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노족 신라왕족설

 


1. 소개
2. 신라 기록에 언급된 김일제, 그리고 무덤의 연관성?
2.1. 반론
2.2. 고고학적 반론
3. 결론
4. 여담


1. 소개


흉노의 세력이 쇠퇴하면서 일부 흉노인들이 신라로 내려가 씨 왕조의 시조가 되었다는 주장.

2. 신라 기록에 언급된 김일제, 그리고 무덤의 연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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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득공의 《고운당필기》에서 언급된 김일제
우선 가장 많이 언급 되는 인물이 바로 전한(前漢) 때의 흉노 왕자 출신인 김일제다.

'''투후(秺侯)는 제천(祭天)의 후손'''으로 7대를 전하여 (3자불명) 하였다. 15대조 성한왕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내리고 그 영(靈)이 선악(仙岳)에서 나와(후략)

'''『문무왕릉비』'''


"태상천자(太上天子)께서 나라를 태평하게 하시고 집안을 열어 드러내셨으니 이름하여 소호씨금천(少昊氏金天)이라 하는데, 이분이 곧 우리가 받은 성씨의 세조(世祖)이시다. 그 후에 유파가 갈라지고 갈래가 나뉘어 번창하고 빛나 온 천하에 만연하니 그 수효가 많고도 많도다. 먼 조상 이름은 '''김일제'''(日磾)시니 흉노 조정에 몸담고 계시다가 서한에 귀순하여 무제 아래에서 벼슬하셨다. 명예와 절개를 중히 여겼으므로 그를 발탁해 시중[1]

과 상시[2] 에 임명하고 투정후(투후)에 봉하였다. 이후 7대에 걸쳐 벼슬을 함에 눈부신 활약이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경조군[3]에 기대어 정착하게 되었는데, 이런 일은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다. 견주어 그보다 더 클 수 없는 일을 하면 후에 어진 이가 나타난다는 말을 여기서 징험할 수 있다. 한나라가 덕을 드러내 보이지 않고 난리가 나서 괴로움을 겪게 되자, 곡식을 싸들고 나라를 떠나 난을 피해 멀리까지 이르렀다. 그런 까닭에 우리 집안은 멀리 떨어진 요동(遼東)에 숨어살게 되었다.

'''『대당고김씨부인묘명』''' [4]

흉노족 신라왕족설이 생겨나게 된 근원엔 신라인이 직접 남긴 기록인 문무왕릉비와 대당고부인묘지명의 2개 비문에 신라 김씨 왕족의 시조 중 하나로 투후 김일제가 언급되고 있다는 점이다. '투후'라는 직책은 오직 김일제만이 받았으므로 투후를 말하면 바로 김일제를 지칭하는 것이 된다. 정리하자면, 투후 김일제는 흉노에 있다가 한무제 때 한나라에 귀순하여 재상직을 얻은 유명인이고, 그의 후손들은 당시 한나라 수도 장안(長安)에 살다가 전한이 멸망하는 시기에 요동으로 피난왔다는 것.
적어도 '''신라에 사는 김씨들은 자신의 조상을 김일제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로 인해 투후 김일제의 후손이 신라로 넘어와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주장이 생기게 되었다. 참고로 김일제는 조선시대 경주 김씨였던 추사 김정희가 쓴 책에서도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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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에 싣고 다니는 청동솥
한편, 신라 초기에 발견된 페르시아황금보검과 마구를 비롯한 과 관련된 유적들은, 흉노족들이 서방과 오가면서 교류했다는 증거라고 한다. 신라 마립간 세력의 대표적인 묘제로 손꼽히는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 역시 스키타이쿠르간 등 북방 민족의 묘제와 비슷한 점이 근거로 제시된다.
시기적으로 최초의 김씨 등장은 1세기경, 흉노의 흔적이라고 주장하는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의 등장은 4세기경으로 맞지 않다는 말이 있지만, 신라의 첫 김씨 왕 미추왕의 재위기간은 3세기 말(262~284)이다. 당연히 김씨의 왕릉은 4세기경에 등장할 수밖에 없으므로 이것은 반박 근거로는 불충분하다.

