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코프 주가시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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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3월 18일 ~ 1943년 4월 14일(만 36세)
(Яков Джугашвили, 조지아어로는 이아코브 주가슈빌리-იაკობ ჯუღაშვილი)
1. 개요
2. 생애
2.1. 유년시절
2.2. 불우한 성장기
2.3. 독소전쟁과 죽음
3. 참고문헌


1. 개요


오빠에게는 공명심도 권력욕도 없었고, 거친 면도 고집 센 면도 없었다. 그는 또 내면적인 모순이나 외향의 분열과도 인연이 없었다. 또 비교적 빛나는 인연의 소유자도 아니었다. 그는 조심스럽고 가식이 없는 성격이고 대단한 근면하며 실제로 일도 할 수 있는 인간으로서 그 조용한 태도는 사람을 절로 매료시켰다.
이복동생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의 회고
소련군인. 그 유명한 이오시프 스탈린장남으로 독소전쟁에서 소련군 육군 포병 대위로 참가하였다가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로버트 서비스나 올레크 흘레브뉴크 등의 스탈린 평전에서는 '야코프 스탈린'으로 표기하지만 다른 서적에서는 일반적으로 야코프 주가시빌리로 칭하는 편이다.

2. 생애



2.1. 유년시절


1907년 3월 18일, 조지아인인 이오세브 주가슈빌리(იოსებ ჯუღაშვილი)와 그의 첫 번째 아내인 에카테리나 "카토" 스바니제(ეკატერინა „კატო“ სვანიძე) 사이에서 태어났다.[1] 이오세브 주가슈빌리는 이오시프 스탈린의 본명으로 스탈린은 본래 조지아인이었다. 그 때문에 스탈린이 러시아에서 러시아인 여성 사이에서 낳은 이복동생들과 달리 조지아 출신이다.[2] 따라서 본명 역시 조지아어식으로 이아코브 이오세비스 제 주가슈빌리(იაკობ იოსების ძე ჯუღაშვილ, Iakob Iosebis dze Jugashvili)이지만 러시아어 표기를 따른 '야코프 이오시포비치 주가시빌리(Яков Иосифович Джугашвили, Yakov Iosifovich Dzhugashvili)'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때 카토는 반역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증거불충분 및 여러 지인들의 로비로 감방이 아니라 지역 경찰서장인 레치츠키 중령의 집에서 머물고 있었다. 스탈린과 스탈린의 어머니인 에카테리네 "케케" 겔라제가 야코프의 탄생의 순간을 지켰다. 스탈린은 자신을 도와준 바 있었던 이아코브 에그나타슈빌리(იაკობ ეგნატაშვილი, Iakob Egnatashvili)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아들의 이름을 이아코브(იაკობ, 러시아어식 표기로는 야코프-Яков)로 지었다.
당시 언론활동에 열중하던 스탈린은 야코프가 울음을 터트리면 짜증을 내곤 했지만 울음을 멈추면 즉시 아들을 간질이고 키스하며 매우 귀여워했다. 이때 스탈린이 아들의 출생신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일에 야코프의 정확한 생일에 관해서 혼동이 있었다. 9월에 야코프는 세례를 받았다. 하지만 혁명활동 중이었던 스탈린은 아들을 팽개치고 은행강도질을 하거나 아예 시베리아 유형을 끌려가기도 했으며 어린 아들과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스탈린은 가족들을 데리고 바쿠로 이주했는데 1907년을 넘기기 전에 카토가 병에 걸려 죽었다. 카토가 죽었을 당시 스탈린은 무척 슬퍼했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카토가 죽은 후 스탈린은 야코프를 처가인 스바니제 일가에 맡기고 떠났다. 이후 1912년이 되어서야 유형에서 탈출하여 한번 찾아보았지만 아들에게 거의 애정을 표시하지 않고 얼마 안 가 떠나버렸다. 이 때문에 스바니제 일가는 스탈린의 매정한 행태에 상당히 분개해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대숙청 기간 중에 스탈린의 사생활을 너무 떠들어댄 죄로 총살된다.

