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부동 전투
1. 개요
1950년 8월 3일부터 29일까지 6.25 전쟁 도중 지금의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와 학산리(유학산)에서 대한민국 국군과 조선인민군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 낙동강 전선의 요충지인 다부동을 백선엽 등이 이끄는 국군이 큰 희생을 감수하면서 지켜냈다. 이로써 북한군은 작전한계점에 도달, 유엔군은 추후 반격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게 된다. "동양의 베르됭 전투"라고도 불린다.
지금은 행정구역 명칭이 '다부동(洞)'이 아닌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里)'이지만 전투 당시의 지명을 그대로 따라 '다부동 전투'라 부른다. 경상북도에서는 1988년까지 읍·면의 하위 행정구역 단위로 '동'을 쓰는 곳이 많았다.
2. 당시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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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커 미 제8군사령관이 8월 1일 낙동간 방어전선을 구축하라는 명령에 따라 유엔군이 낙동강 남안으로 철수하여 방어선을 구축하려 하자 인민군은 유엔군에게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서 맹추격전을 전개하여 낙동강 북부 전선에서는 8월 5일을 경유하여 낙동강을 도하하게 되었다. 이때 낙동강 북부 전선을 담당한 인민군 제2군단은 서에서 동으로 7개 사단을 전개하여 대구를 탈취 후 부산을 점령하려 하였고 제1군단은 남에서 북으로 4개 사단을 전개하여 영산과 함안, 마산을 잇는 선을 돌파해 부산을 점령하려 하였다. 주공축선은 5개 사단이 집중된 대구 방면, 그 가운데서도 증강된 3개 사단(북한군 3, 13, 15사단과 1사단 일부)이 공격을 감행한 대구 북방의 1사단 정면이었다. 일명 '8월 공세'가 시작된 것이다.
이때 김일성은 직접 내려와 인민군 사단들을 시찰하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광복절까지는 부산을 점령하라고 인민군을 독촉했다.
3. 전투 전개
3.1. 해평리의 초전
백선엽 준장이 지휘하는 제1보병사단은 성창에서 적과의 접촉을 끊고 8월 3일 오후 낙동리에서 고생고생하며 낙동강을 도하했다. 낙동강을 건넌 1사단은 제13연대를 인동에, 제11연대를 해평동에, 그리고 사단 도하를 엄호하고 철수한 제12연대를 낙동리에 배치했다. 이때 사단은 좌측의 미군 제1기병사단과 연결되어 있었으나 우측으로는 인민군이 1사단을 추격하여 인민군 제13사단이 낙동리로, 제15사단이 구미시로, 제3사단이 왜관으로 비집고 들어오고 있었다.
8월 3일 17:00에 인민군 1개 연대가 낙동리의 모래밭에 몰려들어 도하하기 시작했는데 국군은 김점곤 중령이 이끄는 12연대로 저지선을 펼쳐 시간을 벌었다.
그러던 중 4일 사단에 좌인접한 제6보병사단과 전투지경선이 조정되면서 12연대는 사단 예비대로 임무변경되어 상림동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날 인민군 1개 연대가 12연대가 이동하는 틈을 타 낙정리로 도하하여 11연대를 공격하자 백선엽은 12연대 1대대를 증원하여 막아내고, 6일 궁기동 남쪽 225고지를 탈취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결국 도하에 성공한 인민군 13사단은 7일 밤 공격을 재개했다. 이 상황에서도 국군은 힘들게 해평동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백선엽은 여기에 12연대 3대대를 증원하고 같은 연대 2대대를 13연대 지역에 투입하였다. 이리하여 12연대는 견제력을 상실했다. 이날 22:00에 강정 나루터로 인민군 15사단 1개 대대가 도하했고, 그 결과 강 건너의 인민군은 급격히 증가했다.
8일 1:00에 해평동이 인민군에게 점령되자 과림동으로 후퇴했던 12연대 1대대는 항공지원을 받으며 역습을 감행해 전투 2시간만에 해평동을 탈취한 후 그 북쪽으로 진출하였다. 그러나 인민군이 13연대의 정면인 남율동 부근에 4일부터 만든 수중가도로 2개 연대와 T-34 15대를 도하시켜 9일에는 낙동강 대안의 고지군(201고지, 369고지, 154고지) 등이 돌파되고 말았다.
