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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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프 공화국의 영역
Rif War
Guerra del Rif
1. 개요
1920년~1927년에 있었던 스페인-프랑스 대 모로코 베르베르족이 세운 리프 공화국간의 대전쟁으로 전간기 시절 북아프리카에서 있었던 전쟁 중 가장 큰 전쟁이다.
크게 스페인-모로코 분쟁의 일부분으로 보통 리프 전쟁이라고 하면 3차 리프 전쟁을 칭한다.
스페인-프랑스군이 수십만 대군을 동원하고 당시 최첨단 무기였던 독가스, 탱크, 전투기까지 사용했다. 전쟁이 장기화되고 베르베르족도 격렬히 저항하여 수많은 피해를 낳았다.
2. 상세
2.1. 전쟁 초기 스페인의 대패와 리프 공화국의 성립
중세 시절부터 꾸준히 있었던 스페인과 모로코의 갈등은 산업화 이후 서구와의 군사력 격차가 확연해지자 점차 스페인의 모로코 간섭과 지배라는 결과로 나타났다. 스페인은 아메리카 식민지와 필리핀 등을 잃고 마지막 남은 아프리카 식민지라도 어떻게든 지키고자 했으며 열강의 다툼으로 모로코 위기가 발생해 전 모로코를 식민화하는덴 실패했지만 프랑스와 함께 모로코를 보호령으로 삼는데는 성공한다. 이후 스페인령 사하라와 스페인령 모로코 식민지를 설치하고 모로코 왕국에 정치적인 간섭을 행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모로코인들과 베르베르족은 몇차례 봉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1차 리프 전쟁과 2차 리프 전쟁 당시의 봉기는 진압되었다. 하지만 2차 전쟁 당시 스페인군이 크게 고전한 리프 지역의 베르베르족은 강성해지기 시작했고 이들에게 위협을 느낀 스페인군은 마누엘 실베스트레 장군이 이끄는 2만명의 병력을 보내 그들을 완전히 제거하려고 하였다.
이에 리프 지역 베르베르 부족은 3천명의 부족병사들을 동원해 이들을 요격할려고 했고 지휘관에 아브드 엘 크림을 임명했다. 그는 교사 출신으로 스페인어에 능통했고 유럽인들과 오랜 접촉으로 서구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스페인군은 모로코계 스페인 협력군인 아스카리와 스페인 외인부대를 중심으로 대규모 병력을 편성했고 이때 지휘관 중에는 훗날 스페인 총통이 되는 프란시스코 프랑코도 있었다. 스페인군은 기세 좋게 진격했지만 아브드 엘 크림이 이끄는 리프 부족이 매복해 있다가 기습하는 방식으로 대승을 거둔다.
아누알 전투(Battle of Annual)에서 실베스트레 장군이 이끄는 스페인군 주력은 아브드 엘 크림이 이끄는 리프 군대에 포위되어 완벽히 섬멸당한다. 아누알의 재앙으로 불리는 이 전투에서 실베스트레 장군은 패주 중에 실종됐고 나머지 지휘관인 펠리페 나바로와 가브리엘 모랄레스는 포로로 잡힌다.[1]
리프 부족군이 대승을 거두자 모로코엔 반 스페인의 열정이 솟아올라 수많은 주변 부족들과 모로코인들이 리프에 가담하고 이윽고 리프군은 8만에 달하는 대병력으로 성장했다. 리프군은 멜리야와 인근 스페인령 플라사스 데 소베라니아 까지 진격했지만, 도시를 함락시키는데는 실패하고 퇴각한다.
물론 멜라야로 진격할 즈음, 이미 엄청난 성과로 리프(Rif) 부족들간 동맹이 느슨해진 것도 있었고, 보급선 문제도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엘 크림은 그 뒤로도 멜리야를 함락시키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한다. 스페인으로서는 그 사이에 호세 상후르호(Jose Sanjurjo)의 36,000명 원군이 도착하여 동부지역은 지켜낼 수 있었다.
