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너 폰 브라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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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베르너 마그누스 막시밀리안 프라이헤어 폰브라운[2]
Wernher Magnus Maximilian Freiherr von Braun
출생
1912년 3월 23일
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 포젠 주 비르지츠
사망
1977년 6월 16일
미국 버지니아 주 알렉산드리아
직업
과학자
국적
독일 제국나치 독일미국
주요
업적

V2, 주피터 로켓, 새턴 로켓
1. 개요
2. 초년 이력
3. 나치 시절
3.1. 나치 시절에 대한 평가
4. 종전 - 미국에 투항하다
5. 미 육군 소속기
6. NASA 재직기
7. 이후
8. 평가
9.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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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V2의 성능은 완벽했다. 엉뚱한 행성에 떨어졌다는 것만 제외하면."'''

"The rocket worked perfectly, except for landing on the wrong planet."[3]

- 베르너 폰브라운

'''베르너 폰브라운'''[4]
Wernher von Braun[5]
미국의 독일 출신 천재 로켓 과학자이다. 로켓 공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나치 독일에서 V2 로켓을 처음 개발하였고, 이후 나치 독일이 패망하자[6] 미국으로 자리를 옮겨 머큐리 계획, 아폴로 계획의 우주개발을 책임졌다. 최초의 실용 로켓인 V2 미사일 개발을 시작으로 인류가 만든 최대의 로켓인 새턴 로켓 개발에 이르기까지 폰브라운은 인류 로켓 개발 역사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초년 이력


아버지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 농업장관을 맡았다. 폰브라운은 지금은 폴란드로 넘어간 프로이센 포젠[7]에서 태어났다. 당시는 독일 영토였으나,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으로 이곳이 폴란드로 넘어가자 베를린으로 이주하여 초등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엄격한 아버지와 그 당시 독일 특유의 딱딱한 교육 때문에 처음에는 답답해 했다. 하지만 결국 어머니 덕분에, 또한 로켓을 날리려면 꼭 필요했기에 싫어하는 수학도 공부했다.
소년 시절엔 로켓덕후 아니랄까봐 사촌형과 함께 작은 로켓을 만들어 날리다가 과일 가게의 사과더미에 떨어지는 바람에 그 사과를 다 물어내는가 하면, 궤짝에 화약 추진체를 단 차량을 만들어 사람 많은 도로에서 달리게 하다가 경찰관에게 잡혀 아버지에게 혼나기도 했다. 본격적인 우주덕후가 되는 계기는 전통적으로 14세 생일에 받는 금시계 대신에 어머니가 사 보낸 천체망원경이었다. 이 망원경으로 동기들과 우주를 관측하다가 더 큰 망원경이 있으면 더 잘 관측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교장선생님을 설득해 큰 망원경을 얻어내고[8] 동기들과 함께 돌집을 지어 학교에 자그마한 천문대를 만들기도 했다.
어머니가 사준 망원경을 가지고 우주덕후가 되었고, 이후 우주로 나가겠다는 일념으로 로켓 덕후가 되어 어릴 때부터 우주 여행에 대한 꿈을 키웠다. 1930년 베를린 기술대학에 입학하여 우주비행동호회에 가입했고 이때 헤르만 오베르트[9]의 제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후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10]에서 1학기 동안 공부했다.

3. 나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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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도른베르거와 함께.[11]
독일에서 나치당이 집권할 때쯤 그는 물리학으로 베를린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스물을 막 넘긴 나이였다.[12] 1934년에 이미 2.2~3.5km까지 올라가는 로켓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나치당이 민간의 로켓 개발을 금지하는 대신 발트 해 연안의 페네뮌데에 육군 포병 병과 소속의 거대한 로켓 실험 단지를 만들어 폰브라운을 신임하던 발터 도른베르거[13]를 지휘관으로 선임하고 이들을 유치하여 로켓 개발을 맡겼다. 폰브라운은 고다드의 로켓을 참고하여 연구를 진행하였으며[14] A1, A2, A3, A5[15]로켓을 개발해 기술을 축적하여 당시 최고의 로켓, V2(A4)로켓을 개발하기에 이른다. 1942년 V2 로켓 발사[16]에 성공하였고, 1944년 영국 공격용으로 실용화시켰다.
전쟁 초창기부터 로켓 무기는 실용화 가능성이 제기되었지만 정작 아돌프 히틀러는 시큰둥했다. 그러나 SS장관 하인리히 힘러는 육군 소속인 이 연구소를 무장친위대 소속으로 옮겨서 자신이 공을 독차지하려고 좀 더 많은 예산을 쓸 수 있게 해주겠다며 폰브라운을 꼬셨다. 폰브라운은 예산이 부족해서 문제가 되는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에 거절했고, 이후 힘러가 감독하고 있는 게슈타포가 보복으로 폰브라운을 체포하게 된다. 이유는 폰브라운이 클라우스 리델, 헬무트 그뢰트룹[17]과의 대화에서 '''씨바 우주선 연구도 못하고... 전쟁도 망해가고...''' 하는 푸념을 했는데 SS 보안대의 스파이였던 여성 치과의사가 이걸 패배주의에 젖었다, 즉 사보타주 아니냐고 고발했다.[18] 다행히 당시 군수장관을 맡고 있던 알베르트 슈페어가 개입하여 폰브라운은 풀려나오게 된다.[19] 이후에도 힘러의 노력은 계속되어 결국 V2 로켓의 실전부대는 SS대장 한스 캠러(Hans Kammler)가 총괄하고 그 예하에 육군과 무장친위대의 미사일 대대가 함께 배속되는 형태로 개편된다. 이 중 육군 대대의 지휘관인 발터 도른베르거는 폰브라운을 매우 아꼈으며 그 외의 지휘관들도 따로 노는 분위기였다.
제공권을 잃은 독일은 유일한 희망인 V2 로켓을 영국에 계속 발사했으나, 그것은 제공권을 장악한 연합군이 퍼붓는 폭탄의 새발의 피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에 전세를 돌이킬 수 없었다. 폰브라운은 V2에 이어 미국을 때릴 대륙간 탄도탄인 A9를 개발하려고 했으나, 이미 전세는 그런 걸 개발할 형편이 아니었고, 독일은 결국 항복한다. 폰브라운은 로켓 개발 기지가 있던 페네뮌데 근처까지 진격한 소련군[20]을 피해 남부로 도피한 후 미군에 항복하였다.

