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야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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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상나라의 마지막 왕 제신이 주나라 무왕과 싸운 전투. 이 전투의 패배로 상나라의 멸망이 확정되었다.아! 우리 우방의 총군(冢君), 어사(御事), 사도(司徒), 사마(司馬), 사공(司空), 아려(亞旅), 사씨(師氏), 천장부(千夫長), 백장부(百夫長)와 용(庸), 촉(蜀), 강(羌), 무(髳), 노(盧), 팽(彭), 복(濮)의 사람들아. 너희들의 과(戈)를 들고, 너희들의 방패를 나란히 하며, 너희들의 모(矛)를 세워라. 내 맹세할지어다.[1]
혁명이란 단어의 기원이기도 하다.
2. 목야대전의 배경
사기에 따르면 상나라의 마지막 왕 제신은 흉악한 폭군이었다. 제신은 주지육림·포락지형 등의 혹형을 만들며, 주나라의 제후인 희창을 잡아 가두고, 그의 장자 백읍고를 요리해서 먹게 하는 등 잔악한 행동을 벌였다. 또한 각지를 정벌하여 원성이 가득해졌다.
희창은 주나라에 돌아온 후, 인근 국가를 병탄하여 국력을 강화하고, 또한 상나라에 원한이 깊은 제후들에게 손을 써서 주나라의 국력을 강화시킨다. 하지만 희창은 노령이었고, 그가 죽은 뒤 아들인 발(發)이 주나라의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그가 무왕이다.
혁명을 선언한 무왕의 군대는 상나라의 허를 찔러 공격을 시작하고, 여러 제후들이 가세하여 순식간에 대군이 되었다. 상나라는 멸망할 듯이 보였지만, 무왕은 아직 때가 아니라며 한 차례 군사를 물렸다.
3. 목야대전의 전개
몇 년 후, 무왕은 다시 상나라를 공격했다. 주무왕은 주원(周原, 현 중국 섬서성 푸펑(부풍)현 인근)에서 시작해 풍호(豊鎬, 현 시안 인근)를 통해 관중 분지를 지나고, 이후 중원으로 들어가 낙양을 지나 맹진(孟津)에 도달한다. 주나라 군대는 맹진(孟津)에서 황하를 건너려 했으나, 폭풍이 불어와 강을 건널 수 없었다. 무왕은 분노하여 황하의 신 하백에게 "천명은 이미 내려졌다, 어째서 방해하는가" 하고 크게 소리를 질렀는데 그러자 폭풍우가 멎어 주나라 군대는 강을 거널 수 있었다. 이 때 배 안에 뱅어가 뛰어들어 왔는데, 흰색인 뱅어는 상나라를 상징하는 색이므로 상서롭게 여겨졌다. 무왕은 여기서 황하를 건너며 이후 쭉 하북 평원을 따라 진군하며 목야에 이르렀다.[2]
정리하자면 당시, 주무왕은 최소 900km에서 최대 1000km 혹은 그 이상을 대군을 이끌고 행군했다. 기원전 1000년경 상고시대에 잘 해봐야 청동기 무기를 들고 당시 숲과 습지로 가득했던 북중국의 자연조건을 행군해야 했다. 사서에 따르면 도중에 상나라의 요새나 저항군을 만나면 깨뜨리고, 중간중간에 합류하는 제후들도 다독여야 했다. 그 고생이 말도 못했으리라. 이렇게 주나라 군대와 상나라 군대가 상나라의 수도 조가(朝歌)에 가까운 목야(牧野)에서 마주치자 또 다시 폭풍우가 불었지만, 무왕은 '상나라 탕왕이 하나라 걸왕을 무찌른 명조(鳴条) 전투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니 이것은 상서로운 일'이라고 격려하였다.
사기 주본기에 따르면 상나라는 준비에 만전을 기하여 70만 대군을 동원했다.[3] 주나라는 동맹국의 군대를 더해도 40만이었다. 하지만 상나라 군대에는 전장에서 길흉을 점치는 신관이 포함되어 있었고, 복속된 작은 국가의 군대들까지 섞여 있어 질이 나빴다. 상나라 군대의 전열은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줄배신을 때리고 주나라 군대에게 길을 열어주는가 하면, 아예 창을 거꾸로 들고 뒤에 있던 본진을 공격하기도 했다. 중국의 문학가인 궈모뤄(郭沫若)는 이 병사들 가운데 노예들까지 섞여 있었다고 추측하며, 제신은 이런 병사들을 앞에 세우고 자신이 믿는 상나라의 정예병은 뒤에 배치했을 것이라고 보았다. 당연히 평소 불만이 많았을 노예나 항병(降兵)들은 주나라 군대가 몰려오자 기다렸다는 듯 상나라 군대에 대항하여 싸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혹은 강태공이 이미 이렇게 되도록 음모를 써서 계략을 꾸며 두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현대의 연구에 따르면 상이 주변과 느슨한 속국관계를 이뤘는데, 이 연결성이 상당히 취약했다는 점은 지적되고 있다.
아무튼 전투는 상나라의 참담한 패배로 끝났고, 이 한 번의 싸움으로 상나라는 궤멸된다.
4. 목야대전의 결말
주나라 군대는 제신을 쫓아 조가까지 쳐들어 갔다. 제신은 왕궁에 불을 질러 죽었으며, 무왕은 제신의 시신에 세 개의 화살을 쏘고 도끼로 목을 쳐서 잘라 벌했다. 이로서 상나라는 멸망하고, 혁명군의 맹주였던 주나라가 천자국이 되어 제후들을 다스리게 되었다.
5. 목야대전과 관련한 여담
- 천하장사 악래(惡來) 역시 이 싸움에 출진했으나 죽었다고 한다.
- 사기 주본기에 따르면 이 싸움에서 주와 함께한 제후군은 용(庸)·촉(蜀)·강(羌)·모(髳)·미(微)·노(纑)·팽(彭)·복(濮) 등이다.
- 상서에 따르면 주왕을 제거한 날의 간지는 갑자(甲子)였다고 하는데 청동기 명문에서도 확인된다.
- 근래의 갑골문 연구에 따르면, 당시 제신은 상나라의 주력 군대를 동방으로 출진시키고 있었다. 목야의 싸움에서 노예나 항복한 병사를 동원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 상서 목서에서 주무왕은 제후들과 동맹을 선언하면서 "암탉이 새벽을 알리면 집안이 망한다. 지금 상나라의 군주는 여자 말만 듣고 현명한 사람의 말을 멀리하고…"라는 발언을 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담은 여기서 기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