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수
1. 개요
대한민국의 축구인.
2016년부터 2017년까지 창춘 야타이 감독을 맡았다.
2. 축구인 생활
2.1. 현역 시절
영남상고(現 부산정보고등학교) 시절 장신 스트라이커로 주목을 받으며 연세대에 입학했으나, 고3 때 이중계약 파동[1] 으로 인해 '''출전정지 2년'''이라는 중징계를 받아 기량이 쇠퇴했고, 결국 만 30세라는 한창 이른 나이에 은퇴를 택한다.
2.2. 지도자 시절
2.2.1. 대한민국에서...
중국에서는 중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도 거론되는 등 승승장구하고 있지만, 대한민국에서는 평판이 그리 좋지 않다. 7년 동안 박종환 감독 밑에서 코치 생활을 해서 그런지 선수 지휘에 좀 강압적인 면이 있었다 한다. 2005~2006 두 시즌간 FC 서울에서 감독 생활을 했는데, 2009 시즌까지 FC 서울의 골칫거리였던 거친 경기 스타일과 약한 멘탈은 이 감독의 지휘 아래 완성되었다.
서울빠들은 이장수가 있었으면 조광래가 발굴한 이청용 등의 유망주들이 출전하지 못해 썩었을 것이라며 잘 떠났다고 여기고 있다.[2]
그러나 유일한 수확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아디 영입!!
그리고 감독 본인은 이런 지적에 대해 한동원, 고명진, 송진형, 천제훈 등의 신예들을 기용해 컵대회 우승까지 차지했다며 반론했다.[3]
2.2.2. 중국에서....
다만, 중국에서는 다르다. 중국에서 가장 성공한 외국인 감독으로 이름이 높지만, 더불어 후술하듯이 온갖 구단 프런트와 갈등에서부터 언론과 소송 등 마음 고생도 많이 해야 했다.
하위권에 머물러 있던 충칭 룽신을 FA컵 우승으로 이끌며 충칭의 별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그의 활동은 2000년 KBS2 《인간극장》에서 소개됐다. 이후 칭다오에서도 FA컵 우승을 안기고, 얼마 뒤 수도를 연고로 하는 만년 콩라인 베이징 궈안의 감독을 맡았고 리그 우승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구단 측의 막장짓으로 인하여 짤렸다.
중국에서는 중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후보로까지 다 거론될 만큼 인지도가 상당히 높기 때문에 다른 수퍼리그 팀으로 부임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의외로 6개월만에 중국의 2부리그 급인 갑급 리그의 광저우 헝다 팀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광저우 헝다는 이른바 '''중국판 맨체스터 시티 FC'''라고 부를 수 있을 팀으로, 포브스가 선정한 중국 100대 부호 중 1위를 차지한 쉬쟈인 회장이 운영하는 헝다부동산그룹이 인수한 팀이다. '안 하면 아예 안 하고 하면 최고로 한다'는 헝다부동산그룹의 기업철학으로 잡힌 지원금이 무려 '''1억 위안'''(한화로 176억 정도)으로, 구단 수뇌부는 이 감독에게 2010년 1부 리그 복귀, 2011년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 출전권 획득, 2012년 아시아 정상정복을 조건으로 제시했다고 한다. 현재 중국 최강팀들도 16강 못 뚫고 떨어지는게 AFC 챔피언스 리그라는 걸 감안하면 굉장히 어려운 목표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2010년 들어 중국 국대로 뛰고 있는 정즈, 쑨샹, 가오린을 영입했다. 최소한 슈퍼리그 복귀는 쉬워 보이는 상황. 애시당초 이 팀은 성적을 못 내서 내려간 팀이 아니라 승부조작을 해서 내려간 팀이다.
그리고 2010년 10월 30일, 2부리그 우승을 하며 1부리그 승격을 확정지었고, 2011년 9월 28일에 중국 수퍼리그 우승도 확정지었다.
2012 시즌 막강한 선수 보강으로 AFC 챔피언스 리그에서 K리그 우승팀인 전북 현대와 J리그 우승팀인 가시와 레이솔을 물리치며 상종가를 올렸으나, 의외로 태국의 부리람에게 홈에서 패배를 당하며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강에 진출하였으나, 결국 경질되었다.
해임 후 국내로 돌아와서 휴식 중인데, 2012 시즌 초반 허정무 감독이 사임하여 현재 감독이 없는 인천 유나이티드와 성적이 막장으로 치닫고 있는 포항 스틸러스에서 러브콜을 날리고 있다는 루머가 있었으나 묻혔고, 2012 시즌 종료 후 기대에 못미친 성적을 낸 수원으로 부임한다는 루머도 있었으나, 이 역시 수원의 서정원 수석코치가 수원의 새 감독으로 선임되면서 묻혔다.
