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따

 

[image]
이름
주앙 소아리스 다 모타 네투
(João Soares da Mota Neto)
출생
1980년 11월 21일
국적
[image] 브라질
출신지
세아라 주 포르탈레자
신체
173cm / 77kg
소속팀
세아라 SC(브라질) (1997~1999)
RCD 마요르카 B(스페인) (1999~2001)
세아라 SC(브라질) (2002~2003)
'''크루제이루(브라질) (2003~2004)'''
'''전남 드래곤즈 (2004~2005)'''
스포르팅 리스본(포르투갈)(임대) (2005)
'''성남 일화 천마 (2005~2009)'''
세아라 SC(브라질) (2009)
포항 스틸러스 (2010~2011)
세아라 SC(브라질) (2012~2013)
CA 브라간치누(브라질) (2014 )
포지션
스트라이커, 공격형 미드필더, 윙어
별명
'''모따신''' [1]
[image] '''득점왕'''
'''2003년'''

'''2004년'''

'''2005년'''
김도훈
(성남 일화 천마)

'''모따'''
'''(전남 드래곤즈)'''

마차도
(울산 현대 호랑이)
'''2004 K리그 베스트 일레븐 '''
FW
나드손
FW
'''모따'''
MF
김동진
MF
따바레즈
MF
김두현
MF
김대의
DF
산토스
DF
유경렬
DF
무사
DF
곽희주
GK
이운재
1. 소개
2. 경력
2.1. K리그 진출 전
2.2. K리그 진출
3. 여담
4. 평가
4.1. 과한 신격화?
5. 관련 문서


1. 소개


전남, 성남 팬들에게는 '''신이라 불리운 사나이'''
브라질의 前 축구선수. 본명은 João Soares da Mota Neto.

2. 경력



2.1. K리그 진출 전


세아라 SC에서 축구를 시작했으며, 1999/00 시즌에는 프리메라리가의 RCD 마요르카 B팀에서 유스 시절을 보내다가. 2002년 브라질로 돌아와 Ceara에서 1년을 뛴후 실력으로 2003년 브라질의 명문 크루제이루(Cruzeiro)에 입단했다.

2.2. K리그 진출



2.2.1. 전남 드래곤즈


'''K리그에 머무를 실력이 아니었던''' 모따는 2004년 전남 드래곤즈에 입단하며 K리그와 인연을 맺었다. 광양컵에서 첫 선을 보인 모따는 데뷔 무대에서 좋은 활약으로 전남팬들을 설레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어 열린 대구와의 리그 개막전에서, 모따는 이따마르와 함께 2골을 쏟아부으며 4-1 대승을 이끈 것을 시작으로 이장수 감독의 지휘하에, 기량을 폭발시키며 팀을 이끌었다.
29경기 14골. 경기당 0.6이 넘는 무시무시한 결정력을 보여주었던 모따의 힘으로 전남은 리그 플레이오프에 까지 올라가는 저력을 보였다. 비록 전남은 4강에서 미끄러지고 말았지만, 모따의 04시즌 맹 활약은 다른 팀들에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리그 MVP는 수원 우승의 1등 공신인 나드손이 받았지만, 모따도 K리그 베스트 11과 득점왕을 거머쥐면서 K리그 첫 시즌을 눈부시게 마무리 지었다.
실력을 인정받은 모따는 시즌이 종료되자 마자 포르투갈의 명문 스포르팅 리스본으로 이적한다.[2]