3.1. 나치 시절에 대한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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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페네뮌데 기지에서. 양복을 입은 사람이 폰브라운.[21]
힘러에게 체포당했다가 풀려난 과정을 보면 폰브라운은 나치에 탄압당하는 양심적인 과학자인 것도 같지만, 그 실상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체포된 것은 힘러의 개인적 미움을 샀기 때문이므로 반 나치 운동과는 전혀 관계 없는 문제이다. 폰브라운은 1937년(기록에 따라서는 1932년)에 나치당에 가입했으며, 1940년에는 무장친위대 장교가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히틀러 옆에서 무장친위대 장교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 남아 있으며, 비록 폰브라운은 자신이 무장친위대 장교복을 입은 것은 그 때가 유일하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정규 복장으로 계속 입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최종 계급은 친위대 소령(SS-Sturmbannführer)이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열성적 나치당원이었다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폰브라운은 위의 사항들에 대해서 나치당 가입이나 무장친위대 장교가 된 일 등은 자발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강제된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이는 물론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변명이겠지만, 무장친위대 제복 문제를 제외하면 그의 변명이 사실과 다르다는 분명한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당시 독일에서는 로켓 기술이 독일 민족의 우수함을 입증하는 프로파간다로서 선전되었기 때문에 나치당이나 무장친위대에서 가입을 강요하는 것은 정황상 별로 어색한 일은 아니며, 힘러 본인이 로켓 개발팀을 장악하는 데 굉장한 욕심을 드러내기도 했으니까. 또한 장교복을 입는 것은 군대에서는 의무사항인 것이 당연하므로 그의 사상을 입증하는 자료가 되기는 어렵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실제로 강요를 받았다는 분명한 증거도 없다. 전부 이랬다 저랬다 하는 구전들뿐. 정리하자면, 그가 자발적인 나치였을지도 모른다는 여러 정황이 존재하지만 직접적인 근거는 매우 박약하다.
그보다 좀 더 분명한 증거가 있는 문제는 노예 노동에 대한 것이며, 이 점에서는 별로 변명의 여지가 없다. V2 제조를 위한 노예 노동에서 2만여 명(다른 자료에서는 1만 2천여 명)이 사망했는데, 이는 V2 공격으로 인한 사망자인 약 7250명을 크게 뛰어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옹호론은 당시 독일에서 노예 노동을 시킨 것은 노동력 부족 때문이었으며[22] 폰브라운도 그런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노예 노동을 받아들였을 뿐이었다는 것이다. 폰브라운 스스로도 그러한 변명을 했으며 자신은 한동안 노예 노동이 얼마나 가혹하게 이루어지는지 잘 몰랐고, 알게 된 후에도 별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V2 공장 역시 직접 방문한 적은 없고[23] 단지 "소문만 들었다"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현재에도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지만, 적잖은 연구자들은 이를 반박한다. 폰브라운 자신이 수용소의 죄수(혹은 포로)들을 노동자로 제공해 달라고 촉구한 편지가 남아 있으며, 기 모랑이라는 강제노역 생존자가 자신을 포함한 노동자들이 사보타주를 했을 때 폰브라운이 자신에게 25번 채찍질을 할 것을 지시했다고 증언했기 때문이다. 이는 폰브라운이 노예 노동의 가혹함에 대해 별 문제의식이 없었다는 점과 노동자들의 처분에 대해 지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을 보여준다.[24] 다만 아무리 폰브라운이라도 노예 노동에 저항하는 태도를 보였을 경우 총살당했을 것이라는 증언도 있다. 실제로 1943년부터 SS보안대가 그를 매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고 정말로 휙 잡아가기도 했으니까. 이 증언을 받아들인다면 그가 노예 노동 상황을 실질적으로 바꿀 수 없었다는 변명은 상당한 설득력을 얻는다. 그러나 그의 편지나 기 모랑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최소한 그는 노예노동을 쓰지 않을 수 없다고 판단된 시점부터는 적극적으로 노예노동을 요구했다는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로켓의 퀄리티에 민감하던 폰브라운이 비전문가 강제수용자들의 노역으로 만드는 걸 좋아했을지 또한 의문의 여지가 있다. 결국 강제노동에 있어서 더 큰 권한을 가지고 더 많은 수용자들을 끌어모은 쪽은 폰브라운보다는 발터 도른베르거, 그리고 도른베르거의 상관이자 힘러가 직접 임명한 한스 캠러 SS대장이었을 것이라는 게 이런 의견을 내는 사람들의 추측인데, 사실 이는 '''폰브라운을 상당히 정치에 무지한 인물로 여기는''' 시각이긴 하지만 아예 일리가 없는 것도 아니다. 폰브라운을 힘러가 직접 SS로 영입했다 해도 폰브라운은 군사무기보다는 우주발사체에만 관심이 많았으며, 똑같이 로켓을 좋아했지만 국방군 장교 신분이었던 도른베르거가 폰브라운보다 독일군 돌아가는 행태에도 웬만큼 밝았기 때문에 서류작업부터 상부에의 접대, 기름칠 등의 면에서 폰브라운을 최대한 챙겨줬고[25], 그 과정에서 강제노동자 동원도 주도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오히려 V2가 중용되던 1944년 하반기의 폰브라운은 힘러가 스스로 V2 프로그램을 장악하려고 술수를 부려 상당한 스트레스와 언제 쥐도새도 모르게 끌려갈지 모른다는 두려움(실제로 끌려가기도 했고)을 느끼고 있었고, 반면 도른베르거는 히틀러가 뒤늦게 V2를 중용할 때도 그에게 직접 사과를 했을 정도니, 그 시기 V2 총책임자의 위치는 적어도 형식상으로라도 폰브라운보다는 도른베르거라고 봐야 한다는 말. 즉, 이는 훗날 폰브라운이 아폴로 계획으로 유명해지자 그에 대한 까임이 늘어나면서 상대적으로 덜 유명한 도른베르거나 캠러의 행적까지 폰브라운의 행적으로 함께 취급되었다는 추론이다.[26] 물론 폰브라운과 함께 VfR 시절부터 함께하고 새턴 V를 개발한 아더 루돌프(Arthur Rudolph)가 1980년대에 OSI의 나치 피정복민 강제노동의 진상규명 작업에서 미국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서독으로 추방된 사례를 보면 폰브라운 또한 결백했을 가능성은 낮지만, 형 따라 로켓 만들던 동생 마그누스(Magnus von Braun)가 미국에서 천수를 누린걸 보면 강제노동 문제에서 폰브라운이 꼭 적극적이었는지는 모른다.[27] 물론 아더 루돌프와 달리 폰브라운은 좀 젊은 나이에 암으로 사망하여 살아생전에 강제노동 동원 혐의를 재평가할 기회가 없었다는 점 또한 감안해야 할 것이다.
일단 많은 연구자들은 그가 적극적으로 나치 권력층에 접근한 것은 사실이겠지만, 이는 그의 사상 때문이 아니라 '''로켓 개발에 드는 돈을 국가로부터 지원받기 위해서'''(즉 스폰서 낚아보려고)라는 데서 의견을 같이하는 편. 나치 정권이 로켓 개발을 지원하기 전에는 민간 연구자들이 자비로 로켓을 개발하고 있었으며 군사용으로 로켓을 개발한다는 발상에 상당한 거부감을 나타냈지만, 당시에는 국방 예산이 아니면 사실상 로켓 연구와 같은 대규모의 연구를 진행하기란 불가능했다.[28] 사실 이는 냉전 시대에도 마찬가지였고, 냉전 시대에 미국과 소련에서 로켓 연구 예산이 배정된 것도 상당부분 군사적 목적 때문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물론 돈 때문에 그랬다고 하더라도 나치 협력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면죄부가 되지 않겠지만.

