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현
1. 개요
대한민국의 축구 코치. 현재 전북 현대 모터스 수석 코치로 활약하고 있다. 선수 시절 포지션은 중앙 미드필더로서 모든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지만, 가장 잘 맞고 선호하는 포지션은 공격형 미드필더와 중앙 미드필더다.
데뷔는 수원 삼성 블루윙즈에서 했고, 영국에서 돌아온 뒤 다시 수원에서 뛰는 등 블루윙즈에서도 상당한 위상을 갖고는 있지만, 성남의 김두현에겐 미치지 못한다.
다만, 정작 성남에서 우승한 기록은 2006년 리그 하나 뿐이고, 시민구단 시절에는 단 하나의 우승도 경험하지 못한 채[11] 리그1(당시 클래식) 복귀에 실패한 팀을 뒤로 한 채 은퇴식도 없이 말레이시아로 떠났다.
2. 우승
-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01 ~ 2005.7 / 2009 ~ 2014)
- K리그 1 : 2004
- 대한축구협회 FA컵 : 2002 , 2009 , 2010
- K리그 리그컵 : 2001 ,2002
- K리그 슈퍼컵 : 2005
- AFC 챔피언스리그 : 2001
- 아시안 슈퍼컵 : 2001, 2002
- 성남 FC (2005.7 ~ 2007 / 2015 ~ 2017)
- K리그 1 : 2006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2003 ~ 2012)
- 2003 동아시안컵 : 우승
- 2007 AFC 아시안컵 : 3위
3. 플레이 스타일
김두현의 특징은 공격수들에게 좋은 패스를 하면서 잘 배급해 준다는 점과 경기장에서의 활동량이 좋은 편이라는 점, 그리고 킥이 정확하여 프리킥, 코너킥 등을 전담할 수 있으며 2선에서 강력한 중거리슛을 때릴 수 있어서 상대 수비진들이 밀집해 있을 때 좋은 공격 옵션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양발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흔치 않은 선수로 거의 완벽한 양발잡이다.[12] 공격형 미드필더, 중앙 미드필더, 수비형 미드필더 등의 다양한 역할을 소화할 수 있으나 가장 좋은 능력을 보여준 포지션은 수비 부담이 덜한 공격형 미드필더 역할이다. 그리고, 수비형 미드필더로 설 때는 상대적으로 부족한 수비 실력을 부지런한 활동량으로 커버하는 스타일이자 피를로처럼 다양한 패스와 좋은 볼 컨트롤로 공격의 줄기를 뚫어보려고 시도하는 스타일이다.
축구 전문 잡지 포포투의 외부 기고가로 활약한다. (에두의 이적이 있던 무렵인) 2015년 7월호에는 "투자가 늘어날 수 없는 이상 K리그도 벨기에처럼 셀링 리그를 검토할 때가 되었다"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4. 프로 경력
4.1. 수원 1막
통진고 시절부터 좋은 패스 실력과 벼락같은 중거리슛 능력으로 이름을 떨쳤고 김호 감독의 러브콜을 받아서 2001년에 수원 삼성 블루윙즈에 입단하였다. 데뷔시즌인 2001시즌에 신인치고는 많은 경기수인 15경기에 출장하며 1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수원 팬들에게 고종수의 뒤를 이을 패스가 좋은 유망주로 기대감을 가지게 했다.
2002년부터는 고종수의 장기 부상, 가비의 잔부상과 폼 저하 등의 문제, 에니우의 기량미달 등 공격형 미드필더들의 공백을 틈타 2002년 20경기, 2003년에는 34경기에 출장하며 팀내에서 주전 자리를 굳히게 된다.
2004년까지 팀내에서 주전으로 활약하며 2002년 FA컵 우승, 2004년 K리그 우승을 차지하였으나 차범근 감독의 부임 이후로 선호하는 자리였던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를 내주고 3-5-2에서의 중앙 미드필더, 수비형 미드필더, 윙백 등 다양한 포지션에서 활동하게 되며, 자신에게 잘 맞지 않는 포지션을 돌아가면서 소화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와중에 2005년 여름에 성남 일화 천마의 이적 요청을 받고 성남으로 이적하게 된다.