그러던 와중에 다행스럽게도 14:00에 해평동에 이르는 제방을 따라 T-34 5대가 남하하다 국군의 대전차포 화망과 미군의 항공지원에 걸려 4대가 파괴되고 369고지 밑의 국민학교에 숨어있던 T-34 3대가 대전차 특공조의 활약에 파괴되어 인민군은 대부분의 전차를 상실하였다.
전차 전력을 상실한 인민군은 전술을 바꾸어 금곡리를 우회하여 1사단의 우측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이때 국군 제2군단장 유재흥 준장이 12일 사단은 'Y'선으로 철수하여 방어하라는 명령을 내려 1사단은 20:00에 이탈하여 본 전투장이 될 다부동으로 이동했다.
3.2. 주전장 다부동
당시 군단 작전명령에 명시된 'Y'선이란 1사단의 좌 1선 13연대가 고수하고 있는 왜관 북쪽 6.5km를 기점으로 하여 11, 12연대를 5내지 10km 가량 후퇴시켜 좌로부터 369고지-수약산-족계산-신주막을 잇는 작전 지역을 말한다.
이 선은 백선엽이 지형 정찰 후 결정한 최후 방어선이었다. 이 구간은 전투정면이 20km에 달하여 매우 넓은 방어 정면이었으나 적을 감시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고 또한 1사단과 인접해 있는 6사단, 미군 1기병사단과 연결되어 방어에 유리했다.
13일 백선엽은 좌익에 15연대(13연대가 개칭됐다), 중앙에 12연대, 우익에 11연대를 각각 배치했다. 이때 1사단은 개전 이래 처음으로 편제상의 90~100%, 병력은 70%나 추가되었고, 뿐만 아니라 T-34 격파가 가능한 3.5인치 로켓포까지 지급되어 사기가 더 올라갔다.
이러던 와중에 뜻하지 않은 사태가 벌어졌는데, 12연대가 재정비를 하고 있을 동안 인민군 13사단이 12연대의 꼬리를 물고 침투하여 수암산과 유학산을 먼저 점령한 것이다. 이는 2군단장 유재흥의 삽질(...)로 2군단이 쓸데없이 철수 경로를 통제하려 하고 백선엽까지 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바람에 두 고지에 배치할 병력이 부족해져 버린 탓이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12연대는 13일 공격을 실시해 수암산을 탈취했으나 유학산을 탈취하는 데는 실패했다. 유학산은 지역에서 가장 높은 고지로 중요한 요충지라 1사단은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곳을 탈취해야 했다.
14일 새벽 인민군 3사단 1개 연대가 328고지를 공격하는 시각에 국군 12연대는 유학산을 공격했다. 15연대는 328고지를 빼앗겼다가 고전 끝에 탈환에 성공하는 등 혈투를 벌였지만 12연대는 유학산 탈취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때 좌익 11연대를 공격한 인민군 13사단이 야간을 이용하여 진목동까지 침투하여 사단 주저항선이 돌파되고 말았다.
이에 백선엽은 진목동 방면으로 나가 혼란속에 후퇴하고 있는 11연대 1대대를 수습하여 673고지로 역습하는 한편 좌측에 있던 12연대 1대대를 인민군 전차가 돌파한 진목정으로 급파하여 적의 돌파구를 봉쇄하는 데 성공했다.
인민군이 대구(당시 대구에 대한민국 정부의 모든 기능이 집중되어 있었다)만이라도 점령하라는 김일성의 독전으로 광복절에 다부동으로 총공세를 감행하여 사단 좌익 15연대는 328고지를 빼앗긴 채 고전했고 진목정에서는 진전 없는 격전이 계속되었다.
사단 좌익에 인접한 미군 1기병사단에서는 왜관 북쪽 2km의 303고지가 피탈되고, 사단 우익 인접 국군 6사단은 4km나 물러나 대구의 운명은 촌각을 다투었다.
