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워드 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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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ard Hawks'''
(1896. 5. 30 - 1977. 12. 26)[1]

'''좋은 영화는 끝내주는 장면 세 개에, 나쁜 장면만 없으면 된다.'''

''A good movie is three great scenes and no bad ones.''[2]

1. 개요
2. 소개
2.1. 존 포드와의 관계
3. 일생
4. 기타
5. 대표작 일람


1. 개요


미국영화 감독.
고전 할리우드거장 중 한 명이며, 당대 '''거의 모든 장르'''에서 뛰어난 활약을 선보여, 통칭 "'''장르의 대가'''"라고 불린다.
지금은 그 유명세가 조금 줄었지만, 생전엔 앨프리드 히치콕, 장 르누아르와 함께 영화사 최고의 거장으로 대우받았다.

2. 소개


할리우드 황금기 시절[3] 거장 중 하나이자,[4] '''거의 모든 장르'''에서 걸작과 대표작을 만들어낸 괴물 같은 감독.
미국에 마틴 스콜세지, 스티븐 스필버그, 브라이언 싱어, 로버트 알트만, 마이클 만과 같은 거물 감독들도 혹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으며, 여러번 경의를 표했다. 그 영향은 해외에도 뻗쳐, 장 뤽 고다르프랑수아 트뤼포를 필두로 한 누벨바그 감독들이 하워드 혹스를 영화사상 최고의 감독 중 하나로 꼽았으며, 작품에서도 그 영향을 서슴없이 드러냈다.
'서부극존 포드', '스릴러히치콕', '블랙 유머빌리 와일더'처럼, 거의 한 장르만 집요하게 파고든 당대 거장들과 달리, 혹스는 할리우드 최신 유행에 따라 항상 새로운 장르에 도전했고, 그만큼 다양한 걸작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그가 손댄 장르만 해도 '''코미디, 스릴러, 느와르, 서부극, 로맨스, 뮤지컬, 전쟁, Sci-Fi[5] 등''' 모두 미국 영화의 근간이 되는 장르들이라, 지금도 미국 영화계에선 하워드 혹스를 각 장르의 시조이자 모범답안으로 여겨 깊이 연구하고 뒤따르고 있다.
특히 스크류볼 코미디와 남성 전문가들의 팀웍 묘사에 능했는데, 존 카펜터는 후자의 영향을 많이 받은 편이다. 멀리 갈것도 없이, 카펜터의 대표작 더 씽은 혹스가 만든 원작을 리메이크한 영화다.
시대 유행에 발맞춰 활약했기 때문에, 하워드 혹스의 경력은 당시 할리우드 유행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어, 그의 작품을 따라가다보면 고전 할리우드 역사가 단번에 정리된다. 또한 같은 배우를 돌려 쓰지 않고 영화마다 새로운 배우를 써서, 그와 함께 작업한 배우 목록도 화려하다. 마릴린 먼로, 캐서린 햅번, 로렌 바콜, 리타 헤이워드, 바바라 스탠윅, 루이스 브룩스,[6] 존 웨인, 험프리 보가트, 캐리 그랜트, 로버트 미첨, 게리 쿠퍼, 존 베리모어[7], 커크 더글러스 등, 모두 한 시대를 풍미한 위대한 배우들임을 알 수 있다.
배우들과 단순히 같이 일하기만 한 게 아니라, 각 배우의 연기를 최대로 끌어내기도 하여서, 모두 하워드 혹스를 통해 대표작을 찍거나 뛰어난 연기로 주목을 받았다. 존 웨인을 연기 못한다고 무시하던 존 포드도, 혹스의 〈붉은 강〉을 보고 존 웨인을 다시 보게 되었을 정도.

2.1. 존 포드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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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존 포드, 하워드 혹스, 여배우 미셸 캐리.[8]
다양한 장르에 손을 댄 하워드 혹스였지만 특히 서부극에서 실력을 발휘했기에, 서부극의 대가인 존 포드와 자주 엮였다.
실제로 이 둘은 동종업계 종사자이자 실력있는 동료감독으로 '''서로 알고 지냈으며''', 각자의 실력에 깊은 존중감을 가졌다. 존 웨인 같은 유명배우를 공유하기도 했고, 틈틈이 사적인 만남을 가지기도 했다.[9] 말년의 존 포드가 건강악화로 입원했을 땐, 하워드 혹스가 피터 보그다노비치와 함께 병문안을 하기도 했다.
존 포드와 하워드 혹스의 연출 차이에 대해선, 오슨 웰스가 한 문장으로 명쾌하게 정의했다.

'''"존 포드는 운문이고, 하워드 혹스는 이다."'''[10]

오슨 웰스

평론가 태그 갤러거도 비슷한 취지의 글을 썼다.

'''"하워드 혹스 영화의 대사를 우리는 그 배우들과 함께 기억하며 존 포드의 영화의 대사들은 그 화면의 구도와 함께 기억한다"'''

태그 갤러거

당대엔 라이벌이나 동료로 불렸던 둘이었지만, 시간이 흘러 '''존 포드가 1인자이고, 하워드 혹스가 2인자인 것처럼 평가가 달라졌다'''. 아무래도 하워드 혹스를 지지하던 세력이 쇠퇴하고, 존 포드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서 인 듯하다. 또한, 유행에 철저했던 하워드 혹스와 달리, 존 포드는 유행과 상관없이 작품을 만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영화광으로 유명한 쿠엔틴 타란티노 같은 감독은 하워드 혹스가 존 포드보다 더 뛰어난 영화 감독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하워드 혹스는 "나는 할 수 있는 한 매번 존 포드를 모방했다"며 자주 존 포드를 칭찬한 반면, 존 포드는 그 과묵한 성격대로 말을 많이 남기지 않아, 발언만 놓고 보면 묘하게 상하관계처럼 보인다.

