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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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안성(장안성) 고루.[1] 시안시의 상징. 1384년에 건립되었고, 현재 남아있는 중국의 고루 중 가장 규모가 크다.
1. 개요
2. 기후
3. 역사
3.1. 장안과의 관계
3.2. 시안의 역사
3.3. 장안의 역사
4. 현재
5. 관광
6. 여담
7. 삼국지 시리즈에서의 장안


1. 개요


시안시 (산시성)

西安(Xi'an, 서안). 중국 산시성(陕西省)의 성도이다. 중국고도이자 현재 북서부 개발의 중점 개발도시이자 대도시이다.
현재 명칭은 시안이나, 옛 이름인 장안(長安)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인구는 2017년 기준 1,200만 명으로, 최근 급격한 개발로 인구가 매우 빠르게 늘어나고 있는 도시이다. 10년 만에 약 300만 명이 증가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인천광역시 만큼의 인구가 증가한 것. 중국 중남부에서 인구증가가 높은 도시중 하나이다.
춘추전국시대를 종결한 통일국가 의 수도가 현재 서안의 북쪽에 위치한 함양(咸阳, 셴양)이다. 현재 시안의 공항 이름이 이곳의 명칭을 따서 시안 셴양 국제공항이다. 진나라의 멸망 후 제국도 함양을 수도로 삼으며 '장안'으로 개명, 계속 발전하였다. 송나라(북송) 시대 이전까지 낙양(洛陽, 뤄양)과 함께 중국의 양대 도시로 번창했었다.
이후 다소 쇠퇴하였고 명나라 때 서안부(西安府)로 개칭되었다가 현재 중국의 시안시로 이어지고 있다. 워낙 유명한 도시였기에 서울이나 수도(首都)를 가리키는 대명사인 '장안'도 이 장안에서 따왔다.[2] 이 표현은 조선 후기까지도 쓰였다. '장안의 화제가 되다'라는 말도 여기서 나왔다는 설이 있다.[3] 이 도시의 이름에서 '오래 되고 큰 도시의 성 안', '수도'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
위도 34도로 목포시거제시와 위도가 비슷하다.

2. 기후


시안은 남북이 모두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이다.
연평균 강수량은 560mm정도로 약간 건조한 편이며 연평균기온 14.1℃, 1월 평균기온 0.3℃, 7월 평균기온 27℃이다. 역대 최저기온 -21℃이며 역대 최고기온 섭씨 42℃이다.
내륙에 위치하여 일교차가 큰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를 보이며 대충 한국의 남부 내륙지방인 경상북도 내륙, 대구광역시 일대와 기후가 비슷하다. 산으로 둘러쌓여 있는 점에서는 경북 내륙인 안동, 영주, 예천, 영양 일대와 비슷하지만 조금 더 따뜻한 편이다.

3. 역사



3.1. 장안과의 관계


흔히 장안=고대의 시안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좀 복잡하다. 역사적으로 장안은 어디까지나 현에 불과했고, 시안 및 시안의 전신들은 대부분 시간동안 장안현보다 윗단계 행정단위였다.[4] 그리고 시안의 위에도 더 윗단계의 행정단위[5]가 존재했다.
어쨌든 장안 역시 시안의 일부분이라 할 수 있으며 현대에 와서는 시안시에 소속된 장안구로 남아있기 때문에 이하 장안 관련 내용도 존치하기로 한다.

3.2. 시안의 역사


진나라 시절에는 내사라는 관원을 설치하여 경기(京畿) 일대를 다스렸고, 전한 경제 2년에 좌내사/우내사로 갈랐다. 장안은 진나라 시절에 장안향이었다가 한나라가 수도를 세우면서 장안현이 된다.
전한 무제 태초 원년에는 우내사를 경조윤으로 개명하였고, 장안현을 포함한 10개의 현을 다스렸으며 치소를 장안현에 설치하였다. 군(郡)의 태수에 해당되는 직책이었고 경조윤이 다스리는 지역을 경조라고 하였으나 정식으로 군을 설치하진 않았다. 경조윤은 좌풍익, 우부풍과 함께 사례교위(지방의 주자사, 주목에 해당)에 소속되었다.[6]
위나라 시절에는 경조군을 설치하고 경조윤도 경조태수로 변경하였다. 조비, 조예 시절에 황자를 경조왕, 진왕으로 책봉하면서 경조국, 진국이었던 시절도 있었다.
오호십육국 및 남북조시대에는 다시 경조군으로 돌아갔으나 다스리는 관원은 태수가 아닌 경조윤으로 돌아갔다.
이후에도 경조부, 옹주, 안서총관부, 봉원로 등으로 명칭을 변경하다가 명나라 시절부터 서안부를 설치하였고 이 명칭이 오늘날까지 유지된다.
중화민국 시절에는 성이 직접 현을 관리하도록 행정체제를 개편하면서 서안부는 철거되고 원래 장안현의 도시 부분에 시안시를 설치, 그리고 장안현의 치소는 원 장안현의 다른 곳으로 옮겨서 시안시와 장안현이 동시에 존재하게 된다.
그러다가 중화인민공화국 정권이 들어서면서 다시 옛날 체제로 복귀, 시안시는 다시 장안현을 포함한 주변의 현들을 통할하게 된다. 그러다가 시안시가 개발, 확장되면서 원래의 장안현은 시안시로 병합되어 장안구로 남게 된다.