다부동으로 쏟아지는 공세가 심상치 않음을 판단한 유엔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는 다부동에 융단 폭격을 명령했다. 16일 오키나와 기지에서 출격한 B-29 98대는 960톤의 폭탄을 목표에 투하하였으나 인민군의 포격이 다소 줄어든 것 이외에는 별 성과가 없었다(다만 백선엽 장군의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포로를 심문한 결과 이날의 융단폭격을 기점으로 적들의 기세가 결정적으로 꺾였다 증언했다고 전한다). 이 때 폭격의 성과를 확인하기 위해 공중 정찰을 수차례 실시했으나 연기에 가려 구체적인 전과를 확인할 수 없었고, 이 때문에 19일 실시 예정이었던 2차 폭격은 취소되었다.
한편 백선엽은 중과부적으로 현 진지의 방어가 힘들 것으로 판단하여 사단 고문관 메이 중위를 미 8군 사령부에 보내 증원을 건의하게 하였다. 8군 사령관 월튼 워커 중장은 백선엽의 요청에 경산에 있던 미군 27연대, 37야포대대, 8야포대대를 진목정으로, 23연대를 두모동으로 투입하여 종심을 강화하였다.
17일 국군 11, 12연대는 유학산을 공격하여 적 1,500명을 사살했으나 11연대 11중대가 지키고 있던 673고지가 기습을 받아 뚫리는 바람에 유학산 탈환에 또다시 실패하고 말았다.
한편 15연대는 융단폭격의 영향으로 인민군이 침묵하고 있는 사이 공격을 재개하여 적을 낙동강 서안으로 몰아내고 328고지를 탈환하였다. 그러나 사단 우측에 벌어진 간격으로 인민군이 침투하여 가산성을 점령했고 이로 인해 동쪽이 노출된 틈을 타서 18일 적의 특공대가 사단 사령부를 기습했으나 다행히 백선엽 및 사단 주요인물들을 사살하는 데는 실패했다.
20일을 전후하여 전선이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인접한 안강-기계의 급한 불도 꺼지자 2군단장 유재흥은 19일 'Y'선을 견고하게 하기 휘해 제8보병사단 10연대를 1사단에 배속시켰다. 그러나 유학산을 방어하고 있던 인민군 15사단과 8사단이 20일 영천과 신녕으로 향하면서 영천·신녕전투가 시작되었다.
21일 백선엽은 증원병력을 받자 'Y'선 회복을 결심하고 12연대와 10연대로 하여금 수암산 및 유학산을 공격하게 하는 한편 11연대로 신주막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번 공격도 수약산과 유학산을 점령하는데 그치고 11연대는 공격 초반부터 반격에 부딪혀 점차 후퇴하고 있었다. 이에 격분한 백선엽은 직접 권총을 들고 선두지휘하여 힘겹게 원위치를 확보하였다. 또한 이날 북한군 포병대대장 정봉욱 중좌가 휘하 병력을 이끌고 국군에 투항하여 적 포병대 배치를 알려주어 반격에 큰 도움이 되었다.[1]
한편 증원된 미군 27연대는 인민군의 전차 접근로인 진목정 북쪽에 배치되어 8월 18일 저녁 남하하는 T-34 2대와 SU-76 자주포를 파괴하고 100여 명을 사살한 데 이어, 21일에는 모든 화포와 전차를 총동원한 끝에 강력한 북한군 보전협동부대의 야간 침투 시도를 5시간 만에 격퇴했다. 당시 미군은 북한군이 오리라 추정되는 길목에 지뢰를 묻지 않고 보란 듯이 땅위에 올려두었는데, 이들의 예측대로 이곳으로 온 북한군 전차 행렬 중 선두 전차가 지뢰 제거를 위해 정지한 틈을 타 3.5인치 바주카 및 전차포로 총공격을 가했다. 특히 전날 이곳의 좌표를 미리 따둔 덕에 더욱 효과적인 공격이 가능했다. 이날 제8포병대대는 약 1,600발의 포탄을 사격했고 이외에도 약 2,500발의 박격포탄 사격이 실시되었다. 날이 밝은 후 확인된 전과만 전차 7대와 자주포 3대, 다수의 기타 차량과 유기된 시체 1,300구였다.