2.2.2. 성남 일화 천마 시절


포르투갈로 떠난 모따는 좀처럼 출장기회를 잡지 못하며 6개월간 5경기 출장에 그쳤고 피스컵을 위해 전력 보강에 열을 올리던 성남 일화의 눈에 들어오게 된다. 이미 수원에서 김두현을 영입한 상태였던 성남은 즉시, 모따 영입에 착수해 전력 강화를 마무리지었다. 모따는 피스컵 개막전인 PSV 아인트호벤과의 경기에서 골을 성공시키면서 건재함을 과시했다.
모따는 성남의 주전 공격수 김도훈, 두두와 환상의 콤비를 이루었고 이들을 앞세운 성남은 그해 후반기. 전반기의 부진을 훌륭하게 만회하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했다.
하지만 모따는 이전 경기에서 팔꿈치 가격으로 퇴장당하며 05년 플레이오프에 출전하지 못했고 모따의 공백을 메우지 못한 성남은 울산에게 패하며 리그 우승을 꿈을 접어야 했다. 06시즌부터 적용된 용병 쿼터 축소로 모따를 떠나보낼 가능성이 제기되었지만, 모따의 재능을 높이산 성남은 모따를 잔류시키는 쪽으로 결정을 지었다.
06시즌에서도 모따의 활약은 계속되었다. 김도훈 대신 우성용과 짝을 맞춘 모따는 우성용과도 좋은 궁합을 보이며 성남의 고공행진을 이끌었다. 우성용과 모따, 두두의 활약에 지는 법을 잊어버린 성남은 미친듯한 공격력을 선보였다.
하지만 잘나가던 성남에게 비극이 일어났다. 바로 모따의 오른쪽 발목 부상. 모따는 경남전에서 김성재에게 백태클을 당해 오른쪽 발목뼈 복합골절과 발목인대 절단이라는 중상을 당했다. 성남은 모따 없이 전기리그 우승을 차지하긴 했지만, 전력의 큰 손실을 입었다. 두두를 서울로 임대보내고 이따마르와 네아가를 데려왔지만 모따의 공백을 메우기는 역부족이었고 후기리그에선 선수들의 의욕 저하까지 겹쳐 분노의 영입을 단행한 수원과 팀을 재정비한 서울에 밀려나고 말았다.[3]
그리고 성남은 플레이오프에서 FC 서울과 맞붙었다. 4개월이란 긴 재활을 마치고 돌아온 모따는 전반 40분, 김철호의 패스를 왼발 슈팅으로 연결해 결승골을 터뜨리며 04, 05년의 한을 풀었다.[4]
성남의 결승전 상대는 이관우, 백지훈을 영입해 후반기 대반격에 성공한 수원. 챔피언결정전 1차전, 모따의 프리킥이 수원 수비수들을 맞고 나오자 박진섭이 바로 크로스를 올렸고, 우성용이 이정수와의 헤딩경합을 이기고 헤딩슛을 꽂아 넣으면서 성남의 1-0 승리로 끝났다.
그리고 대망의 2차전에서 모따는 수원의 수비진을 유린하며 2골을 작렬, 실바가 한골을 만회하는데 그친 수원을 따돌리고 자신의 K리그 커리어 첫 우승을 거머쥐었다. 절망적인 부상에도 끝까지 기다려준 구단에 대한 보답이었다.
07시즌 에도 모따의 활약은 계속 되었다. A3와 아챔등 많은 경기를 소화해야 했던 성남에게 모따의 존재는 절대적이었다. A3와 피스컵에서는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지만, 리그에서 수원에게 1-2로 패할때까지 무려 16경기 연속 무패라는 무시무시한 기록으로 1위를 고수하고, AFC 챔피언스 리그에서 4강에 진출하는데는 모따의 지칠줄 모르는 활약이 있었다.
하지만 리그 최종전에서 모따가 부상을 당하면서, 성남은 또 다시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금방 출장할 수 있을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회복이 더뎌지면서, AFC 챔피언스 리그 4강 2차전과 리그 챔피언 결정전 모두 모따를 뺀 채로 나가야 했고 각각 우라와와 포항에게 참패하면서, 성남은 무관으로 시즌을 마쳐야 했다.
08시즌에도 모따는 절대적이었다. 모따와 서울에서 임대 복귀한 두두를 선봉에 세운 성남은 수원의 무패 행진에 빛이 가려졌지만 가공할 공격력을 선보이며 수원을 추격했다.
하지만 후반기들어 이동국, 두두 등 다른 공격자원들이 동반으로 부진에 빠지자, 모따 역시 침체에 빠지는 경우가 잦아졌다. 게다가 다혈질로 인해 자주 카드를 받으면서 경기를 이탈하는 경우가 많았고, 팀내에서도 말썽을 일으켰다. 성남의 성적도 조금씩 기울었고 결국 수원과 서울을 넘지 못하고 위로 밀려났다. 그리고 깊은 부진속에 빠진 채 시작된 6강 PO에서, 루이스를 앞세운 전북의 유기적인 미드필더진 앞에 성남은 무력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부진의 책임을 지고 김학범 감독이 사임하고 신임 신태용 감독이 부임한 09시즌의 시작은 불안했다. 신태용 감독은 기존의 용병과 노장들을 모두 방출시키는 대대적인 팀 리빌딩을 단행했고 프렌차이즈 스타인 김상식, 김영철과 08시즌 K리그 득점왕인 두두마저 팀을 떠나야 했다.
모따 역시 숙청의 칼날에 벗어날 수 없었다. 브라질로 돌아간 모따에 대해 빗셀 고베가 200만불의 이적료를 제시했다는 등 다양한 소문이 돌면서 곧 떠날것이 유력해 졌다. 하지만 모따 본인이 이적을 거부하고, 성남 전지훈련에 참가하게 되면서 모따는 계속 성남의 일원으로 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모따는 김민수에게 거친 팔꿈치 가격을 하면서 출장 정지 처분을 받아 한동안 그라운드에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 모따는 컵대회와 FA컵에서 골을 기록햇을 뿐, 리그에서는 단 2AS에 그치며 부진했다. 그리고 리그 중 당한 부상을 이유로, 성남은 모따와 상호계약해지를 단행하고 작별을 고했다.

