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령 모로코
1. 개요
1912년, 스페인과 프랑스가 '모로코 관련 조약'을 체결하며 프랑스령 모로코와 스페인령 모로코로 분할되면서 설립된 식민지이다.
2. 상세
1860년부터 스페인은 기존에 보유하던 몇몇 해안 식민거점들을 확장하기 시작했고, 테투안 전투에서 모로코를 패배시킨 후 와드라스 조약(Treaty of Wad Ras)을 통해 본격적으로 모로코에 개입하기 시작한다.[1] 1900년 6월 27일 프랑스와 모로코를 갈라서 차지하기로 했지만 경계를 정하지 않았다. 1902년 이후 강으로 경계를 정했고, 스페인은 1904년 스페인이 프랑스와 협상한 곳에서 권리를 행사하겠다 선언했다.
1912년 이후 모로코는 프랑스와 스페인은 모로코를 완전히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스페인은 모로코에 대하여 강압적인 통치를 시행하였으며, 리프(Rif) 지역의 풍부한 고급 철을 사업가 호라치오 에체바리에타(Don Echvarrieta)[2] 를 내세워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채굴은 많은 환경 피해를 초래했고, 원주민들이 광산의 이익을 향유하지 못하면서 불만이 쌓여갔다.
결국 1920년에는 압델 카림(Abd el-krim)이 이끄는 '리프 공화국'이 독립을 선언했지만 스페인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7년 동안 리프 공화국과 스페인 간의 전쟁이 발발하였고 (리프 전쟁), 23000명의 스페인군 사상자가 발생했다. 스페인은 모로코의 반란을 막기 위하여 외인부대 등의 최정예 부대를 모로코 및 사하라에 주둔시켰으며, 본토 주둔군은 향토방위군 수준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1934년 남쪽의 Cape Judy와 합쳐 스페인령 서아프리카(Spanish West Africa)를 이루었다.
1936년에는 스페인 제2공화국 정부에 불만을 느낀 모로코 주둔군인 몰라 장군이 카나리아 제도로 추방된 프란시스코 프랑코와 접선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스페인 내전이 시작되었다. 모로코에 주둔한 스페인군과 모로코인 외인부대는 국민파의 주력을 담당하였다. 프랑코 정권 수립 이후에는 모로코의 독립 운동을 더욱 더 철저히 탄압하였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모로코 독립운동에 대한 탄압과는 별개로 의외로 프랑코 정권도 나름 효과적인 현지인 유화책을 썼다. 일단 실질적으로 프랑스가 멱살잡고 이끌어준 정복전쟁 과정에서 베르베르 부족들의 유목민족스런 전투력과 감투정신, 상무의식에 감화된 스페인 군인들과 장교들은 개인적으로 인근 부족장, 지방 유력자들과 친분이 있는 경우가 많았고, 무엇보다 모로코 주둔군이 주도적으로 일으킨 스페인 내전은 유례없는 상호 관계 전환의 기회가 되었다. 안그래도 역사적으로 많은 부분에서 레콩키스타로 인해 고향에서 쫒겨난 무어인들의 후손격으로 볼 여지가 많은 모로코라 근대 들어와 자신들을 자력으로도 아니고 이웃나라 프랑스 멱살캐리로 아프리카 땅에서 다시한번 패배시키고 정복했으니 복수심이 이만저만이 아닌데, 36년 여름 쿠데타 발발과 식민지군 모집은 정식으로 쿠데타군의 일부도 아닌 주축으로 스페인 본토를 '침략'(?!)하여 화풀이할 기회가 되었다.
이 와중에서 프란시스코 프랑코 본인부터 시작하여 바로 자신을 정복한 그 스페인 장성, 장교들이 갑자기 마치 때이른 20세기 후반의 다문화주의자, 다원주의자 마냥 온갖 이슬람교와 예언자 무함마드에 대한 립서비스성 칭송을 늘어놓고, 일체의 사회문화적 간섭에서 손을 때며 부분적 자치도 보장하면서 공통된 소위 '유대인-프리메이슨-볼셰비키' 무신론자들에 대한 '성전'을 주장하니 좌익 공화파냐 우파 쿠데타파냐 따위 문젠 관심 없고 일단 스페인에 대한 복수를 갈망한 모로코인들이 뜨겁게 응답할 법도 했다. 당시 유럽에선 2류였던 군대를 가지고 쿠데타를 일으킨 파시스트 진영이나, 군대의 태반은 어제까진 정육점 아재, 학교 선생님, 빨렛방 아지메였던 민간인들이 총꼬나쥔 민병대였던 공화파나 실전 경험이 풍부하고, 군기가 제대로 들었고, 멘탈이나 체력이나 강인한 군사적 인적 자원이 희귀했던 상황에 이 리프 전쟁의 패잔병들이 대거 좌파 세속주의자들에 대한 '지하드-십자군'[3] 이란 전후로 좀처럼 보기 힘든 기묘한 '성전'에 가담하면서 프랑코 진영의 승리의 초석을 놓았다.