이날 밤 목숨 걸고 도로 양쪽의 참호에서 저지전을 펴며 전차전을 관람(?)했던 참전자들은 북한군 T-34 및 SU-76과 미군 27연대를 지원하던 73전차대대 C중대의 M26 퍼싱이 야간에 맞교환한 포탄들이 마치 볼링장 핀을 향해 질주하는 볼링공을 연상시킨다 하여 '볼링장 전투(Battle of the Bowling Alley)'로 불렀는데, 이는 한국전쟁 초반에 일어난 가장 유명한 전차전으로 알려져 있다.
3.3. 'Y'선 탈취 성공
낙동강 방어선의 이점을 살리려면 Y선으로 지정된 유학산과 수암산을 확보해야만 했다. 위에 언급되었지만 낙동강 방어선은 초기 방어선인 'X'선과 최후의 방어선인 'Y'선으로 이루어지고, 이 Y선을 확보하는 데 성공할 때 혼란스러운 낙동강 방어선의 진정을 기대할 수 있었다.
이곳의 중요성은 북한 인민군 역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넘어오려고 하였다. 때문에 자연스레 전선이 혼란스러워졌고, 전투 양상도 굉장히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참전 용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백병전은 기본이었고, 소총을 쏘기도 어려워 상호간에 수류탄을 주고 받는 수류탄전도 치러졌다. 나중엔 대인수류탄이 모자라서 대전차용까지 던져댔다. 이러니 당연히 병력 손실이 많았다.
전투가 끝난후 피해상황 집계결과, 국군 전사자 2,300명, 북한군 전사자는 5,690명이었다. 얼마나 시체가 많았는지 국군 1사단이 미군에 다부동지역을 인계하고 이동하게 되었을 때 미군 병사들이 "저 위에 있는 시체들을 모두 파묻기 전엔 지역을 인수하지 않겠다."고 했을 정도.[2]
이 어려운 상황을 1사단은 잘 버텨내고 최종적으로 미군의 증원을 받아 Y선 탈취에 성공하면서 추후 반격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4. 의의
인민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여 대한민국 정부가 있는 대구를 함락하고 부산까지 진격하기 위해 다부동 전투에 주력군을 동원하여 한달에 가까운 기간 동안 총공세를 펼쳤지만, 백선엽이 이끄는 대한민국 국군 제1사단은 미8군과 육군본부의 추가적인 병력 지원을 받아가며 25일간 거의 밤낮없이 이어진 전투 끝에 승리를 거두고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는데 성공했다.
다부동을 포함한 대구 북방은 북한군 8월 공세에서 주공 중의 주공이 집중된 정면으로, 북한군 3개 사단이 미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취약한 한국군 1개 사단 정면을 선택, 당시 한국 제2의 대도시인 대구를 점령하고자 시도했다. 요컨대 대구 주공축선이야말로 북한군이 결전을 기도한 작전적 중심(Center of Gravity, ''Schwerpunkt'')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지역을 방어하고 있던 1사단은 초기 한미연합군을 통틀어 가장 넓은 정면을 방어하고 있었음에도 침착히 지연전을 벌이면서 퇴각한 후, 수암산-유학산-다부동을 잇는 선으로 정면이 축소되자 북한군 3, 13, 15사단의 집중공격에 맞서 엄청난 손실을 입으면서도 방어선을 고수해내며 북한군 8월 공세를 실패로 몰아넣었다. 다부동에서의 엄청난 손실과 지속적인 유엔군 전력 증강으로 북한군은 8월 공세 실패 시점에서 작전한계점에 도달했다. 이로써 8월 15일 전에 전쟁을 끝내고 한반도 전체를 장악한다는 김일성의 호언장담은 무위로 돌아갔다.
