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고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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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로버트.H 고다드(Robert Hutchings Goddard)
'''출생'''
1882년 10월 5일
미국 매사추세츠 주 우스터
'''사망'''
1945년 8월 10일
미국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
'''국적'''
미국
'''직업'''
과학자
'''업적'''
'''세계 최초로 액체 연료를 사용한 로켓 발사'''
1. 개요
2. 생애
3. 로켓 개발
4. 후대에 미친 영향
5. 기타


1. 개요


"'''불가능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어제의 꿈은 오늘의 희망이며, 내일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1]

- 로버트 고다드[2]

Robert Hutchings Goddard, 1882년 10월 5일 ~ 1945년 8월 10일
미국의 물리학자, 로켓 개발자이자 '''현대 로켓공학의 아버지.''' 현대 로켓과학의 시대는 이 사람이 나타나고서부터 동이 트기 시작했다.

2. 생애


로버트 고다드는 1882년 10월 5일에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우스터에서 태어났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고등학교를 2년 늦게 들어가는 등 학업에 다소 지장이 있었으나 1904년에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그해 우스터 과학기술대학에 입학하였다. 당시 물리학과장이었던 윌리엄 더프교수는 고다드의 학구열에 일찌감치 주목하여 그를 실험실 조교, 강사로 채용하였다.
1908년에 대학을 졸업하였으며 그 후 1911년에 클라크 대학에서 물리학 박사과정을 밟기 시작한다. 그 이후 로켓의 개발에 꾸준히 관심을 가졌으며 최초로 액체연료로켓을 발사시키는[3] 업적을 남겼다.
1945년 8월 10일에 미국 매릴랜드주의 볼티모어에서 사망한다.

3. 로켓 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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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제작한 로켓과 함께)
1914년에는 스미스소니언 협회의 도움으로 로켓 모터의 개발에 착수했고, 1917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군에 지원했다. 그가 한 일은 로켓을 군사적인 용도로 사용할 가능성을 실현하는것이었다. 연구는 그럭저럭 순조롭게 진행되었지만, 결과가 나올 무렵 종전이 되면서 중단되었으며 모두 취소되었다. 이때의 연구 결과는 훗날 바주카무반동총의 추진체 기술로 응용되어 모든 현대적인 대전차 로켓의 기반이 되었다. 1919년에는 달 비행의 가능성에 대해서 집필하였다.
그 후 '''1926년에 세계 최초로 액체연료 로켓의 발사에 성공하였다!''' 고작 2.5초 동안 56미터를 날아간 게 전부일 정도로 작고 보잘 것 없는 성능이었지만, 이는 최초로 액체연료의 가능성을 증명했다는 것이 큰 의미가 있다. 이후 실험을 거듭하면서 로켓의 성능은 거듭 향상되었으며 1935년의 실험에서는 처음으로 로켓으로 음속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이후 미 해군의 로켓 엔지니어로 등용되어 로켓을 연구하게 되지만, 미 해군은 로켓의 가치를 파악하지 못했고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위의 로켓을 보듯이 작고 기본적인 구조밖에 없었지만 로켓이 56미터밖에 날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로켓의 구조에 있었다. 현재의 로켓과는 달리 위의 1호 로켓은 '''노즐이 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로켓이 직진으로 쏴 올릴 방법이 없었기에 무거운 연료 탱크를 아래에 둬서 무게추 역할을 하도록 만들었는데 이 때문에 노즐에서 나오는 추진력이 연료통에 방해를 받아서 추력이 급감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추력과 무게중심, 그리고 수직으로 날아갈수 있도록 균형을 잡는 일은 고다드의 일생의 두고두고 큰 과제로 남았고 액체연료-액체산소-노즐의 순서로 무게중심을 잡는데는 성공했지만 수직으로 날아가게 하는 문제는 이후 대서양을 횡단해서 일약 대스타가 된 찰스 린드버그가 후원하고 조언을 주고받고 나서야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고[4] 이미 그때쯤에는 2차대전으로 고다드의 연구는 관심 밖이었고 이러한 고다드의 연구를 고스란히 흡수하여 탄생한 로켓이 아이러니하게도 '''적국 나치의 군사용 미사일인 V2 로켓이었다'''[5]
고다드는 지병인 결핵이 후두암으로 악화되어 1945년 8월 사망할 때까지 로켓에 대한 연구로 214개의 특허를 얻었으며 1960년에 미국은 고다드의 유족으로부터 이를 100만 달러에 매입한다.

