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서린 헵번
헐리우드의 First Lady 캐서린 햅번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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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배우. 그는 그의 독립성과 활발한 성격으로 할리우드에서 60년 동안 주인공을 연기해 왔으며 의지가 강한 연기를 맡아오면서 자신의 모습을 구축했다. 그는 스크루볼 코미디에서 드라마, 영화로 연기 영역을 확장했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주연상만 남녀무이하게 4번 수상한 배우'''이자 '''AFI(미국영화협회) 선정 가장 위대한 여배우 1위'''[2] 에 뽑힌 인물이다.'''“An actor of substance whose intelligence and rootedness in true American values set her apart from other Hollywood icons.”'''
"지적인 면모와 미국적 가치관에 기초한 인간적인 면모에 있어서는 그 어떤 할리우드 아이콘들과도 비교를 불허하는 대배우."
코네티컷의 부유하고 진보적인 가족에서 태어난 그는, 브린모어 대학교를 다니는 동안 연기를 시작하였다. 4년 동안 극장에서 연기를 한 그는 영화에 데뷔하기 전에 브로드웨이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영화계에 들어와 찍은 첫 작품인 《아침의 영광》으로 캐서린은 아카데미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그는 '흥행의 독약'이라는 표현을 들으면서 RKO 라디오 픽처스와의 계약을 파기하면서, MGM/UA로 건너가 《필라델피아 스토리》로 성공하게 된다. 이후 그는 스펜서 트레이시를 만나 25년 동안 커플로 영화에 나오게 된다.
이후 그는 《아프리카의 여왕》에 출연하면서 드라마 영화에서 성공을 거두게 되고 이후 1960년대에 《초대받지 않은 손님》, 《겨울의 사자》로 아카데미상을 연속으로 수상받게 된다. 이후 그는 《황금 연못》으로 다시 한번 아카데미상을 수상받았다. 그는 1994년에 유작인 러브 어페어에 출연하였는데, 그 때 나이가 87세였다. 그는 2003년에 9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는 할리우드에서 언론에게 호의적이지 않았으며, 사회에서 여주인공에게 원하던 기대를 따르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는 노골적으로 말하였으며, 적극적이었으며, 운동신경이 좋았던 데다, 여성이 바지를 입는 것을 좋아하지 않은 시대였음에도 바지를 입었다. 그는 스펜서 트레이시가 유부남이었지만, 그와 교제를 하였다. 그는 20세기 미국 여성의 인식을 변화시키는데 영향을 주었다. 때문에 당대 여성 팬들이 많았던 배우기도 하다. [3] 1999년에 미국 영화 연구소는 그를 위대한 여배우 1위로 선정하였다.
그는 당대 최고의 배우로[4] 보통 영화사의 최초의 여성은 최초로 크레딧에 이름을 넣은 스타 '플로렌스 로렌스', 최초의 무성영화 전성기를 연 스타 '메리 픽포드', 최초로 리얼리즘 연기를 시도한 '릴리안 기쉬', 최초로 무성과 유성 다 성공한 '그레타 가르보' 등으로 캐서린 햅번 전에도 수없이 많았다. 다만 영화가 처음 발명되었을 때 영화배우는 연기보다는 수동적 행동이나 이미지가 돋보이는 게 절대적이었고, 여성 영화 배우는 연기보다도 여성의 기존 캐릭터와 이미지의 표현이 대다수 관건이였다. 할리우드에 여성 연극 배우보다는 특정 이미지를 가진 여성 스타가 주를 이룬 것도 그것이었다. 하지만 캐서린 햅번은 이러한 기존의 체제에 강하게 반발한 첫 배우였다. 그는 처음으로 이미지적인 틀을 배제하고 주관이 강한 연기로 영화사를 장식한 최초의 여성이었다.
