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연군

 

'''계동궁의 역대 종주'''
2대 낙천군 이온

'''3대 남연군 이구'''

4대 완림군 이재원[1]

'''조선 장조의 손자[2] | 계동궁 2대 사손'''
'''남연군
南延君'''

'''군호'''
남연군(南延君)[3]
'''시호'''
영희(榮僖) / 충정(忠正)
'''본관'''
전주(全州)
'''이름'''
구(球)
'''초명'''
채중(采重 / 寀重)
''''''
치수(稚受)
'''양부'''
은신군
'''양모'''
남양군부인 남양 홍씨(南陽 洪氏)
'''생부'''
이병원[4]
'''생모'''
미상
'''부인'''
군부인 여흥 민씨(驪興 閔氏)
'''자녀'''
4남
'''생몰
기간
'''
'''음력'''
1788년 8월 22일 ~ 1836년 3월 19일
'''양력'''
1788년 9월 21일 ~ 1836년 5월 4일
1. 개요
2. 생애
3. 사후
3.1. 묘소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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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시대의 왕족. 흥선대원군아버지, 고종할아버지이다.

2. 생애


1788년(정조 12년)에 태어났다. 첫 이름은 이채중(李采重).
그는 원래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6대손이라 출생 당시에는 왕족이 아니었다. 그러나 28살이던 1815년(순조 15년)에 정조의 이복 동생이자 연령군의 양손자인 은신군양자로 입적하여 종친이 되었다. 이때 남연군(南延君) 군호를 받고 이름을 구(球)로 고쳤다.
이 양자 입적으로 제법 빵빵한 인맥을 얻었다. 은신군의 부인이자 남연군의 양어머니 남양 홍씨는 조선 후기의 유명한 실학자 홍대용의 5촌 조카이자, 추사 김정희의 양어머니의 자매였다. 즉, 김정희와는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족보 상 이종사촌이 되었다.
인현왕후의 백부 민정중의 후손이 되는 민경혁의 딸과 결혼하여 4남 1녀를 보았다. 장남 흥녕군 이창응과 차남 흥완군 이정응은 젊어서 죽었고 3남과 4남이 조정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3남은 평판은 굉장히 안 좋지만 영의정을 지내는 흥인군 이최응이고 막내 아들은 그 유명한 흥선대원군 이하응. 남연군은 막내 아들의 재능이 남다름을 알아차리고 김정희 문하로 보내서 글과 그림을 배우게 했다고 한다.
본래 남연군은 왕실 직계와 상당히 멀었지만, 사도세자의 친자 은신군의 양자가 되면서 족보 상 직계 왕통에 꽤 가까운 입장이 되었다. 이 덕분에 당시 사람이 귀했던 왕실의 가까운 종친으로 대접받았으며 아들인 이최응, 이하응과 함께 '종친의 모범'으로 인정받은 기록도 있다.
남연군 본인은 살아 있을 때 정치적으로는 그리 큰 두각을 나타냈다거나 주목을 받지는 못한 듯하며, 기록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그냥 조용하고 무난하게 살다 간 인물로 보인다. 다만 은신군의 양자가 된 뒤에도 자신의 본가 근처에서 생활한 것 및 수원관 재직 시절 제사 제대로 안챙기고(...) 용주사에서 술을 마시거나 고기를 구워 먹기도 했으며, 이조예조의 소속 관원도 아니면서 능참봉의 인사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탄핵당한 적은 있었다.[5]
1828년(순조 28년) 청나라에서 회강을 평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정에서는 남연군을 정사로 한 진하사(進賀使)를 파견했다. 이런 일에는 원래 정승급 인물을 정사로 보낸다. 이는 남연군이 정승급 얼굴 마담의 자격을 갖췄고 조정에서 그만한 대우를 받았다는 뜻이다.

3. 사후


헌종 2년(1836년)에 사망했다. 죽은 후 조정은 남연군을 순조의 묘정에 배향하고 영희(榮僖)라는 시호를 내렸으나, 고종 1년(1864년)에 충정(忠正)으로 고쳤다.

3.1. 묘소


[image]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에 있는 남연군묘
처음에는 경기도 연천군에 묻혔지만 뒷날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의 현 위치로 이장했다. 여기에는 유명한 야사가 있다. 지금의 남연군묘 자리에는 원래 절('가야사'라고 전해진다)이 있었으나, 실력 있는 지관 하나가 이하응에게 천하의 명당 자리라고 그 절을 소개하여 "이 터는 천하의 명당으로 천자 나올 땅(二代天子之地)입니다. 그러나 무덤의 주인은 화를 얻을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이하응은 "어쨌든 천자가 나올 자리인데 둘이면 어떤가?"라며 지관을 데리고 그 절을 둘러보았고, 가산을 팔아 그 절 주지에게 값을 치르고 절을 태워버린 뒤, 연천에 있던 남연군의 묘를 현재의 자리로 이장했다고 전한다. [6] 뒷날 고종은 이 덕에 자신이 왕위에 올랐다며 남연군의 묘가 있는 가야산에 보덕사(報德寺)를 세웠다고 한다.
훗날 2018년 9월에 개봉한 한국 영화명당》이 이 야사를 모티브로 해서 나온 영화다.
그런데 남연군 묘는 손자가 왕위에 오른 후 수난을 겪었다. 바로 오페르트 도굴사건. 다만 지금 자리에 묘를 쓸 때 도굴에 대비해 튼튼한 석곽을 마련한 덕에 관까지 파헤쳐지지는 않았다. 살아 생전보다는 죽은 후에 그야말로 영욕을 모두 누린 셈이다.
2017년 묘소 및 주변 토지를, 소유권자인 운현궁 사손 이청이 관할 지자체에 기증했다고 한다.

4. 여담


  • 현손이구(항목 2)와 한글 이름은 같으나 한자는 다르다. 남연군과는 달리 이쪽은 李.


[1] 원래 남연군의 장남인 흥녕군 이창응이 차기 계동궁 종주가 되어야 했으나 아버지 남연군보다 일찍 죽어 그의 양자 완림군이 물려받았다.[2] 남연군의 양아버지 은신군영조의 동생 연령군의 봉사손이었다. 그러나 계대 문제로 조선시대 당시에 은신군의 후손들은, '우리는 연령군의 제사를 챙길 뿐, 엄연히 사도세자(장조)의 자손'이라고 인식했고, 왕실에서도 그들에게 영조 - 사도세자의 후손 자격으로 군호를 주었다.(20세기 중반부터는 연령군을 조상으로 인정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연령군, 낙천군, 은신군 항목 참조.[3] 군호는 양어머니의 본관 남양(南陽)에서 따왔다. 남양은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이다.[4]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5대손.[5] 출처: 출처: 《조선왕조실록》 - 순조실록 8권, 1816년(순조 16년) 7월 13일 경신 1번째 기사.[6] 여담으로 이 가야사에 있던 동종은 나중에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위치한 봉원사에 봉안되었으며 현재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64호에 지정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