4. 종전 - 미국에 투항하다


2차대전 말기 미국과 소련은 모두 V2 로켓 기술과 폰브라운을 원하고 있었다.[29] 양국은 독일의 로켓 기술과 폰브라운을 얻기 위해 비밀리에 노력했다. 한편 폰브라운과 측근들 역시 패망이 가까워 오면서 자신들의 거취를 고민하게 되었는데, 미국 쪽으로 투항하기로 결심으로 굳혔다. 소련군은 폰브라운의 로켓 연구소인 "페네뮌데"의 점령을 위해 기갑부대를 보내 로켓 생산 공장을 점령해서[30] 제조 중이던 수백 기 분량의 반제품과 부품을 입수했다. 한편 폰브라운과 그의 동료 과학자들은 친위대 감시에서 탈출해서[31] 자발적으로 미군을 찾아가 항복했다.[32] 이때 폰브라운이 데리고 미국에 투항한 인원은 과학자 118명 그리고 그들의 가족 300여 명에 달했다. 페네뮌데는 원래 소련군 점령 지구였으나, 미군은 독일이 항복하자마자 재빨리 이곳에 와서 수십 기를 가져간다. 뒤늦게 이곳에 도착한 소련군은 남아있던 훨씬 많은 제품을 챙기게 된다.[33]
다른 분야는 몰라도 로켓기술에 있어서는 독일은 미국과 소련을 압도하고 있었다. V2 플랜트를 조사한 미군의 보고서는 독일의 로켓 기술이 미국보다 적어도 25년 앞서 있다고 평가했고[34], 소련군에 종군했던 소련 과학자의 회고에 의하면 소련 전체에 한 대밖에 없던 오실로스코프가 소련군이 접수한 독일의 로켓연구소에는 한 곳에만 여러 대 있었다고 한다. V2 기술을 획득한 이후 이전의 미소가 독자적으로 연구하던 로켓은 모두 쓸모가 없어졌고[35], 이후 나온 소련의 R-1, R-2, 그리고 미국의 레드스톤 로켓은 모두 V2의 파생형에 불과했다.

