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폴트 모차르트
Leopold Mozart
1.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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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네임은 '''요한 게오르크 레오폴트 모차르트'''(Johann Georg Leopold Mozart). 1719년 11월 14일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출생, 1787년 5월 28일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사망.
독일의 음악가, 바이올리니스트, 지휘자, 음악교육자.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아버지'''로 유명하지만 그 자신도 자수성가한 대단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아우크스부르크의 제본공 요한 게오르크 모차르트(1679~1736), 어머니는 그의 2번째 아내 안나 마리아 줄처(1696~1766)로 모두 음악과는 별로 상관이 없었기 때문. 레오폴트 자신은 어렸을 때 성당에서 성가대 활동을 했는데 음악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한 건 대략 그때 쯤으로 보인다.
레오폴트의 부모는 그를 가톨릭 사제로 키우고 싶어하여 1732년경 아우크스부르크에 있는 예수회 계열의 성 살바토르 김나지움(St. Salvator Gymnasium)에 보냈는데, 1735년에 괜찮은 성적(magna cum laude)으로 졸업했다. 레오폴트는 이듬해인 1736년 같은 계열의 상급학교인 성 살바토르 리세움(St. Salvator Lyceum)에 진학했는데, 이때부터 학교공부 대신 음악과 자연과학 등에 더 관심을 가졌으며 아마추어 가수이자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하기도 했다. 마침 이 해(1736)에 부친이 사망하자 애초에 사제가 되고 싶지 않았던 그는 바로 리세움의 학업을 포기해 버리고 다음해(1737)에 베네딕트 수도회 계열의 잘츠부르크 대학에 진학하여 철학과 법학을 전공했다. 그리고 1738년 철학 학사 학위를 따긴 했는데, 그 다음 해에는 자연과학 수업에 자주 결석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했다.
애초에 부모가 성직자가 되라며 보낸 학교를 멋대로 그만두고 몰래 대학에 입학한데다 부친이 사망해 버렸기 때문에 부친과 연결된 후원자들의 도움도 다 끊겨버렸다. 레오폴트는 별 수 없이 잘츠부르크의 명문귀족 요한 밥티스트 투른 발사시나 탁시스 백작가의 시종으로 들어갔으며, 이 때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하면서 비로소 레오폴트의 음악인생이 시작된다. 그간 음악은 전문적으로 배운 것이 아니라 취미삼아 했었기 때문에 이후 전업 음악가가 되기까지 상당한 노력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작곡도 취업을 한 후부터 시작했고, 1743년에는 무보수로 궁정악단 제4바이올리니스트가 되었으며 잘츠부르크 성당에서 소년 합창단원들에게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가르쳤다. 1747년 잘츠부르크 토박이 집안의 딸 안나 마리아 페르틀(Anna Maria Pertl, 1720년~1778년)을 만나 결혼하고, 1758년에는 제2바이올리니스트로 진급, 1763년에는 드디어 궁정부악장으로 진급했으며 사망할 때까지 쭉 그 자리를 지켰다. 다만 후술하는 것처럼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자주 연주여행을 다니면서 자리를 비웠던 탓에 결국 악장으로 승진하지는 못했는데, 레오폴트 시절 찰츠부르크의 궁정악장은 대작곡가 요제프 하이든의 동생이었던 미하엘 하이든이 차지했으며 1806년에 사망할 때까지 이 자리를 지켰다.
안나 마리아 페르틀 사이에서는 3남 4녀, 총 7명의 아이가 있었다. 그런데 그 중 5명은 태어난지 얼마 안돼서 금세 죽었고, 살아남은 아이는 셋째 딸 '''마리아 안나 발부르가 이그나티아 모차르트'''(Maria Anna Walburga Ignatia Mozart, 1751~1829, 통칭 '''나넬''')와 셋째 아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2명 뿐이다.
레오폴트가 어떻게 음악가로서 성공할 수 있었는지, '''정말 순수하게 음악가로서 높은 자리에까지 올랐는지''' 상세하게 기록된 자료는 없다. 뒤늦게 음악을 시작했기 때문인지 작곡 실력도 평범하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이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들을 보면 나름 충실한 구성을 갖추고 있지만 특별히 독창적이지는 않으며 작곡수법도 평이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음악학자, 교육자로서의 자질은 뛰어났다는데 전문가들은 동의하고 있다. 그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재능을 발견한 뒤 어린 아들을 데리고 유럽 전역을 여행하며 모든 뒷바라지를 했다는 것으로도 그의 교육자적인 역량은 충분히 입증된다. 막내 볼프강이 태어난 1756년에는 '''《바이올린 연주법(Versuch einer grundlichen Violinschule)》'''이라는 바이올린 교습서를 펴내는데, 이 책은 사실상 유럽 최초의 바이올린 교습서라는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 게다가 18세기 음악 이론의 중요한 자료가 되기 때문에 음악사적 가치도 높다. 이 책은 출판된 후 수십 년동안 바이올린 교습서의 기본교재로 활용되었고, 현대에도 추천할 만한 바이올린 지도서로서 역할을 톡톡히 한다. 이 책은 2010년 한국에도 번역돼 나왔다.