3.3. 장안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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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여러 도시 중에서도 특히 유서깊은 곳이다. 역사에 등장한 때가 전설적인 주나라 시기로 역사가 3000년을 넘는 굉장히 오랜 도시다. 한나라가 장안을 수도로 삼으며 발전이 시작됐지만 그 전부터 이 일대는 중국의 중심이었다. 서주의 수도인 호경, 진나라의 수도인 함양 모두 이 일대에 위치한 도시였으니 기원전 1122년부터 기원후 907년까지 2140년간 번영해온 셈이다. 이후 장안은 낙양과 함께 중국의 양대 수도로 번창했다.
장안은 낙양(洛陽, 뤄양)에 견주어 서도(西都), 서경(西京) 또는 상도(上都)라고도 불리기도 했으며, 낙양과 함께 송대 이전까지 중국의 중심 도시였다. 장안과 낙양이 고대 중국의 수도였던 것은, 당시 황허와 그 지류 유역이 중국에서 가장 농업생산력이 풍부했었고, 따라서 인구가 가장 많은 지역이었기 때문. 장안은 관중이라 불렸고 중원이란 낙양 인근만을 한정하여 부를 때 쓰는 말이었다.
중국 고사에는 '''관중을 얻는 자 천하를 얻는다'''(得關中者得天下)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중국 고대사에 있어서 그야말로 핵심적인 지역이었으며, 진나라 진시황전한 유방, 당나라 이연은 이 장안이 포함된 관중 일대를 기반으로 천하를 얻었고, 오호십육국시대전진(前秦)과 후일 수나라의 전신이 되는 남북조시대북주(北周) 역시 이 지역을 기반으로 하여 화북을 통일한 바가 있다. 사실상 고대 중국을 통일했던 6개 국가 중 4개의 국가가 그 시작이 관중 지방이었으니 고대 중국에 있어서 장안의 중요성을 실감할 수 있다.[7] 지금의 척박함을 생각하면 믿기 어려울 정도.
일단 지형의 조건이 상당히 특이하다. 도시와 평원을 둘러싼 진령산맥이 원형의 성벽처럼 만들어져 있으며, 서쪽에는 황하, 북쪽에는 위수와 경수가 흐른다. 특히나 장안을 둘러싸고 보호받는 경지면적이 의외로 넓어 관중평야는 낙양의 5배 넓이로써 천부지국(天府之國)이라고 불린 옥토의 땅이었다. 이는 만일 국가급 전쟁에서 포위당했을 때 식량을 자체적으로 대량조달하기 쉬우므로 오래 버틸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서쪽 방면의 산악지대, 황토고원은 장안의 북쪽을 든든하게 막아주는 대규모의 자연장벽이라서 통로가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다. 덕분에 주변지역에서 장안으로 오려면 황하를 타고 위수로 진입하든지, 아니면 동쪽 산악지대에 있는 함곡관 같은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관중 평야가 동서로 넓기에 남북 형태로 보면 정말 도시가 산에 끼인 듯한 모습을 보인다. 동쪽으로 가면 또 산과 황하가 관중으로 들어오는 입구를 막는다.
여기서 동으로 진격하면 위수황하가 서에서 동으로 흐르기 때문에 낙양일대까지 사실상 프리패스나 다름없지만, 동에서 서로 공격하면 함곡관이나 동관 걸어 잠그고 틀어박히면 된다. 장안을 얻으면 관중만 먹는 게 아니라 사실상 낙양까지 영향력이 미쳐 구 한나라 경기 일대에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동쪽은 함곡관으로, 여기서 중원과 관중이 구별된다.[8] 한마디로 말해서 방어하기 편리한 곳치고는 교통사정도 좋다는 이야기다. 또, 인접한 양주는 강족을 비롯한 서북방 이민족의 영토와 가깝고 이민족과의 교역이나 거래가 가능하며, 기병을 양성하기 좋은 땅이었다.
여기까지 보면 알겠지만, 장안이라는 개념도 역사적으로 일정하지 않았다. 특히 한나라 시절의 장안과 당나라 시절의 장안은 이름만 같았지 지리적으로나 기원으로나 아예 다른 곳이었다. 또 당나라 시절에는 장안성과 장안현이 좀 다른 개념이었다. 장안성 안에 만년현(이후 함녕현으로 개명)과 장안현이 갈라져 있어서 한 성곽 내에 두 도시가 공존하게 된 것. 이러한 상황은 1914년 함녕현이 철거될 때까지 지속된다.

3.3.1. 주나라 ~ 진(秦)나라


주나라(서주)의 도읍지 호경도 인근에 위치했는데[9], 종주(宗周)로 불리며 성주(成周)라 불린 낙읍이 동방 경영의 중심지로 기능하는 동안, 주나라의 본거지로 기능했다. 전국시대 진(秦)나라의 수도인 함양(기원전 350~206)[10]이 인근에 있었다.[11] 그 당시만 하더라도 장안은 함양 외곽의 일개 향리였다. 그러나 결국 함양은 항우에게 의해 '''완벽하게 파괴되었다.''' 장안은 한나라(전한) 고조 유방 때 처음 도읍했던 낙양에서 천도하면서 사실상 새로 세워진 도시다. 파괴된 함양의 위수 남쪽에 아직 궁궐 등의 시설들이 남아 있었고, 여기에 기초하여 새로 도시를 지은 게 장안이었다.

3.3.2. 한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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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장안성 평면도
한나라 때의 장안은 지금 시안의 북서쪽 시가지 외곽에 자리잡고 있었으며[12], 비단길의 시작점이었다. 장안의 정치경제적, 그리고 전략적 이점들이 전한의 수도가 되게 한 원인이었다.

