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신군

 


'''계동궁의 역대 종주'''
2대 낙천군 이온
[1]

''' [2]'''

3대 남연군 이구
'''조선 장조의 왕자'''
'''은신군
恩信君'''

'''군호'''
은신군(恩信君)[3]
'''시호'''
소민(昭愍)
'''본관'''
전주(全州)
'''이름'''
진(禛)
'''부왕'''
조선 장조(사도세자)
'''생모'''
숙빈 임씨(肅嬪 林氏)
'''부인'''
남양군부인 남양 홍씨(南陽 洪氏)
'''자녀'''
1남[4]
'''묘소'''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
'''생몰
기간
'''
'''음력'''
1755년 1월 11일 ~ 1771년 3월 29일
'''양력'''
1755년 2월 21일 ~ 1771년 5월 13일
1. 소개
2. 생애
3. 사후와 후손
4. 매체에서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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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조선의 왕족으로, 본명은 이진(李禛). 장조의 4남으로, 후궁 숙빈 임씨의 차남. 정조의 두번째 이복 동생이다.

2. 생애


12세가 되는 1767년에 홍대현[5]의 딸 남양 홍씨와 혼인하고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4세 때 김구주 일당이 사치를 부린다고 모함해 친형인 은언군과 함께 관직을 박탈당하고 제주로 귀양을 간다. 그 후 풍토병에 걸려 17세의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이에 영조는 다음과 같은 입장을 표명했다.

“아! 이번의 처분이 국가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마음에는 지금까지 차마 못할 일이라고 여겼었다. 본주(本州)의 계본(啓本)이 어제 도착하였는데, 중관(中官)이 혹시 상심할 것을 염려하여 머뭇거리면서 머물러 두게 하였다가 오늘에야 비로소 알렸으니, 슬픈 마음을 어디다 비유하겠는가? 관재(棺材)는 본목(本牧)으로 하여금 가려서 지급하게 하고, 의금(衣衾)은 본현감(本縣監)으로 하여금 종신(宗臣)의 예(例)에 따라 살피고 단속하여 마음을 써서 거행하도록 하되, 우선 가시 울타리를 철거하게 하고 마음을 써서 운구(運柩)하도록 하라.〈은언군(恩彦君)〉 이인(李橉)이 만약 함께 물고(物故)하였다면 나의 마음이 어떠하였겠는가? 특별히 석방하는 일을 당일 안에 배도(倍道)하여 분부하도록 하라. 그리고 진의 처(妻)에게는 해청(該廳)으로 하여금 휼전(恤典)을 베풀도록 하라.”

사관은 다음과 같이 논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종자(宗子)는 성(城)이다.’라고 하였으니, 곧 왕실(王室)의 울타리가 됨을 이르는 것이다. 진은 지금 임금의 손자로 아주 멀리 떨어진 섬에서 그의 죄가 아닌데 죽었으니, 임금이 비록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전례를 시행하기는 하였지만 미칠 수가 없었다.


3. 사후와 후손


이복 형 정조가 즉위한 뒤 복권받았고, '소민공(昭愍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후 정조는 은신군을 숙종의 6남 연령군의 봉사손으로 정했다.# 그런데 이게 은신군이 죽은 후에 정한데다가, 연령군의 아들인[6] 낙천군의 아들로 입적시킨다고 명확하게 한 게 아니라서 당시에도 말이 많았다.
항렬을 따지면 은신군은 연령군의 손자 뻘이기 때문에(할아버지 영조의 동생이므로) 연령군의 손자, 낙천군의 아들로 입적하는 것이 맞았다. 그런데 연령군의 봉사손으로 정한다고만 하고 낙천군과의 관계는 일절 언급이 없었던 것이다. 연령군의 봉사손이 된다고 해서 자동으로 낙천군의 아들이 되는 게 아니고, 구체적으로 '낙천군의 양자로 삼는다'라고 정해야 비로소 낙천군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정조가 밝히길 "은신군이 낙천군의 제사를 받들기 주저해서 곧장 연령군의 제사를 모시게 했다"고 하는데# 생전에 입적한 게 아니기 때문에 좀 의문스러운 부분이 있다. 어쨌든, 은신군도 자식이 없어서 한동안은 예관들이 대신 제사를 지냈다.
1815년(순조 15년)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6대손 남연군이 은신군의 양자가 되었다.#, 위에 언급한 애매한 문제 때문인지 남연군과 그의 후손들은, '우리는 연령군의 제사를 챙길 뿐, 엄연히 사도세자의 자손'이라고 인식했다. 그러다 20세기 중반에 들어서야 정식으로 연령군과 낙천군을 자신들의 선조로 인정했다. 그래서 연령군 - 낙천군 - 은신군 - 남연군으로 이어지는 계보가 확립되었다.[7]
남연군에게는 아들 4명이 있었다. 그 중 넷째가 바로 '''흥선대원군''', 그 차남이 '''고종'''이다. 그래서 고종의 부계 증조부 중 한 명이다[8].
묘소는 처음에 제주도에 있었다가 한성부 근처로 옮겨왔다. 그러다 1779년(정조 3년) 11월에 경기도 양주군 금촌 이패리[9]에 있는 어머니 숙빈 임씨 묘소 옆으로 다시 옮겼다. 이후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10]으로 이장했다가 2000년대에 운현궁 4대 사손 이청이 화장하여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에 위치한 흥선대원군묘 건너편에 있는 이우[11]의 묘 자리에 납골 형식으로 모셨다. 은신군 뿐 아니라 낙천군, 흥친왕, 영선군, 이문용, 이우, 이종[12]의 납골묘도 함께 있다.



4. 매체에서의 등장


  • 이태리[13] - 1998년 MBC대왕의 길



[1] 달선군 항목 본문 참조.[2] 생전에 종주였던 적은 없다.[3] 군호는 충청남도 논산시의 옛 지명인 은진(恩津)에서 유래했다.[4] 후술하겠지만 양자이다.[5] 조선 후기의 유명한 실학자 홍대용의 사촌이 홍대현이다.[6] 물론 양자.[7] 1792년 편찬된 《선원계보기략》에도 은신군은 사도세자의 아들로 되어 있었고, 고종이 즉위한 뒤에 편찬된 《선원보》들도 사도세자의 자녀 항목에 은신군을 넣었으며, 출계(出系)라는 단어를 넣지도 않고 사도세자의 아랫 부분에 은신군의 이력을 기록하였다. 1892년 발행된 《선원계보기략》에도 은신군은 사도세자의 아들로 등재되었다. 뿐만 아니라 1899년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어 그의 후손들에게 황족 자격으로 군호를 줄 때, 은신군의 자손들도 포함되었다. #[8] 고종에겐 '''부계 증조부가 3명(...)'''이었다. 실제 핏줄 상 생 증조부는 인평대군의 5대손 이병원이고, 즉위 전 족보 상 증조부는 친할아버지 남연군의 양아버지 은신군이었다. 그리고 즉위할 때 효명세자의 양자가 되었기 때문에 법적 증조부는 정조이다.[9]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이패동 해질모루부락 서쪽.[10] 현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11] 고종의 아들 의친왕 이강의 2남이자 영선군 이준용양자.[12] 이우의 아들이자 이청의 동생. 1966년 12월에 미국에서 교통사고요절했다.[13] 본명 이민호. 1993년 생으로 《순풍산부인과》의 정배, 《화정》에서 효종을, 《뷰티인사이드》에서 정주환 역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