2.2. 불우한 성장기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고 소련이 건국된 후인 1921년에야 스탈린은 13살이 된 바실리를 찾아가 모스크바로 데려왔지만 죽은 아내 카토를 떠올리는 야코프를 스탈린은 무척이나 싸늘하게 대하며 공공연하게 바보라고 망신을 주었고, 후처 나데즈다 알릴루예바(Наде́жда Серге́евна Аллилу́ева)에게 키우게 했다. 이때 스탈린은 야코프의 교육에 어느 정도 관심을 보이긴 했지만 정치에 바빴으므로 실질적으로 나데즈다가 야코프의 교육을 담당했는데 자기와 6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새어머니와 야코프는 그다지 잘 지내지 못한 모양이다. 1922년 10월, 나데즈다는 시어머니에게 편지를 써서 다음과 같이 불평했다.

안녕하세요. 어머니께 키스를 보냅니다. 소소도 안부를 전합니다. 그이는 아주 건강하고 기분도 좋아요. 일도 열심히 하고, 어머니 생각도 한답니다. 야샤는 공부하고, 뛰놀고, 담배를 피우고, 제 말을 듣지 않습니다. 바센카 역시 뛰놀고, 엄마에게 함부로 하고, 제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아요. 그래도 아직 담배는 안 피우는데, 머지 않아 이오시프에게 배워 담배도 피울 거예요. 이오시프가 파피로스카 담배를 피울 때마다 늘 아이에게 담배 연기를 내뿜으니까요.
이런 기록을 보아선 상당히 삐딱선을 탄 모양이다. 1926년, 나데즈다는 야코프가 정신을 차리기는 완전히 글렀다고 편지를 쓰기도 했다. 하지만 나데즈다는 야코프에게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주려고 하면서 헌신한 모양이고 둘의 관계는 이후에 매우 좋아져서 나데즈다는 사실상 야코프에 대한 유일한 방패막이가 된다. 그러다가 1928년, 야코프는 기술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진학 대신에 같은 학교 친구인 조야와 결혼하겠다고 스탈린에게 허락을 청했지만 스탈린은 며느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 길길이 날뛰면서 딱 잘라 거절하고 그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이에 스탈린이 일언지하에 거절하자 항의표시로 부엌에서 권총자살을 기도했다. 스탈린은 이를 두고 총도 제대로 쏠 줄 모른다고 비웃었고 1928년 4월 9일, 스탈린은 나데즈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야샤에게 내 말을 전해 주시오. 너는 망나니나 공갈배처럼 행동했고, 나와 닮은 구석이 전혀 없으며 내가 너를 위해 더 해줄 일도 없다고, 네가 원하는 아무나하고 네 멋대로 살라고."

결국 야코프는 레닌그라드로 떠나서 살았고 그곳에서 화력발전소 전기기사로 일했다. 거기서 딸을 하나 낳았으나 곧 죽었고 부부 사이도 악화되어 곧 이혼했다. 이 시기 스탈린은 야코프 일가를 일부러 찾아가 보지도 않고 무시했다. 야코프 역시 소련 공산당에 가입하라는 아버지의 요구를 무시하여 스탈린을 분노케 했고 스탈린은 야코프를 불러 이렇게 호통을 쳤다.

"너는 내 아들이야! 네가 그러면 내가 어떻게 보이겠니? 중앙위원회 서기장인 내가! 어떤 문제에서든 네 의견을 가질 수 있어. 그렇지만 아버지 생각도 좀 해라!"