3. 일생


1896년, 인디애나 주에서 종이 공장장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부모의 직업이 직업인지라, 경제적으론 전혀 걱정없는 윤택한 유년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대신 이사를 많이 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동안 위스콘신, 캘리포니아 순으로 이사했고, 고등학교 졸업 후엔 뉴햄프셔로 옮겨 살았으며, 이후 뉴욕으로 옮겨 코넬 대학교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다고 한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공군으로 활동하였고, 종전 후 기계공, 디자이너, 레이서 등의 직업을 전전했으며, 공군 경력을 살려 비행기 파일럿을 하기도 했다.
1922년, 파라마운트 픽처스 스토리 부서에서 일하며 영화계에 입문했다. 머리가 비상했던 하워드 혹스는, 연출하기 힘든 장면이 있을 때마다 해결사처럼 나타나 손쉽게 연출해내는 재능을 보였고, 그 재능을 인정받아 1926년에 데뷔작인 〈영광의 길 ''The Road to Glory''〉을 찍게 된다.
이후 1970년 은퇴작 〈리오 로보 ''Rio Lobo''〉를 찍기까지, 약 40여편의 영화를 만들었다.[11]
1977년, 자택에서 애완견에 걸려 넘어져 부상을 입었는데, 이에 의한 합병증으로 몇 주 뒤 별세했다. 향년 81세.

4. 기타


생전에 여러 영화인들이 경의를 표한 것과 다르게, 시간이 지날수록 잊혀지고 있는지라(...) 영화 관련 강의나 모임에서 하워드 혹스가 나오면 다소 어색한 풍경이 벌어진다고 한다.

" 상황은 학생들과 하워드 혹스의 〈리오 브라보〉를 서로 논쟁하듯이 의견을 나누는 수업 중에 일어났다. 다소 신기한 것은, 학생 중에 대부분은 이 영화를 그 전에 본 적이 없었으며, 심지어 하워드 혹스의 영화를 처음 본 학생도 있었다..."[12]

[13]

정성일

어니스트 헤밍웨이랑 친구 사이였다고 한다.
타인에게 한마디도 지지 않는 강인한 여성상을 자기 영화 속에서 즐겨 썼는데 이를 부르는 '혹스식 여인'이라는 표현도 있다. 실제로 본인의 이상형이었는지 두번째 부인이자 뉴욕 사교계 아이콘이었던 낸시 키스[14]는 그야말로 궁극의 '혹스식 여인'이었다고. 여성 관계가 상당히 복잡했던 걸로 유명하다.

5. 대표작 일람


총 작품수는 '''46편'''이며,[15] 이곳엔 대표작들만 나열한다.
  • 1926년, 〈영광의 길〉[16]
  • 1932년, 스카페이스
  • 1938년, 〈아이 양육〉
  • 1939년, 〈천사만이 날개를 가졌다〉
  • 1940년, 〈그의 연인 프라이데이〉
  • 1941년, 요크 상사[17]
  • 1944년, 〈소유와 무소유〉
  • 1946년, 빅 슬립 (a.k.a. 명탐정 필립)
  • 1948년, 〈붉은 강〉
  • 1951년, 괴물
  • 1953년,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
  • 1959년, 〈리오 브라보〉
  • 1966년, 엘도라도
  • 1970년, 〈리오 로보〉

[1] 동시대 영화감독인 찰리 채플린과 하루 차이로 타계했다.[2] 출처마다 문장이 다르다. great 대신 good이 들어간다든가.[3] 1920년대~1960년대[4] 다른 거장으론 존 포드, 앨프리드 히치콕, 빌리 와일더, 윌리엄 와일러 등이 있다.[5] 특히 SF 영화의 위상을 올리는데 큰 역할을 한 사람이다. 제작한 더 씽바디 스내처 모두 미국 SF 호러 영화에 큰 자산이 되었을 정도.[6]판도라의 상자 ''Die Büchse der Pandora''〉(1929) 주연[7] 드루 배리모어할아버지[8] 〈엘도라도 ''El Dorado''〉(1967) 촬영장에서 찍은 사진[9] 사실, 당시 할리우드가 워낙 좁은 세계다보니, 유명감독들끼리 사적으로 친해지기 쉬웠다.[10] #발언 출처[11] 기록상 그의 진짜 마지막 경력은, 1971년프렌치 커넥션〉에 각본가로 잠깐 참여한 것이다.[12] #발언 출처[13] 단, 이 일화는 '하워드 혹스를 모른다'가 아닌, '영화를 제대로 못 느꼈다'를 문제 삼고 있다.[14] 슬림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다. 이 별명은 훗날 로렌 바콜에게 넘어간다.[15] 출처: 위키백과[16]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광의 길〉과 국내 제목이 같음.[17] 실존인물 앨빈 C.요크를 다룬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