한고조는 처음엔 낙양을 수도로 삼고자 했다. 이때 누경으로부터 관중은 수비에 용이하고 과거 낙양을 수도로 삼았던 주나라와 한나라는 여러 면에서 다르다는 점을 지적받았다. 한나라는 전쟁을 하며 덕을 쌓지 못했고 따라서 유사시 관중에 들어가 천하를 제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관중은 가히 천하의 덜미를 거머쥐고 뒤통수를 후려갈길 수 있는 형국의 요지로서 장량 또한 누경의 의견에 지지를 보내며, 관중은 '금성천리(金城千里, 천리 땅에 걸친 견고한 성)'나 다름없으며 '천부지국(天府之國, 하늘 곳간의 나라)'이라 표현했다. 한고조는 즉각 장안으로 수도를 옮기고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제일 처음 지어진 건축물인 장락궁(長樂宮)이었는데, 원래 진나라 때의 건물이었던 흥락궁(興樂宮)을 토대로 개축한 것이었다. 서쪽으로는 상국 소하(蕭何)의 강력한 주장에 힘입어 미앙궁(未央宮)이 건설되었다. 한 고조 시절 장안은 주로 이 두 궁궐로 이뤄졌고, 아직 성벽이 완전히 세워지지 못한 상태였다. 혜제 시절에 성벽을 완공함으로써, 장안이 도시의 모습을 갖추는 데 크게 기여했다. 혜제 이후 즉위한 한문제한경제 시절에는 근검절약을 강조한 두 황제의 치세에 걸맞게 마땅한 토목공사는 없었다.
한무제가 즉위하자 장락궁 북쪽에 명광궁(明光宮)을 더했고, 미앙궁 북쪽으론 북궁(北宮)과 계원(桂原)을 추가했다. 무제는 상림원(上林苑)을 지었는데, 그 둘레는 약 300리에 달했다. 무제는 이 모든 궁궐 단지들을 장안 내외에 걸쳐 지었지만, 서쪽 교외에 위치한 건장궁(建章宮)이 가장 거대한 위용을 자랑했다. 한무제 시대 장안은 제국의 수도로서 가장 번영했다. 당시 장안성의 대부분은 장락궁과 미앙궁 등의 궁궐과 관청들이 차지하고 있어, 황제와 고급 관료들을 위해 설계된 도시라고 할 수 있었다.[13] 이 당시 장안성의 모양은 북쪽이 북두칠성, 남쪽이 남두육성의 모양을 하고 있어 두성(斗城)이라 불렸다. 경제 활동은 주로 도시 북서쪽의 서시와 동시에서 행해졌는데, 두 시장은 위수에 가깝게 위치했다.
왕망이 찬탈하여 전한이 멸망하고, 잠시 나라의 수도로 상안(常安)으로 개칭되었으나, 적미군에 의해 폐허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 장안은 적미군의 폐허를 완전히 제대로 복구하지 않은 상태였다. 후한을 일으킨 광무제는 장안에서 낙양으로 천도했다. 후한 시대에 장안은 경조윤(京兆尹)으로 불리었으며 좌풍익(左馮翊), 우부풍(右扶風)과 함께 묶여져 삼보(三輔)라고 칭해졌다.
후한 말기 헌제동탁낙양을 불태우고 일단 우격다짐으로 대충 수도로 복구해 다시 장안으로 옮겼다. 이곳은 비교적 서량과 가까웠으며 이 때문에 동탁은 반동탁연합군이 결성되자 자신의 근거지인 서량과 최대한 가까운 곳으로 천도해서 병력과 물자를 쉽게 조달하려 했다. 동탁은 반동탁연합군에게 밀릴 경우 강족저족 등 서량에 사는 이민족들의 힘을 빌리려 했던 것. 동탁이 여포에게 암살되자 이각, 곽사가 난을 일으켰고, 이 삼보의 난으로 장안은 다시 잿더미가 되었다. 또 헌제는 이를 떠나 조조에 몸을 의탁, 조조는 허창을 수도로 삼았다. 다만 장안은 곧 도시로 복구되어 조위 서방의 중요 도시로 남았다. 삼국지연의에서는 마초가 장안을 함락했다는 일화도 있으나 연의의 각색으로 실제 역사에서는 장안 근처를 휘젓기는 했으나 장안성을 점령했다는 기록은 없다.

3.3.3. 위진남북조


삼국시대에는 촉한 북벌의 목표가 된 데 대비되어 조위에서는 대촉 방어 요충지 및 전진 기지로서 중요시되었다. 제갈량의 북벌의 주요 전장이 되었던 가정, 오장원 등이 장안 서쪽 근교에 해당한다. 서진 때 영가의 난으로 또다시 초토화가 되었다가 호한 정권의 유요가 거점으로 삼고, 이후 근준의 난으로 독립하면서 군주가 된 전조 정권의 수도이기도 하였다. 후조가 중원과 화북을 통일하면서 흡수되었다가 후조말 혼란기에 저족의 포홍(蒲弘)이 독립하면서 이 일대에 전진을 건국한다. 이후 전진은 손자인 부견 대에서 화북을 통일하며 강대해지지만 비수대전으로 몰락한 이후 강족의 요장(姚長)이 부견을 패사시키고 건국한 후진의 수도가 되었다. 다시 손자인 요홍 대에서 동진이 후진을 멸망시켜 일시 남조의 영역으로 들어갔지만 제위 찬탈에 급했던 유유의 병크로 혁련발발의 하나라에 빼앗겼다. 정작 혁련발발은 기존 수도인 통만이 북위와 가깝고 방어가 튼튼하다고 하여 장안으로 천도하지 않았다. 이후 북위를 거쳐 동서로 분열된 서위북주, 수나라, 당나라 때 꾸준히 수도로 기능하여 낙양과 함께 북송대 이전까지 중국의 중심 도시였다.[14]