결국 야코프는 마지못해 공산당에 가입했으나 여전히 아버지와 사이는 좋지 않았고 왕래도 없었다.
1930년대에 가끔 가족 모임이 있었는데 스베틀라나의 회고에 따르면 늘 조용한 태도였지만 바실리가 여자들 앞에서 음담패설을 지껄이는 것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두들겨팬 적이 있다고 한다. 바실리 스탈린의 인격을 생각한다면 이상한 일도 아니지만. 하지만 이복 여동생인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Светлана Аллилуева[3]와는 사이가 광장히 좋아 그녀가 공부하는 것을 도와주거나 같이 놀기도 했다.
1935년, 야코프는 모스크바로 돌아왔고 모스크바 항공학교 생도인 올가 골리셰바와 약혼하고 동거하였으나 파경을 맞이했다. 1936년 오데사 출신의 무용수이자 이혼녀인[4] 유대인 여성인 발레리나 유디트 "율리야" 멜처와 결혼하였다. 며느리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에 스탈린은 불만스러워했으나 스탈린의 병적인 반유대주의가 폭발하기 전이라서 그렇게 표시는 하지 않았다. 주변에서 야코프에게 유대인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비난을 하곤 했었는데 그때마다 야코프는 열렬히 아내를 변호하곤 했다고 한다.[5] 두 사람의 사이에서 1938년 2월에 딸 갈리나 "구랴"(1938~2007)가 태어났다. 한편 야코프와 파경을 맞이했던 올가 골리셰바는 고향인 스탈린그라드로 돌아갔는데, 그녀는 이미 임신한 상태였고 1936년에 예브게니(1936~2016)[6]를 낳아 야코프에게 알리지 않고 예브게니 골리셰프로 이름짓고 혼자서 키웠다. 야코프는 자신에게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1938년에야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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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스탈린 일가의 모임, 왼쪽부터 바실리 스탈린, 안드레이 즈다노프,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 이오시프 스탈린, 그리고 야코프.
그러다가 야코프와 스탈린의 왕래는 차차 늘어가기 시작했다. 기술자로 일하던 야코프가 스탈린의 아파트를 찾아가자 스탈린은 소련엔 기술자보단 장교가 더 필요하다고 아들을 질책하며 사관학교에 들어가라고 요구한다. 이에 야코프가 프룬제 군사대학 포병군사학교에 입학하면서 스탈린은 차차 장남에게 애정을 보이기 시작했다. 1941년 5월 5일, 스탈린은 야코프와 포병군사학교 졸업생들을 크렘린에 초청하였고 좌중에 "내가 아는 사람이 포병군사학교에서 공부했는데, 그의 공책을 어깨 너머로 보니 1916년에 퇴역한 대포들을 공부하는데 엄청난 시간을 쏟고 있더라고."라고 농담했다. 그렇게 야코프가 군사학교에서 군인이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이 스탈린은 꽤 만족스러웠던 것인지 스탈린은 여름이 되면 야코프 일가를 전부 자신의 집에 불러 같이 살게 할 정도로 관계를 회복했다.

