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령 알제리

 


'''프랑스령 알제리'''
'''Algérie frança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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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휘장
1830년 ~ 1962년
위치
알제리
수도
알제
정치체제
공화제
국가원수
프랑스 대통령
정부수반
주지사
통화
알제리 프랑(1848~1960)
프랑스 프랑(1960~1962)
언어
프랑스어, 아랍어
성립 이전
오스만령 알제리
소멸 이후
알제리 인민 민주 공화국
1. 개요
2. 역사
2.1. 알제리 점령
2.2. 지배와 개발 및 알제리 선주민 차별
2.3. 비시 프랑스 시절
2.4. 독립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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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현대 알제리 지역에서 성립된 프랑스식민지 중 하나. 대우는 식민지와 다를 바 없었지만, 프랑스는 다른 식민지들과는 달리 알제리만큼은 지배 기간 내내 본토로 취급하였으며 실제로 본토와 동등한 지위의 행정구역으로 편성하여 본토 레지옹처럼 주지사가 파견되어 지역을 관할하였다. 프랑스의 다른 식민지들은 총독이 실권을 쥐고 있었던 것과는 큰 차이.
프랑스가 알제리를 본토로 편입시키려 했던 이유는, 지리적으로 프랑스 본토와 가장 가까운 식민지였으며 공식적인 영토가 될 경우 프랑스-알제리 사이의 해역, 즉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나가는 길목을 프랑스가 완전히 장악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아프리카로 진출하는 거점으로 삼기에 적절하였는데 실제로 프랑스군의 주요 군항과 군수물자 공장들이 위치했었으며 그 유명한 프랑스 외인부대 역시 여기서 시작되었다. 그만큼 지정학적 가치가 매우 높은 지역이라 프랑스가 마지막까지 놓아주려 하지 않았던 식민지이기도 하다. 결국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LN)과 프랑스 간에 벌어진 8년 간의 알제리 전쟁 끝에, 1962년 알제리는 프랑스로부터 독립하여 오늘날의 알제리 인민민주공화국으로 이어진다.
본토로 취급됐으므로 알제리인들은 명목상으로 프랑스 대통령 선거권도 있고 프랑스 국민의회에도 진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는 시민권자인 프랑스계와 기타 유럽계(피에 누아르), 세파르딤 유대인에게만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줬고 아랍계 알제리인들은 시민권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참정권을 주지 않았다.

2. 역사



2.1. 알제리 점령


알제리 일대는 이슬람화 직후부터 유명한 해적의 근거지가 되었다가 1516년 마침내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 된다.(바르바리 해적) 오스만 치하에서는 명목상의 총독이 있었지만 상당부분 자치적인 형태를 띄었다. 오스만 제국이 강성했을 때는 바르바리 해적들이 지중해에서 대놓고 노략질을 일삼았지만,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면서 안 좋은 기운이 끼기 시작한다.
이를 틈타 서구 열강들은 자신들을 괴롭히던 바르바리 해적을 공격해 쫓아내기 시작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 프랑스 왕국의 국왕 샤를 10세는 아예 바르바리 해적의 근거지가 되는 북아프리카 서부 해안을 점령하기로 마음먹었다. 때마침 당시 오스만 제국의 알자자이르 총독 후세인 이븐 파샤가 자신을 능멸한 프랑스 외교관 피에르 디발(Pierre Deval)의 뺨을 부채로 때린 것을 계기로 프랑스는 오스만 제국과 후세인 이븐 파샤에 사과를 요구했고, 이것이 거절당하자 이를 구실로 프랑스 왕국은 군대를 보내 알자자이르를 점령했고 후세인 이븐 파샤는 항복했다. 이로서 바르바리 해적은 완전히 토벌되고 프랑스는 복아프리카 서부 지중해 해안을 지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지역에 주요 도시인 '알자자이르'의 프랑스어명 '알제'를 따 '알제리'라는 이름을 붙이고 통치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알제리 정복을 주도한 샤를 10세는 프랑스군의 주력 상당수가 알제리로 가 있는 틈을 타 프랑스 본국에서 7월 혁명이 일어나는 바람에 왕 자리에서 쫓겨났다. 새로 등장한 7월 왕정 초반 샤를 10세가 주도한 프랑스령 알제리의 통치에 대한 갑론을박이 있었지만 결국 통치하기로 결정했다.
초기에는 지중해 해안 일대에서 출발한 프랑스의 알제리 정복은 식민 지배 기간 내내 계속되어 내륙의 사하라 사막 방면으로 진출하면서 모로코 왕국이나, 베르베르인, 투아레그인 등의 내륙의 유목민들과 싸워가면서 1936년에 이르러서야 현재의 국경으로 확정된다.