어쨌든 3개월 간 이 압도적인 전과로 인해 리프 부족은 1920년 9월 18일 리프 공화국을 세우고 아브드 엘 크림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리프 공화국은 서구 제국주의에 반감을 가지던 소련으로부터 국가로 승인을 받아 물자 원조를 약속받는 등 국가로서의 체제를 신속하게 갖추어 갔다. 반면 스페인은 대폭적인 증원을 파견해 공세로 전환했지만 셰프샤우엔 전투에서 또 다시 대패하고 모로코에서 전면 철수의 위기까지 몰리게 된다.
2.2. 프랑스의 참전
한편 스페인과 리프 공화국간의 전쟁을 관망하던 프랑스는 예상외로 스페인이 대패하고 고전하자 프랑스령 모로코와 프랑스령 알제리에도 이 같은 반식민지 운동이 번질 것을 우려하였다.
이에 1924년 프랑스군이 전선의 국경부대를 동원해 스페인을 돕기 시작했고 이에 화가 난 아브드 엘 크림은 1925년 프랑스령 모로코를 공격하여 프랑스측에 많은 사상자를 내게 하였다. 이에 격분한 프랑스측은 필리프 페탱을 사령관으로 삼아 프랑스 외인부대를 비롯하여 대규모 병력을 총동원하여 참전하였고 스페인에도 압도적인 군수품 지원을 퍼부어서 다시 공세를 재개하도록 지원했다.
프랑스군은 6만~15만에 달하는 대병력을 동원하였고 스페인도 15만 이상의 병력을 동원하였다. 더해서 1차 대전 당시 개발되어 전간기 시기 완료되었던 최첨단 탱크, 항공기까지 동원하였고 그래도 리프 공화국군이 격렬히 저항하자 독가스 공격도 퍼붓는다.
이후 1925년 9월, 스페인군은 프리모 데 리베라의 지휘 하에 리프 공화국의 수도 악스디르 근처였던 알 호세이마(Al Hoceima)에 대규모 상륙 작전을 개시하여 리프 공화국군을 분쇄하고 교두보를 확보했다.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이끄는 스페인 외인부대 병력은 리프 공화국군과의 격렬한 전투를 치뤘고 이때 겨자가스 공격으로 다시 리프군을 격퇴한다.
스페인군은 알 호세이마(Al Hoceima) 상륙작전 당시 에스파냐급 드레드노트 전함 2척과, FT-17 전차, 수상기 모함에서 함재기까지 동원해 폭격을 가했는데, 이는 최초로 육해공이 단일지위 하에 전개된 상륙작전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때 프랑스군도 쿠르베급 전함 파리와 해군 보병 대대를 파견해 지원했다.
2.3. 종결
수도 함락으로 더 이상 항전이 힘들다고 판단한 아브드 엘 크림은 최후의 희망을 걸고 테투안(Tetuan) 시에 대공세를 가했으나 결국 도시 함락에 실패하고 전력을 소진한 리프 공화국군은 재기불능 상태에 빠졌다.
결국 1926년 5월 아브드 엘 크림은 원래의 적이던 스페인이 아닌 프랑스에 항복하기로 결정하고 무장해제에 응했다. 프랑스 정부는 점령한 모로코 지역에 대해 스페인의 지배권을 인정했지만 아브드 엘 크림을 넘기라는 요구는 거절하고 그를 레위니옹 섬에 유배시켰다.
막대한 희생을 낸 리프 전쟁을 끝으로 모로코는 사실상 스페인과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다.
3. 기타
1차 세계대전과 리프 전쟁에서 보여준 독가스의 위력에, 1925년 6월 국제연맹 이사회의 주관으로 독가스 사용을 금지한 제네바 의정서가 작성되어 1928년 발효되었다.[2] 그러나 이후에도 몇몇 국가들은 화학무기를 계속 비축해두었고, 특히 이탈리아는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 독가스를 살포하여 전시 독가스 금지규정을 어긴 첫 국가가 되었다(...).
리프 공화국은 오늘날 모로코의 공화주의 운동인 신 리프 공화국 운동의 모티브가 되었다.
아브드 엘 크림의 게릴라 전술은 당대의 게릴라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고 스페인 내전 당시 게릴라들의 전술로 이어졌다. 여기서 다시 후대의 파르티잔에도 영향을 줘 현대적 게릴라 전술을 완성하는데 도움이 됐다고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