2.3. 독소전쟁과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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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가 되어 루프트바페 장교들과 함께 사진찍힌 야코프. 독일군은 이 사진을 삐라로 만들어 모스크바에 살포했다.
그러다가 1941년 6월, 독소전쟁이 발발하면서 육군 포병대위였던 야코프는 6월 23일, 육군 제14기갑사단 포병연대에 소속되어 전선으로 나갔다. 그의 가족들은 스베틀라나와 함께 소치로 피난갔다. 그의 이복동생 바실리 스탈린은 공군 조종장교로 아버지 빽을 써서 모스크바에서 꿀을 빤 반면 야코프는 그 어떠한 보호도 받지 않고 즉각 최전선에 육군 포병 장교로 투입되었다. 게다가 야코프와 스탈린의 관계가 영 거시기했다는 것을 알았던 소련 군부에서도 알아서 야코프를 안전한 참모본부에 배치한다거나 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결국 야코프는 7월 경에 스몰렌스크 전투 중에 비텝스크에서 독일군의 포로로 잡혔고 이 사실은 8월이 되어 확인되었다. 9월에 소치로 피난 갔던 일가가 모스크바로 돌아오자 스탈린은 유대인인 며느리가 독일에 야코프를 팔아넘긴 게 아닌가 의심하여 270호 명령에 따라 즉시 며느리를 포함한 장남 일가를 수용소에 투옥시켜 버렸다. 포로로 잡힌 야코프는 스탈린의 약점을 캘 수 있으리라고 여긴 독일군에게 계속된 심문을 받았으나 야코프 주가시빌리는 아버지와 소련 체제를 옹호하며 나치에게 굴복하지 않았다.[7]
나치 독일 측은 스탈린의 아들이라는 거대한 가치를 지닌 야코프를 전향시키려고 했는지, 독일의 거대한 군수공업을 보여주었지만 야코프는 소련측이 최후에 승리할 것이라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고 독일 측은 다시 야코프를 포로수용소에 수용했다. 일설에 따르면 이때 독일 측이 흔히 프리드리히 파울루스로 지목되는 독일군 장군과 야코프를 교환하자고 제안했다는 말이 있지만, 1941년 시점에서 파울루스는 아직 포로로 잡히지 않았고 독일 측이 그러한 제안을 해왔다는 문서적인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파울루스는 1943년에 스탈린그라드에서 항복하는데, 야코프가 43년 4월에 죽었고 파울루스의 항복은 2월 직전이라 2개월 정도 시간이 있기는 하다.
일단 스탈린의 딸인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는 스탈린그라드 전투 직후 스탈린이 독일 측에서 야코프와 누군가를 교환하자는 제안을 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회고한 바가 있다. 이 당시에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소련군에 포로로 잡힌 히틀러의 조카 레오 라우발[8] 교환하려 했다는 얘기도 있다.
피도 눈물도 없는 강철의 대원수로 유명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당시 스탈린은 이미 아들과 관계가 회복된 만큼 야코프가 포로로 잡혔다는 사실에 매우 괴로워하며 며칠 동안 딸인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를 불러 같이 잤고 모든 지도층은 감히 스탈린 앞에서 야코프의 얘기를 꺼내지도 못했다. 군사학교에 입관해서 열심히 노력하던 아들을 보고 장래를 기대했는데 독소전쟁 당시 최전선에서 솔선수범하면서 싸우다 적에게 붙잡혔으니 그럴 만 하다. 그러다가 게오르기 주코프 장군이 스탈린에게 야코프의 안부와 더불어 구출작전의 실행 여부를 묻자 스탈린은 이를 허락하면서도 아들이 살아오길 기대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며칠 후 식사 자리에서 스탈린은 식사를 하다 말고 접시를 밀어놓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니, 야코프는 모국을 배신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할 거요. 전쟁은 정말 끔찍해! 얼마나 많은 우리 인민의 생명을 앗아갔소! 틀림없이 가족과 친척 가운데 전쟁에서 죽은 사람이 없는 집은 없을 것이오."[9]

결국 야코프는 1943년, 포로 수용소에서 경계병이 쏜 총에 맞아 죽었다는 설이 있다. 또 하나의 설은 너무 많이 탈옥을 하려 하여 독일군이 포로 수용소 주변을 전기로 담을 만들었고 이 사실을 알고도 야코프는 전기 담을 향해 뛰어 들었다는 설이 있다. 자세한 정황은 상당히 불분명하다. 비밀 해제된 러시아의 자료로 현재 밝혀진 바에 의하면 수용소의 명령을 듣지 않아 경계병에게 사살되었다고 한다. 독일이 패망한 후 소련군은 야코프의 심문기록 및 야코프와 같이 포로 생활을 했던 포로들 및 감시병들의 증언을 확보하게 되었다. 야코프가 음모에 의해 포로가 된 것이 아니란 것을 확인하고 1943년에 야코프의 가족들을 석방한 스탈린은 장남의 일가를 전후에 좀 더 후하게 대접했다.
이래서 그런지 "스탈린은 가족에게도 냉혈한이다."라면서 그를 비난하기도 하는데 이런 주장은 주로 종교계를 중심으로 하는 서구권의 반공진영에서 나온다. 일단 이런 나라들은 직접적인 전쟁 위협을 덜 느끼는 편이고,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 역시 징병제국가주의에 대한 거부감이 강한 편이기 때문이다.[10]
그러나 수천만 명이 죽어나간 독소전쟁에서 스탈린은 가족에게도 다른 인민/병사들에 비해 특혜를 베풀지 않음으로써 전시 지도자로서 솔선수범을 보였다고 보기도 한다.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감상주의가 잘 먹히지 않는 동구권이나, 서방권 중에서도 전쟁의 위협을 생생하게 느끼고 사는 대한민국 같은 나라들은, 냉혈한 독재자였지만 자기 가족에게도 공평하게 다른 국민만큼의 희생을 요구했던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보며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스탈린이 장남을 강제로 사지로 내몬 것이 아니라 야고프 본인이 자원해서 최전선에 싸웠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 갖고 스탈린을 냉혈한이라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 실제로 그의 이복동생은 형과 달리 전쟁 내내 모스크바에서 신나게 꿀을 빨고 망나니 짓을 했다. [11]
아들인 야코프의 죽음을 알게 된 이오시프 스탈린은 겉으로는 멍청한 놈이라고 말은 했어도 속으로는 매우 슬퍼했다고 한다. 야사에 따르면 부하들에게 자식의 최후를 보고받은 스탈린은 몸이 떨리도록 놀라면서 식사에 손도 대지 않았다는 설이 있다.