5. 미 육군 소속기


미국은 이런 로켓 천재를 감옥에 보낼 생각은 전혀 없었고, 미국으로 데려와서 신무기를 제조하게 하였다. 그래서 독일이 패망한 지 약 한 달 만인 1945년 6월 20일 그와 그의 팀을 미국으로 데려왔다. 독일인에 대한 감정이 나빴기 때문에 그들은 미국에 도착해서 스위스인으로 행세하였다. 그러나 어쨌든 패전국 '''나치 독일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후 미국의 인공위성 계획 등에서 배제되어 한동안 기회를 잡지 못했다.[36]
함께 나치 독일과 싸웠던 미국과 소련은 곧 냉전에 돌입하였고, 폰브라운과 그 동료들은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뉴멕시코에서 로켓 개발을 하게 되었다. 소련도 독일 V2 기술자들을 데려갔으나, 폰브라운 팀과 같은 개발자급은 헬무트 그뢰트룹 1명을 제외하면 확보하지 못하고 V2의 제조 직공들을 주로 데려갔다.[37] 그러나 소련의 세르게이 코롤료프가 남겨진 V2 부품들을 이용해서 V2를 카피하여 발사하는 데 성공했다. 나아가 코룔로프는 자신이 가진 기술과 V2로 얻은 기술을 결합해 이후 세계 최초로 위성 궤도에 도달한 R-7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R-7은 V2와 구조도 틀릴뿐더러 코롤료프 크로스라고 부르는 엔진 클러스터링 기술같은 코롤료프의 독창성도 많이 들어간 것으로서, 단순히 V2를 베낀 것은 아니다.[38]
폰브라운은 미국에서 어머니 쪽 친척인 마리아를 독일에서 데려와 결혼하고,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폰브라운과 같이 투항한 다수의 독일 로켓 과학자들은 매마른 사막보다는 좀 더 자신들의 고향의 자연과 닮은 앨라배마 주 헌츠빌로 이주하게 됐다. 폰브라운은 훨씬 더 좋아진 연구조건에서 연구를 진행할 수 있게 되었으나, 미국의 공군 만능주의자들이 탄도 미사일의 효용성을 낮게 보았으며 육해공 각군이 로켓 개발을 독립적으로 진행하는 등 소련보다 로켓 개발 추진이 미흡했다. 당시 미국은 육/해/공군/해안경비대에, 기상청에, 각 대기업 등 독자적으로 로켓을 개발하는 기관이 20곳이 넘었다. 이들 사이에 협력이나 정보 공유는 전혀 없었다. 이런 막장 상황은 결국 스푸트니크 쇼크로 이어진다. 또한 미국에서는 독일인에 대한 감정이 나빴다는 점 때문에 은근히 견제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폰브라운은 미 육군 로켓 개발팀(Army's rocket development team)의 책임자로 임명된다. 52년부터 56년에 걸쳐 브라운의 육군 로켓 개발팀은 V2를 발전시킨 레드스톤 로켓을 개발했다. 이 레드스톤 로켓은 대륙간 탄도 미사일을 비롯해 미국 최초의 인공위성 익스플로러 1호, 미국 최초의 유인 우주선 머큐리 계획 등에 사용되었다.
또 이 시절은 브라운은 월트 디즈니 사와 손을 잡고 로켓과 우주 여행에 대한 홍보 프로그램 시리즈에 출연하여 우주개발에 대한 여론을 환기시키고 정치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그래서 50년대 중반 우주 여행을 주제로 한 여러 다큐멘터리가 폰브라운의 감수 아래 디즈니 사에서 제작되었다.
당시 브라운의 라이벌인 소련의 세르게이 코롤료프는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엄청난 속도로 기술적 진전을 이루고 있었는데, 폰브라운은 당시 로켓에 미온적인 미국 정부 때문에 이렇게 한가하게 지내고 있었다.[39]

