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학구

 

李學九
1922년(?) ~ 196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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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당시 남침을 감행한 북한군 부대 중 하나였던 13사단의 참모장이었다[1]. 계급은 총좌[2].
13사단은 6.25전쟁 초반에 한국군미군을 밀어붙이며 낙동강 전선까지 진격했으나,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하여 부대가 고립되었다. 이 때 리학구는 자신이 모시던 사단장인 홍용진(洪鏞鎭) 소장과 후퇴하네 마네 하면서 옥신각신했다. 리학구는 조금이라도 빨리 후퇴해서 병력이라도 살려보자는 반면, 홍용진은 결사항전으로 버티자고 해서 두 사람은 심하게 말다툼을 했다. 결국 리학구는 홍용진을 자신의 권총으로 쏴 팔에 부상을 입히고 탈출하여 1950년 9월 21일 오전 다부동 남쪽 4km 지점에 있는 삼산동 부근 길가에서 자고 있던 미 제1기병사단 제8기병연대 소속 병사를 흔들어 깨워서 투항했다. 앞서 8월 29일 13사단 포병 연대장 정봉욱(鄭鳳旭) 중좌가 한국군 1사단에 투항한데 이은 고위 장교의 투항이었다. 그 후 북한군 1사단, 3사단, 13사단은 다부동 전투에서 와해되어 상주 방면으로 후퇴했으며 특히 13사단은 유난히 많은 귀순·투항자를 내고 사실상 궤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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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에 투항한 뒤 이송중인 이학구.
리학구는 당시 28세의 젊은 나이였지만 전반적인 전황을 잘 아는 고위 장교로서 귀중한 존재였다. 그는 북한군의 불법남침을 증명해 주는 북한군의 작전명령 제1호 등 중요한 정보자료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미군 측에서는 투항한 리학구를 포로로 취급하여 거제도에 있는 포로수용소에 감금했다. 리학구는 거듭 대한민국에 귀순하겠다고 밝혔으나 미군 측에서 거절했다. [3] 그래도 고위 장교였기에 미군 측으로부터 상당한 예우를 받았다.[4]
리학구 등의 포로들이 수용된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말 그대로 헬게이트였다. 친공포로와 반공포로가 툭하면 현피를 떴고 현피만 뜨면 반드시 사상자가 발생했다. 심지어는 친공포로들이 포로수용소장 돗트 준장을 생포해서 인질극을 벌이는 상황까지 갔다[5]. 이 상황에서 리학구는 '''단지 포로들 중 가장 계급이 높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친공포로의 대표자가 되었다. 이로 인해 리학구의 위장투항설이 거론되기도 했었다.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전쟁 포로들은 그를 공산주의자라는 것만 빼고는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였다고 평가하였다고.
결국 리학구는 윌리엄 F. 딘 소장과 포로교환이 이루어져[6] 북한으로 송환되었다. 송환된 후 1963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1] 원래 리학구는 개전 당시 북한군 제2군단장 김광협의 작전참모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김광협이 군단 참모장으로 좌천되면서 보직이 바뀌었다.[2] 총좌는 국군 계급으로 따지면 대령. 현재 북한군 계급으로는 대좌이다. 현재 북한군 장교 계급은 대-상-중-소 체계이지만 6.25 전쟁 당시에는 총-대-중-소 체계였다.[3] 거절한 이유는 사로잡은 전쟁포로를 함부로 자국 군대에 편입시킬 수 없기 때문이라는 주장과, 포로가 된 딘 소장과의 일대일 교환을 위해서라는 주장이 있다. 후자는 미국 G-2 정보문서에 근거한 것이라는데 리학구가 귀순할 당시 미국에서는 딘 소장이 포로가 된 것이 아니라 전사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어 확인이 필요하다.[4] 차라리 국군에 투항했다면 다부동 전투 때 국군에 투항해 소장까지 진급한 정봉욱 장군처럼 국군으로 편입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5] 이 당시 인질로 잡힌 돗트 준장과 그 후임으로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포로들의 요구를 수용해줬던 콜슨 준장 이 두사람은 대령으로 강등 조치후 바로 현역부적합 전역시키고 포로들에게 난폭하기로 악명높은 보트너 준장을 부임시켰다.[6] 리학구나 딘이나 둘 다 신분 분류상 ''' 장성'''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에 맞교환될 수 있었던 것이다. 보통 포로교환을 할 때 같거나 비슷한 계급끼리 교환하는 것이 원칙이다. 어떤 전쟁이든 간에 장성과 사병을 맞교환하는 군대는 없고 그러자고 제안하는 군대도 없다. 예외가 하나 있긴 한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돌프 히틀러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원수야코프 주가시빌리 대위를 맞교환하자고 했다. 이게 결코 허무맹랑한 포로교환 조건이 아닌 이유가 바로 이 야코프 주가시빌리 대위가 다름아닌 '''이오시프 스탈린 본인의 장남'''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물론 스탈린은 자기 아들이라고 예외를 둘 수 없는 공산주의의 구조 상 거절했다. 다만 이는 사실관계에 대한 조사가 조금 필요한 부분이기는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