4.2. 성남 맞춤형?
성남 일화로 이적해서는 김학범 감독이 선호하던 4-2-3-1 포지션에서 공격형 미드필더 역할을 맡아서 성남 일화의 전성기를 이끌게 된다. 이전 차범근 감독 시절에는 김두현에게 공격과 수비의 부담이 같이 주어져서 공격도 수비도 안되는 어중간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으나 성남의 4-2-3-1에서는 김두현에게 주어지는 수비 부담이 덜어졌고 김두현이 공격에 전념하는 동안 김상식, 김철호, 손대호 등의 K리그 최상위권의 수비형 미드필더들이 뒤에서 궂은 일을 해 주면서 김두현의 수비 부담을 덜어준 것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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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성남의 일곱번째 K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일등공신이 되며 K리그 MVP를 받게 되었다. 저 튀어보이는 옷은 축구를 사랑했던 앙드레김이 K리그 시상식에 서는 선수들을 위해 만든 옷 중 하나이다.
4.3. EPL의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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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에도 계속된 K리그에서의 활약으로 풋볼 리그 챔피언쉽의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의 초청을 받게 된다. 2007년 12월에 오퍼를 받은 후 2008년 1월에 6개월간 임대 이적하였고, 2008년 5월에 2007~2008년 챔피언십 우승으로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 승격과 함께 완전이적 계약을 하게 된다.
2008~2009 시즌 아스날과의 경기를 통해 인상적인 프리미어리그 데뷔를 하였고, 이후에도 주전으로 뛰며 볼턴 원더러스과의 경기에서는 골대를 맞추어 거의 득점을 할 뻔하며 좋은 모습을 보여서 영국 현지에서는 '썬더볼트'라는 별명까지 얻기도 했으나 미들즈브러와의 경기에서 8주 무릎 부상을 당한 이후 주전 자리를 빼앗기면서 거의 출장하지 못했다. 다만 정말 아쉬웠던 부분은 비슷한 시기 진출한 조원희에 비교하자면 초반 주전으로 나오는듯했지만 무릎부상이 EPL생활을 흔들었다. 또한 그당시 미필이였기때문에 머지않아 다시 한국으로 복귀해야만 하기도 했다.
4.4. 수원 2막, 그리고 재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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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경기감각 회복을 위해 2009년 시즌 중 수원 삼성 블루윙즈로 이적하였다. 사실은 직전 소속팀인 성남 일화 천마로 복귀하려고 했으나, 구단의 자금줄이 사라지면서 같이 영입하려던 몰리나와 김두현 둘 중 하나밖에 잡을 돈이 없었고, 결국 성남은 김두현을 포기하고 몰리나를 영입하였다[13] . 2010년까지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으나 2011년부터는 경찰 축구단에 입대하여 R리그에서 뛰게 된다.
2013년이 되면서 주장을 맡아서 홈 개막전에서 강원 FC를 상대로 결승골을 넣는 등 좋은 모습을 보여줬으나, 3월 17일 포항전에서 전반 12분만에 전방십자인대파열로 교체, 6개월 부상을 끊었다. 그 뒤로는 간간히 나오면서 수원의 중원을 책임지는 것은 여전했으나 존재감은…
첫 팀에서 은퇴하고 싶었지만, 기량에 비해 기회가 적었다.
4.5. 성남으로 복귀, 그리고 부활
두목까치의 비상, 돌아온 성남 FC의 정신적 지주이자 영원한 주장.
2014시즌 종료 뒤 수원과 재계약을 하지 않은 채 개인 훈련을 하면서 고심하던 끝에 옛 스승 김학범 감독의 말에 따라 2015년 2월 2일 FA자격으로 성남 FC로 이적했다. 이적료는 4억. 계약기간은 1년으로 추정된다.