4. 후대에 미친 영향


그러나 미국에서는 고다드의 직접적인 영향은 크지 않았다[6]. 당시 미국은 로켓의 가치에 대해서 잘 이해하지 못했고 일부 언론은 이를 두고 고다드를 비방하기도 하였다. 거기다 고다드 자신부터가 상당히 내성적이고 작업도 대중에게 공개하는 대신 동료들도 모를 정도로 독고다이로 진행하는, 즉 예나 지금이나 로켓 개발자들이 갖추면 상당히 좋은 언론플레이 소질[7]은 전혀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는 더 악화되기만 했다. 그나마 소수의 연구자들은 고다드의 연구가 가진 가치를 이해하였지만[8] 결국은 소수였기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고다드를 생전에 그를 무시했던 언론은 아폴로 11호(...) 이후에나 해당 기사를 정정하지만 사과도 아닌 데다 이미 지나간 버스... 결국 미국은 독일의 패전 이후 영입한 베르너 폰 브라운이 중심이 되어서 로켓을 개발하게 된다.
정작 고다드의 연구에 가장 큰 혜택을 입은 것은 미국의 적국인 나치 독일베르너 폰 브라운이었다. 암 투병 중에도 수거된 V2를 면밀히 살핀 고다드는 V2에 자신이 고안한 설계 방식이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베르너 폰 브라운도 고다드의 실험이 자신이 V2를 개발하는데 필요한 시간을 단축시켜주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뿐만 아니라, 소련스푸트니크 위성 발사에 사용된 로켓도 역시 폰 브라운의 V2를 기반으로 제작되었으니 미국 연구자가 고안한 로켓을 잘 활용한 것은 미국의 적국들이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5. 기타


  • NASA의 여러 지구관측 과학위성과 허블 우주 망원경을 비롯한 외우주 탐사위성을 관제하는 고다드 우주비행센터에 이름이 붙었다. 하지만 고다드 우주비행센터 근처의 월롭스 발사장에서 보다 많은 고딩(!), 대학생, 소자본 로켓덕후들이 사운딩 로켓을 쏘아올리는 걸 생각하면 이 또한 나쁘지만은 않은 작명이다.
  • 미국의 민간 우주기업 블루 오리진에서 로켓의 수직이착륙을 연구하여 준궤도 우주여행 로켓인 ‘뉴 셰퍼드’를 개발했는데, 수직이착륙 기술을 연구하기 위한 실험기 이름이 ‘고다드(Goddard)’다.
  • 관심있는 독자는 네이버캐스트 인물세계사의 로버트 고다드 편을 참고. 네이버캐스트

[1] 이 감동적인 명언의 삽화 버젼. . [2] 건강의 문제로 2년 늦게 들어간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졸업생 대표자격으로 답사를 하며 한 말.[3] 이보다 앞서 러시아의 콘스탄틴 치올콥스키가 액체추진기관을 이용한 우주비행이 이론적으로 가능함을 처음 제시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액체추진과 액체산소의 결합에서 나오는 폭발을 견딜 수 있는 재질의 용기를 만들지 못해서 실제 실험으로 입증하지는 못했다.[4] 자이로스코프를 두부에 달아기울어질 경우 바로잡도록 하고 분류익이라는 노즐 구조로 추력의 방향을 간단하게나마 조정할수 있게 하였다.[5] 고다드가 만든 로켓은 오페르트의 로켓 이론과 합쳐져 폰 브라운과 나치스의 기술적 노하우에 큰 도움이 되었으며 당시 아주 원시적인 컴퓨터인 애니악을 간소화시킨 전자연산기를 V2에 장착하여 쟈이로스코프-전자연산기-연료-산소-노즐-분류익 순으로 만들어져 당시 기술로는 최고의 정확성을 갖고 있었고 미약하게나마 유도성능도 갖고 있는 등 로켓 발전에 일진보 했지만 '''완성 시기가 1944년이었고 생산대수는 너무 적었으며, 특히 미국에는 대서양 때문에 닿지도 않았다'''(...) 이러한 한계 때문에 종전까지 V2의 위험성이나 로켓의 유용성은 제대로 부각되지 못했고 결국 고다드는 로켓이 주류가 되는 시대를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6] 이는 소련도 마찬가지였는데, 고다드와 동시대 사람이자 로켓 연구가였던 콘스탄틴 에두아르도비치 치올코프스키 박사가 어린 시절에 앓은 열병의 후유증으로 귀가 제대로 안들리는 장애인인데다가 학회에서 굉장히 소외된 사람이었다. 그로 인해 소련 정부의 대숙청 이후 자료조차 소실된 상태로 그의 사후 30년이나 지나 독일 과학팀의 연구 결과를 통해서야 그의 존재를 알았을 정도였다. 결국 두사람의 연구는 독일이 거저먹기로 가져가버린 셈이 되었다.[7] NASA가 전 세계적으로 지지도가 높은 것도 결국은 미 연방정부 기관 중 손꼽히는 언플능력에 힘입은 측면이 많다. 20세기 초의 헤르만 오베르트 등 여러 유럽 로켓과학자들도 로켓 제작을 서커스처럼 크게 홍보하면서 스폰서를 섭외했다. 당시 로켓의 유용성을 쇼맨십으로 입증했던 이가 바로 헤르만 오페르트 박사와 토마스 에디슨이었다. 그러나 오페르트는 로켓 영화를 만들다가 로켓 제작에 실패해 도망갔고, 천하의 발명왕 에디슨도 로켓에 대한 지식과 기술은 전혀 없어서 아무 실적도 내지 못했다. 21세기 현재도 스페이스X가 잘나가는 데에는 일론 머스크의 뛰어난 언플능력도 무시할 수 없다.[8] 대표적인 인물이 대서양 횡단으로 슈퍼스타가 된 찰스 린드버그로 그는 고다드에게 보내는 첫 편지에서 당시 돈으로 무려 5천 달러라는 거금을 함께 보냈고 이후에도 후원과 자신의 비행기 경험에서 나온 조언 등을 보내주는 식으로 그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자이로스코프를 도입한 것도 린드버그의 도움 덕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