3.3.4. ,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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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장안성 평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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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장안성 복원도[15]
수나라 문제 때 한나라의 장안성 토질이 염화되어 거주에 부적절해지자 현재 시가지가 있는 위치에 장안을 재건했는데, 이때는 수문제가 즉위 전 받았던 작위인 대흥군공에서 이름을 따와 대흥(大興)이라고 명명했다. 하지만 수양제가 낙양을 재건하여 동도로 칭한 후 천도해 배도(陪都)가 되기도 했다.
장안의 두 번째 전성기는 당나라 때의 도읍지였을 때다. 당의 창업주 당고조는 618년 대흥을 수도로 정하면서 이름을 장안으로 개칭했다. 장안성은 외성의 길이가 동서 9.7㎞, 남북 8.6㎞에 달했으며 동서남북의 성벽에 각각 3개씩 총 12개의 성문이 있었다. 내부는 110개의 방(坊)으로 구획되어[16] 엄격한 통금이 실시되었고[17], 황성의 정문인 주작문 앞으로 곧게 뻗은 폭 150m의 주작대로를 경계로[18][19] 동서 지역인 장안현과 만년현으로 나뉘어졌다. 장안현과 만년현에는 각각 동시(東市)와 서시(西市)라는 상업 전용구역이 설치되었는데, 특히 서시는 실크로드의 시발점이자 종점 역할을 해 세계 각국의 상인들이 몰려들었다. 장안성 남동쪽에는 당현종 때 준설해 생긴 곡강지(曲江池)가 인근의 부용원(芙溶園)과 더불어 명승지로 유명했다. 장안성 내에는 당나라 황실의 정궁인 태극궁(太極宮)과 당현종이 친왕이었을 때 살았던 저택을 궁궐로 증축한 흥경궁(興慶宮)이 있었다. 이외에도 지금은 폐허로 남았지만 정전이 중국 역사상 최대 크기의 건축이라는 함원전을 가진 대명궁이 장안성 외성 북쪽에 맞닿아 당고종 때 건축되었다. '''최전성기에는 장안의 인구가 100만 명에 달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인데, 당시 전 세계에서 이 규모와 맞먹었다고 여겨지는 도시는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이슬람 제국의 수도인 바그다드뿐이었다.'''
당나라 장안의 도시계획을 도입하는 것은 7~8세기 동아시아의 트렌드였으며, 발해상경용천부일본헤이조쿄헤이안쿄는 둘 다 장안을 모방해 서로 쌍둥이처럼 도시 외양이 비슷했다. 동시대 신라서라벌도 여기는 발해나 일본과 달리 원래 존재하던 도시를 개조한 셈이라 장안성의 구조를 똑같지는 않지만 부분적으로 도입하였다. 그리고 중국, 한국, 일본, 베트남의 후대 왕조들도 조금씩 변형되긴 했지만 도성 구조에서 당제의 영향이 계속 남게 된다.
전례 없는 번영을 구가하던 장안은 황소의 난을 겪으면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904년 주전충당소종을 협박해 낙양으로 천도하면서 장안의 궁전과 관청 건물을 철거해 자재를 이송하고 황실과 백성을 강제로 이주시켜 이후 두 번 다시는 옛 영광을 회복하지 못했다.

3.3.5. 오대십국~현대


송나라 때는 송태조 조광윤이 천도를 논한적이 있는데 976년, 송나라가 개국한 지 16년이 지났을 때, 송태조가 낙양으로 제사를 지내러 갔다. 제사를 마치고도 낙양에 머물며 개봉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신하 이회충이 개봉에는 운하가 있고, 곡식이 수 백만석씩 올라오는데, 도성을 지키는 수십만 병력들은 그걸 먹고 살고있다고 하며, 폐하가 낙양에 머물면, 수십만 병력들은 뭘 어떻게 먹고 사느냐며 낙양 천도는 불가하다고 했다.
이에 송태조는 낙양 천도는 장기적인 것이 아니고, 가장 좋은 것은 장안으로 천도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송태조는 자신이 서쪽으로 천도하려는 것은, 산과 강의 험준함을 이용해 주나라, 한나라의 일을 본받고 쓸데없이 많은 병력을 줄여 용병하는 일을 막기 위해 장안으로 옮겨야 한다고 의견을 제시했다.
반면 송태종 조광의는 나라를 지키는 것은 덕에 있지, 험준한 지형에 있지 않다며 조운이 갖추어져 물자가 풍부한 개봉에 도읍을 정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조광윤은 "진왕(당시 조광의의 왕작)의 의견은 훌륭하나 백년이 넘지 않아 천하 백성들의 힘이 고갈될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같은해 11월 송태조가 붕어하면서 이렇게 송나라 때의 장안 천도 논의는 유야무야 되었고 개봉이 계속 송나라의 수도가 된다. 그리고 송이 멸망하고 그 뒤를 이은 몽골인원나라, 그리고 다시 한족명나라를 거치며 서안은 일개 지방도시로 전락한다. 애초 몽골족들은 자신들이 기원한 내몽골이나 만주와 인접한 베이징을 도읍으로 삼았고 연경이라 칭했기 때문에 이 때부터 베이징 시대가 개막되었다.
명나라 초 홍무제 주원장은 1391년에 감찰어사 호자기가 올린 서안(장안)이 속한 관중이야말로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지세를 갖추고 있다는 상서를 받았다. 그리하여 주원장은 서안(장안) 천도를 검토하기 위해, 태자 주표[20]를 보내 관중을 살피게 한다. 주표는 남경으로 돌아와 섬서성 지도를 바쳤으나, 이듬해 주표는 병사하고 만다. 태자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60이 넘은 노인이었던 그에게 천도 같은 큰 일을 행할 의지는 사라지게 되었고, 그렇게 다시 한번 장안이 통일왕조의 수도가 될뻔한 기회는 지나가게 되었다.
이후 명나라 말 이자성의 난순나라의 일시 수도(서경(西京)이기도 했고 현재까지 중화인민공화국의 시안시로 이어지고 있다.