김두현의 이적 소식에 성남 FC의 팬들은 과거 팀을 K리그 우승으로 이끌던 추억을 떠올리면서 AFC 챔피언스 리그를 대비하여 울산 현대 축구단으로 이적한 김태환과 제파로프의 공백을 메울 수 있겠다면서 대체로 환영한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성남 FC로 돌아온 김두현은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으로 이적한 이후 8년만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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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월 3일 오전 성남시청 대회의실에서 공식적으로 김두현의 성남 FC 입단 기자회견을 열었다. 공식 기자회견에서 김두현은 '''"8년 전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면서 우승을 하겠다는 포부를 드러냈다.
4.5.1. 2015년
그리고 곧바로 김학범 감독과 함께 성남의 구마모토 훈련장으로 떠나 특훈에서 1위를 찍었고, 24일 부리람에서 주장 완장을 받고 성남 복귀전을 치렀다.
같은 해 3월 22일에 벌어진 3라운드 친정(수원) 상대의 경기 에서는 피로 누적으로 경기 후반 중간께 쓰러져 교체되며 팀의 쓰디쓴 패배를 지켜보았으나, 4월 4일 4라운드 대전 시티즌과의 경기에서는 동점골(1:1), 추가골(3:1) 및 쐐기골(4:1)을 넣으며(시즌 1~3호 골) 2015년 K리그 클래식 1호 이자 자신의 생애 두번째이자 프로 첫 해트트릭[14] 을 기록하였다. 1도움까지 기록하며 혼자 북 치고 장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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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 소속 100경기 기념 포스터
이후 아챔(ACL) 16강 1차전 광저우 헝다와의 홈경기에서 막판 극적인 결승골을 PK로 넣으며 시민구단의 저력을 보이는데 일조를 했으나, 광저우에서의 원정경기에서 체력적 열세와 날씨의 이중고를 못버티고 팀이 지면서 아챔 여정은 종료. 이후 김두현 뿐 아니라 성남 선수들이 다같이 폼 저하를 보이며 리그에서 순위가 서서히 떨어지고 있다.
하지만, 팀이 흔들리는 가운데에서도 주장으로서 중심역할을 하는 것은 확실하다. 황의조를 비롯한 많은 선수들의 인터뷰에서 김두현의 영향력이 엄청나다고 할 수 있다. 오랜만에 올스타로 출전할 정도의 활약을 선보이고 있으나, 그 혼자만 전후방 전체를 뛰어다니는 성남의 현실이다.
팀이 무려 3전4기만에, 그것도 4위로 상위스플릿에 가는데 큰 몫 을 맡았다. 두현 도움 = 의조 득점이라는 공식(?)이 생겼을 정도. 그 공을 기려 두목김밥이 등장했다[15] .
다만, 스플릿에 접어든 뒤에는 선수단의 체력 저하와 본인의 부상(포항에선 아예 코를 얻어맞아 약 10분간 밖에서 치료받기도)이 겹치며 1승 3무 1패로 5위, 아시아챔피언스리그 도전에 실패했다.
그래도 김두현(도움)+황의조(골)의 득점 공식을 만들어내고 오랫동안 부진했던 팀을 무시못할 수준으로 끌어올린 그야말로 '치트키' 플레이어.
김두현의 이적 소식이 떴을 땐 수원 팬들이 분노의 목소리를 토해내기도 했었지만, 김두현의 부재로 확실하게 주전을 꿰찬 권창훈이 성장하면서[16] 결과적으로는 양쪽 모두에게 좋은 선택이 되었다.
4.5.2. 2016년
그러나 2016 시즌에는 역시 나이를 못 이기는지, 잔부상이 많아지며 체력도 많이 떨어졌다.