다부동 전투를 전후하여 마산 위기나 영천 전투처럼 유엔군이 허를 찔려 낙동강 방어선이 일시적으로 위기에 빠진 경우는 있으나, 낙동강 방어선에서 북한군이 작정하고 병력을 집중한 주공을 격퇴한 전투는 다부동 전투가 유일하다. 이는 포천-동두천-의정부 전투 이래 성공만을 거듭하던 북한군의 작전적 주공이 좌절한 첫 사례로, 다부동에서 1사단이 밀려났다면 교통의 요지인 대구가 피탈, 한미 전선이 양분되고 방어선이 연쇄적으로 무너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다부동 전투가 벌어진 1950년 8월은 낙동강 방어전을 통틀어 피아 전력비가 북한군에게 가장 유리한 시점이었다. 즉 북한군으로서는 가장 성공 가능성이 높고, 유엔군으로서는 가장 막기 어려운 공격이 8월 공세의 대구 북방 축선 주공이었다. 이 공격이 실패하자 북한군이 적화통일을 실현시킬 가능성은 급격히 낮아졌다.
최근 연구에서도 8월공세의 주공인 상주-다부동-대구축선의 방어를 책임지고 있었던 한국군 제1사단은 심한 전투력의 격차에도 불구하고 20여일간에 걸쳐 혈투를 치른 끝에 다부동 일대의 방어선에서 이들을 격멸함으로써, 대구 점령을 목표로 한 북한군의 8월 공세는 좌절되고 말았으며, [3] 이 8월공세 이후 북한군은 작전한계점을 초과했다고 본다.[4]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려는 북한군의 기도 좌절에 미친 영향을 고려할 때, 다부동 전투는 낙동강 방어전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한국군과 미군이 연합하여 작전을 실시하여 연합작전이 발전할 수 있는 계기와 한미간의 상호신뢰도 형성될 수 있었다.
5. 여담
다부동 전투 직전 낙동강 전선 서남부에서는 작은 규모였고 덜 알려졌지만 낙동강 방어선이 무너질 수도 있는 위기인 마산 위기가 벌어졌다.
다부동 전투 이후의 영천 전투는 6.25전쟁의 전환점을 이룬 의미 있는 전투였다. 전투의 패배로 작전계획의 골간이 와해된 적은 전략의 근본방침을 바꿔 전면적인 철수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5]
당시 제1사단은 전황이 너무도 급박하여 대대급 이하 부대의 행정요원까지 모두 전투원으로 일선에 투입하는 바람에 정확한 보충 및 사상 통계를 작성할 여유조차 없었다. 이 때문에 1950년 8월에 제1사단이 정확히 몇 명의 사상자를 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전후에 피해 및 보충병 수효 등에 관한 증언을 취합해 대략적으로 추산한 결과 약 1만여명의 손실을 입었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사단 하나가 통째로 녹아 없어진 뒤 새로 만들어진 셈. 사단장 백선엽 준장도 후일 "매일 주저앉아 울고 싶을 정도의 피해를 입었다"고 회고했다. 공세에 실패한 북한군의 손실은 더 처참해서, 북한군 3, 13, 15사단은 다부동 전투 기간 도합 약 3만여명의 손실을 입은 것으로 판단된다.
국군 내에서 도는 말에 따르면 낙동강 오리알이 이 전투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한다.
당시 종군 문인으로 참전한 조지훈이 쓴 "다부원에서"가 다부동 전투를 소재로 한 것이다. 간간이 EBS 교재나 모의고사에서 볼 수 있다.
현재 6.25 전쟁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으로 매년 봄에 국방부유해발굴감식단의 주도하에 칠곡대대와 성주대대, 구미대대, 왜관읍에 위치한 미군부대인 캠프 캐롤에서 유해발굴을 하는데, 6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유해와 유품이 나오고 있다. 한 달간 35~60구 정도를 발굴하며 치열했던 이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서 칠곡군을 호국의 고장이라 부르고 있으며 이를 활용한 실제 평화 축전, 마라톤 등이 벌어지며 6월에는 다부동 전투 기념행사를 하고 있다.[6] 그리고 이 전투를 기리기 위한 기념관이 중앙고속도로 다부 나들목 옆에 위치하고 있다.[7] 이곳 말고도 왜관읍 북쪽으로 조금 더 가면 왜관 전적 기념관도 존재하고 있다.