3.3.6. 쇠퇴


장안이 망한 이유는 지력 쇠퇴와 당나라 이후의 기후 변화 때문이다. 장안은 한국사로 치면 경주시와도 비슷한 특징을 가지는데, 중원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중국 영역 전체에서는 다소 한 쪽에 치우친 위치이며 주변 지형도 험준한 산지에, 한정된 입구만이 존재하는 폐쇄적인 분지 지형이나 그 안의 분지가 비옥하다. 즉 지키기 좋으면서 중장기적 세력 확장의 기반으로서도 유용했다. 전성기에는 이 앞마당의 부양력으로 어느 정도 커버가 되었는데 수천 년간 중국의 중심지로 개발되다 보니 당나라 시기에 이르면 지력이 쇠퇴하면서 관중 분지의 생산력이 감소, 식량 자급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 되었다. 이미 후한 대에 농사에 치명적인 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나, 적절하게 밀이 전래되면서 밀농사를 지어 버틸 수 있었고[21] 북주 - 수나라는 이 지방의 역량으로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다. 이후 수-당나라 시기에는 부양해야 할 인구가 이전시대에 비해 엄청나게 늘었고 이미 수문제 때부터 식량을 구하러 다니는 황제라는 의미인 축량천자라는 말이 돌 정도였다. 결국 수나라는 대운하 개발을 통해 강남 지역의 물자를 관중 지역으로 수송하기 위한 개발 사업에 착수하게 된다. 물론 운하 문서에도 나오지만 수양제의 운하는 한계가 있었고 따라서 관중지역으로의 수송도 한계가 있었다. 어쨌거나 그래도 이 시기까지는 그럭저럭 100만 인구를 부양할 수 있었지만 당나라 중기부터는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버틸 수 있을 만큼의 토지, 관개시설 관리가 이뤄지지 않으며 농업 인프라가 붕괴했고, 이후부터는 토지염화가 악화되는 방향으로 악순환이 반복된다. 한때 전 중국에서 가장 풍요로운 곳이라던 관중 지역이 아니게 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당나라 이후 건조하고 추워지면서 농업 생산력이 더 감소되었다. 게다가 당나라 말기 정치적 불안은 외부 물자를 수송할 대운하 통제의 상실로 이어져 장안이 수도로서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결국 주전충당 소종을 움직여 낙양으로 천도하고, 장안을 파괴하면서 장안은 더 이상 중국사에서 수도로 등장하지 않게 되었다. 이후 장안에서 멀지 않은 낙양도 비슷한 이유로 중국사의 중심에서 밀려나고, 무대는 차차 동쪽(해안)지역으로 옮겨갔는데, 양쯔강 유역이 개척되고, 서역진출의 필요성이 줄어들며 거란, 여진, 몽골 등 동북방민족이 흥기하고 북쪽으로도 영역을 넓힘에 따라 장안과 낙양은 중국사의 중심에서 밀려나게 된다.[22] 그나마 바로 다음 시대인 북송은 낙양과 장안에서 멀지 않고, 수로가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수운이 용이한 개봉부를 수도로 삼기도 했으나 북송을 마지막으로, 중국의 중심지는 완전히 동부 해안 지역으로 넘어간다. 이후 왕조들이 항주(남송), 남경(초기의 중화민국)과 북경(, , , 명(영락제 이후 남명 이전까지), 및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에 도읍한 것도 그 때문.