2.2. 지배와 개발 및 알제리 선주민 차별


식민 통치를 하면서 알제리 북부 해안지대가 프랑스 남부 해안지대와 유사한 자연환경[1]을 가졌음을 파악한 프랑스 정부는 알제리를 제 2의 프랑스로 만들어 영구 지배하겠다는 계획으로 강력한 프랑스화 정책을 추진했다. 알제리 내륙이 건조하고 척박한 것과 다르게 해안지대는 겨울에 춥지도 않으면서 여름에는 지나치게 덥지도 않고 비가 적당히 와서 토질이 비옥했다.
이 당시 프랑스 정부의 프랑스화에 발맞춰 수많은 유럽인[2]들이 알제리에서의 새로운 기회를 찾아 대거 알제리로 이주했는데 식민 통치가 끝날 무렵인 1950년대 말 이들 유럽계 이주민들의 수는 알제리 인구 1000만 명중 100만 명 넘게 차지했을 정도였다. 중세부터 알제리에 거주하던 세파르딤 유대인들은 잽싸게 프랑스 식민통치의 지지자가 되었다.[3] 알제나 오랑 등의 알제리의 주요 도시들은 유럽 도시 분위기가 짙게 나타나는데, 이 당시 이주해온 유럽인들이 이 도시들에 정착하면서 나타난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이들은 검은 발이라는 뜻의 피에 누아르(Pied-Noir)라 불리며 식민 지배 시기 알제리 사회에서의 기득권을 독차지했다.
피에 누아르들은 사막에 물을 끌어올려 개간해서 나무와 식물을 심어 녹림과 밭으로 만들었고 포도 등을 재배해 프랑스에 수출하여 많은 이득을 얻었다. 수출용 제조 공장들도 다수 있었다.
알제리는 군사적으로도 중요했다. 프랑스 공군, 육군, 해군의 주요 군항과 많은 군수물자 공장들도 알제리에 있을 정도였다. 그 유명한 외인부대가 여기서 시작했고, 이 최정예 부대의 본거지였다.
물론 현지 토착 아랍인과 베르베르인들은 차별받았다. 현지인들은 유럽계 이주민보다 높은 세금을 내야 했고, 알제리의 유럽계 이주민들은 현지인들을 열등하고 나태한 민족으로 보았으며 '쥐새끼'라고 부면서 공공연히 경멸했다. 프랑스 지배 이전 현지인들은 부족 단위로 토지를 소유하였는데 프랑스는 현지에서 사유재산권을 확립하면서 공유재산인 부족 재산의 처분에 대해 제약을 가했고, 이런저런 구실로(주로 프랑스 통치에 반항했다는 이유) 현지 현지인들의 토지를 빼앗아 유럽계 이주민에게 매각했다. 공업에 있어서도 프랑스 본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자 프랑스는 알제리를 산업의 원료가 될 자원의 공급지와 자신들의 공업 상품을 팔아줄 시장으로 두었으며, 이를 위해 현지인들이 공업 자본가가 되는 것을 방해했다.
제 1차 세계대전 시절에는 프랑스가 독일에 맞서기 위해 알제리의 인력과 물자를 동원했으며, 이 때 많은 알제리인들이 프랑스군에 징병되어 싸웠다.(28만 명 정도 징집, 8만 명 정도 사망) 또한 많은 수의 알제리인을 강제노동에 동원했다. 알제리는 많은 인력을 희생하고 물자를 대주었지만 하지만 프랑스 본국은 알제리에 전쟁에 기여한 만큼의 대접을 하지 않았다.
프랑스 극우 진영과 이에 영향을 받은 미국 일부 우파 역사가들은 프랑스가 알제리를 근대화시켰다는 주장을 하고 있지만, 프랑스의 인프라 투자는 피에 누아르들이 대거 정착한 식민도시 위주로 진행되었으며, 정작 알제리 현지인들은 비옥한 해안가의 옥토들을 빼앗기고 추방당한 뒤 내륙의 척박한 토지를 경작해야 했다. 피에 누아르들의 소득이 계속 증가하는 것과는 반대로 알제리 현지인들의 소득은 인구 증가와 더불어 계속 감소하였으며, 피에 누아르들에게만 평등 교육이 진행되고 무슬림들을 일부러 학교 교육에서 철저히 배제하는 정책이 시행되었다. 후에 알제리 독립 이후에는 중학교만 졸업해도 엘리트 대우를 받거나 교사를 할 수 있었을 정도였으니...
다만 프랑스가 알제리를 지배하면서 역설적으로 알제리라는 국가의 개념[4]과 알제리인[5]의 정체성이 생겼다는 것이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

2.3. 비시 프랑스 시절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본국은 나치 독일무력하게 점령당해 독일의 괴뢰정권 비시 프랑스 정부가 들어섰으며, 샤를 드골 등의 주전파는 영국으로 망명해 자유 프랑스 정부를 세웠다. 프랑스령 알제리는 다른 식민지와 마찬가지로 비시 프랑스를 따랐다.
그러나 1943년에 연합군지중해 전선을 안정시키고 이탈리아를 위협하기 위해 횃불 작전을 벌여 알제리를 공격했고, 연합군은 비시 프랑스군 내 일부 자유 프랑스 내통자들의 협력을 얻어 알제리를 점령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알제리는 자유 프랑스 및 연합군이 파리를 탈환하기 이전까지 자유 프랑스의 거점이 되었다.