2.1. 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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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무지덧널무덤
일단 '''학계에서 신라 흉노왕족설은 정설은 아니다.''' 증명할 수 없다고 하는 주장도 있으나 하지만 신라의 무덤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그야말로 북방 기마민족들의 유물이긴 한 것이다. 일단 진한 변한에서 수장을 "" "거서간"이라고 불렀으며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유물들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확실히 김일제의 후손이라는 것이 증명이 되는가에는 의문점이 있다. 흉노족이 김일제만 있는 것은 아니니 김일제의 직계 후손은 아니지만 사로국 초기 무덤에서 발견되는 유물들이 워낙에도 흉노의 유물과 일치하여 관련이 있다는 주장도 있는 것이다.
쿠르간과 신라의 무덤은 등장은 시기적으로 차이가 크며[5] 또한 돌무지덧널무덤에 부장된 유물은 스키타이뿐만 아니라 백제, 가야계와 비슷한 유물이 다수 발견되며, 오히려 백제나 가야계의 유물이 스키타이의 유물과 비슷한 면모도 보이는 등 이렇게 따지면 '''삼한 자체가 스키타이와 관련성이 보인다는 식의 주장도 가능'''하다.
그나마 증명 가능한 학설로는 '''북방민족계통설'''인데, 이것 역시 '''흉노에 한정짓는 주장이 아니다'''. 분명한 것은 김씨는 석씨와 함께 건국세력(6부, 박씨)이 아닌 초창기에 이주해온 세력이라고 추정하는 주장도 있다는 것인데, 이에 비춰보면 일단 신라 건국자는 박혁거세[6]이지 석탈해 또는 김알지가 아니다. 즉, 어디에선가 이주해 왔다고 볼 수도 있는데 김씨는 북방 기마민족계통으로 추정되고,[7] 석씨는 고고학적으론 각배등의 북방 기마민족계통 유물로 보아 기마민족 세력이지만 문헌의 전설로는 해상세력으로도 추정된다.
당시 신라 김씨가 김일제를 시조로 받들었기 때문에 흉노족 어쩌고 하지만, 당시 김일제는 이민족으로 중국에서 출세한 입지전적인 위인으로 중국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이미 유명한 대상이었다. 즉, 원래 숭조사업을 벌일 땐 자신의 성씨와 행색과 비슷한 출신지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로 섬기는 게 일반적이라는 주장도 있다. 또 사서에 남은 기록으로는 김일제의 직계 후손이 김알지라고 단정짓지도 못한다. 김일제를 시조로 들고 있는 비문에 대해서도 역사적으로 숭조사업은 매우 흔하게 일어났기 때문에[8] 김일제를 시조로 든 것은 승조사업이라고 주장한다. 김일제는 당시 백제 의자왕을 배신한 예식진(禰寔進)의 묘에서도 언급되듯이 중국 사서에서는 남흉노족으로서 유명한 인물이였다. 당시 중국에서는 한족과 이민족을 같은 조상으로 동일시하는 경향이 많았던 것도 있다. 우연히 성씨도 김씨인 덕분에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소호금천씨를 시조로 하는 관념과 일치한다는 주장도 있다. 중국에서는 김일제는 소호 금천(金天)의 후손으로 기록한다.
소호 금천씨를 흉노 사람인 김일제의 조상으로 사서에 쓰는 이유도 흉노, 선비족, 강족, 저족, 갈족 등 이민족들이 중국 한족들을 지배했을 때 한족들과 이민족은 각기 민족고취와 중국지배와 융화를 위하여 이민족도 모두 중국인의 조상이 있는 것으로 썼기 때문이다. 또한 김씨 부인이 중국에 거주했을 때 중국인들이 같은 중국인이라는 점으로 우대하여 신라 김씨와 흉노 김씨의 비슷한 점을 인정하고 묘비에 강조하여 그리 적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는 것이다. 확실히 고조선흉노와 가장 강력한 동맹이었고 중국인이 쓴 사서에는 고조선을 "흉노의 왼팔(지리적으로 왼쪽에 위치)을 잘라냈다"라고 썼을 정도이니 말이다.
즉, 신라 왕실에서 당나라와 친분 관계도 염두에 두면서 적절한 숭조 대상을 물색하다가 '''김씨를 연상시키는 김일제의 조상이라고 꾸며낸 것'''이 학계에서 꽤 주장되는 설이다.[9] 여기서의 키포인트는 흉노가 아니라 중국이다. 당대에 모화사상으로 인해 이민족계 중국 출신에서 중국인을 주체로 하여 숭조사상으로 떠받들은 것이, 민족주의가 발양된 현대에 흉노 같은 북방민족 계열로 관심이 옮겨져 북방민족과 연결고리를 강조하게 된 묘한 상황 비스무리한 것.