4. 현재


지금은 지방도시이자 관광도시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의화단 운동~광서신정 시기 청이 한때 임시수도로 삼으려고 했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풍옥상염석산이 서안의 지배권을 놓고 다퉜으며 1차 장풍전쟁, 2차 장풍전쟁, 중원대전의 주요 전장이 되기도 했다. 1934년 제5차 초공작전으로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이 멸망하고 중국 공산당홍군의 생존자들이 대장정에 올라 섬서성으로 퇴각하자 이를 섬멸하기 위해 공산당 전선을 시찰온 장개석을 초비 부사령관 장학량과 서안 수정공서 주임 양호성이 감금시켜 제2차 국공합작을 강요했던 서안 사건 등 역사에는 꾸준히 등장하고 있다.
현대에는 중일전쟁 때 전투가 벌어져 중국군과 일본군은 시안에서 싸웠다. 그 과정에서 시안을 위시한 섬서성 일대에 대기근이 들어 수백만 가량의 아사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최근 시안 시는 개방 도시로 지정되어, 유라시아 대륙의 연결통로이자 중국이 추진하는 서부대개발의 교통요지로서 중국 서부 최대의 도시가 되고 있다.[23] 개혁 개방 이전에도 시안은 중국 경제의 중요한 지위를 차지해 왔지만, 최근에는 경제발전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그 원인으로는 성 안의 공업에서 중공업의 차지하는 비율이 매우 크고, 국방 산업 등의 특수 공업을 기반으로, 경공업이나 기술 개발력을 중시한 공업 정책의 결과이며, 최근에는 하이테크 신기술 산업 개발구, 경제 기술 개발구, 곡강 신구, 생태구, 염양국가 항공 하이테크 기술 산업 기지의 「4구 일기지」를 설치해, 첨단기술의 개발과 산업화를 추진하는 경제정책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위기와 중국 정부의 투자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한국의 삼성 반도체 메모리 공장이 설립되었으며, 2017년 THAAD의 역풍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성장을 이루어내고 있다. 다만 이러한 중공업 위주의 개발 정책과 내륙 지형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도시의 환경은 좋지 못한 편이다. 미세먼지와 매연이 심하며 교통 체증은 점점 심각해지고 있는 추세이다. 게다가 아직 개발되지 않은 지역도 많고, 국제적인 관광 도시치고는 낙후된 지역이 많아 주의가 필요하다. 치안은 좋은 편인데, 대부분의 중국 지역이 그렇지만 관광지나 호텔 등을 제외하고는 영어 사용도 보편적이지 않기 때문에 출장 및 여행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
시안의 현대적인 면모를 보고 싶으면 동남부의 취장(曲江) 지역에 가 보는 것이 좋다. 부자 동네로 유명한 곳인데, 작년에 시안 지하철 4호선 대당부용원 역이 들어서면서 접근성이 좋아졌다. 당(唐) 시대의 영광을 재현한 대당부용원(带汤芙蓉园)이 단연 대표적인 볼거리이며, 주변 환경도 매우 세련되고 현대적이다. 거대한 취장서점(曲江书城)과 그 주변의 호수공원들, 대로를 거닐다 보면 시안이 중국 역사의 상징일 뿐 아니라 중국의 신1선도시(新一線城市)로서 무섭게 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5. 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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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안의 대표적인 관광지는 경악스러울 정도로 높고 넓은 시안 벽(城壁)이다.[24] 성벽 동서남북으로 4개의 문(장악문, 안정문, 영녕문, 안원문)이 각 3중으로 설치되어 있으며, 지금도 시안은 성벽 안쪽이 중심가이다. 현재의 성벽은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물론 삼국지 시절 그대로 남아있는 건 아니고, 명나라 때의 성벽이 지금까지 유지·보수되며 남아있는 것.[25]
성벽은 대단히 높고 두꺼워 둘레가 14km에 달하며, 성벽 안에 직접 올라가 주위를 둘러보는 것도 가능하다. 위에서 아예 자전거나 전동차를 대여하기도 한다.[26] 1993년부터 매년 11월에는 성벽 위에서 성벽국제마라톤대회도 열린다. 일부 성문 아래에는 차도가 설치돼 있어 실제 통행로로 이용된다.[27][28] 시안 성벽을 기준으로 도시를 관찰하다 보면, 성벽 안쪽에는 오래된 저층 건물이 많고 성벽 바깥쪽에만 고층 건물들이 늘어서 있음을 알 수 있다.
성 북쪽에는 당나라시기 궁궐인 대명궁(大明宫)의 터가 있는데, 현재는 초석만 닦아놓은 상황이다. 장기적으로는 복원계획이 있으나 아직까지 복원된 건물은 없다. 그러나 대명궁의 정문인 단봉문(丹凤门)의 터에는 단봉문 형태의 철골구조물 박물관이 설치되어있으며, 궁 안에는 대명궁전기(大明宫传奇)라는 단편영화상영관이 있어서 역사에 관심이 크게 없더라도 나름 즐길 거리는 많다.
또한 종루(钟楼)와 고루(鼓楼)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시안의 종루는 중국에 있는 종루들 가운데 규모가 큰 축에 속하며, 보존도 잘 된 것으로 유명하다. 안에 직접 입장할 수도 있으며 1인당 35위안, 고루 관람까지 포함할 시 50위안에 표를 판다. 고루는 바로 근처에 있지 않고 5~10분 걸어가야 한다. 둘 다 정해진 시간에 작은 공연을 하는데 퀄리티는 그리 높지 않다. 종루와 고루 모두 조명이 설치돼 있어, 밤에 가 보면 우리나라의 궁궐과는 다른 색채로 빛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코앞에 지하철역이 설치돼 있고, 시안의 핵심 도심이기 때문에 먹을거리도 많으므로 둘러볼 만하다.
회족거리(회민가, 回民街)도 유명하다. 소수 무슬림 민족인 회족이 모여사는 곳에 상권이 형성되었으며, 시안 내 가장 유명한 미식 거리라고 볼 수 있다. 양꼬치, 파오모(泡馍), 감과자(柿子饼) 등 정말 많은 종류의 거리 음식을 맛볼 수 있으며 공예품도 제법 볼 만하다. 다만 관광객이 정말 많고 오토바이도 많이 돌아다니므로 소매치기를 조심할 필요가 있다.
동남부에 있는 대자은사(大慈恩寺)와 해당 사찰의 탑인 대연탑(大雁塔)도 시안이 자랑하는 볼거리다. 절 자체의 입장료는 40위안이며, 탑은 무료였으나 최근에는 25위안의 입장료를 받는다. 코앞에 지하철역이 있어 환승으로도 갈 수 있다. 매일 저녁 9시에 분수 쇼가 열리는데, 내레이션을 비롯해 쇼의 질이 매우 높지는 않으나 한 번쯤 볼 만하다. 대연탑 근처에는 산시역사박물관(陕西历史博物馆)도 있다. 이 박물관은 중국에서 가장 큰 역사 박물관 중 하나인데, 현재 전시중인 소장품보다 그냥 보관중인 것들이 훨씬 많다고 하며 현재 더 넓은 부지로 이전하는 것을 고려 중이라고 한다. 매일 제한 인원을 수용하여 이른 아침에 가도 긴 줄이 늘어선 것을 볼 수 있지만, 외국인은 이와 관계없이 언제든 입장할 수 있으므로 줄을 설 필요없이 매표소로 직행하면 된다.
또한 동쪽 근교에는 그 유명한 진시황릉(병마용), 화청지 등이 자리하고 있어, 역덕후라면 한 번쯤 방문할 가치가 있다. 단, 기차역 근처의 버스터미널에서 전용 버스를 타고 1시간 반 이상 나가야만 볼 수 있다.[29] 다행히도 진시황릉과 병마용 , 화청지가 한 곳에 모여있다는 것이 위안거리. 그러나 시안 지하철의 9호선이 해당 구간을 연결하면서 이젠 지하철로도 가는것이 가능해졌다.
북쪽 근교에는 황제릉들이 존재하는데, 이들 중에서 한 경제의 능인 양릉(阳陵)은 현대박물관으로 개조되어 현재 4A급여유경구로 등록되어있으며, 그 외에도 무제의 능인 무릉(茂陵)역시 그 근처에 박물관을 건설해 놓은 상태이다. 또한 공항선 친궁(秦宫)역 인근에는 함양궁 터와 박물관이 위치해있으며, 공항선 바이치자이(摆旗寨)역 근처에는 창유와인박물관(张裕瑞那城堡酒庄)도 있는데 와이너리 자체가 상당히 고풍적인 유럽 성 형태로 꾸며져있어 가 보면 상당히 아름답다.