6. NASA 재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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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5월 19일 케네디 대통령과.
1950년 후반 미국에서는 육해공군이 독자적으로 로켓을 개발하고 있었다. 해군은 '뱅가드'라고 하는 로켓을, 공군은 '에어로비 하이', 육군은 '레드스톤'이라 불리던 로켓을 독자 개발하며 서로 자기들이 로켓 연구를 주도하겠다며 벼르고 있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인공위성을 발사하기 위해 처음 선택한 것은 해군의 뱅가드였다. 당시 해군의 힘이 그만큼 강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육군 우주개발부가 '''독일 투항자 출신(폰브라운 팀)'''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었다. 독일 출신이 아닌 순수 미국인들에 의해 개발된 로켓을 발사시키고 싶어했던 이유가 작용했던 것이다. 또한 그 폰브라운 팀을 데리고 있는 육군조차도 "소련? 짜잘하게 놀고 있겠지 뭐." 라며 얕잡아 보고 있었다.
미국보다 공군력이 뒤져 있던 소련은 로켓/미사일로 그것을 어떻게든 만회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당시 소련은 원자폭탄+V2의 결합이 궁극의 전략 무기가 될 것이라고 제대로 판단했고 이를 위해서 로켓 개발을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반면 당시 미국은 '''"공군!!!"'''만 읊조리던 사람들이 많아서…
그 결과 소련은 1957년 10월 4일 마침내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발사하는 데 성공했다. 스푸트니크 성공의 파장과 충격은 엄청났다. 이를 스푸트니크 쇼크라고 부리기도 한다.[40] 스푸트니크를 발사하는데 쓰인 R-7 로켓은 최초의 ICBM이었다.
소련이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발사하자 충격을 먹은 미국은 허둥지둥 해군이 개발한 뱅가드를 발사하기로 했다. 스푸트니크 성공 후 2개월 만인 1957년 12월 6일 미국은 뱅가드 발사 장면을 전세계에 생중계를 하며 요란을 떨었으나, 이륙 후 2초 만에 폭발하며 세계적으로 개망신을 당하고 말았다. 미국의 충격은 두 배로 커졌다. 미국과 경쟁하던 소련의 서기장인 니키타 흐루쇼프가 뱅가드(전위부대)가 아니라 리어가드(후위부대)라고 부르자며 조롱한 것은 물론이고 미국 내에서도 실패에 대한 비난이 상당했으며, 한 언론의 표제 제목은 "Oh, Flopnik"[41]
뱅가드가 실패하자 결국 폰브라운에게 기회가 넘어왔다. 폰브라운의 육군 로켓 개발팀은 레드스톤을 개량해서 1958년 1월 31일 인공위성 익스플로러 1호를 발사하는데 성공했고, 이로써 미국은 간신히 체면치례했다.
미국은 그동안 육해공군이 따로따로 실행하던 우주개발을 NASA를 설립하여 한곳에 모으고 폰브라운을 감독으로 앉혀 우주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이 과정에도 미국 국방부의 삽질과 해군과 육군, 공군의 알력다툼이 관련되어 있다. 일단 능력을 우선으로 브라운을 총 책임자로 앉히게 되었지만 해군 쪽에서는 육군이 공을 독점하는 게 싫어 과학자들을 모아 NASA라는 기구로 모으는 것에 찬성했던 것이다. 나사는 원래 있었던 기관인 NACA(국가 항공 자문위원회:National Advisory Committee for Aeronautics)[42]에다가 육해공군의 로켓관련 부서를 통합하는 식으로 이뤄졌다. 하지만 브라운은 그것도 그것대로 좋아했다고 한다. 다만 자기가 달에 가고 싶어했지만 그때 이미 나이 57세라 가는 것은 좌절되었다고 한다.
나사 설립 직후부터 폰브라운은 60년대 안에 소련보다 먼저 유인 우주선을 달에 보냈다가 귀환시킨다는 목표에 집중했다. 그는 이를 위해 10년의 장기적인 계획을 세웠고, 달착륙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고 나머지 자질구리한 계획들은 폐기시켰다. 달착륙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중요한 과제가 두 가지 있었다. 거대한 발사체를 개발하는 것, 달 착륙을 위한 랑데부 및 도킹 등 우주상의 비행 기술 습득이 그것이었다. 브라운은 이를 위해 투트랙 전략을 사용하였다. 발사체 개발과 비행 기술 습득을 위한 계획을 병행한 것이다. 그리하여 새턴 로켓 개발과 제미니 계획을 동시에 진행하였다. 그다음으로 중요한 과제였던 달착륙선과 아폴로 사령선 본체의 개발도 순차적으로 병행해 나가게 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과제는 3인의 우주인과 달착륙선을 달까지 보내기 위해 엄청난 추진력을 가진 로켓의 개발이 필요했다. 소련이 유인 달착륙에 실패한 것은 무엇보다도 거대 발사체의 개발에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폰브라운은 무엇보다도 초대형 로켓 엔진 개발에 집중했다. 사실 브라운은 오래 전부터 화성 탐험을 꿈꿔왔고 이를 위해 혼자서 계속 거대 발사체의 개발에 대해 구상하고 있었다. 그덕분에 대형 로켓 엔진 개발은 매우 빠르게 진행되어 1963년 이미 F-1 로켓 엔진의 테스트가 성공 단계에 이르렀다. 새턴 로켓이 인간을 달에 보내고도 남는 충분한 추진력을 가졌던 것도 궁극적으로 인간을 화성까지 보내고자 했던 폰브라운의 기대가 반영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F-1 엔진이 성공적으로 개발되자 곧바로 F-1 엔진을 탑재한 새턴 로켓의 개발에 착수했다. 그 사이에 제미니 계획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인간을 달로 보내기 위한 비행기술이 습득되었다. 또한 제미니 계획 중 닐 암스트롱이라는 뛰어난 파일럿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폴로 계획이 계속 순항한 것은 아니었다. 새로 설계된 아폴로 사령선 테스트 중 화재사고가 발생해 우주인 3명이 숨지는 참사가 일어났다. 순직한 우주인들을 기리기 위해 아폴로 1호로 명명된 이 화재 사건으로 아폴로 계획은 1년 이상 늦춰지는 차질을 빚게 되었다. 그럼에도 대단한 추진력의 폰브라운은 임기 응변을 발휘하여 사령선 없이 무인으로 새턴 V 로켓을 테스트한 후 다른 중간테스트를 생략하고 1968년 겨울 곧바로 인간을 달까지 선회시키는 아폴로 8호 계획을 밀어부쳐 성공시켰다. 그동안 지구궤도를 벗어나 본적이 없었던 인간이 처음으로 지구를 떠나 달을 돌고 오자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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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7월 16일, 아폴로 11호 발사에 성공한 뒤 관제탑에서.
왼쪽 세 번째 사람부터 찰스 W. 매슈스, 베르너 폰브라운(쌍안경을 목에 건 사람), 조지 뮐러, 새뮤얼 필립스 중장.#
이후 남은 계획도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마침내 1969년 아폴로 11호를 달에 안착시켰다. 닐 암스트롱은 '한 인간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 된' 발자국을 남겼다. 이 순간은 인류가 우주에 대한 가능성을 확인한 것이었고, 미국으로서는 당시 최대의 정적, 소련의 스푸트니크 1호의 발사로 인해 떨어진 자존심을 다시 세우게 되었다. 이 순간은 폰브라운의 생애에서 최고의 순간이었다. 이를 통해 폰브라운은 미국에서 각광을 받았다.[43]

7. 이후


1970년대가 되어 베트남 전쟁의 패전과 함께 미국의 경제는 하향세를 보이고, 소련과의 달착륙 경쟁에서 승리한 이후 대중과 정치권의 관심이 떨어지면서 우주 개발 예산은 크게 삭감되었다. 화성 유인탐사를 계획하고 있던 폰브라운은 이것이 취소되어 매우 실망했고, 1972년 나사를 떠나 항공기 관련 군수업체인 페어차일드사의 부사장이 되었다. 그러나 췌장암이 발견되어 1975년 은퇴하여 치료를 받다가 1977년 65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8. 평가


