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볼티모어
2차 대전 당시 실전에 투입된 쌍발 폭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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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발 배경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본사를 두고 미 육군에게 폭격기를, 그리고 미 해군에는 뇌격기를 납품하며 성장한 글렌 L. 마틴(Glenn L. Martin Company) 사는 서유럽에서 2차 대전이 발발한 직후인 1940년 봄에 발등에 불이 떨어진 프랑스의 요청을 받아 그들이 1939년에 발표했던 쌍발 폭격기 '''마틴 메릴랜드'''(Martin 167 Maryland)를 수출하게 된다. 또한 그 개량형의 개발에도 들어가 사내 명칭 '''Model 187'''로 생산을 개시했지만, 이때는 이미 프랑스가 독일군에게 항복해버려 판매처가 없어져 버렸다. 마틴 사는 완성된 모델 187을 '''A-30'''이라는 명칭으로 미 육군에게도 제안해 보았으나, 육군항공대는 그전부터 A-20이나 록히드 허드슨 같은 충분한 후보들을 선정해놓고 있었던 탓에 그리 희망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2. 구원의 손길
이러던 차에 대서양 너머 영국으로부터 건너온 무기 구매단이 이 쌍발 폭격기에 주목하게 된다. 이 사절단에는 조지 5세의 아들인 왕세자 켄트 공작까지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는 RAF 훈련사령부를 맡고 있는 유능한 파일럿이자 항공단장이었다. 모델 187은 자신들이 만들고 있던 브리스톨 보포트에 비해 더 파워풀한 라이트 R-2600 엔진을 바탕으로 속도와 폭탄 탑재량이 더 나은 것으로, 문제는 1기에 12만 달러라는 비싼 가격이 걸림돌이었다.[1] 그러나 별다른 대안이 없던 구매단은 일단 프랑스가 주문했던 물량을 포함하여 400대를 구입하는 계약서에 서명하게 된다. 물론, 이 기체들은 나중에 전시 무기 대여법인 렌드리스 법안이 의회에서 비준을 거치면서 잔액의 상당액수는 미 전쟁성이 대신 지불하게 된다.
한편, 육군에 공격기 후보로 제출된 A-30은 군의 흥미를 끌긴 했지만, 역시 다른 후보들을 크게 압도하는 장점은 없어서 시제기 외에는 더 이상의 추가 구매를 따내는데는 실패했다. 영국은 구입한 모델 187에 볼티모어(Baltimore)라는 이름을 붙이고 훈련 부대를 편성해 기종 전환 교육을 개시했다.[2]
이렇게 해서 프랑스를 위해 만들어지기 시작한 모델 187은 초기 생산분과 2차 생산분까지 모두 600대가 전부 영국으로 보내지게 된다. 말하자면 미국에서 만들어지고 전량이 영국에서 쓰이게 된 렌드리스 무기 중 하나가 된 것이다.
3. 운용
그때부터 영국 공군 사양에 맞춰 생산된 볼티모어 폭격기는 몇 가지 면에서 기본 소체가 된 메릴랜드 폭격기와는 차이점이 있었는데, 이는 당대의 쌍발 폭격기로서는 사뭇 다른 선구적인 개념이었다. 우선, 볼티모어의 무장 탑재량과 속도는 메릴랜드에 비해 크게 나아진 것이 없었다. 오히려 속도는 근소하게 느려졌는데, 그러면서도 최대이륙중량은 2.6톤 이상 늘어나 있었다.
볼티모어의 늘어난 중량은 거의 모두 방어 무장과 탑승자와 엔진, 연료탱크롤 보호하는 장갑, 그리고 기타 의장에 할애되었다. 영국의 걸작 DH-98 모스키토 폭격기가 전투기를 능가하는 빠른 속력으로 생존성을 얻었다면, 볼티모어는 장갑과 무장, 그리고 강화된 기체 구조로 내구성을 끌어올린 것이다. 또한 한둘레 더 커진 덩치를 바탕으로 기내도 넓어져서, 동체 안에서 탑승자가 앞뒤로 자유롭게 왕래하는 것이 가능해졌고 방어 무장도 한층 강화되었다. 반면, 종래의 메릴랜드 폭격기는 기내에서 일어설 수도 없을 정도로 비좁았다. 폭탄 탑재량은 약간 더 나아졌으나, 대신 용적이 크게 넓어져 지상요원들의 무장 탑재 작업이 쉬워졌고 좀 더 큰 폭탄을 실을 수도 있게 되었다.
생산 1호기는 1941년 6월에 첫 비행에 성공했고, 전쟁 동안 영연방 공군[3] , 자유 프랑스 공군, 그리고 이탈리아가 연합군에 항복한 후에는 이탈리아 공군과 그리스 공군에도 양도된 이 폭격기는 1944년 5월까지 1,575대가 생산되었다. 영국 공군은 볼티모어를 주로 지중해 방면에서 경폭격기로 이용했다.
4. 실전에서
영국 공군에서 볼티모어를 처음으로 배속받은 실전 부대는 223 스쿼드론으로, 이 부대는 1941년 4월부터 44년 8월까지 북아프리카 전선과 이탈리아 전선에서 활약을 펼쳤다. 이 부대를 시작으로 곧 5개의 비행대로 증설된 볼티모어 부대는 북아프리카 전선에서는 나치 독일의 에르빈 롬멜 장군이 이끄는 아프리카 군단에게 맹폭을 가하며 막대한 손해를 입혔다. 아프리카 전선이 정리된 후에는 시칠리아 섬 공략과 이탈리아 본토 공격에 참가했는데, 볼티모어는 이탈리아 전선에서만 최소한 5,000소티 이상 출격을 거듭하며 6000톤이 넘는 많은 양의 폭탄을 투하했다. 영국 공군은 이에 그치지 않고 미 육군에 제시했던 A-30 사양으로 개조해 11정의 7.7mm 기관총을 기수에 고슴도치처럼 달고 저공을 훑으며 기총 소사를 가했다.
전쟁이 종반을 향해 치닫으며 볼티모어 I으로 시작된 시리즈는 볼티모어 V까지 점차 개량 한계점에 다다를 정도로 개수를 거치게 되지만, 구식화는 피할 수 없었다. 낡은 중고기가 된 기체들은 1944년 9월부터는 영국 해군항공대에서 유보트를 찾아내고 격침시키는 대잠초계기로 쓰이게 된다. 이 폭격기는 처음부터 대잠기로 만들어진 기종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잠수함들을 격침시키도록 도왔으며 8척은 직접 자신의 손으로 수장시키는 공훈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