6. 여담


역사적 가치가 큰 도시이기 때문에, 로마카이로, 교토처럼 지하철도 마음대로 못 넣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실제로 시안 지하철의 건설계획 자체는 1970년대부터 있었지만 비용 문제 때문에 오랜 기간 동안 검토만 되다가, 본격적으로 착공에 들어간 것은 2006년부터다. 2011년 9월이 되어서야 첫 지하철인 2호선의 1단계 노선이 개통되었으니 틀린 이야기도 아니다. 다만 현재는 4호선까지 개통된 데다 추가로 5개 호선이 건설 중이며, 무려 16호선의 건설까지 계획 단계에 있다. 적어도 로마처럼 지하철 노선을 대대적으로 착공 못 하는 사태까지는 피했다(...)
한국에서 가는 관광객도 많은 편이라 교통편도 괜찮다. 북서쪽의 이웃 도시 셴양에 공항이 있고, 인천국제공항에서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이 각각 매일 1회씩 직항으로 왕복운항한다. 소요시간은 2시간 50분~3시간 10분. 중국동방항공중국국제항공, 산동항공 등도 왕복운항하는데, 직항이 아니라 경유라서 시간이 오래 걸린다. 또한 LCC 중 에어부산이 부산-시안 노선을 운행하고 있다.
2019년 6월 LCC 업계에 중국 노선이 신규 개방되면서, 제주항공이 제주-시안 노선을 배분받는데 성공했다.
시안의 미앙궁 터, 대명궁, 대안탑, 소안탑, 흥교사가 세계문화유산실크로드: 창안-톈산 회랑 도로망의 일부로 등재되어 있다.
시안 지역에서 많이 소비되는 빙펑(冰峰)이란 오렌지맛의 지역대표 음료수가 있다. 판매량에 있어 콜라, 환타 등 다른 탄산음료와 비교가 무색할 정도 압도적이다. 현지의 대표적인 간식거리가 중국식 햄버거인 러우자모와 굵은 당면 무침인 량피, 그리고 빙펑을 세트처럼 먹는 것이다.[30]

7. 삼국지 시리즈에서의 장안


시리즈 대대로 초반의 동탁 근거지로 나오며 작중 몇손가락안에 드는 대도시에 속한다.
삼국지 3에서는 3중 성벽으로 돼있고 한 가운데의 내성은 너비가 좁아 수비하기에 적합하다. 공격하는 입장에서는 2단의 성벽을 뚫고 들어가는 것부터가 일이다.
삼국지 5에서는 외곽에 외성 2개가 있고 본성은 서쪽과 북쪽에 관문이 있어서 한중과 안정, 하변, 홍농에서 침공해 오기 상당히 까다롭다. 반대로 완성에서는 수비가 허약한 본성의 남동쪽에서 공격할 수 있는데 수비 측이 이를 역이용하여 본성을 포기하고 관문만 막은 채 외성을 본거지로 삼고 있으면 이건 이것대로 난관이다. 한 가지 재밌는 점은 한중에서 공격할 때 완성에서 공격하는 진입로로 2개 부대를 별동대처럼 투입할 수 있는데 이것이 자오곡을 통해 기습한 부대가 아닐까라는 추측도 있다. 완성에서의 진입로면 상용 쪽 진입로인가 싶기도 하지만.
삼국지 11에서 최대 규모의 도시이다. 공터가 22개인 도시는 낙양, 장안 둘뿐인데, 낙양은 관문, 항구가 3개인 반면, 장안은 5개를 가지고 있어서 총 금/군량의 수입은 장안쪽이 더 많다. 하지만 공터의 배치는 낙양에 비해서 살짝 비효율적이고, 3개의 관문 중 함곡관은 낙양, 무관은 완에 가깝다. 그래서 실질적인 갯수는 3개라고 보아도 될 것 같다.
영안, 상용과 함께 맵의 서부의 관문 역할을 하는 도시로, 동관을 통한 수비가 매우 용이하다. 반면 천수, 한중에서의 공격은 넓은 필드때문에 수비가 쉽지 않고[31] 장안에서는 무관을 얻을 수가 없어서, 수비에 있어서는 낙양보다 확실히 불리한 면이 있다. 원래대로라면 한중 방면은 악명 놓은 진령산맥으로 거의 막히다시피 해야 되고, 천수 방면 역시 녹록치 않으며, 무위 방면은 소관이 막고 있어야 하지만, 역대 삼국지 시리즈 중에서 소관을 등장시킨 시리즈는 없다(....)
진삼국무쌍 시리즈에서는 주로 여포가 동탁을 치는 맵으로 등장한다. 진삼국무쌍 7에서는 촉의 IF 시나리오로 자오곡 계책으로 장안을 급습하거나 맹장전에서는 여포군 IF 시나리오의 최종 무대로 등장하여 기존 장안이 확대되어 외성과 시가지, 내성으로 나뉘어져 최종 무대다운 웅장함을 드러냈다.