고다드가 현대적인 로켓을 만들어내기는 했지만 아직 초기단계에 머물러 있던 로켓 과학을 브라운은 공학의 경지로 끌어올려 이를 실용화했으며 (본인이 원한건 아니었지만)무기화하기까지 한 인물로서 이 분야에서 그가 미친 영향은 매우 거대하다.
미국과 소련의 첫 발사체들이 모두 그의 V2의 파생형 내지 역설계 물건인 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중국도 1950년대 소련의 R-2를 수입해서 복제하면서 미사일 기술을 축적했는데, R-2도 V2에 연료용량을 확장시킨 업그레이드 버전일 뿐이니, 현재 우주 3강국의 로켓 모두가 그의 기술을 원천으로 하는 셈이다.
굉장히 상상력이 풍부해서 1930년대 이미 SDI, MD와 비슷한 우주무기를 구상했을 정도였다. 궤도에 거울을 장착한 여러 위성을 띄워놓고 이들이 반사시키는 태양광을 지면의 한곳에 모아서 모두 불태워버리는 무기를 상상했다.
그런데 현대 독일에서는 평가가 상당히 나쁜 편이다. 아무래도 그가 나치에 적극 협력했고 친위대에 복무한 사실이 있기 때문이며 V2 같은 흉악한 무기를 만들어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때문... 이라고 하지만 그보다 그가 이룬 우주 개발과 달 착륙이라는 위대한 성취가 조국인 독일이 아닌 미국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여러모로 독일인들은 폰브라운에 대해 복잡한 감정이 교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도 그에게 그리 관대한 편은 아니었다. 아폴로 계획을 총지휘한 관리자이자 천재 로켓 과학자였던 그가 아니었다면 문레이스에서 이기지 못했을 것이라는 설이 정설이고,[44]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 공학자로 단연 첫 손에 꼽힐 만한 인물이지만, 타국 출신, 그것도 나치 출신 과학자라는 멍에는 결국 그를 위인의 반열에까지는 오르지 못하게 했다. 달 착륙, 미국 최초의 유인 우주 비행 등의 영예는 닐 암스트롱, 존 글렌과 같은 조종사들에게 돌아갔다. 현대 로켓의 모든 기본을 완성했음에도 나사 내의 여러 연구 센터들 가운데 고다드의 이름을 딴 센터가 있지만 폰브라운의 이름을 딴 연구 센터는 없다.
그래도 그의 NASA 우주 로켓 연구소가 있었던 앨라배마주 헌츠빌에서는 여러 기관에서 그의 이름을 기리고 있다. 그가 설립을 도운 앨라바마대학 헌츠빌 캠퍼스(University of Alabama in Huntsville)의 리서치 빌딩 이름이 Von Braun Research Hall이라 명명되었다. 또 Von Braun Center라는 이름의 대형 콘서트장과 그의 박물관이 헌츠빌에 있다. 또 헌츠빌시의 로켓 우주 소사이티에는 Von Braun Astronomical Society이라는 이름이 붙었다.[45]
또 아폴로 11호 발사 성공 후 1970년 헌츠빌에 개장한 '미국 우주 로켓 센터(U.S. Space & Rocket Center)'는 미국의 로켓 및 우주 과학 성과에 대한 방대한 전시물이 있는데, 당연히 아폴로와 새턴 V 로켓이 중심이 되어 그 전신인 주피터, 레드스톤 로켓, 제미니, 머큐리 등이 전시되어 있어 과장해서 말하면 폰브라운의 개인 전시관에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심지어 폰브라운의 일생을 다룬 개인 전시관도 있다. 물론 80년대에 폰브라운과는 무관한 우주왕복선 관련 전시물이 추가되기도 했다.
또 그의 모국인 독일에서도 도로명 등의 지명으로 그의 이름이 사용된 곳이 10여군데나 된다고 한다. 그의 모교인 베를린 공과대학교에서는 1963년 그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1979년 바이에른주에 그의 이름을 딴 공과김나지움이 생겼지만 워낙 나치 문제에 민감한 나라인 만큼 몇차례 논란과 비판 끝에 결국 2014년 교명에서 폰브라운의 이름을 제거했다.
공학계에서의 업적이 업적이니 만큼 평생 12개의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다.
아폴로 프로그램 당시 나사의 책임자였던 조지 로우(George Low)가 폰브라운 박사가 너무 인기와 화제를 모으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여 푸대접을 했다는 얘기도 있다.

