 '좌파 모험주의'로 보고 오히려 배격했다.[16] 벨라루스인의 70%가 '''공식적으로 자기네 나라 말인''' 벨라루스어를 못한다(...).제주도 사람이라고 전부 다 제주도 사투리로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듯이...[17] 당초 계획은 독일을 반 갈라서 동독 전체를 폴란드에 합치려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그 반의 다시 반만 폴란드에 합치고 나머지 반으로다가 동독이라는 독일인데 뭔가 독일 같지 않은(...) 국가를 만들게 되었다. 세계 제일의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일찍부터 공업지대로 개발된, 동부 프로이센 최고의 알짜배기 땅인 슐레지엔이 폴란드로 넘어가 실롱스크로 바뀌어 버렸기 때문이다.[18] 참고로 프랑스 북서부에도 브레스트라는 도시가 있다.[19] Brześć nad Bugiem, 부크 강 연안에 있는 브레스트라는 뜻.[20] 그걸 참관한 소련군 장교는 유대계 소련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