김두현을 받쳐줄 줄로 알았던 황진성이 유리몸을 되찾는(...) 와중에 황의조도 폼이 떨어진 성남은 티아고 하나만 바라보다(그래도 티아고가 있을 때는 황금티 콤비를 자랑하며 승점을 많이 가져왔다), 티아고가 사우디로 떠나자마자 연일 하한가를 기록하더니 김학범 감독도 퇴출되고 결국 11위로 리그를 마친 후 승강 플레이오프를 거쳐 2부 리그인 K리그 챌린지로 강등되는 수모를 겪었다.
4.5.3. 2017년
2017년을 앞두고 인천에서 온 배승진에게 완장을 넘겼다. 3라운드에서야 선발 출장을 하는 등 아직 컨디션이 좋지 않은 듯 하나 새 주장인 배승진보다 출전이 많고, 여전히 쏠쏠한 활약을 보이고 있다.
26라운드 홈 부산전에선 멋진 프리킥 동점골(''1'':1)로 팀을 패배 직전에서 건져내고, 다음 대전 원정에선 페널티킥 골(1:''4'')로 2경기 연속 득점 및 2연속 무패도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체력 문제도 있고 해서 출전 기회도 적었고, 팀은 4위로 간신히 플레이오프에 올랐으나 3위 아산에 0:1로 패하면서 시즌이 종료되었다. 시즌 도중 박경훈 감독을 찾아가 "기회를 달라"고 직접 말한 뒤 다시 기회를 부여받았다. 김두현 인터뷰
4.6. 말레이시아
2017시즌 종료 후 성남과 계약기간이 만료되면서 말레이시아의 네그리 셈빌란 FA로 이적하였다.
본인은 축구 지도자의 길을 걷고 싶다면서, 자녀들과 함께 영어를 배울 수도 있는 말레이시아로 이적한 것이다. 은퇴가 아니기 때문인지, 은퇴 경기도 은퇴식도 없이 고별 영상만 남기고 갔다. 새로운 환경을 맞아서인지 녹슬지 않은 기량을 과시하고 있으나, 리그 18경기, 컵 1경기 득점은 없이 사실상 시즌을 마감했다.
한편으로 말레이시아에 김두현 글로벌 축구센터를 개설하였다. 국제학교하고도 계약을 맺는 등 활발한 활동 중.
4.7.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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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이 뜸하던 차에 미국 2부리그인 USL의 인디 일레븐(Indy Eleven)과 플레잉코치로 계약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인디 일레븐은 미국 인디애나주 인디애나폴리스를 연고지로 둔 팀으로, 동부 컨퍼런스에 속해있고 현재 감독은 서울 이랜드 감독으로 한국 팬들에게 친숙한 마틴 레니다. 2018 시즌에는 16개 팀 중 7위로 마무리한 중위권 수준의 팀이다. 나이도 있으니 플레잉 코치로 계약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공식 이름은 여전히 Do Heon이지만, 유니폼에는 Doo Hyun으로 되어 있다. 이를테면 등록명이 Doo Hyun인듯.
레니 감독은 가는 팀마다 나름 돌풍을 일으키는 지라, 이랜드에 있을 때 김두현 영입을 추진했으나, 태평양 건너에서 드디어 손을 잡았다. 2019년 6월 8일 멤피스 901전에서 문전 프리킥으로 데뷔골-'''2''':0)을 기록하며 팀내 득점 공동 5위... 그것도 슈팅 총 5회 중 1개가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시즌 중 귀국하여 성남종합운동장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나이와 부상 여파를 이기지 못했는지, 합류 5달만인 8월 13일에 결국 인디 일레븐도 떠났다. 총 7경기 1골.
