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렌 바콜
1. 개요
미국 영화 협회(AFI) 선정 가장 위대한 여성 배우 20위
2. 생애
1924년 9월 16일 뉴욕 브롱스에서 외동 딸로 태어났다. 본명은 '베티 조앤 퍼스크 (Betty Joan Perske)'로 부모님이 로런이 5살 때 이혼하시면서 루마니아 출신의 어머니의 성인 '''버콜'''로 성을 바꿨다. 부모님이 이혼 후 아버지는 더 이상 보지 못했고,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굉장히 사이좋은 모녀지간이었다고 한다. 부모님 두 분 다 유대인이시다.
1945년 3월 1일 로런 버콜은 배우 험프리 보가트와 결혼식을 올렸다. 험프리 보가트가 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함께 살았다.
험프리가 사망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로런은 가수이자 배우였던 프랭크 시나트라와 교제를 시작했다. 한 방송에 나와 본인이 시나트라와의 관계를 끝냈다고 말한 적 있었지만, 그녀의 자서전에서는 이야기가 좀 다르다. 자서전에서는 시나트라가 결별을 통보했다고 적혀있다. 결별 이유는 시나트라가 로런 바콜에게 했던 프로포즈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시나트라는 로런이 이 사실을 언론에게 알렸다고 생각 해 화가나서 결별을 고한 것. 사실은 로런은 자신의 친구였던 '어빙 폴 라자르'에게 시나트라에게 프로포즈 받았다는 사실을 알렸고, 이 친구가 가십기자와 만나 로런에게서 들은 얘기를 미주알고주알 다 말했던 것이었다...
그렇게 바콜은 시나트라와 결별 후 배우 제이슨 로바즈와 교제를 시작해 1961년 7월 16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결혼식을 올리려 했으나, 오스트리아 당국에서 혼인 허가증을 교부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결혼이 미뤄졌다. 네바다 주에서도 혼인을 거부당하자, 1961년 7월 4일 결혼식을 올릴 수 있는 멕시코 엔시나다까지 차를 몰고 가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이렇게 고생해서 결혼을 올린것도 잠시 제이슨과는 1969년 이혼하였으며, 후에 로렌 바콜의 자서전에 따르면 제이슨 로바즈의 알코올 의존증이 이혼의 원인이 됐다고 한다.
3. 경력
1941년 부터 뉴욕에 있는 '미국 극예술 아카데미'에서 수업을 받기 시작했으며, 커크 더글러스와 동급생이었다. 수업을 받는 동안 극장 안내원, 모델일을 시작했다. 1942년 17살 때부터 브로드웨이에서 본격적으로 연기활동을 시작했으며, Johnny 2 X 4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그 시절 로런은 어머니와 그리니치빌리지에 살고있었으며, 같은 해 그리니치빌리지 미인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었다.
10대 시절 모델일을 하던 도중 하퍼스 바자커버를 찍게 되었고, 미국-프랑스 칼럼니스트였던 다이애나 브릴랜드의 눈에 띄면서 18살 때 '줄리안 웨스트'를소개 받게 된다. 줄리안 웨스트는 로런 버콜이 보그커버를 찍을 수 있게 밀어주었으며, 로런 버콜은 1943년 3월 보그 커버모델이 되었다. 보그 커버
중요한 건, 이 보그 커버 한 장으로 로런의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다. 로런의 첫 데뷔작인 '소유와 무소유'의 영화 감독 하워드 혹스의 부인이었던 슬림 키스가 이 표지를 보고 로런 버콜의 스크린 테스트를 남편에게 제안 했던것.
사실 연기를 잘한다는 이미지는 적었던 배우다. 배우 전성기를 얘기할땐 하워드 혹스나 험프리 보가트와 함께한 영화들만 자주 거론되고 그나마도 주변 배우들보다 발연기를 한다는 얘기가 당시에도 나온 적이 있었다. 빅 슬립이 대표적. 보가트 사망 후 경력이 생긴 이후로는 평타 치는 연기를 선보였고 딱 한 번 여우조연상 후보도 올랐으나, 여전히 연기상과는 거리가 멀어 대표작은 혹스와 보가트와 함께한 영화들에 머물러 있었다. 스타 아우라나 에피소드가 역대급으로 강렬해서 장수한 케이스라 할 수 있다.
4. 헌액
5. 여담
해리 트루먼 대통령과 사진이 찍힌 적이 있다. 이후 트루먼의 지인이 "자네 부인이 사진에 대해 뭐라 말 안하던가?"라고 물어보자 트루먼은 "아내가 '당신 피아노를 치는 거예요? 아니면 그 여자랑 노는 거예요?'라고 묻던데?"라고 말했다. '피아노를 치다'와 '놀다' 모두 영어로는 'to play'임을 이용한 트루먼의 말장난.
외모상으로 캐서린 헵번과 꽤나 유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