2.2. 고고학적 반론


여기서 한번 정리하고 넘어갈 부분은 흉노족 신라왕족설은 한반도계 지역과 흉노(또는 북방) 지역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다는 견해와는 분명히 다른 내용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흉노가 존재했던 몽골 고원~중앙아시아 지역과 한반도 간의 직간접적 인적, 물적 교류 자체는 활발했다.[10] 아래의 반박은 흉노족 신라왕족설 그 자체에 대해서만 논의한다. 첨언하자면 한반도와 북방의 관계는 복잡다변하게 전개된 것으로 많은 물적, 인적 교류의 흔적을 바탕으로 어떠한 관계였는 지에 대한 연구가 학계에서 이루어질 뿐이다.
문헌적 기록이야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에 있는 것이 사실상 가장 주요한 근거인데, 이 마저도 소호금천씨의 김일제와 흉노의 다른 김일제를 혼동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으며 그것을 문무대왕릉비와 엮은 것 말고는 근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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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복(銅鍑)이 출토된 대성동 29호.[11]
고고학적으로도 흉노족 신라왕족설이라는 견해는 조금도 인정받고 있지 않다. 그나마 관련이 있는 내용이라면 대성동 고분군이 처음 발굴되던 시점에 위에서도 나와있는 동복이 대성동 29호분에서 출토되고 북방계의 마구류들이 출토되면서 "기마민족 남하설"이 대두되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이는 당시 발굴 자료가 많이 누적되지 않았던 시절의 이야기고 동복이나 북방계 마구류는 가야나 신라 말고도 백제, 마한 등지에서도 널리 확인되면서 자연스럽게 "기마민족 남하설"은 사그러 들었으며 그나마 북방과 한반도는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고 이해하는 정도로 남아 있다. 즉 위에서 흉노의 유물들이라고 말한 출토품들의 의미는 '''"아! 우리는 흉노다! 이렇게 된 이상 흉노 아이템을 묻는다!"'''의 근거가 아니다.
당시 동복이나 북방계 아이템들을 부장품으로 넣은 갖춤새 등은 교류의 산물 그 자체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흉노족 신라왕족설 본 문서에서 보면 동복이 출토된 대성동 고분군에 가야 유물은 하나~도 없고 흉노 유물 일색으로 나온 것처럼 느껴질 수 있겠지만 당연히 가야계 유물[12]이 훨씬 더 많고 일부만 그런 외래유물이 출토된 것이다. 그렇다고 외래유물이 동복 하나인 것도 당연히 아니다. 그 밖에도 왜계 토기, 청동기를 비롯한 각종 왜계유물, 동경을 비롯한 중원계 유물 등 동북아시아라는 바운더리가 형성되던 시기였다. 그런 맥락 중의 하나로 북방계 유물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 더 짚고 넘어가야할 것이, 다소 고고학적 이야기지만 특정한 아이덴티티를 갖는 유물의 존재가 그 고분의 성격 전체를 설명하지 않는다. 가령 동복보다 많이 나온 중원계 동경(銅鏡)은 생각보다 각지의 많은 목관 · 목곽묘에서 출토되었는데 그렇다면 이 무덤들은 중국인의 무덤인가?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당연-히 단순히 "네. 