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빈 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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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조선 숙종의 후궁. 또한 숙종이 가장 사랑한 아들 연령군의 어머니이다. 본관은 밀양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2] 박효건(朴孝健)의 딸이다.
2. 생애
생년월일은 미상이며, 어린 시절 역시 알려져 있지 않다. 원래 희빈 장씨의 나인으로 상궁 시절인 1683년에 숙종의 승은을 입었는데 10여 년이 지난 1698년 11월 4일에야 회임을 했고 그 공으로 내명부 종4품 숙원에 책봉되어 그때 비로소 정식 후궁이 되었다.[3] 이듬해인 1699년에 숙종의 6남 연령군을 낳았고, 단종의 복위를 기념하여 종2품 숙의로 진봉되었다.[4]
이어 1701년 3월 23일 귀인에 올랐다가 1702년 10월 18일 인원왕후의 왕비 책봉을 기념하여 정1품 빈의 자리에 올라 명빈이 되었다.
3. 사망과 그 후
1703년 7월 15일에 사망하여 9월 17일 내명부 정1품의 예우로 장례가 치러졌다. 장례에 앞서 명빈의 친척인 박동지가 관아에서 보낸 관을 짤 목재가 형편없음을 지적하자 숙종이 해당 관원 및 아전까지 모두 체포하여 추문·나문토록 하고 '장례 기한 내에 관판을 구하지 못하면 사대부가에서 관판을 찾아내라'는 명을 내렸다. 그녀의 장례를 앞둔 9월 3일, 숙종은 명빈의 초상에 제사를 주관할 사람이 없고 방제[5] 에 아명을 넣을 수 없다는 이유로 6세 ~ 7세에 왕자를 봉작하는 관례를 깨고 5세인 그녀의 외아들을 왕자군으로 책봉하여 연령군으로 삼고 '훤(昍)' 이라는 정식 이름을 주었다.
처음에는 경기도 금천현 번당리[6] 에 묻혔다. 1720년 그의 아들 연령군은 죽으면서 자신이 어릴 때 돌아가신 어머니의 얼굴조차 제대로 기억 못하는 것을 슬퍼하며 "어머니의 곁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겨 그녀의 묘소 근처에 묻혔다. 1935년 경성부 구획 정리 때 원래 있던 자리에서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구 가야사 터 근처 옥계 저수지변에 아들 연령군의 묘소와 함께 이장되었고 연령군의 묘 왼쪽에 묻혔다. 가야사 터는 명빈의 양고손자 남연군 묘소가 있는 곳이다.[7] 명빈의 묘소 왼쪽 아래편에는 양5대손인 흥녕군 이창응의 묘소가 있다.
[1] 명빈의 한자는 실록에는 '䄙嬪'으로 되어있으나 승정원일기에는 '䄙嬪'과 '嫇嬪' 2가지로 기록되어 있다.[2] 조선 시대의 관계. 정3품의 상계(上階)이다.[3] 조선왕조실록 - 숙종실록 32권, 숙종 24년 11월 4일 을해 4번째 기사.[4] 조선왕조실록 - 숙종실록 33권, 숙종 25년 10월 23일 정해 2번째 기사.[5] 신주 아래의 왼쪽에 쓴, 제사를 받드는 사람의 이름.[6] 현재 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7] 연령군은 아들이 없어 선조의 9남 경창군의 6대손 낙천군을 입양했고 낙천군 역시 자식이 없어 사도세자의 4남 은신군을 후사로 두었다. 그런데 은신군마저 후손을 두지 못해(...)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6대손 남연군을 양자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