2.2.3. K리그 복귀. 포항 스틸러스 시절


K리그를 떠난 모따는 브라질로 돌아갔다. 세아라 SC에서 활약하며 2부리그에 있던 팀을 1부 리그로 승격시킨 모따는 이후 다시 K리그 진출을 타진했고 2010시즌. 포항 스틸러스 소속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감독의 전술이 문제인지 본인의 폼이 떨어진 것인지 성남 시절 리그를 호령하던 매서운 모습은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9골 7어시스트로 시즌을 마감, 팀내 최다 공격포인트를 기록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부진하다고 평가받았던 2010 시즌이 본인의 커리어 하이라는 것.[5]
2011시즌 가나 국가대표 출신인 아사모아가 포항으로 이적해 온 이후, 쉐도우 스트라이커인 아사모아가 공격진을 휘저으면 모따가 그 빈자리를 플레이로 톡톡히 효과를 보고 있으나 문제는 '''개인플레이'''가 심해 패스 한 번이면 바로 완벽한 찬스인데도 본인이 해결하려다 찬스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이는 과거 성남시절부터 문제가 되었던 부분.[6]
그러나 예전에 비하면 간간히 동료들에게 패스도 찔러주고 이타적인 플레이가 늘어나 모따 - 슈바 - 아사모아로 이어지는 용병3인방은 2011시즌 포항팬들의 기대치를 한껏 올렸지만...제버릇 못주는 건 여전해서 여전히 공격을 잘라먹는 주범 중 한 명.
2011 K리그 15라운드에서 2골1도움의 원맨쇼를 연출하며 경남과의 3:2승리의 주역이 되었고 이로서 외국인 선수로서 통산 4번째 30-30 클럽에 가입하게 되었다(63골-30도움).
다만, 본인도 슬슬 나이가 있는데다가 타향살이도 힘에 겨워하는 눈치라 브라질로의 복귀 또는 조기은퇴를 생각하고 있다는 루머가 흘러나오고 있고 포항에서 2011 정규시즌이 끝나자마자 외국인 선수를 물색하고 있는지라 포항과의 결별이 유력.
그리고 결별 선물로 2011 K리그 챔피언십 울산 현대와의 경기에선 PK를 날려먹고, PK를 내주는(...) 제대로 된 X맨 플레이로 팀의 0:1 패배를 혼자서 이끌어냈다. 이 경기 직후 포항 팬들의 반응은 '''"다시는 오지마 이 XX야"'''

3. 여담


수원 삼성 블루윙즈에는 호세 '''모따'''라는 선수가 있었다. 2010년 수원의 핵심 공격수로 자리매김했다. 수원의 득점중 대략 반정도는 이선수가 책임진다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 2010년 AFC 챔피언스리그 득점왕을 차지했다.[7] .[8] 호세모따는 2012년 부산에서 재영입했다.
성남은 모따의 빈자리를 '''몰느님''' 몰리나를 데려옴으로써 완벽하게 해결했다. 그러나, 성남이 예전 리즈 시절의 성남이 아닌지라(...) 2010시즌 후 FC 서울에게 바로 털렸다.
2016년 1월 31일, 브라질 언론에서 성남 FC로 이적하면서 K리그 클래식으로 복귀한다고 기사가 나왔다. 아직 구단 측 오피셜은 없는 상황이다. 성남FC 페이스북 페이지에 따르면 테스트 중이라고 했으나 결국 입단하지 못했다.