중국인이네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무덤이란 망자와 생자 간의 이별의 산물로써 각양각색의 각 집단, 민족, 정치체, 국가 마다마다의 제사나 의례 방식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묻히는 피장자의 신분을 나타내는 이이템 또한 당연히 의례 과정 중에서 부장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유의미한 외래 위세품 하나에 해당하는 것이고 무덤에 부장되는 유물 전체(이하 유물 갖춤새라고 표현한다.)들은 의례행위와 관련이 있으며, 그러한 갖춤새들이 특정한 양식에 수렴할때 비로소 "ㅇㅇ국가스러운 방식의 의례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신라나 가야가 아닌 흉노의 무덤에 부장되는 유물들을 살펴보는 것이 더 직접적일 것이다. 흉노를 비롯한 북방계 민족들은 중세까지도 부족사회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도 그렇듯이 해당 민족, 정치체, 집단 등을 표상하는 아이템들을 굉장히 많이 부장하였다. 바로 동물문 장식으로 설명되는 것들이 대표적인 사례인데 우리가 흔히 흉노의 활동 범위라고 알고 있는 그 지역의 흉노 유적들을 살펴보면 그러한 동물문 장식이 시문된 금공유물들이 굉장히 많다. 특히나 아무 동물문이 아니라 사슴, 표범이 가장 대표적인 상징으로써 그러한 문양들을 일정한 도안 속에서 오래도록 사용하였다.[13] 흉노 항목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특유의 입체적인 디자인으로 정형화된 도안의 금공유물이 많다. 특히 사슴을 물어뜯는 두마리의 표범이라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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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흉노족 아이덴티티의 표상인 동물문이 시문된 각종 금공유물.
무덤의 매장의례 자체에서도 북방지역에서는 동물의 뼈를 피장자의 머리맡에 뭍거나 피장자의 바로 인근에 동물의 뼈를 묻는(원래는 살이 붙어있을 수도 있겠지만) 행위가 주로 관찰된다.[14]
하지만 '''신라, 가야의 왕묘에서 흉노의 상징적 유물이나 흉노식 의례 행위의 흔적이 확인된 사례가 없다.'''[15]그렇기 때문에 동복 단 하나의 존재만으로 흉노족과 "민족", "왕족" 등을 표제어로 삼는 가설은 전혀 입론의 여지가 없다.
위의 여하한 이유 때문에 동복은 당시 형성된 교류 네트워크 망에서 수장층의 전유물로써 상징적 요소로써 매납된 것이라고 볼 뿐이다.
다음으로 신라의 적석목곽묘에 대해서 살펴보면 기원에 대해서 다양한 견해가 있는 것이 사실이며 그 중의 하나로 북방 기원설이 있다. 하도 흉노 흉노해서 흉노의 무덤 양식은 하나인줄 알겠지만 이 역시 지역마다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 카자흐스탄의 이식 쿠르간이 주된 단골손님으로 거론되곤 하지만 이식 쿠르간 무덤은 BC 5~4세기의 적석목곽묘다. 실제로 생긴것도 비슷하긴 하지만 신라의 적석목곽묘는 기원후 4세기 후반이 돼서야 형성되기 시작하는 것이며 그마저도 재지적인 흔적들이 무수히 관찰되는 형태이다. 굳이 닮았기 때문에 동북지역도 아니고 중국 대륙도 아니고 그 넘어의 카자흐스탄까지 찾는 것은 지나치게 비약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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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린 톨고이 투브 아이막 고분[16]
황남대총의 입단면도.[17]