바이올린 연주법 외에도 딸 나넬에게 하프시코드를 가르치기 위해 '''나넬 노트북(Nannerl Notenbuch)'''이라는 책도 썼는데 이 책도 현존하고 있다. 이 나넬 노트북은 건반악기 초보자에게 어울리는 쉬운 곡과 연주 방법 등이 수록되어 있으며, 이름이 나넬 노트북이긴 하지만 아들 볼프강을 가르칠 때도 이 책을 활용했다.
한편으로 시종으로 취직해서 궁정부악장까지 오른 것을 보면 윗사람의 기분을 맞추는 수완도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덕에 자식들과 장기간 연주여행을 다니면서도 자신의 고용주였던 대주교 지기스문트 폰 슈라텐바흐(Sigismund Graf von Schrattenbach)의 눈밖에 나지 않고 일종의 유급휴가를 받을 수 있었다.
2. 레오폴트와 아들 볼프강[2]
막내아들 볼프강은 타고난 음악 천재였는데, 특별한 교육을 받지 않고 단순히 누나(나넬)가 아버지에게 음악 레슨을 받는 것을 옆에서 지켜본 것만 가지고 악기를 연주하고 작곡까지 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아들의 비범한 재능을 알아챈 레오폴트는 음악가로서의 커리어를 희생하는 대신 나넬과 볼프강의 음악교육과 출세를 위해 연주여행을 계획하게 된다. 잘츠부르크는 너무 작은 동네였기 때문에 좀더 큰 무대에 진출시키고 싶었던 것. 이 연주여행 덕분에 두 남매의 음악적 재능이 유럽 전역에 알려졌으며 귀족들은 앞다투어 이 남매를 초대했다. 심지어 마리아 테레지아나[3]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3세와 같은 매우 높으신 분들 앞에서 연주하기도 했다.
레오폴트 가족의 연주여행은 총 3차례 이루어졌는데, 1, 2차 연주여행에서는 온 가족이 동행했으나 이탈리아를 순회했던 3차 연주여행에서는 이미 사춘기를 지난데다 음악교사로 취직한 나넬과 부인은 동행하지 않고 아빠와 아들만 참여했다. 여행을 처음 시작할 때 5살의 꼬마였던 볼프강은 3차여행을 시작할 무렵 어느덧 13살이 되었는데, 레오폴트는 '신동'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던 아들이 어린 시기를 넘기기 전에 어떻게든 취직을 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결국은 뜻을 이루지 못한다. 다만 볼프강이 이 3차 여행에서 이후 위대한 오페라 작곡가로 성장할 수 있는 경험을 얻었다는 것이 성과라면 성과.
3번의 구직 여행이 성과없이 끝나자 볼프강은 15살경에 결국 아버지가 있는 잘츠부르크의 궁정음악가로 취직했으며 이후 1781년까지 약 10년가량 이 직책에 있었다. 그런데 1772년 잘츠부르크 대주교가 히에로니무스 폰 콜로레도 백작으로 바뀌면서 볼프강의 인생도 반전의 계기를 맞게 된다. 이 콜로레도 대주교는 굉장히 권위적이고 꼰대스러운데다 예술에 대한 이해력이나 조애도 별로 없는 인물이었다. 대주교라는 직책 때문인지 예식을 위한 종교음악 이외의 다른 음악에는 별반 관심이 없었고 음악가들에 대한 처우나 월급도 매우 박했다. 재능과 혈기가 넘쳤던 젊은 음악가 볼프강이 이처럼 음악에 관심 없는 상전과 충돌을 일으킬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귀족 집안의 하인으로 시작해서 어렵게 자수성가한 아버지와 달리 어렸을 때부터 신동으로 온갖 찬사와 각광을 받았던 볼프강은 까다로운 궁정 예법이나 귀족들의 꼰대질을 견뎌내지 못했고 그들의 비위를 맞출 생각도 전혀 없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들과 대주교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했던 레오폴트는 계속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볼프강은 하루빨리 잘츠부르크를 떠나고 싶어 안달이었으며 궁정 음악가 자리를 몇달씩 비워놓고 뮌헨/빈/파리 등의 대도시를 다니면서 부지런히 구직활동을 하다가 나중에는 아예 궁정음악가 자리를 팽개치고 구직활동에만 전념했다. 이 시기 레오폴트도 아들과 동행하기 위해 휴직계를 내려 했지만 '''"넌 그 동시에 해고"'''라는 통보를 받고 물릴 수밖에 없었으며 대신 자신의 부인이 아들을 따라나섰다. 이처럼 애타게 구직을 했건만 이렇다 할 인맥도 없었고 나이가 들면서 '잊혀진 유망주' 취급을 받고 있었던 볼프강의 구직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그 와중에 모친 안나 마리아가 파리에서 전염병으로 객사하는 비극까지 겪었다.