3. 참고문헌


  • 젊은 스탈린,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 시공사.
  • 스탈린 평전, 로버트 서비스, 교양인.
  • 스탈린 평전, 올레크 흘레브뉴크, 삼인.
  • 나의 아버지 스탈린,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 일신서적출판사.
[1] 야코프 주가시빌리의 얼굴은 어머니를 거의 닮았고 아버지를 전혀 닮지 않았다.[2] 당시 행정구역상으로는 러시아 제국 쿠타이시현이다.[3] 당시 이름은 스베틀라나 스탈리나(Светлана Сталина)였다 아버지 사후 어머니의 본명 나데즈나 알릴루예바Наде́жда Серге́евна Аллилу́ева의 성씨를 따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Светлана Аллилуева로 개명했다.[4] 전남편은 NKVD 장교인 니콜라이 베사라브였고 야코프와 율리야가 맨 처음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결혼 상태였으나 불화로 별거하게 되고 곧 이혼한다.[5] 특히 야코프의 외숙모인 마리야 스바니제가 율리야를 교양도 없고 무식한 창녀라고 죽도록 미워했다. 게다가 어디서 들었는지 결혼을 다섯번이나 했다는 괴상한 정보도 가지고 있었다.[6] 우크라이나 대기근으로 자신의 친할아버지 스탈린의 평이 나쁘자 '''할아버지가 너희들 잘먹고 잘살게 해줬으면 찬양을 해야지 까면 되느냐'''는 망언을 날려 우크라이나로부터 영구 입국금지를 먹었다. 이복 고모 스베틀라나가 아버지의 만행에 사과한다는 말을 하자 '''미친년이 노망났다'''고 까는 등, 확실히 제정신인 위인은 아니었다.[7] 이를 보아 당시 야코프가 아버지와 사이가 꽤 좋아졌던 건 분명해 보인다. 독소전쟁 당시 직접 최전선에서 싸운 병사인 만큼 분당 10명이 죽어나가던 대학살을 눈으로 봐서 나치 독일이 더 싫었을 수도 있지만.[8] 히틀러의 이복누나인 앙겔라 히틀러의 아들이다[9] 스탈린의 말마따나 야코프는 수많은 국민들을 죽음으로 내몬 나치 독일에게 항복하지 않고 아버지를 믿었다.[10] 서유럽 중도우파야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하고 국가주의에 대한 거부감이 강한 건 유명하니까.[11] 참고로 자식들을 전쟁터에 내보내 솔선수범을 보인 지도자들은 스탈린 뿐만이 아니다. 무솔리니는 자신의 아들들을 전쟁에 파일럿으로 참전 시켰다. 처칠의 아들도 제2차 세계 대전의 많은 전역을 참전 했다. 도조의 아들들은 전쟁 동안 후방에 있었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고, 적어도 아버지 빽으로 전선에 안나간 건 아니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독신이었지만 친인척들을 특별히 우대하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