90년대, 00년대 당시 다부동전투기념관으로 인근 초중고 학교에서 6월 즈음해서 하루 견학을 많이 갔는데 안에 전시장 내부에 국군과 북한군이 전투하는 장면을 마네킹으로 재현해놓았다. 문제는 피칠갑에 팔 다리가 다 잘려 처절하게 싸우는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많은 아이들이 충격을 먹었다.
전투 중 미군 수뇌부에 백선엽을 위시로 한 국군이 싸우지도 않고 달아나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간 적이 있었다.[8][9] 이에 흥분한 미군은 "한국놈들이 자기네 땅을 지키는 전투에서 싸우지 않는데 우리가 싸워야 할 이유가 뭐냐"면서 분통을 터트렸고, 백선엽에게 이딴 식으로 싸우면 우린 철수해 버리겠다고 항의하러 갔는데, 정작 항의하러 간 사람들은 '''사단장 백선엽이 일선에서 돌격'''하는 광경[10] 을 봤다. 결국 보고를 올린 담당자와 장교들이 사과했다.[11]
이 인연으로 백선엽은 2020년 5월 29일 국립서울현충원 매장이 무산될 경우 다부동 전적지에 묻히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자위대는 매년 간부후보생들을 다부동으로 보내 현장 실습한다.
한여름의 대구 근방이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어마무시하게 더웠다. 35도를 웃도는 폭염은 예사였다고. 3개월 뒤 장진호 전투와 기상조건이 정확히 반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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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이 다부동 전투 당시 한국군이 90mm 대공포로 지원사격을 하는 모습이라는 일부 설명이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한국전쟁 초기 한국군은 M3 105mm 경곡사포 이외에 변변한 야포를 장비하지 못했다. 이것은 다부동 전투가 끝나고 인천 상륙작전이 감행된 이후 낙동강 전선에서 반격에 돌입할 당시 한국군 제1사단 지원차 배속된 미군 제78 대공포병대대(78th AAA Gun Battalion)의 포격 모습이다.
다부동전적기념관#(사운드 자동재생 주의) [12]
[1] 정봉욱 중좌는 그대로 국군 중령으로 편입되었으며 후일 장군으로 진급하여 육군 제3사관학교장까지 역임했다.[2] 백선엽의 회고록 《부산에서 판문점까지》[3] 석영준. 작전한계점고찰. 군사연구(120). pp.302-303[4] 석영준 (2004). 작전한계점 고찰: 6.25 전쟁 전례분석을 중심으로. 군사연구(120), p.308[5] 6.25전쟁사(5) p.466[6] 칠곡보가 완성되기 전에는 왜관 보도교쪽에서 실시하였으나 칠곡보 완성후에는 그곳에서 기념행사를 하고 있다.[7] 이상하게도 한국군이 운용한 적이 없는 M60 전차가 밖에 떡하니 전시되어 있다.[8] 백선엽 장군의 수기에 따르면 실제로 한국군 11연대 1대대가 보급을 제대로 받지 못해 2일간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다면서 후퇴 중이었다고 한다.[9] 11연대 1대대가 있던 곳이 북한군에게 점령당하면 수비는 고사하고 퇴로마저도 사라져 정말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는 상황이었다.[10] 11연대가 물 한 모금 마시고 후퇴하자 병사들 앞에서 '미군도 이 낮선 땅에서 싸우는데 우리가 후퇴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내가 선두에 설 거니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라'고 훈시를 하고 직접 권총 들고 돌격을 했다고 한다. 다만 부하들이 헐레벌떡 뛰어와서 말리고 재돌격을 감행해 다부동 전투의 승리에 일조했다.[11] 당시 이 광경을 보던 27연대 마이켈리스 대령은 "사단장이 직접 앞서는 한국군은 신병(神兵)이다"라고 추켜세웠다고 한다.[12] 사실 국방부에선 적성국가 교범, 즉 북한군 교범을 참조해서 병기이름을 정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