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령군

 


'''계동궁의 역대 종주'''
연령군가 역사 시작

'''1대 연령군 이훤'''

2대 낙천군 이온
'''조선 숙종의 왕자'''
'''연령군
延齡君'''

'''군호'''
연령군(延齡君)[1]
'''시호'''
효헌(孝憲)
'''본관'''
전주(全州)
'''이름'''
훤(昍)
''''''
문숙(文叔)
'''부왕'''
조선 숙종
'''생모'''
명빈 박씨(榠嬪朴氏)
'''부인'''
상산군부인 상산 김씨(商山 金氏)
'''자녀'''
1남[2]
'''묘소'''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옥계리
'''생몰
기간
'''
'''음력'''
1699년 6월 13일 ~ 1719년 10월 2일
'''양력'''
1699년 7월 9일 ~ 1719년 11월 13일
1. 개요
2. 생애
3. 대중매체에서
4. 사후와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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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훗날 영조로 즉위하는 연잉군과 함께 숙종의 귀여움을 받았다. 어찌나 숙종이 연령군을 예뻐했는지 경종의 자리를 위협하던 연잉군의 자리가 연령군에게 위협당했다는 카더라가 있을 정도다. 또한 연령군의 숙배 때 늦은 이조정랑 조도빈은 바로 파직당했을 정도.[3] 하지만 연령군은 그저 정치와 무관한 사랑용 아들이란 주장도 있다.
5세에 그의 생모인 명빈 박씨가 사망하자 숙종은 주상자가 된 연령군을 서둘러 군에 봉했다. 군은 원래 6세 이후에 봉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반대가 있었다. 그러나 상대가 누구인가? 천하의 숙종이다. 반대하는 대간들을 모조리 부숴버리고 책봉을 강행했다.

2. 생애


9세에 판돈령 부사 김동필의 딸과 혼인하였다. 아버지의 병간호를 위해 변의 맛을 볼 정도로 효성이 지극하였다.
1708년에 출궁하여 사저에 기거했다. 숙종은 연령군을 위해 수만냥의 돈을 들여 저택을 지어주려 했지만, "연잉군에게 2천냥 썼는데 여기서 돈을 낭비하면 되냐"는 조정의 비판에 그만두고, 선조의 적녀인 정명공주의 200칸 저택을 사서 주었다. 원래 거긴 연잉군이 눈독들였던 집인데, 숙종이 택도 없다며 못 사게 했다. 하지만 연령군에겐 대뜸 사주었다. 연잉군 안습.(...) 주춧돌을 보수하는 데만 4가구의 재산에 해당하는 돈을 썼다 할 정도로 연령군을 위해 엄청난 돈을 썼다.
어쨌거나 사저에 기거할 때 민간에 폐를 끼치지 않았다는 좋은 평이 있다. 숙종이 죽기 직전인 1719년에 고작 21세의 나이로 요절하여 숙종은 크게 상심했고 제문과 묘지문을 손수 지었다.

3. 대중매체에서




4. 사후와 후손


1719년(숙종 45년) 소현세자의 후손인 밀풍군의 차남 상원군이 양자가 되었으나#[4] 생부 밀풍군이 이인좌의 난에 엮이는 등의 이유로 1733년(영조 9년) 사망 후 파양당했다.#, 대신 선조의 9남 경창군의 7대손 낙천군이 연령군의 양자로 입적했지만 그 역시 자식없이 죽었다. 그래서 낙천군의 양자이자 연령군의 양손자로 덕흥대원군 9대손인 달선군이 1747년(영조 23년)에 들어왔으나# 곧 자살하자 파양당했다.# 그래서 한동안 연령군의 후손은 없었다.
1776년(정조 즉위년) 정조는 이복동생인 은신군을 연령군의 봉사손으로 정했다.# 그런데 이게 이미 은신군이 죽은 후인데다가, 연령군의 아들[5] 낙천군의 아들로 입적시킨다고 명확하게 한 게 아니라서 당시에도 말이 많았다.## 항렬을 따지면 은신군은 연령군의 손자 뻘이기 때문에(할아버지 영조의 동생이므로) 연령군의 손자, 낙천군의 아들로 입적되는 것이 맞았다. 그런데 연령군의 봉사손으로 정한다고만 하고 낙천군과의 관계는 일절 언급이 없었던 것이다. 연령군의 봉사손이 된다고 해서 자동으로 낙천군의 아들이 되는 게 아니고, 구체적으로 '낙천군의 양자로 삼는다'라고 정해야 비로소 낙천군에게 입적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은신군은 자식없이 죽어서 한 동안은 예관들이 연령군의 제사를 맡았다.#
1815년(순조 15년) 인평대군의 6대손 남연군이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하지만 위에 언급한 애매한 문제때문인지 남연군과 그의 후손들은, "비록 연령군의 제사와 생일은 챙겨도 우리는 엄연히 영조사도세자의 후손"이라는 인식을 했었다. 그러다 20세기 중반에 들어서 정식으로 연령군과 낙천군을 자신들의 선조로 인정하였다.[6]
참고로 이 남연군에게는 아들 4명이 있었는데, 그 중 넷째가 바로 '''흥선대원군''', 다시 그 차남이 '''고종'''이다.[7] 즉, 윗 문단에서 말한 은신군의 후손들은 흥선대원군과 고종의 일가인 것.
어머니 명빈 박씨 옆에 묻어달라는 그의 유언에 따라 현재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 일대인 금천에 묻혔다가 나중에 양증손자인 남연군의 묘가 충청남도 예산군에 조성되자 같은 대방동에 묻힌 양고손자 흥녕군 이창응의 묘와 함께 예산군 덕산면으로 이장되었다.

[1] 군호는 황해도 연안군(延安郡)에서 유래했다.[2] 후술하겠지만 양자이다.[3] 다만 조선 시대 벼슬살이에서 파직은 그리 큰 벌이 아니고 곧 동급의 다른 벼슬에 제수되곤 한다.[4] 상원군 군호는 1727년(영조 3년)에 받았다.#[5] 물론 양자.[6] 1792년 편찬된 《선원계보기략》에도 은신군사도세자의 아들로 되어 있었고, 고종이 즉위한 뒤에 편찬된 《선원보》들도 사도세자의 자녀 항목에 은신군을 넣었으며, 출계(出系)라는 단어를 넣지도 않고 사도세자의 아랫 부분에 은신군의 이력을 기록하였다. 1892년 발행된 《선원계보기략》에도 은신군은 사도세자의 아들로 등재되었다. 뿐만 아니라 1899년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어 그의 후손들에게 황족 자격으로 군호를 줄 때, 은신군의 자손들도 포함되었다. #[7] 그니까 쉽게 말해서 최종적으로는 연령군 - 낙천군 - 은신군 - 남연군 이렇게 계통이 확립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