4. 평가



4.1. 과한 신격화?






[9]
모따가 뛰어난 선수임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해당 자료가 너무 많은 부분이 왜곡되어 있어서 라인업에 취소선과 주석을 달아놓는 것을 넘어 아예 길게 설명하겠다. 별명이 모따신이었다고 정말 지나친 신격화를 하면 곤란하다.
그리고 이런 지나친 과대포장은 모따의 위신을 깎아먹을 뿐임을 자각하길 바라며, 애써 축구팬들에게 익숙한 이름들이 많이 보인다며 거짓된 라인업을 내세우는것 또한 과거 J리그, 오늘날의 중국 슈퍼리그를 바라보며 "K리그에는 유명한 선수는 오지 않는다."는 불필요한 콤플렉스를 준수한 커리어를 지닌 해외 선수의 지나친 신격화로써 해소하려는 얄팍하고 비겁한 속셈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모따가 그런 콤플렉스를 지닌 자들의 니즈를 애써 왜곡된 자료에 쓰이면서까지 충족시켜줘야 할 이유는 없다.
- 이 당시 크루제이루의 감독 반데를레이 루솀부르구는 주로 4-2-2-2 포메이션을 기반으로 앞선 2는 수비형 미드필더 2명을 배치하고, 공격형 미드필더의 2가 윙까지 커버하는 전략을 통해 승부수를 띄웠다. 물론 여기에서 자주 변경하긴 했으나 적어도 이 시절의 그의 축구가 위에서 언급한 3-4-3 형식의 베스트11과는 크게 거리가 있었다. 애초에 저 라인업은 각 선수들의 포지션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막 적은 것에 불과하다. 머릿속에서 자기 멋대로 결과를 만들어놓고 거기에 역사를 짜맞추려다 보니 저런 어이없는 포메이션이 나오는 것이다.
- 히바우두와 두두는 크루제이루 입단을 2004년 시즌에 하였다. 2003년 시즌엔 크루제이루에 없었다는 뜻이다.
- 이 당시 소린은 계약 관계만 복잡하게 얽혀 크루제이루 소속으로 돼있을 뿐 실질적으로는 2002년 1월부터 유럽에서 꾸준히 임대생활을 하던 선수였다. 하물며 2003년 1월에는 바르셀로나에서 주전 레프트 백으로 뛰고 있었는가 하면 03-04 시즌이 시작되는 여름에는 아예 파리 생제르맹으로 1시즌 임대를 가버렸다. 한 마디로 여기에서는 이미 1년 전부터 팀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선수를 가지고 베스트 11이라고 기입한 것이다. 참고로 이 시절 팀의 왼쪽 풀백에는 2002년부터 2004년까지 총 2년동안 크루제이루에서 111경기를 소화한 부동의 주전 레안드로가 존재했다.
- 여기서 말하는 알렉산드로 데 소우자는 페네르바체의 레전드이자 공격형 미드필더인 알렉스다. 그가 3-4-3 포메이션에서 중앙 수비수로 뛴 적은 단 한 차례도 없으며 2003 시즌 팀의 리그 득점 1위(23득점)를 도맡은 것 또한 이 선수였다. 제 호베르투같은 유형의 선수였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 데라쿠르즈라는 선수가 누구를 뜻하는 것인지도 알 수 없거니와 그와 비슷한 이름을 지닌 선수가 2003년 시즌에는 단 한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시즌 펠리페 멜로의 옆자리에 들어갈 미드필더는 아우구스토 헤시페라는 선수다. 그는 크루제이루 유스 출신으로 2002년부터 2007년까지 타 클럽 임대기간을 제외한 3년간 크루제이루에서 약 120경기를 소화해냈다. 최소한 이 시기에 로테이션으로 기용된 칠레 출신의 수비형 미드필더 클라우디오 말도나도같은 선수를 적었다면 모르겠는데 도대체 데라쿠르즈는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아마 에콰도르 국가대표 레전드 울리세스 데라쿠르즈를 얘기하는 거 같은데 데라크루즈는 크루제이루에 뛴 적이 있긴 하지만 1999년 시즌 때 잠깐 뛰었을 뿐 2003년 시즌엔 아스톤 빌라 소속으로 뛰었다.
- 마이콘은 이 시즌에 유망한 선수였기에 국가대표에도 뽑혔지만 클럽에서도 국가대표에서도 주전이 아니었다. 하물며 인테르 시절에나 기량이 만개했기에 "오른쪽은 마이콘의 포지션이다."라며 '마른쪽'같은 별칭이 붙곤 했지만 그는 이 시절 엄연히 라이트 백이다. 그리고 그의 포지션에는 이 시즌에만 무려 리그 41경기를 출전한 마우리뉴가 있었다.