▲ 흉노고분과 적석목곽묘의 비교. 봉분의 유무부터 지상식, 지하식의 차이가 확연히 다르다. 돌을 사용한점, 목곽묘[18]라는 점만이 닮았을 뿐이다.
그렇다면 내몽골이나 몽골 일대의 유적이 현실적으로 가까우니 비교가 될 수 있겠지만 무덤의 형태는 또 전혀 다르다. 기원전후한 시점, BC 1세기부터 AD 1세기의 흉노 무덤은 사실상 돌 몇개 깔아놓는 정도의 봉분을 갖는 것이 전부[19]이며 봉토를 크게 쌓는 적석목곽묘 형태와는 전혀 다르다. 매장 주체부를 보더라도 적석목곽묘는 경주에 있는 초대형 왕묘들은 왠만하면 지상식[20]이고 반면에 내몽골, 몽골 등지의 흉노 무덤들은 지하식, 그것도 사다리 없으면 빠졌다간 못올라오는 정도의 깊이를 갖는 형태로 완전 판이하다. 따라서 한반도에서 그나마 지근거리의 내몽고, 몽고 일대의 흉노는 적석목곽묘와 관련이 없다.
즉 시종일관 적석목곽묘와 관련된 유적으로 이식 쿠르간 무덤만 이야기하는 것은 인근에서는 찾을 수 없기 떄문이다. 만약 정말 이식 쿠르간이 적석목곽묘와 직접적 관련이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카자흐스탄부터 한반도까지 친히 왔다면 무덤 축조 기술자부터 데려와야 하는 집단적 이동인데 집단적 이동에는 분명 이동의 준거가 남기 마련이다. 반면에 이동한 민족의 사례로 대표적인 것이 바로 기원전 4세기 언저리 쯤 바이칼 호수에서 발원한 흉노족이며 그들은 실제로 바이칼 호 인근에서부터 서남쪽 방향으로 남하하는 유적들이 시간순으로 어느 정도 확인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위의 가정은 실질적인 근거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바 적석목곽묘의 기원론을 따짐에 있어서도 북방기원론은 그냥 이러한 썰이 있는데 너무 닮아서 신기하고 관련성이 있으니 차차 찾아보자 정도, 또는 북방과 몇가지 요소요소에서 관련이 있으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도지 이것이 "크! 우리는 흉-노!"는 결코 아니다.
그리고 계림로 14호 감옥보검보고 카자흐스탄과 관련성을 바탕으로 흉노족 신라왕족설의 근거가되는 마냥 서술된 부분이 있는데 이 또한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냥 실크로드의 연장선에 한반도가 있을 따름이지 그것이 어떻게 신라만 실크로드 교역품이 왔으니 그들이 직접온 것이다라는 근거가 될 수 있겠는가?
심지어 계림로 감옥보검은 왕릉에서 출토된 것도 아니고 짬찌무덤에서 출토된 것으로 흉노족 신라왕족설의 근거로는 매우 빈약하다. 차라리 그 썰을 풀기 위한 근거로 삼을 것이라면 황남대총을 비롯한 대릉원의 왕릉에서 출토된 로만글라스와 사산글라스 등의 유리 유물들을 사례로 삼는 것이 더 좋다. 그러한 로만글라스, 사산글라스들의 주요 생산지, 대량 출토지를 따지면 중국도 바로 중동 일대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괘릉이나 흥덕왕릉의 석인상을 보면 호인상이라고 부르는 즉 소그드인(이란계 교역민족) 정도로 추정되는 서역의 인물들도 있다. 카자흐스탄 일대와 결부지을 것이라면 이들 또한 사례로 들지 아니할 수 없다. 물론 당연히 근거로 삼는다한들 400년 넘게 차이나는 시간적 간극을 극복하지는 못하는 근본적 한계를 갖는다.
결론적으로 흉노족 신라왕족설은 지나치게 시공간을 초월했다는 점 또한 문제가 크다. 적석목곽묘나 동복은 모두 AD 4세기의 일이며, 특히 동복같은 경우에는 수입지나 교역 대상이 되는 지점으로는 같은 4세기대의 유적인 중국 요령성 북표현 라마동 고분군으로 찾는다. 즉 흉노가 아닌 선비족의 삼연계 유물로 보는 것이다. 이식쿠르간은 상술했다시피 기원전 5세기의 유적이다.

