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중
1. 관전하는 무리
觀衆
어떤 행사를 보기 위해 온 사람들. 구경꾼 무리. 연예계나 스포츠나 '''관중이 왕이다.'''[1] 가장 직접적인 수입원[2] 이자 가장 친근한 팬이 될 가능성이 높으므로 관중 동원이 연예인, 스포츠인으로서 성공의 가장 중요한 능력 중 하나이다.
경기를 관람할 목적으로 경기장에 온 사람들은 신분에 상관없이 모두 관중으로 치며, 간혹 유명인이 관중으로 오는 경우에는 중계 카메라가 이를 잡아주곤 한다. 유명인 이외에도 미녀나 치어리더, 서포터즈 등 시청자들의 주목을 끌만한 사람들을 잡아주기도 하며, 가끔 독특(?)한 퍼포먼스로 카메라에 잡히는 경우도 있다.
2. 면마과의 여러해살이풀
잎은 겹잎이고 뿌리줄기에서 돌려난다. 말린 뿌리줄기는 ‘면마근’이라 하여 구충제로 사용한다. 산지의 습한 땅에서 자라는데 한국, 만주, 사할린, 일본 등지에 분포한다. 관거(貫渠)ㆍ관절(貫節)ㆍ면마(綿馬)등의 이름으로 불린다. (출처:네이버 백과사전)
멘마와는 관련이 없다.
3. 춘추시대때 제나라의 재상
관이오 문서 참조.
4. 중국의 옛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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關中
오늘날로 치면 대체로 산시성(섬서성) 일대에 해당한다. 지명의 유래는 북쪽의 소관, 동쪽의 함곡관, 남쪽의 무관, 서쪽의 대산관 가운데의 땅. 고대 중국의 9주 중에서 옹주 지역이다.
주나라, 진나라의 발상지이며, 고대부터 당나라 시대에 이르기까지 장안을 중심으로 한 관중 지역은 대부분 왕조가 수도를 관중에 두었을 만큼 중국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사실 관중은 지리적으로 중국의 중심지는 아니고 고대~중세 중국 기준으로도 중원에서 서쪽으로 치우친 위치였다. 그러나 중원이 하북부터 강남까지 탁 트여있는 지형인 것과 달리 험준한 산맥과 관문으로 보호받는 지리적 이점이 있고, 그렇다고 익주마냥 지나치게 험준하고 멀지는 않다. 지형이 폐쇄적이면서도 평화시기에는 관문만 통과하면 중원 남부와 북부로 바로 이어져서 교통도 크게 나쁘지 않고, 위수를 중심으로 한 위수분지의 생산력 덕분에 관중 그 자체만으로도 제국의 수도를 유지할 생산력은 낼 수 있었다. 이렇기에 천하쟁패의 시기가 오면 중대한 비중을 차지하곤 했다. 항우의 경우 진을 멸망시킨 다음 이 관중을 근거로 삼는 것을 거부했다 하여 관중의 중요성도 모르는 의관을 입은 원숭이 취급을 받기도 했다.