2.4. 독립전쟁


그러나 자유와 해방을 외치는 연합군이 북아프리카에 상륙한 것, 그리고 자유 프랑스가 알제리를 되찾고 나서 알제리에 이전과 다를 바 없는 통치를 하게 되면서 알제리인들의 독립 열망은 다시 불이 붙었다. 자유 프랑스군에는 알제리인들도 적지 않았는데 이들은 프랑스를 위해 독일과 싸웠지만 정작 그들이 알제리에서 본 것은 독립 시위 벌였다고 총 맞고 두들겨맞는 동포들이었다.
프랑스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그리고 프랑스령 적도아프리카 등, 다른 식민지들은 다 내주더라도 본토로 여겼던 알제리만큼은 내주지 않으려 했다. 알제리 독립 시위대를 탄압한 것을 계기로 독립 열기가 높아지자 프랑스는 독립 대신 알제리의 자치권을 확대하겠다고 나섰는데, 알제리 인구의 13%를 차지하는 유럽계 피에 누아르와 나머지 알제리 현지인에게 같은 숫자의 의석이 배당되도록 선거구를 조작했으며, 그나마 치러진 선거도 부정선거로 얼룩졌다.
일단 알제리인들은 프랑스에 맞설 힘이 없었기 때문에 숨죽여 지냈다. 그러나 2차대전 프랑스군 참전 알제리인들이 속속 알제리로 들어오고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북베트남군에 추하게 패배하자 알제리인들은 참전자들을 중심으로, 1954년부터 민족해방전선(FLN)을 결성하고 8년간 프랑스와 격렬한 알제리 전쟁을 벌였다.
프랑스군은 FLN에 대해 군사적으로 내내 우위를 점했지만 그 과정에서 일어난 알제리인 학살과 탈식민화 바람 등으로 인해 프랑스에 대한 국제여론은 점점 악화되어갔는데, 특히 아랍 국가들과 소련은 연일 프랑스를 비난하며 알제리 독립에 힘을 보탰다. 계속 이어진 전쟁으로 프랑스군도 67만 대군 중 9만여 명에 이르는 사상자를 내며 프랑스 여론도 전쟁에 환멸을 느끼게 된다. 베트남 전쟁으로 억지로 징집되어 싸우던 프랑스 젊은이들은 알제리에서 똑같이 전쟁을 치루면서 징병 기피자들만 늘어났다.
1958년에 결국 프랑스 제4공화국이 무너지고 샤를 드골개헌을 통해 신임 프랑스 대통령이 되면서 알제리에 대한 독립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정권을 잡은 드골 정부는 알제리에 "1. 알제리는 프랑스의 한 주가 되며 프랑스인들과 똑같은 혜택을 받는다. 2. 알제리는 프랑스의 자치 공화국이 된다. 3. 알제리는 국민투표를 통하여 완전한 독립 국가가 된다"의 세가지 제안을 내놓았고, 알제리 독립세력은 이에 3번안을 선택하여 1962년 에비앙 합의를 통해 독립을 쟁취한다.
독립 과정과 그 직후 프랑스군에 복무하며 알제리 민족해방전선과 싸운 알제리인(Harki/아르키)들은 보복으로 학살당하거나 프랑스 본토로 도망가야 했는데, 이들은 상당수가 문맹이었기 때문에 프랑스에 정착해서 좀도둑이나 막노동일에 종사하며 빈민으로 정착했다고 한다. 피에 누아르들도 보복을 당해 프랑스로 도망가야 했는데, 이들은 아르키만큼 처참하지는 않았으나 알제리에서 프랑스로 피난오는 과정에서 파산한 사람들이 많기는 이쪽도 매한가지였다. 알제리에서 살던 유대인들 상당수는 프랑스 본토로 피난 온 후에 명목상 기독교로 개종하는 경우가 많았다.

[1] 실제로 알제리 이웃국가인 튀니지는 극단주의 테러가 뻥뻥 터지기 이전에 2013년도까지는 프랑스인들이 휴가철마다 즐겨찾던 휴양지였다.[2] 많은 수가 프랑스 혈통이었지만 스페인, 몰타 등의 혈통도 있었다.[3] 오늘날 프랑스 유대인의 상당수는 세파르딤 유대인이며 프랑스 세파르딤 유대인의 과반수가 바로 알제리 출신이다.[4] 프랑스 점령 이전 시기에는 '''알제리라는 국가 자체가 없었다.''' 콩고나 조선, 캄보디아 등 식민지 전후 나라의 전신이 되는 과거의 국가가 없다는 것이 알제리와 다른 식민지의 차이점이라고 볼 수 있다.[5] 아랍인들의 통일성은 아랍민족주의 도래 전에는 매우 약했으며 같은 아랍어를 써도 부족이 다르면 서로 멸시하거나 다른 집단으로 취급하였다. 이는 베르베르인도 마찬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