9. 관련 문서


  • 로버트 고다드: 폰브라운의 액체 연료 로켓 연구에 큰 기반을 제공한 인물. 정작 모국에서는 찬밥 신세였지만...
  • V2: 나치 시절의 대표작.
  • 새턴 로켓: 폰브라운 일생의 역작라 할 수 있는, 인류를 달에 보낸 로켓.
  • 우주 경쟁
  • 발터 도른베르거: 독일 시절의 후견인인 엔지니어. 전범 혐의를 받고 영국에서 재판 후 수감되었다가 미국으로 넘어갔다.
  • 록 스미스: 플라네테스의 등장인물. 작중에서 개발하고 있는 우주선의 이름이 폰 브라운 호인 것도 그렇고, 자신의 꿈을 위해 다른 것을 눈감아 버리는 점 등(물론 록 스미스의 경우는 조금 더 사이코패스 내지는 소시오패스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폰브라운에게서 어느정도 모티브를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1] 1964년 5월, 마셜 우주 비행 센터에서. 뒤에 보이는 것은 새턴 로켓 시리즈.[2]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상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3]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V2가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영국을 폭격하는 무기로 사용된 것을 보고 안타까워하는 말이다. 이상주의자였던 본인은 로켓으로 우주에 가는 것을 상상했지만 히틀러가 이것을 무기로 사용했다는 점을 안타까워했다.[4] 옛날 책에서는 영어식으로 보고 '워너 본 브론'이라고 표기하기도 했으나, 베르너가 맞다. 다만 영미권에서는 당연히 워너 본 브론으로 읽는다. '옥토버 스카이' 등의 영화에서 그렇게 불린다. 좀 아는 사람들이나 독일어 발음 비슷하게 부르는 편.[5] 'von Braun(폰브라운)'이 성이다. von(폰#s-4)은 독일 귀족 가문의 성씨 앞에 붙는 전치사. von도 성에 포함되며, 퍼스트 네임을 제외하고 성만 부를 때 von을 함께 부르는 것이 원칙이다. 이는 독일 뿐만 아니라 유럽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여서 프랑스 귀족의 '드'(예: 샤를 드골), 스페인 귀족의 '돈'(예: 돈 키호테, 돈 후안), 이탈리아 귀족의 '디' 등이 다 성에 포함한다. 폰브라운도 서구에서는 von Braun이라고 표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존 폰노이만도 비슷한 경우이다. 이때 von의 v는 문장 맨 앞에 올 때나 성을 모두 대문자로 쓸 때 외에는 소문자로 쓰는 것이 원칙이다. 베르너 폰브라운은 미국에 귀화할 때 von Braun을 그대로 성씨로 사용했다. (귀화 증명서 링크)[6] 윗 말과 비슷하게 그의 연구 목적은 전쟁에 쓰일 미사일을 만드는 게 아니었다. 미사일을 만든 건 히틀러의 명령을 거절할 수 없었기 때문. 그러나 그는 나치가 유대인 및 전쟁 포로들을 강제 동원하며 자신의 연구를 지원하는 것을 알고도 묵인했다.[7] 현재 폴란드의 비엘코폴스카(wielkopolskie) 주[8] 꽤 비싼 물건이지만 건물을 직접 짓겠다는 브라운의 열의에 설득되어 구매했다.[9] 독일에서 최초로 로켓을 연구하고 이의 가능성을 대중서적으로 펴내 독일에 로켓 붐을 일으킨 사람이다. 그의 활약 덕분에 독일에는 로켓덕후들이 엄청나게 생겨났다.[10] 아인슈타인도 여기 출신이다.[11] 사실상 이 두 사람의 머릿속에서 NASA 유인 우주 프로그램의 큰 틀이 잡힌 셈이다.[12] 그와 우주비행 동아리를 섭외하기 위해 육군 로켓개발단장이자 베를린 대학 교수(발터 도른베르거를 지도하기도 한)였던 카를 베커 대령(1940년 사망)이 박사학위를 거하게 쐈다.[13] 이 사람은 전후 전범재판에서 V2 개발과정에서의 강제노동력 동원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았다. 교수형 안 당한 게 용할 정도로 영국에서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영국 웨일스 수용소에서 동료 전범들에게도 따돌림받는 등 고생하다가 출소하고 도미하여 미 공군의 자문 엔지니어가 된다.[14] 여기에 대해서 고다드는 노획된 V2를 면밀히 분석한 끝에 자신의 기술을 훔쳤다고 판단하였으며 브라운도 고다드의 로켓이 자신의 로켓 개발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건 인정했다.[15] V2(A4)의 축소형 시험모델[16] 이때 브라운은 로켓 역사상 처음으로 전자 두뇌를 로켓에 이식하는 데에 성공한다. 에니악이 완성된 것이 1946년이니 그거보다 훨씬 원시적인 물건이었지만 정확성을 높이기에는 충분했다. 참고로 V1, V2의 V는 독일어로 '''보복병기(Vergeltungswaffe)'''의 약자로, 히틀러가 선전선동 목적으로 붙인 이름이며 V1의 정식명칭은 피젤러(Fieseler) Fi 103이고 V2의 정식명칭은 A4.[17] 유도장치 엔지니어로, 전후 개발자급 엔지니어들 중에선 드물게 소련에 항복한다.[18] 굳이 합리적으로 이유를 붙이자면 '로켓을 발사하는 척 하면서 폭탄을 터트린다'라고 볼 수 있겠으나…대개 이런 시기엔 당연히 이유 따위 필요없고 반역죄 하나면 숙청이 가능했다. 공산권 국가에서 허구한 날 반동분자(=과거로 회귀하려는 세력=공산정권에 반대) 소리 하는 이유가 바로 이거다.[19] 당시 힘러도 일종의 위협을 가한 것일 뿐 브라운을 죽이려는 생각까지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때문에 브라운이 예전부터 몸 담고 있던 우주비행협회는 이 때문에 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브라운은 이를 계기로 더욱 로켓 개발에 몰두했다.[20] 콘스탄틴 로코솝스키의 제2벨라루스 전선군이었다.[21] 다른 인물들은 발터 도른베르거, 프리드리히 올브리히트(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의 일원), 빌헬름 리터 폰레프 (훗날 바르바로사 작전의 북부군 총사령관) 등이다.[22] 사실 노동력이 심하게 부족한 상황이 아니라면 V2와 같은 당시로서는 최첨단 기술이 집약된 정밀 무기를 만드는데 일반적인 노동자가 아닌 노예를 선호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고 폰브라운이 노동자들에게 자기 돈으로 임금을 주어야 하는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23] 페네뮌데가 영국군의 공습으로 개발살나고 생산시설이 여러 곳으로 떠돌던, 그러면서도 히틀러가 뒤늦게 V2의 가치를 인정하고 닥달을 할 적에는 폰브라운도 지금 이런 거 만들어봐야 의미없다고 여겼다고.