5. 국가대표 경력
국가대표로는 2003년에 한일전으로 데뷔. 그러나 K리그에서는 제라두현, 램파두현 별명을 붙일 정도로 본좌급 활약을 벌이는 것에 비해 국가대표 경기에서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여 일부 축구팬들 사이에서 국내용 vs 국대용 선수에 대한 키배가 벌어지게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당시 국가대표 경기에서 잠수를 계속 타다가 중거리슛 한방에 점수를 내고 다시 잠수를 탄다고 해서 불려진 별명이 '닌두현'[17] . 사실 국대가 4백을 쓴 이후로 큰 경기에서 4-2-3-1 포메이션으로 공격형 미드필더를 쓸 때는 대부분 후반에 골을 노릴 때라 수비적인 면이 떨어져도 공격적인 면이 훨씬 뛰어난 '''안정환'''에게 밀릴 수밖에 없으므로 포메이션이 4-3-3일 때나 간혹 중앙 미드필더로 주전으로 나섰고, 심지어 4-3-3을 쓸 때에도 이번에는 다른 선수도 아닌 '''박지성'''이 중앙으로 오면 김두현의 자리는 사라졌다. 어떻게 보면 시대를 잘못 만난 선수.
2012년 5월 최강희 감독이 이끄는 대표팀에 안산 경찰청 축구단 소속으로는 처음으로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었으며 스페인과의 친선전에서 골을 넣었다. 2013년 3월 카타르전을 앞두고 다시 소집되었으나 무릎부상으로 하차했다.
이렇듯 국가대표 경력은 그다지 존재감 제로지만, '''이 선수가 아니었다면 2006 독일 월드컵 본선 진출은 물거품이 되었을 수도 있다.''' 2004년 당시 아시아 3차예선이 진행될 때 한국은 3월 31일 몰디브와의 원정경기에서 '''0:0 무승부'''라는 치욕을 맛봤으며 이로 인해 움베르토 코엘류 감독이 자진사퇴하고 조 2위 레바논에 '''승점 1점차로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이후 양팀이 계속해서 1승을 쌓아가며 순위 변동이 없다가 10월 13일 레바논과의 원정경기에서 1:1 무승부를 기록하며 11월 17일 '''몰디브'''와의 상암 홈경기에서 최종 순위가 결정되는 상황. '''조 1위만이 최종예선에 진출'''하기에 몰디브와의 홈경기를 무조건 이기지 못하면 월드컵 도전은 경우의 수로 넘어가는 일.[18] 후반까지 몰디브를 상대로 쩔쩔 매며 위기에 봉착한 순간, '''김두현이 중거리슛으로 골을 만들어냈다.''' 이후 이동국의 추가골로 간신히 2:0 승리를 거두었고, 김두현의 득점은 극찬을 받았다.
A매치에서 총 12개의 골을 득점했다. 이중 8골을 페널티 박스 바깥에서 중거리 슈팅으로 넣었으며, 놀라운 점은 '''주발이 오른발임에도 불구하고 8골 중에서 5골이 왼발 중거리 슈팅'''이다. 그의 득점분포를 보면 페널티 박스 바깥에서의 중거리슛 8골이 있고, 페널티 박스 안에서 넣은 4골 중 3골은 제법 거리가 있는 위치에서 넣었으며, 나머지 1개는 페널티킥 득점이다.[19] A매치 마지막 골은 2012년 5월 30일 스페인과의 평가전에서 전반 종료직전 성공시킨 동점골이었으며('''이때도 중거리 슛이었다'''), 당시 실점한 스페인의 골키퍼는 현재 나폴리에서 활약하고 있는 페페 레이나(당시 리버풀 소속)이다. 여담으로 12골 중에서 헤딩 골은 없으며, 왼발과 오른발로 각각 6골씩 넣었다.
6. 지도자 경력
2020년 1월 친정팀 수원의 코치로 한국에서의 지도자 경력을 시작했다. 팀의 감독이 두 차례 바뀌는[20]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시즌 끝까지 팀에 남아 코치 자리를 지켰다. 시즌 종료 이후 박건하 감독이 새로운 코칭 스태프를 꾸릴 가능성이 높아짐에 따라 팀을 떠날 것이 확실해 졌고 12월 성남 시절 팀 동료인 김상식 감독을 따라 전북의 코치로 부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21] .