2. 어린 시절
캐서린 헵번은 1907년 5월 12일에 코네티컷 주 하트퍼드에서 6명의 자녀 중에 두 번째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코네티컷 주의 여성 운동가였던 캐서린 마사 휴튼이었으며, 아버지는 하트퍼드 병원에서 비뇨기과 전문의사로 근무하던 의사인 토머스 노발 헵번이었다. 헵번의 어머니는 그를 인내적이고, 독립적이며, 용기있게 가르쳤다. 그가 어릴 때 어머니를 따라서 '여성 참정권 운동'을 하였다. 헵번의 아버지는 미국 사회 보건 협회를 설립하는데 도왔는데, 이 단체는 사회에서 성병에 대해 알리는 단체였다. 헵번의 부모는 자식들이 자유에 관한 주장을 하거나 토론을 하도록 키웠다. 또한 그의 부모는 진보적인 시선으로 사회를 바라보았는데, 이러한 시선은 뒷날 헵번이 부모와 똑같은 시선으로 사회를 바라본 계기가 되었다. 그는 뒷날 "두 대단한 부모"의 결과로 어린 시절부터 그런 시선을 갖게 되었으며, 이러한 시절이 그의 성공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고백하기도 하였다. 그는 평생동안 계속 가족과 가깝게 지냈다.
3. 경력
할리우드에서 스카우트를 담당하던 렐란드 헤이워드는 그가 출연한 《전사의 남편》에서 그를 발견하여, RKO 라디오 픽처스에서 촬영하고 있었던 작품인 《이혼 청구서》에 시드니 페어필드 역에 스크린 테스트를 보도록 하였다. 영화에서 감독을 맡았던 조지 큐커는 그에게 인상을 받아, "그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그가 유리잔을 드는 모습에 마음에 들면서 "나는 그가 그 장면을 연기할 때 가장 능력을 발휘한다고 생각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는 신인으로써는 많은 양이었던 주급 1,500달러를 요구하였다. 큐커는 그의 요구를 스튜디오가 받아들이도록 도왔고, 스튜디오에서는 그의 요구를 3주의 가계약서로 받아들였다. 당시 RKO의 우두머리였던 데이비드 O. 셀즈닉은 평범하지 않은 배우를 캐스팅 하는 것을 "특별한 기회"라고 말하였다.
그는 1932년 7월에 25세의 나이로 캘리포니아 주에 도착하였다. 그는 존 베리모어와 함께 《이혼 청구서》에 출연하였다. 이후 그는 영화계에서 많은 잡음이 있었지만, 그는 영화 산업을 좋아하였다. 《이혼 청구서》는 성공을 거두었고 헵번의 연기는 호평을 받게 되었다. 당시 뉴욕 타임즈에서 비평가로 일했던 모던트 홀은 그의 연기를 "매우 좋다... 헵번의 성격 묘사는 현재 스크린에서 볼 수 있는 최고의 연기 중의 하나이다"라고 평하였다.
4. 말년과 죽음
헵번은 80세 때 "나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다. 그것은 멋지고 긴 꿈일 것이다"라고 밝힌 적이 있었다. 그의 건강은 그가 마지막으로 영화에 나온 이후로 갑자기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1996년 겨울에 햅번은 폐렴으로 인해 병원에 갔으며 거의 죽을 뻔하였다. 1997년에 그녀는 매우 허약해 졌으며, 말과 식사가 줄어들었으며, 죽기 직전까지 갔다. 이후 그는 치매를 앓기 시작하였다. 2003년 5월에 그의 목에서 종양이 발견되었다. 그는 그해 6월 29일에 코네티컷 주 올드 세이브룩에서 96세의 나이로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하트포드에 위치한 시디 헐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는 묻을 때 자신을 위한 추도식이 없기를 요청하였다.
헵번의 죽음은 사회의 관심을 받았다. 텔레비전, 신문, 잡지에서 그를 다루었으며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조지 W. 부시는 "그는 국가의 예술의 보물 중의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브로드웨이에서는 캐서린이 연극에 끼친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03년 7월 1일에 거리의 등불을 껐다. 2004년에는 그의 소원에 따라, 그의 유품이 소더비즈에 경매로 팔려 580만 달러로 팔리게 되었다.
