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천군

 

'''계동궁의 역대 종주'''
1대 연령군 이훤

'''2대 낙천군 이온'''

[1]
3대 남연군 이구

'''조선 숙종의 손자 | 계동궁 1대 사손'''
'''낙천군
洛川君'''

'''군호'''
낙천군(洛川君)
'''본관'''
전주(全州)
'''이름'''
온(縕)
'''초명'''
수신(守愼)
''''''
온중(蘊仲)
'''양부'''
연령군
'''양모'''
상산군부인 상주 김씨(商州 金氏)
'''생부'''
이채(李埰)[2]
'''생모'''
진주 류씨(晉州 柳氏)[3]
'''부인'''
달성군부인 달성 서씨(達城 徐氏)
'''자녀'''
1남[4]
'''묘소'''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
'''생몰
기간
'''
'''음력'''
1720년 10월 21일 ~ 1737년 9월 5일
'''양력'''
1720년 11월 26일 ~ 1737년 9월 28일
1. 개요
2. 생애
3. 사후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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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숙종과 명빈 박씨 소생 서자 연령군의 양자다.

2. 생애


1720년(경종 즉위년)에 한성부에서 권지승문원부정자와 홍문관 정자를 지낸 문신 이채와 부인 진주 류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원래 선조의 9남 경창군의 6대손으로, 조선 왕실 직계와는 선조의 아들 대에서 갈라졌기 때문에 100여년이 지난 당시에는 왕족이 아니었다. 그러나 자녀 없이 죽은 숙종의 3남 연령군의 양자로 입적해 왕족이 되었다.
사실 연령군의 원래 양자는 따로 있었다. 숙종은 소현세자의 증손자 밀풍군 탄의 아들 상원군 공을 연령군의 양자로 삼았다. 그러나 상원군은 아들 없이 죽고, 상원군의 생부 밀풍군이인좌의 난에 엮여 파양당했다. 그래서 다시 대가 끊긴 연령군의 양자로 낙천군이 지명받은 것이다.
낙천군은 입양 후 이름을 수신에서 온으로 바꾸었다. 이후 오위도총부 부총관과 도총관을 역임했다.
1737년(영조 13년) 2월에 서종수의 딸과 혼인했다. 그러나 혼인한지 7달이 채 못지난 그해 9월에 사망했다. 향년 16세.[5]

3. 사후


덕흥대원군의 8대 사손인 동지돈녕부사 이형종의 아들 이영을 달선군으로 봉하고 낙천군의 양자로 삼았다. 그러나 낙천군 부인 달성 서씨가 달선군 부인 신씨를 괴롭히자 달선군이 약을 먹고 자살했다. 달선군은 자식이 없었고, 더군다나 달선군이 죽은 뒤 서씨 부인이 영조에게 건의해 달선군은 사후 파양당하고 말았다. 그래서 연령군 - 낙천군의 대는 또 다시 끊겼다.
영조의 손자 정조는 이복동생 은신군을 연령군의 봉사손으로 정했다.# 그런데 이게 은신군이 죽은 후에 정한데다가, 낙천군의 아들로 입적시킨다고 명확하게 한 게 아니라서 당시에도 말이 많았다.
항렬을 따지면 은신군은 연령군의 손자 뻘이기 때문에(할아버지 영조의 동생이므로) 연령군의 손자, 낙천군의 아들로 입적하는 것이 맞았다. 그런데 연령군의 봉사손으로 정한다고만 하고 낙천군과의 관계는 일절 언급이 없었던 것이다. 연령군의 봉사손이 된다고 해서 자동으로 낙천군의 아들이 되는 게 아니고, 구체적으로 '낙천군의 양자로 삼는다'라고 정해야 비로소 낙천군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정조가 밝히길 "은신군이 낙천군의 제사를 받들기 주저해서 곧장 연령군의 제사를 모시게 했다"고 하는데# 생전에 입적한 게 아니기 때문에 좀 의문스러운 부분이 있다. 어쨌든, 그 은신군도 자식이 없어서 한동안은 예관들이 대신 제사를 지냈다.
1815년(순조 15년)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6대손 남연군이 은신군의 양자가 되었다.# 위에 언급한 애매한 문제 때문인지 남연군과 그의 후손들은, '우리는 연령군의 제사를 챙길 뿐, 엄연히 사도세자의 자손'이라고 인식했다. 그러다 20세기 중반에 들어서야 정식으로 연령군과 낙천군을 자신들의 선조로 인정했다. 그래서 연령군 - 낙천군 - 은신군 - 남연군으로 이어지는 계보가 확립되었다.[6]
낙천군의 첫 무덤은 연령군명빈 박씨 묘가 자리하던 서울특별시 동작구 대방동에 있었다. 이후 연령군 묘는 남연군 묘가 있는 충청남도 예산군으로 갔고, 낙천군 묘는 2000년대에 운현궁 4대 사손 이청이 화장하여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에 위치한 흥선대원군묘 건너편에 있는 이우[7]의 묘 자리에 납골 형식으로 모셨다. 낙천군 뿐 아니라 은신군, 흥친왕, 영선군, 이문용, 이우, 이종[8]의 납골묘도 함께 있다.

4. 여담


  • 혼인하기 정말 힘들었다. 영조는 처음에 낙천군의 부인으로 세자시강원에서 일하던 시직 김치만(金致萬)의 딸을 지목했다. 그런데 이미 약혼한 상대가 있어서 거절당했다. 그러자 영조는 김치만을 체포하고 계속 설득했지만 김치만이 끝까지 반대하자 그를 삭탈관직시켰다. 한번 물먹은 영조는 대신 정성왕후의 일족인 서종수(徐宗秀)의 딸과 혼인시키려 했다. 그러나 서종수도 처음에는 거절했다.(...) 그러자 영조는 서종수를 옥에 가둔 다음 종부시[9]에 엄명을 내려 날짜를 정하게 한 다음 1737년(영조 13년) 4월에 혼인을 성사시켰다.



[1] 달선군 항목 본문 참조.[2] 선조의 9남 경창군의 5대손.[3] 한성부 우윤을 지낸 유만중의 딸.[4] 후술하겠지만 양자이다.[5] (당시 나이 셈법인)세는 나이 기준으로는 18세.[6] 1792년 편찬된 《선원계보기략》에도 은신군은 사도세자의 아들로 되어 있었고, 고종이 즉위한 뒤에 편찬된 《선원보》들도 사도세자의 자녀 항목에 은신군을 넣었으며, 출계(出系)라는 단어를 넣지도 않고 사도세자의 아랫 부분에 은신군의 이력을 기록하였다. 1892년 발행된 《선원계보기략》에도 은신군은 사도세자의 아들로 등재되었다. 뿐만 아니라 1899년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받아 고종이 그의 후손들에게 황족 자격으로 군호를 줄 때, 은신군의 자손들도 포함시켰다. #[7] 고종의 아들 의친왕 이강의 2남이자 영선군 이준용양자.[8] 이우의 아들이자 이청의 동생. 1966년 12월에 미국에서 교통사고요절했다.[9] 조선 왕실 계보인 《선원보첩(璿源譜牒)》의 편찬과 종친의 잘못을 규탄하는 임무를 관장했던 기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