3. 결론


확실한 사실은 현재까지 정설은 없다. 김일제는 문무왕릉비에 기록된 문제의 인물이다. 김알지가 신라 김씨의 시조로 알고 있는 역사상식과 전혀 달리, 김씨 흉노설은 1961년에 문무왕릉비의 비석 하단이 발견되고 잇따라 2009년에는 비석 상단마저 발견되면서부터 의혹의 중심이 되어왔다. 여러가지 설이 많긴 하지만 견해는 대체로 둘로 나누어진다. 한쪽은 김일제가 한무제 시기 포로로 잡혀온 흉노 휴저왕의 아들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신라의 김씨들이 흉노족의 후예들이라고 보는 견해다. 다른 한쪽에서는 비문의 내용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김씨왕족들이 자신들의 선조의 권위를 과장하기 위해 내세운 허구적 조상이라고 본다. 두 견해 사이에 사실 접점이 없어 한국사학계 내에서도 서로 토론이 잘 진행되지 않고 있다.[21]
고고학적으로도 한반도의 유물들을 살펴보면 중원문화의 영향만큼이나 북방계 문화 요소가 상당히 많이 관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라 금관의 디자인적 요소도 북방과 관련이 있는 것이고, 특히 보요부 장식들[22] 또한 계통을 따져보면 북방에 있다. 말고도 한반도 전체가 중원, 북방과 마주하면서 기마문화가 형성되는데 이 영향으로 처음에는 중원계보다도 북방계 마구류들의 비중이 훨씬 더 많다. 6세기까지도 선비족과 비교검토가 가능할 정도의 디자인적 동일성을 보인다. '누금공법'마저도 북방과 관련이 있는 요소다.
그 밖에도 제 가야는 두 말할 것 없고, 고구려부여[23], 심지어는 낙랑의 토착재지인(비 한족)으로 추정되는 무덤들에서도 흉노계 유물 및 북방요소들이 많이 나타난다. 더 나아가면 중국에서도 북방에 인접한 동네의 유적들에서는 북방계 유물의 출토량이 굉장히 많다.
하지만 이런 북방 유목민 문화의 영향이 '흉노'를 직접적으로 지칭하는 증거가 되지 않는다. 북방 유목민의 문화에 영향을 받은 것은 확실하나, 그것만으로는 '흉노'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북방의 민족들이 부여 → 고구려 → 백제 순으로 남하하면서 한반도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이들 북방 문화의 전래는 흉노와는 '직접적'으로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더 확실하게 말하자면, 단순 문화에 영향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흉노 민족이 실제로 대규모 직접 이주를 한 것인 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고고학적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더군다나 김일제에 이르러서는, 흉노를 떠나 한나라에 귀순한지 7대가 넘었는데 한족(漢族)의 문화에 동화되지 않고 7대가 넘게 흉노의 문화를 지켜서 그것을 결국 신라에 전수했다는 것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한나라에 귀순한 상태에서 대대손손 자신들만의 금관을 쓰고 자신들만의 무덤양식을 보존했다는 것인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한나라의 수도 장안(지금의 시안)에서 신라의 무덤양식을 하나라도 찾아볼 수 있어야 되는데, 아직까지 그런 유적이 발견된 적은 단연코 없다.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이런 점을 들어 흉노 신라왕족설은 다만 그 이름(유명세)을 빌려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4. 여담


  • 일본에서는 도쿄대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교수가 기마민족정복왕조설을 주장한 바 있다.[24] 이것은 사로국과 가야 초기의 고고학적 유물들이 북방 기마민족계통의 유물로 나오며 스에키가 일본 북규슈에서부터 발견되기 때문이다. 다만 흉노와의 관련성은 아니고 김해의 대성동고분군에서 발견되는 북방 기마민족계통의 유물들은 흉노보다는 선비족 유물과 유사성이 많다는 것에 착안한 것이다. 그러니 흉노족 개드립에 낚이지 말자.
  • 게다가 이 설 역시 일본 고고학계에서도 설의 표제어마냥 진짜 기마민족의 정복왕조로써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고 현재는 마찬가지로 상호관련성을 주목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 루리웹이나 다음 뉴스, 다음 아고라 같이 몇몇 반보수, 반경상도 성향이 강한 사이트에서도 위 흉노드립을 수입해 가지고 영남(특히 TK) 지역 까기 좋아하는 곳에서도 '신라=흉노, 따라서 신라의 후손들인 경상도인들 역시 한민족이 아니다 배척하자(...)'거나 혹은 '흉쌍도'[25]라고 하는 지역드립으로 귀결되고는 한다. 그런 사이트에서는 그냥 다른 수식어 다 떼고 그냥 흉노라고 부른다. 지역드립이 으레 그렇듯 대부분은 병맛 넘치고 악질적인 헛소리이므로 진지하게 빠져들지 말자.