- 마이콘을 제외하면 자연스레 미드필더 자리에 한 명이 비게 되는데, 이 자리에는 브라질 국가대표에서만 50경기 이상 출전한 공격형 미드필더 지뉴 혹은 프랑스의 축구 클럽 지롱뱅 보르도의 레전드가 된 웬델이 들어가는 것이 맞다. 유투브에서 당시의 경기 라인업을 살펴보더라도 그들의 이름이 자주 나타나며 적어도 한 시즌에 20경기조차 출전해본 경력이 없는 마이콘에게 팀의 베스트 11을 넘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 주전 공격수에는 히바우두, 두두 대신에 콜롬비아 출신이자 국가대표 66경기 15골의 경력을 지닌 스트라이커 빅토르 아리스티자발이 선정되어야 하는 것이 맞다. 그는 리그에서만 약 21~22골(브라질 리그의 예전 데이터들이 정확하지 않아 약간의 오차가 존재한다.)을 기록하여 알렉스 바로 다음의 골잡이로 이름을 날렸으며 다수의 현지 사이트에서도 이 시절을 언급하며 아리스티자발을 주전 공격수로 언급한다.
- 루이장은 이 당시 출전 경기수가 15경기에 지나지 않았고 저 시즌에는 부동의 주전 크리스에게 밀려 주전도 아니었다. 그는 크리스가 2003년 여름 잠시 바이어 레버쿠젠으로 임대를 떠나고 나서야 팀에서 주전으로 출전할 수 있었다. 현지에서는 이 당시 리그에서만 35경기를 소화한 중앙 수비수 에두 드라체나라는 선수와 크리스를 베스트11의 멤버로써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여기까지는 크루제이루라는 팀의 베스트11에 관한 이야기다. 고로 현지 자료들을 추합한 뒤 다시 라인업을 작성하자면 2003년 크루제이루의 라인업은 이렇다.
FW-아리스티자발,모따(데이비드)
MF-알렉스, 아우구스토 헤시페, 펠리페 멜로, 지뉴(웬델)
DF-레안드로, 에두 드라체나, 크리스(루이장), 마우리뉴(마이콘)
GK-에우렐류 고메스
이젠 모따 얘기를 해보겠다. 위의 글에서는 "모따는 쟁쟁한 멤버들 사이에서 리그 40경기 32득점 10도움, FA컵 9경기 10득점 3도움을 기록하며 팀의 핵심선수로 활약했다."라고 언급돼있지만 이 기록도 사실 왜곡된 기록이다.
2003년 브라질 세리에 A 순위표 및 득점순위
해당 자료를 확인해본다면 알겠지만 그 어디에도 모따의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전에 이 시즌 득점왕이 리그 31득점을 한 딤바라는 선수다. 32득점은 어디에서 나타난 숫자인지 알 수 없다. 또한 모따의 위키피디아만 들어가 보더라도 포르투갈 위키피디아에서는 2003년 55경기 출전 28득점이라고 기입돼있는가 하면 영문 위키피디아에서는 그가 2003년부터 2004년까지 37경기 출전에 15득점을 했다고 기입되어 있다.
그러는가 하면 이곳에서는 리그 35경기에 출전하여 15득점을 했다고 적혀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브라질의 FA컵과 다름없는 코파 도 브라질에서는 8경기 출장에 1골에 그쳤으며 그보다 한 단계 낮은 미네이루 대회(EPL로 치면 칼링컵쯤 되는 대회다.)에서 11경기 8득점을 기록했다. 위에서 언급한 55경기 출전 28득점은 이것들을 전부 합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추가로 이곳에서는 그를 2003년 크루제이루의 주전으로 소개하며 리그 16득점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것은 브라질 세리에A 공식 홈페이지의 기록에 근거하여 작성된 영문 위키피디아의 Top Scorer 항목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이 자료들을 추합해보자면 모따는 이 시기에 리그 35경기 출전하여 15득점을 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그리고 이 득점 횟수는 향후 알렉스의 추천으로 똑같이 페네르바체로 이적한 크루제이루의 서브 공격수 데이비드가 기록한 득점과 똑같은 수이다.
여러 자료들을 확인했을 때 모따가 2003년 크루제이루의 주전 공격수인 것은 사실이지만 위에 서술된 것 처럼 활약한 것은 아니었고 1위 팀의 준수한 스트라이커로써 그 역할은 충분히 해주었던 것으로 봐야 할 듯 하다. 그렇지만 투톱 중에 한자리는 아리스티자발이 선점한 관계로 모따는 주전이기는 했으나 만만찮은 득점력을 지닌 데이비드와 끊임없이 경쟁하는 선수에 가까웠다.