2014년 7월 중국 갑급리그(2부리그)[5][6] 청두 톈청의 감독으로 부임.[7] 목표는 강등권 탈출이었고, 부임 초반 연승덕택에 놀랍게도 승격권까지 올랐지만 이미 감독부임 이전부터 이어지고있던 구단의 임금 체불 사건 등으로 인해 선수단의 사기가 저하 및 훈련 거부 사태까지 막장에 막장을 거듭하며[8] 결국 팀은 을급리그로 강등당했다. 이장수 감독은 아들의 결혼 관계로 한국에 돌아와 휴식 중이었는데, 팀이 2015년에 해체됐다. 중국에서 생활할 동안 제일 고생했던 때이지만 이 막장팀 감독 자리에 올랐던 걸 한 번도 후회하지는 않고 오히려 부탁을 해왔던 친구에게 팀을 일으키지 못해 너무 미안하다는 대인배적인 소감을 남겼다.
약 1년 간 백수 생활을 하다가 2016년 5월 슈퍼리그 최하위팀인 창춘 야타이의 감독 자리에 오른다. 목표는 강등권 탈출. 그리고 마지막에 연승행진으로 스퍼트를 올려서 12위까지 올라가며 잔류에 성공했다!!
그러나 2017 시즌에는 개막 후 5경기에서 1무 4패를 기록하고 해고됐다.
3. 인터뷰 논란
2006년 플레이오프 성남 일화 천마와의 경기에서 서울이 0-1로 패배한 후 이장수 당시 감독이 '''심판이 고의로 오심을 저질렀다'''는 인터뷰를 한 사건. 한국프로축구연맹에서는 이 발언이 프로연맹과 심판들의 권위를 실추시켰다고 판단하여[9] 상벌위원회를 소집하였으나 이장수 감독은 상벌위 참석을 거부하였고 결국 벌금 500만원을 물게 되었다. 그런데 심지어 이 감독은 이 벌금을 납부하지 않았다! 중국 슈퍼리그 광저우 헝다 감독으로 취임할 때 시점으로 벌금을 납부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는데, 아마 아직도 미납 상태인 것 같다.
여담으로, 이 감독이 인터뷰에서 언급한 해당 상황은 서울의 슈팅이 골인으로 인정되기 전에 박진섭이 아슬아슬하게 걷어낸 장면인데, KBS 스포츠의 축구 토크 프로그램인 <사커 플러스>에서 리플레이 분석을 한 결과 노골이 맞으며 오심이 아니라고 밝혀진 바 있다.[10]
[1] 원래 중앙대에 입학하기로 했다가 영남상고 출신 연세대 선배의 집요한 회유에 넘어가 연세대로 진로를 바꿨다. 이 과정에서 중앙대 선수들과 연세대 선수들이 이장수가 학력고사를 치는 시험장 앞에서 칼과 몽둥이까지 휘두르며 싸워 물의를 빚었다.[2] 이청용을 윙백으로 그나마도 잠깐 써먹다 말았다.[3] 언급한 선수들 중 고명진과 송진형은 프로에서 알아주는 선수들로 성장했고, 국가대표 유니폼도 조금이나마 입어봤다. 반면 한동원은 07년 성남 이적 이후 부상이 잦아지고 성장이 정체되기 시작해 어느 팀에서도 중용받지 못하다 조용히 은퇴했다. 천제훈은 유망주 딱지를 떼지 못한 채 완전히 잊혀진 선수가 되었다가 2011년, 2011년 K리그 승부조작 사건으로 축구판을 영구히 떠났다.[4] 아시아 쿼터로는 조원희가 있었다.[5] 1부리그가 아니다. 영어로는 리그원으로 표기하나, 1부리그는 슈퍼리그, 2부리그는 갑급, 3부리그는 을급 리그다.[6] 대한민국에 대입해보면 K리그 챌린지.[7] 원래 맡을 생각은 없었지만 이 팀에서 일하고 있던 중국인 친구가 계속 부탁을 해와서 맡게 되었다.[8] 이장수 감독마저 부임하고 나서 월급을 못 받았다. 이장수 자신은 그걸 감수하면서도 끝까지 구단에 선수들 체불 월급 완전 지불을 요구하고 한편으로는 선수들을 설득해가며 훈련, 경기에 참여시키는 등 팀과 선수들 가운데서 고생만 했다.[9] 감독의 심판판정 비판은 흔히 있는 일이지만 이 건에서는 '고의로 오심을 했다'고 주장한 점 및 서울 구단측에서도 구단 홈페이지를 통해 '도둑맞은 챔피언결정전 행 티켓' 운운하면서 심판판정에 과한 비난을 가했다는 점이 감안된 것으로 보인다.[10] 이 방송에 분석가로서 출연한 김대길 해설의원은 리플레이 분석을 마친 뒤 함께 출연한 FC 서울 관계자에게 "골이라고 해드릴까요?"라고 질문하며 출연진들은 물론 각종 축구 커뮤니티 회원들로 하여금 웃음을 자아냈다. 물론 TV로 보고 있던 이장수 감독만 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