[24] 기 모랑은 그 채찍질이 폰브라운 자신의 나치즘 판타지 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그가 폰브라운의 심리상태를 통찰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25] 실제로 도른베르거는 폰브라운을 대신하여 V2에 관심을 갖게 된 아돌프 히틀러와도 자주 만나며 이런저런 보고를 하고 그 히틀러에게 감사편지를 받기도 했다.[26] 도른베르거는 엔지니어라 해도 엄연히 국방군 소장 신분이었기 때문에 강제노역 문제를 결국 피해가지 못했고, 항복 후 곧장 미국으로 간 폰브라운과 달리 영국에서 2년간 복역한 뒤 미국으로 간다. 캠러는 종전 직전 실종되었다.[27] 마그누스는 형 베르너를 따라 화공 엔지니어로서 로켓개발에 참여하고 형과 똑같이 미 정보국에게 심문을 거쳤으며 1980년대 추방당한 아더 루돌프와 달리 늘그막까지 미국과 영국을 오가며 크라이슬러 임원으로 일하다 미국에서 평화롭게 사망했다.[28] 그 이전에도 폰브라운은 체신청 등에 접근해서 로켓 연구비를 지원받으려고 시도한 일이 있지만, 이런 다른 기관들은 제대로 로켓 연구를 지원할 수 있을 정도의 예산이 없었다. 물론 편지를 로켓으로 쏴서 다른 지역으로 신속하게 배달한다는 아이디어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꼭 예산이 없어서만은 아니겠지만.[29] 정작 미국은 로버트 고다드가 로켓을 이미 개발했는데 별 신경도 안 쓰다가 V2를 보고 그제서야 로켓의 가치를 깨달았다. 브라운의 V2는 고다드의 로켓에게 큰 영감을 얻어 설계되었다. 물론 고다드의 로켓은 기술적으로 매우 조잡한 것이었다. V2는 고다드의 로켓과는 차원이 다른 훨씬 정교한 제어 기술이 적용되어 있었고, 성능 또한 비교가 안 되는 수준이었다.[30] 1943년 영국군이 페네뮌데를 폭격한 후, V2의 제조공장은 지하화되어 노르트하우젠에에 세워졌는데(이 시기부터 강제노동도 본격화), 이 공장은 소련군이 이미 진주한 지역이어서 미군에서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이곳에 남아 있던 공작기계와 반제품들을 모두 소련군이 가져간 탓에 폰브라운은 미국으로 건너간 후 초기 개발에 어려움을 겪었다. 생산에 필요한 기계 중 미국에서 구할 수 없는 것들이 있었던지라.[31] 히틀러에게 절대 충성하는 광신적인 친위대원들은 전쟁 말기 연합군에 유용하게 쓰일 거라고 예상되는 지식인과 기술인력들을 무차별 처형했다. 폰브라운과 그 동료 과학자들은 처형 직전에 탈출했으며, (친위대원들은 미군에게 걸리면 사형감이었으니) 그들에게 사복을 주고 서로 건드리지 않기로 타협을 했다고도 한다.[32] 사실 미국에 투항한 이유는 영국보다 더욱 좋은 대접(연봉)을 제시했기 때문이었다고 훗날 밝혔다. 물론 V2와 강제노동으로 시달린 영/불, 그리고 강철의 대원수가 독재를 펼치던 소련보다야 미국의 연구환경이 더 낫긴 하다.[33] 도른베르거와 폰브라운이 넘긴 자료는 이외에도 각종 자료, 영상 필름, 부분품 등 화물열차로 341칸 분량이나 되었다. 이것들은 열차편으로 벨기에의 앤트워프 항구로 운반되어 배에 실어 미국으로 가져갔다.[34] 당시 육군항공대 소속으로 칼텍에 설치되어 있던 제트추진연구소(JPL)에서 망명한 유대계 헝가리인 과학자 테오도르 폰카르만의 주도하게 연구를 하고 있었고, 이렇게 해서 나온 게 프라이빗(이등병)-코퍼럴(상등병) 지대지미사일이다. 그러다가 독일기술이 도입되자 미국에서 자체 연구하던 것은 모두 엎어졌다. 이 제트 추진 연구소는 현재 나사 소속으로 여러 우주 기술을 연구하고 있다.[35] 뱅가드와 같은 토종 미국산 로켓은 결국 백주에 실패했다. 다만 이렇게 미국 또는 소련이 독자적으로 로켓을 연구하면서 양성된 인재들은 독일의 기술력과 합쳐져서 후에 우주 기술의 약진을 이끈다.[36] 폰브라운 팀을 미국이 보호한 것이 그들을 써먹기 보다 일단 소련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한 목적이 더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37] 그래서 폰브라운을 포함한 독일인 기술자들은 저 말을 듣고는 소련의 로켓 기술을 얕보게 됐고. 이후 스푸트니크로 뒤통수를 맞게 된다.[38] 소련으로 넘어간 기술자는 V2 유도장치를 개발한 헬무트 괴트룹이 거의 유일했는데 당시 소련에는 이 유도장치 개발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적재적소.[39] 어이없게도 10년 전에는 코롤료프가 반동혐의로 굴라크에 끌려가서 죽을 고생을 하고 있었고, 브라운은 나치 독일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V2 플랜트를 건설하고 있었으니 한 사람이 리즈 시절일 때는 다른 사람은 바닥을 달리고 있었다.[40] 세계 최초라는 건 둘째치고, 이 사건을 기점으로 소련이 대대적으로 성장할 거라는 절망적인 관측들이 나타났기 때문.[41] flop(자빠지다)+nik(스푸트니크의 nik)를 합성하여 만든 말로, 2초 만에 주저 앉은 자국의 로켓을 조소한 것.[42] 1908년 설립되어 주로 국가적으로 항공기술을 연구하는 기관이었다. 그래서 미국의 항공산업이 꼭 민간업체가 이끈 것은 아니고 초기에는 국가적인 지원이 있었다.[43] 이에 반해 소련에서 폰브라운의 역할을 하던 세르게이 코롤료프는 존재 자체가 국가비밀이었고, 1967년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대중에 알려졌다. 소련은 소유즈 우주선을 달까지 보낼 수 있는 출력을 가진 대형로켓 N-1을 개발했으나 발사 테스트에서 연속적으로 폭발하면서 계속 계획이 지연(이 중에는 유인 우주 로켓을 발사하는 테스트도 포함)되었고 그 사이에 미국이 아폴로 11호 달착륙을 성공시키자 완전히 포기했다. 사실 소련의 우주개발은 세르게이 코롤료프가 죽고 난 이후 계속 지지부진했다.[44] 아폴로 계획 총책임자 새뮤얼 필립스 중장은 그가 아니었다면 자기 생애에 미국인이 달에 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45] 라이벌 세르게이 코롤료프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되고 모스크바 주의 코롤료프 시, 에네르기아 사의 풀네임 등을 통해 여전히 그의 이름이 기념되고 있기 때문에 비교되는 것도 있다. 물론 코롤료프는 폰브라운과 달리 평생 소련에 헌신했던 소련 출신의 과학자니까 폰브라운처럼 업적에 비해 푸대접받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