당연히 공화파라고 이런 상황을 인지하지 못한게 아닌지라 이념적으로 제국주의에 비판적이면 비판적이었지 전혀 모로코 식민지에 애착같은건 없었던 아나키스트 CNT, 스페인 공산당 같은 세력들을 중심으로 모로코 '''전격 독립'''을 선포하여 맞불을 놓음으로서 정예 식민지군을 정치적으로 와해시키려는 노력이 있었다. 그러나 인민 전선 정권의 주축이었던 사회노동당내 온건파들이나, 자유주의 중도세력의 반대와 결정적으로 전쟁 중반까지만 해도 자매 인민 전선 공화국을 구해주러 올거라고 믿었던 레옹 블룸 재임기 프랑스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이런 시도가 내부적으로 무산되었다. 스페인 내전의 다른 면모에서 너무나도 종종 반복된 민주진영의 '''정치의 필요'''란 핸디캡 때문에 앞뒤 볼거 없이 행동해도 나치 독일, 파시스트 이탈리아란 거의 무조건적 후원 세력이 있었던 국가군에게 말려버린 모습이 이런 초기의 결정적인 군사적 문제에서도 그대로 드러난 셈이다. 스페인 내부에서도 두 전쟁의 연관성은 나름 최근에서야 심도있게 조명하기 시작한 주제지만 어쨋든 스페인 내전과 스페인 자체의 현대사를 이해함에 있어서도 나머지 제국은 이미 다 상실한체 이 스페인의 가장 오래된 숙적 이웃의 땅에 처들어가 군사적 추태를 보이다 남의 힘으로 얻어서 자국의 내전에 아주 크게 써먹은 이 기묘한 식민지의 역사는 매우 중요하다.
스페인 내전 후에는 제5 전차연대와 제 27 전투비행단(Grupo)이 주둔했으며 Bf-109E, He 112, G.50을 운용했다.
2차대전이 발발하자 스페인군은 이탈리아의 침략(?!)[4] 을 방어한다는 목적으로 1940년, 국제자유구역이던 탕헤르를 일시적으로 점령하였다.
연합군의 북아프리카 상륙작전인 횃불 작전 중에는 스페인군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종종 연합군 항공기와 스페인 항공기가 상호 항공위치 장비 미비로 종종 영공을 침범하거나 항로를 방해하기도 했다. 연합군의 상륙지점이 카사블랑카와 프랑스령 알제리다 보니 그 사이에 끼인 스페인령 모로코가 겪은 해프닝. 1942년 11월 8일에는 공수부대 상륙지점을 착각한 C-47을 요격하기도 했으며 나중에는 지브롤터의 스핏파이어와 알제리에서 출발한 비시 프랑스의 D.520도 여기에 가세해(..) 스페인의 머리를 아프게했다. 그러던 중 1943년 3월 3일에는 P-38 11기가 스페인 영공을 침범했다가 스페인군의 He 112(조종사:Teniente Miguel Entrena Klett)에게 격추되는 일도 발생했다.
이후 1956년 프랑스령 모로코가 독립하자 스페인도 결국 모로코를 모로코 왕국에 반환하였다.
[1] 1860년 4월 20일 체결되었으며, 1. 모로코는 2천만 페소의 전쟁배상금 지불 의무와 2. 서부 해안의 시디이프니 할양 3. 기존 스페인령 영역 확장과 스페인 점령지역에 대한 보호 4. 최혜국 대우 5. 점령지 인근 삼림벌채권 등을 규정한 대표적인 불평등조약이다.[2] 백만장자이자 현 이베리아 항공의 창립자로, 기업인, 광산업자, 부동산사업자, 은행가,정치인(...)이다. 모로코에서 광산을 경영하면서 리프전쟁의 스페인 포로를 구해오기도 했다. 부동산에서 일가견이 있어서 마드리드와 빌바오, 바르셀로나의 건축사업에 참여 하기도 했고, 광산업으로 벌은 돈을 관광업에 투자하기도 했다. 급진 자유주의 성향 정치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2차대전 기간 중에는 독일군 정보국 국장이자 반나치 운동가였던 빌헬름 카나리스와 함께 활동하기도 했다. [3] 실제로 당시 사제들이 좌익에게 집중 학살당한 가톨릭교회나, 모로코 말리키 학파의 이맘들이나 같이 '성전'을 성포하며 쿠데타군에 힘을 대줬다[4] 당시 이탈리아는 스페인과 우방국이었기 때문에 침략할 일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