7. 사건 사고
7.1. 논문 표절
논문 표절 혐의를 받은 대표적인 선수이다. 2011년, 명지대학교 체육대학원에서 운동생리학 박사학위를 받으며 제출한 논문이 2008년 경희대에서 나온 다른 논문과 비슷한 정도를 넘어서 그냥 복붙 수준이기 때문이다. KBS 시사 프로그램에서 토씨 하나까지 베꼈다며 확인사살까지 당했으나, 문대성, 이원희 등에 비해 이슈화가 덜하다.
8. 관련 문서
[1] 처음 여권을 신청할 때 본인이 직접 발급을 받아 'Doo Hyun'이라 정확히 기재됐으나, 나중에 재발급 받을 때 대리신청을 하여 영문명이 저렇게 됐다고 한다. 하지만 여권의 영문표기가 웬만해선 안 바뀐다는 점을 고려하면 신빙성은 크지 않다.[2] 공격형 미드필더, 중앙 미드필더, 수비형 미드필더[3] 수원 삼성 블루윙즈[4] 2004 아테네 올림픽[5] 성남 일화 천마, 2005 동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 2006 독일 월드컵, 2006 도하 아시안 게임, 2007 AFC 아시안컵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태국·베트남,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13-2014시즌, 성남 FC[6] 2010 동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7]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8] 2003년 동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9] 수원 삼성 블루윙즈 데뷔 시즌[10] 와일드카드 출장 기록 포함[11] 성남시민구단의 현재 유일한 우승은 2014년 FA컵으로, 이때 김두현은 수원에서 신예 권창훈과 경쟁중이었다.[12] 완전히 똑같은 수준은 아니고 선수시절 인터뷰에서는 강한 슛을 때리고싶을 때에는 왼발, 보다 정확한 킥을 차야 할 때에는 오른발을 선호한다고 밝혔다. 이 인터뷰대로 국가대표에서 넣은 골 중에 왼발 중거리슛이 차지하는 비율이 상당히 높다. 국가대표 항목 참조.[13] 몰리나는 그 전해에 성남이 영입하려 했으나 막판에 계약이 틀어졌다. 그 후 몰리나는 성남 일화 천마를 이끌면서 엄청난 성적을 내 결과적으로는 김두현을 포기한 것이 잘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몰리나를 구단에서 돈이 없다고 너무 급하게 헐값으로 15억에 FC 서울에 팔아서 그렇지... 참고로 김두현은 성남 구단과 사이가 좋은 편이었고 충성심도 강했다. 해외 진출후에도 비시즌엔 성남의 선수들과 함께 훈련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14] 대표팀 시절(2008년), 개인 첫 해트트릭 기록이 있다.[15] 사실, 성남 구단과 시청, 상인회의 합작 캠페인으로 만들어진 4대 브랜드의 하나. 나머지는 준혁선빵(...), 용지에 꼬치다(...), 의조빠닭.[16] 국대에도 선발되어 첫 경기에서 데뷔골을 넣었다.[17] 닌자 + 김두현[18] 물론 이 경기 이후 벌어지는 레바논과 베트남의 경기 결과에 따라서 한국의 최종예선 기회는 유동적이긴 했다. 허나 레바논이 베트남보다 한수 위였기 때문에 만약 한국이 몰디브와 무승부 이하를 기록할 경우 레바논이 베트남을 잡아 최종예선에 진출하고, 직전 대회 4위가 지역 예선도 통과하지 못하는 이변의 희생양이 될 수 있었다.[19] 이 페널티킥은 2008년 6월 14일 남아공 월드컵 3차예선 5차전 투르크메니스탄과의 원정 경기에서 넣은 것으로, 앞서 두 골을 득점한 상황이었던 상태여서 페널티킥을 성공시킴으로 생애 처음으로 A매치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게 되었다. 이날 김두현의 원맨쇼로 3:1으로 승리를 거두었다.[20] 이임생, 주승진, 박건하[21] 이민성 수석코치가 대전 감독으로 부임함에 따라 대체자를 찾던 스승 김학범 감독이 U-23 대표팀 코치직을 제안했으나 김두현 본인이 전북을 선택한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