한때 미남 괴짜 거부 하워드 휴즈[5] 의 연인이었으며 결혼까지 할 뻔했던 이 둘의 관계는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영화 에비에이터에 묘사되어있다. 이 영화에서 케이트 블란쳇이 헵번의 역할로 출연하며 해당 연기로 2005년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자신과 9편의 영화에서 호흡을 맞추었던 유부남 배우 스펜서 트레이시와도 25년 넘게 연인관계를 유지했다. 둘은 동거하지 않고 각자의 집을 유지하면서 언론에 연인관계를 드러내려 하지 않았지만, 트레이시가 병환으로 앓던 말년 5년 간은 캐서린 헵번이 그를 간호하느라 자신의 커리어 활동을 중단했다. 이들의 관계는 당시 헵번의 남편과 트레이시 아내도 인정했었다고 한다. 사실, 스펜서 트레이시는 헵번을 만나기 전부터 이미 혼인 관계가 파탄난 상태였으나, 자녀가 있는 데다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이혼을 인정하지 않는 교리를 어길 수 없어서 서류상으로는 이혼하지 않았던 것이라 한다. 관련 기사 1 트레이시의 말년에 병수발을 들며 헌신했지만, 트레이시 가족을 배려해 장례식에는 불참했다고 한다. 관련 기사 2
5. 수상
헵번은 아카데미상에서 여우주연상을 4번이나 수상하였으며, 12번 여우주연상에 후보로 올랐다. 이 기록을 넘은 인물은 메릴 스트립밖에 없다.
캐서린 헵번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4회 수상자로 유명하지만 '''단 한번도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는 것'''으로 더 유명하다. 이유를 물은 기자들을 향한 캐서린 헵번의 대답이 걸작이다. '''"거기까지 가는 것이 귀찮다! 어차피 나 말고 누가 수상을 한단 말인가?"''' 실제로 캐서린 헵번은 자신이 예술가란 자부심이 대단한 배우였고 자신을 취재하려는 기자들에게 노골적인 모욕과 적대감을 서슴치 않고 보인 걸로도 유명한 호탕한 대장부였다. 그러나 딱 한번 4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 시상자로 참석하였다.
헵번은 또한 오랜 세월 후에 상을 받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첫 번째 상을 받은 후 마지막 상을 받을 때 48년의 세월이 지났으며 영국 아카데미상에서 2번의 수상과 5번의 후보로 올랐다. 또한 에미상에서는 1번의 수상과 6번의 후보로 올랐으며, 골든 글로브 상에서는 8번의 후보에 올랐으며, 토니상은 2번 후보에 올랐다. 이외에도 칸 영화제와 베니스 영화제에서 수상하였으며, 또한 1979년에 스크린 액터스 길드에서 평생공로상을, 1990년에는 문화발전에 기여한 예술가들에게 주는 상인 케네디 센터 공로상을 수상하였다.
6. 아카데미상 수상 및 후보 목록
'''제6회 여우주연상 : 《아침의 영광》, 수상'''
제8회 여우주연상 : 《앨리스 아담스》, 후보
제13회 여우주연상 : 《필라델피아 스토리》, 후보
제15회 여우주연상 : 《여성의 해》, 후보
제24회 여우주연상 : 《아프리카의 여왕》, 후보
제28회 여우주연상 : 《써머타임》, 후보
제29회 여우주연상 : 《레인메이커》, 후보
제32회 여우주연상 : 《갑자기, 지난 여름에》, 후보
제35회 여우주연상 : 《밤으로의 긴 여로》, 후보
'''제40회 여우주연상 : 《초대받지 않은 손님》, 수상'''
'''제41회 여우주연상 : 《겨울의 사자》, 수상'''
'''제54회 여우주연상 : 《황금 연못》, 수상'''
[1] #[2] 출처[3] 어느 정도였냐면 오즈 야스지로의 초여름에서 주인공 노리코가 좋아하는 배우도 캐서린 헵번이었다. 당시 헵번을 향한 여성들의 지지가 전 세계적이었다는 걸 보여 주는 증거.[4] 당대 캐스팅 1위의 엄청난 인기 배우였다. 현재에도 할리우드의 여신하면 떠오르는 오드리 헵번, 그레이스 켈리, 엘리자베스 테일러, 비비안 리등을 보자. 죄다 빼어난 미녀들이다. 이러한 여신계보들 중 캐서린 헵번의 이름은 이들의 대선배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이질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한마디로 캐서린은 연기만으로도 신으로 불린 최초의 사례인 것이다. 오드리 헵번이 무명시절 "캐서린 헵번이 당대 최고의 스타배우이니 헵번이란 이름은 피하자."라는 말을 듣자 "아뇨, 저의 헵번은 오드리 헵번이니 상관없어요."라는 얘기는 이미 유명하다.[5] 에비에이터 실존인물. 이 영화에서 케이트 블란쳇이 헵번 역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