[1] 侍中: 최고관직인 재상직을 말함.[2] 常侍: 임금에게 충고하는 벼슬로써 정치에 대해 논박하고 왕명과 문서의 출납 등을 담당하였다. 십상시로 유명한 직책이다.[3] 京兆郡: 현 시안시 무공현(武功縣).[4] 원문: 太上天子有國泰宗陽號少昊氏金天卽吾宗受氏世祖厥後派疏枝分有昌有徽蔓衍四天下亦已多已衆遠祖諱日磾 自龍庭歸命西漢仕武帝愼名節陟拜侍中常侍封秺亭侯自秺亭已降七葉軒紱燉煌繇是望係京兆郡史籍敍載 莫之與京必世後仁徵驗斯在及漢不見德亂離瘼矣握粟去國避時屆遠故吾宗違異於遼東[5] 쿠르간은 BC 1세기부터 이미 사라지기 시작한다.[6] 삼국유사 기이편에 나오는 알지거서간(閼智居西干).[7] 여담으로 도깨비가 이 북방기마계 이주민들을 보던 당시 신라 토착민들의 시선을 보여준다고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 원래 한반도 도깨비는 뿔이 달린 형태는 아니고(일제강점기 시절 일본 요괴상이 덧칠된 것), 방망이 들고 다니는 털복숭이 사람처럼 묘사되었다고 하는데, 당시 토착민들 눈엔 철기를 다룰 줄 알던 이주민들이 그야말로 도깨비 방망이를 휘두르는 도깨비처럼 보였을 것이라는 주장. 그리고 철기를 다룰 줄 알던 이주민들이 자신들의 성을 쇠(金)씨라고 칭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8] 신라만 그런 것은 아니고 한국사 안에서 사례를 찾아보면 고려왕건 가문, 궁예, 견훤은 조상이 당숙종 등 중국 황제나 백제 의자왕, 신라 진흥왕이라고 무리수를 둔 전승이 여럿 확인된다. 백제가야도 여러 계통 버전의 시조전승이 동시에 전해지고 있으며, 왕실이 아닌 기타 수많은 집안들의 족보에서도 시조 숭조는 수없이 확인할 수 있다.[9] 이런 식의 숭조사업과 윤색은 그다지 신기할 일도 아니다. 수준이 신화 수준이라서 당연히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일 뿐 주몽, 박혁거세, 단군왕검, 수로왕, 탈해이사금 등의 출생을 보면 다들 이것보다 한 술 더 뜬 모습을 보인다.[10] 조선시대에도 몽골어가 역관이 배울 외국어 과목 중 하나였다. 교류 자체는 항상 있었다.[11] 출토 유물은 더 있으나 특징적인 위세품은 우측 세로 1줄의 것들이 전부다. 보다시피 무수한 가야계 토기와 일반 재지적 위세품을 제외하면 북방과 관련이 있는 것은 동복 하나밖에 없다.[12] 엄밀히 말하면 영남지역 공통양식에서 점차 가야계로 변한다.[13] 흉노부터 시작하여 선비도 말할 것이 없으며, 나중에는 금나라, 원나라에서도 아이덴티티를 표징하는 도안, 이미지로써 사용된다.[14] 한국도 동물 순장 행위는 없는 것은 아니지만 흉노계 무덤에서처럼 빈번하게 관찰되지는 않는다.[15] 북방민족처럼 훼기의례는 고대 한반도 고분에서도 나타나지만 훼기현상 자체가 북방의 전유물이라고까지 할 정도가 아니므로 훼기현상이 있다는 자체만으로 흉노와 직결될 수 없다.[16] 동경은 기원전 2세기 초~1세기 경으로 추정되는 것이며, 아래의 동물뼈는 개의 두개골이다.[17] 5세기 중엽의 대표적인 적석목곽묘다.[18] 그 목곽묘라는 것도 몽골은 중국식 영향이 두드러지고 반면에 한반도 일대는 비교적 자체적 변화를 갖는 다는 점에서도 다르다.[19] 심지어 기원 전후한 시점부터는 약간의 흉노 자체적 전통만을 남겨놓고 한식(漢式) 무덤으로 바뀐다. [20] 단면도 상에서 봤을 때 지표면 위에 자리하고 있어서 지상식이라고 일반적으로 칭한다.[21] 논문: 金日磾 관련 논의의 현 단계와 새로운 이해의 방향/ 정훈식 (경성대학교) / 동양한문학연구 52 권 호 pp.183~206( 23 pages)[22] 딸랑거려서 빛을 반짝반짝 반사하는 효과를 연출할 수 있는 장식부.[23] 부여는 거의 선비족이랑 동일한 물질문화를 영유하는 것으로까지 추정된다. 다만 선비족의 중심지라고 할만한 유적이 대규모 발굴된 적이 없으므로 다소 재론의 여지는 있다. 뿐만아니라 유물의 형태적 요소만으로 민족을 쉽게 정의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현실적으로 부여 유적이 한국에 없는 것 또한 심화연구의 제한점으로 작용하고 있다.[24] 반론 문단에 예시로써 서술된 한국의 기마민족남하설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25] 흉노+(개)쌍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