송나라 이전까지 관중 지방과 파촉 지방을 결합하면 그 세력은 중국 통일에 가까워지는 경우가 많았다.[3] 당장 전국시대 진나라, 한고조, 북주(와 이들의 후신 수나라-당나라)가 관중에 도읍하고 익주를 배후지에 두어서 천하를 제패한 케이스, 오호십육국시대 전진도 관중에서 일어나 이런 식으로 천하를 제패하기 직전까지 갔다. 일단 관중과 익주를 동시에 먹으면 양쪽에서 진령산맥을 축으로 한 적대세력의 방해가 없어져 관중의 물량을 전선으로 이동시키고 그 빈자리를 배후지인 익주의 풍부한 물자를 끌어다 보충하는 방식으로 시너지가 나는 것이다. 한고조가 이런 식으로 물량전으로 천하를 잡았고 거기다 관중과 장안까지 먹으면 험지에 의존해 그 안에서 천하를 제어하는 게 쉬워진다, 한고조가 낙양이 아니라 장안을 도읍으로 삼은 것도 유사시에 관중 땅의 험지 안에서 제후들을 제어하기에 편한 땅이라는 유경#s-1의 제안에 공감했기 때문. 삼국지를 보면 촉한이 이곳을 지속적으로 공략하고 정치 경제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며 이 지역의 인심을 잡으려 했으며 이민족들과의 연계를 통해 공략하려고 한 연유가 이것이다. 후세에 조선의 학자 정약용이 괜히 고대의 전략가들은 장안, 낙양을 중심으로 전략을 짰다고 한 게 아닌 것.[4]
다만 송나라 시대부터는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차지하지 못했고, 이때부터 중국 역사의 중심지는 관중보다 동쪽으로 이동한다.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명이 분분한데, 내륙 깊숙한 곳에 있던 관중지방이 당 말기인 서기 8~9세기에 소빙하기가 도래하면서 연 평균기온이 뚝 떨어져 기후변화로 건조해지면서 중국 동부 해안과 강의 하류가 더 중요해졌다는 설, 관중은 실크로드의 출입구인데 해상무역이 활발해지면서 반대로 실크로드를 통한 육상무역의 중요성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라는 설, 장강 하류의 강남 지역이 개발되면서 경제적 중심지가 이동했기 때문이라는 설, 이민족의 힘이 상대적으로 강해진 시기에 관중이 동쪽 중원으로부터의 공격을 방어하는 데는 유리하지만 서쪽과 북쪽에서 들어오는 이민족의 공격에는 취약한 점이 노출되었기 때문이라는 설 등이 있다.[5] 그러나 위수분지 이북은 여전히 말을 기르기 좋은 곳이었으며 이곳을 잃은 송은 기병 양성에 큰 어려움을 겪어 북방 방비가 어려워졌다.
그래도 중세 중국에서는 나름대로 중요한 지역이었다가 명나라 말엽에 이르러 다시금 17세기의 소빙하기가 도래하여 기후가 다시 변화하자 관중을 포함한 섬서성 일대는 곡창지대에서 황무지가 되었으며, 거듭되는 흉작까지 겹치자 대규모 유랑민이 발생한다. 이들은 반란을 일으켜 명 정부를 타도하기 위해 일어서는데, 그 사건이 명나라를 사실상 멸망시킨 이자성의 난이다.
[1] 하지만 2015년 8월 25일에 일어난 KIA vs SK 전에서는 심판이 관중을 퇴장시킨 사례가 나왔다.[2] 유료관중일 경우 순도 100%, 무료관중이라도 E스포츠처럼 사람을 꾸준하게 많이 모을수 있다면 이를 대상으로 홍보효과를 노리는 기업이 어딘가는 있다.[3] 그러니까 관중을 먹지 못한 익주 세력은 결국 중원의 물량에 멸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예로 한중과 제갈량을 보유하고도 형주를 상실하고 농서와 관중을 병탄하려던 시도가 실패해 결국 위에 잡아먹힌 촉한이 있다.[4] 좀 더 정확히 설명하자면 관중+파촉만으론 안 되고 형주 북부 남양, 양양 일대까지 장악해야 천하통일에 다가간다. 관중으로 기반으로 통일했다는 세력들(선진, 유방, 북주)은 모두 최소한 남양까지는 확보한 상태였다. 단순히 파촉+관중만으로는 루트가 한정되어있어 방어에는 편하지만 공격할 때 진군도 어려워진다. 위 세번의 예시중 형주일대에 대한 영향력이 가장 작았던 유방의 경우(대략 남양 정도만 자신의 세력권으로 뒀다.) 항우의 방어선을 뚫기 위해 정말 죽을 똥을 싸야했고 실제로 한신의 북벌을 성공시켜 항우를 휴전조약으로 끌어냈기에 망정이지 그전까진 끝내 형양 성고 일대를 뚫지 못했다.[5] 다만 송 태조 조광윤이 장안을 도읍으로 물색했던 것은 북방 이민족의 방어가 주된 목적이었기 때문이었으며, 그의 선견지명이 맞아 떨어졌다는 점에서 이 설은 설득력이 부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