[1] 북을 쳐서 시간을 알리는 곳. 서울로 치면 종각과 같은 시설이다.[2] 일본의 옛 수도인 교토의 별칭은 '라쿠요(낙양, 洛陽)'인데 이와 대비된다.[3] 소수설로 (城)의 순우리말인 '재' 또는 '잣'의 '안쪽'이라 하여 '재안' 또는 '잣안'이라 하던 것에서 변했다는 설도 있다.[4] 중화민국 시절에 시안이 현으로 내려오면서 잠시 동급으로 내려온 적이 있다.[5] 우리가 익숙한 삼국지 시대에는 주, 오늘날에는 성이라고 부르는 등급.[6] 이 셋을 삼보라고 통칭한다. 삼보의 난에서 나오는 그 삼보가 맞다. 그리고 이 세 관원이 다스리는 지역도 삼보라고 칭해지게 되었다.[7] 나머지 2개의 국가 중 후한(後漢)은 낙양을 기반으로 하였고 진(晉)의 전신인 위(魏)는 허창을 기반으로 하였다.[8] 여담으로 함곡관은 두 개가 있다. 하나는 흔히 알고 있는 함곡관으로 시안과 뤄양의 사이에 있으며(후한-삼국시대의 홍농에 있다. 지금 지명으로는 링바오 시의 북쪽.), 사실은 이게 관중과 중원을 구분하는 경계로 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후한시대 낙양이 수도가 되면서 수도 방위용으로 옛 함곡관과 낙양 사이에 함곡관을 새로 만든 것이다.[9] 현재 시안의 남서쪽에 있는 호현이라는 곳이 호경이 있던 곳이다.[10] 전국시대 중기 때까지는 옹(雍)이었으나, 효공 때 천도했다.[11] 위수 건너편 북쪽에 있었으며, 지금도 그 자리에 셴양이 있다.(함양을 중국어로 읽으면 셴양이 된다) 정확히는 진나라 당시보다 서쪽에 있다. 시안 기준으로는 북서쪽. 아방궁은 현재의 서안과 호경 사이쯤에 있었다.[12] 위성 지도로 보면 회색빛인 시안 시가지와 달리 묘하게 방형의 녹색빛이 도는 곳이 있는데, 한대의 장안성 모양과 일치한다.[13] 그래서 인구 자체는 낙양이 훨씬 많았다. 장안이 속한 경조윤의 인구는 대략 70만 명 정도였는데(이 중에서 장안의 인구는 25만 명가량), 낙양이 속한 하남군의 인구는 170만을 훌쩍 넘는다.[14] 후한 이후 위, 서진, 호한, 전조, 후조, 전진, 후진, 동진, 호하, 북위, 서위, 북주, 수, 당의 정권이 거쳐갔으며 이중 서진(민제때 임시), 전조, 전진, 후진, 서위, 북주, 수, 당의 수도였다.[15] 서북쪽에 있는 시가지는 한대의 장안성이다.[16] 각 방은 내부에 난 십자형 도로에 의해 네 구역으로 구획되었다.[17] 당나라 중기부터 통금제도가 해이해지기 시작해 후기로 가면 유명무실화되었다. 다음 왕조인 송나라는 수도 개봉부에 통금을 공식적으로 두지 않아 불야성을 이루었다.[18] 얼마나 폭이 넓은지 비교하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폭이 넓은 도로인 서울특별시 세종대로의 폭이 100m이다.[19] 주작대로는 당대 중국의 특징적 도로체계로 보기도 한다. 일례로 발해 상경에 있는 주작대로가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인가를 묻는 선택지가 한국사 관련 시험에서 자주 등장한다.[20] 명나라 2대 황제 건문제의 아버지.[21] 삼국지를 보면 촉한과 조위가 이 지역에 풍부하게 자라는 보리를 두고 싸우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바로 이런 배경이 있는 것이다.[22] 낙양도 장안보다는 중원 및 해안에서 좀 더 가깝긴 하지만 입지가 좁아 이전 시대에 비해 늘어난 인구를 부양하기에 역부족인 것은 마찬가지였다.[23] 이에 대해서는 일대일로 문서를 참조하면 더 자세히 알 수 있다.[24] 장안은 예로부터 우주방어로 악명이 높았다.[25] 이것은 문화대혁명기간 동안 성이 박살난 베이징 시와 매우 대조적이다. 베이징 성은 문화대혁명 때 철거되었고, 현재는 그 안에 베이징 지하철 2호선을 넣었다.[26] 자전거 대여 시 100분 안에 반납하면 추가요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 자전거를 빌릴 때 보증금과 대여료를 낸다.[27] 신서유기에 잘 나온다.[28] 성벽 내 각 방향의 대로로 들어가는 문들은 차량이 통과한다. 당연히 작은 문은 사람들이 통과한다.[29] 기차역 근처에서 불법으로 호객하는 버스가 있지만 가격이 매우 비싸므로, 버스터미널에 가는 것이 좋다. 기차역 뒤쪽으로 조금만 돌아가면 된다. 단 교통카드인 창안퉁카(长安通卡)를 받지 않는 경우가 많으므로 주의하자. 기차역 출발 기준 편도 소요시간 약 2시간, 1인당 요금 10위안 이하로 갈 수 있다.[30] 빙펑 외에도 베이징의 베이빙양처럼 중국 내에는 각 지역에서 생산과 소비가 되는 로컬 음료수가 여럿 있다.[31] 한중의 관문인 양평관에서 장안의 내정시설까지의 거리가 굉장히 가깝다. 바보CPU에게 위임을 시켜놓으면 그냥 다 파괴된다고 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