5. 관련 문서



[1] 포항 팬 한정. 왜 그런지는 포항 스틸러스/2011년 챔피언십 문서 참고.[2] 당시 전남 프런트는 이장수 감독을 경질시키려고 언론에 헛소문을 퍼트리는 등 아마추어적인 팀 운영으로 많은 질타를 받았는데 이와중에 모따가 이적하고 이따마르까지 포항으로 가버리면서 하위권으로 굴러떨어지게 된다.[3] 06년까지 시행된 전후기 리그 제도는 전or후기리그 우승팀은 후or전기리그에서 아무리 부진해도 자동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규정탓에 부작용이 상당했다. 전기리그에서 잘나가던 팀들이 후반기만 가면 시들시들한 모습을 보여주거나 전반기에 죽 써놓고 후반기에만 잘 해서도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경우가 생긴 것. (2006년 성남은 전후기 통합해도 승점 1위였고 1234위가 나란히 플레이오프에 갔다. 오히려 04, 05년에 문제가 심했다.) 이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았고 결국 07년부터 6강 플레이오프 제도가 정착하게 된다.[4] 참고로 이 경기가 FC서울이 주장하는 '도둑맞은 챔프전 티켓' 경기이다. 서울 김한윤의 슈팅은 보는 각도에 따라선 골로 보일수도 있지만, 실제로 골라인 각도에서 본 바로는 공이 골 라인을 완벽하게 넘지 않아, 결국에 노골 선언되면서 FC 서울의 챔결 목전에서 눈물을 삼켜야 했다.[5] 기존 커리어 하이였던 2004 시즌에 14골 1도움(공격 포인트 15)/ 부진하다고 평가받은 2010 시즌에 9골 7도움(공격 포인트 16). 스탯이야 커리어 하이긴 한데 성남 시절 두두, 우성용, 김도훈 등과 함께하며 리그를 정복했었기에.[6] 원래 개인플레이를 선호하는 선수이지만 지나치게 개인플레이에 치중할 때는 팀원들에게 짜증이 났을 경우가 많다. 이는 모따의 기량이 주위에서 뛰는 친구들과 워낙 차이가 나서 팀원들이 모따의 템포를 따라오지 못할 때의 얘기다. 성남 시절에는 그게 황족 성남 시절이라....[7] 여기 안나왔지만 전설이라 불렸던 그 모따도 2007년에 아챔 득점왕을 한 바 있다.[8] 아챔에서만 처넣는다고 수원 팬들 사이에서 허세 모따로 통하기도 했었다. 어느 정도의 시간, 이라고는 해도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는 리그에서도 그나마 좀 넣었지만 사실 수원 팬덤 내부에서는 저놈 저거 기름이 흐르는 땅에 가려고 아챔에서만 넣는다는 소문도 돌았다. 아이러니하게도 2011년엔 비싼돈주고 사온 게인리히,마르셀,베르손 외국인 공격수 3인방의 득점력이 워낙 저조해서 호세 모따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9] 이런 경력 덕분에 K리그를 거쳐간 외국인 선수중에서 명성이 가장 높은 편이었다. 수원에서 뛰다 샬케로 이적한 에두는 포포투와의 인터뷰에서 모따와 같은 리그에서 뛰는게 만족스럽다고 밝힌적이 있고 어느 브라질 선수는 모따와 같은 리그에서 뛴다는것 자체가 영광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