모친의 사망 이후 볼프강은 레오폴트의 간청으로 억지로 잘츠부르크 궁정음악가로 재취업하지만 이미 마음은 그 동네를 완전히 떠난지 오래였다. 복귀한지 2년만인 1781년 볼프강은 기어이 대주교와 담판을 짓고 궁정음악가 자리를 던져 버렸으며, 곧장 비인으로 가서 프리랜서 생활을 시작한다.
그나마 아들이 비인에 가서 부친의 마음에 드는 행동을 했으면 모르겠는데 결혼문제로 또 속을 썩였다. 비인에 간 이듬해인 1782년 볼프강은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이 머무르던 여관 주인의 딸이었던 콘스탄체 베버와 결혼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레오폴트는 볼프강이 이왕 비인에 간 김에 제대로 출세해서 좀더 높은 집안의 여자와 결혼하기를 바랬기 때문에 당연히 이 결혼을 강하게 반대했는데, 결국 볼프강과 콘스탄체가 결혼하자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았고 콘스탄체를 며느리 취급도 해주지 않았다. 다만 이로 인해 부자가 완전히 절연한 것은 아니었고 음악과 관련해서는 계속 서신을 주고받았다.
이처럼 볼프강은 취직문제부터 시작해서 결혼문제까지 아빠 말을 듣지 않았으며, 레오폴트는 기껏 키워놨더니 삐딱선만 타는 아들에 대한 걱정을 끌어안고 1787년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4] 딸 나넬은 모친의 사망 이후 집안의 가사를 대신 맡았으며 그 때문인지 당시에는 매우 늦은 나이였던 32살이 돼서야 결혼을 했다. 그나마 말년의 레오폴트는 딸 나넬이 늦은 나이에 낳은 손자를 엄청나게 좋아했으며 죽을 때까지 이 외손자를 키우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다만 볼프강이 무조건 아버지의 속만 썩였던 것은 아니다. 아들이 비인에서 드디어 작곡가로 성공을 거두고 요제프 하이든을 비롯한 당대의 유명 음악인들이 자신의 아들을 극찬하자 이에 고무된 레오폴트는 1785년 2월 빈에 있는 아들의 집을 깜짝 방문했다. 이 때 부자간 분위기가 상당히 좋았으며 며느리와의 앙금도 어느 정도 풀렸다고 한다.
1787년 레오폴트가 사망하자 빈에 있는 볼프강은 너무 바쁜데다 잘츠부르크까지 너무 멀어서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부친의 장례식에 참석하지도 못했으며[5] , 그 후 볼프강도 4년만에 사망했기 때문에 누나 나넬과도 영영 만나지 못했다.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묘는 집안 사람 네 명, 즉 며느리 콘스탄체 베버 모차르트와 그녀의 이모 제노베파 베버, 나넬의 딸 자네테 베르톨트 폰 존넨부르크, 장모 오이프로시나 페르틀과 함께 있다. 생전에는 매우 사이가 좋지 않았던 며느리 콘스탄체와 함께 묻혀 있는 것이 놀라운데, 콘스탄체가 잘츠부르크에서 말년을 보내게 된 사유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문서의 콘스탄체 부분을 참고 바란다.
3. 작품
▲ 사냥 교향곡 (Sinfonia da Caccia) G장조 1악장
▲ 트럼펫 협주곡 D장조
▲ 현악과 통주저음(basso continuo)[6] 을 위한 교향곡 B♭장조
일반적으로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 장난감 교향곡은 실제로는 그의 작품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장난감 교향곡 참조.
[1] 여기 있는 내용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문서에 좀더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이 부분은 주로 레오폴트 입장에서 서술한 것이다.[2] 여기 있는 내용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문서에 좀더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이 부분은 주로 레오폴트 입장에서 서술한 것이다.[3] 마리아 테레지아를 만났을 때 그녀의 딸이었던 마리 앙투아네트를 만났다. 이 때 벌어진 유명한 일화에 대해서는 모차르트 항목 참조.[4] 이 부분은 2017년 2월 14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루어졌다.[5] 볼프강은 이 때 한참 오페라 돈 지오반니를 작곡에 열중해 있었기 때문에 시간을 비우기 어려웠던 점도 있다. 물론 아무리 그래도 부친의 장례식에 가지 않은 것은 너무한 처사이긴 하다.[6] 건반악기 주자가 단순하게 제시된 저음 위에 화음을 즉흥으로 연속 보충하여 반주를 완성하는 것. 악보에는 왼손 부분만 적혀 있는데 오른손을 놀게 하지 않기 위해 그에 맞춰 움직여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