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형순

 


[image]'''한국의 독립운동가'''[image]
'''문형순'''
'''文亨淳'''
[image]
생몰년도
1897년 ~ 1966년 (향년 69세)
본관
남평 문씨
출생지
평안남도 안주군 대니면 이서리#
(현 평안남도 문덕군 풍년리)
사망지
대한민국 제주도 북제주군 제주도립병원
국적
조선대한제국대한민국
별칭
가명 이도일, 문시영
직업
독립운동가, 경찰공무원
학력
신흥무관학교
정당
조선혁명당(1929년)

"문형순은 배운 게 없어 경찰 법규조차 몰랐다. 그 때 그의 별명이 '문 도깨비'였다. 그 까닭은 그가 초등학교도 나오지 않은 일자무식 때문이라기보다는 당시 경찰 중에서는 군대에 맞설 수 있는 드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문형순씨는 나보다 20살은 위로 당시 이미 50대의 중년이었다. 그는 기운이 장사였고 배짱 있고 남자다운 멋진 사람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물론 제주지구 토벌대사령관이던 송요찬·함병선 연대장 그리고 나 역시 일제 때 모두 일본군이나 그 앞잡이인 만주군에 있었지만 그 때 문형순씨는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이었다. 그런 경력 때문에 군대에서도 문 서장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4.3 사건 당시, 서귀포경찰서장을 역임했던 김호겸의 증언 (1999년 1월 20일)

1. 개요
2. 독립운동
3. 4.3의 광풍 속에서 경찰직무를 수행하다
3.1. 시시하다. 아무 내용도 없다.
3.2. 부당함으로 불이행
3.3. 2005년 공덕비 철거 논란
4. 퇴직 이후의 궁핍한 생활
5. 사후
5.1. 경찰영웅 추서, 그러나 국가유공자 선정은 불발
6. 김경훈 시인의 시 '부당함으로 불이행'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경찰이다.

2. 독립운동


[image]
[image]
문 서장의 독립운동 내력(붉은 네모칸)이 기재된 인사기록
문 서장이 중앙호위대장으로 있었던 국민부 중앙집행위원회의 조직도
1897년 1월 4일, 평안남도 안주군에서 출생하여 1919년 3월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여 만주 등지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했으며, 고려혁명군의 군사교관으로 복무한 후 1929년에 만주 한인사회 준 자치정부인 국민부 중앙호위대장을 역임했으며 조선혁명당 집행위원을 겸임했다. 1935년엔 북지 하북성에서 지하공작대에 복무했으며 1945년 8월까지 화북지역에서 한국 광복군으로 활동하다 8.15 광복 후 귀국하여 경찰계에 투신하였다.

3. 4.3의 광풍 속에서 경찰직무를 수행하다


해방 후 경찰에 투신하여 1947년 5월 경위 계급의 제주경찰감찰청 기동대장으로 발령받아 제주도에 부임하였다. 1948년 겨울 모슬포 지서장으로 부임하기까지 그의 경찰경력은 다음과 같다.
  • 1947. 05. 08. 제주경찰감찰청 경위, 기동대장
  • 1947. 07. 18. 경찰관 교습소 교두 겸임
  • 1947. 10. 03. 제1구경찰서 한림지서장
  • 1947. 12. 04. 제1구경찰서 세화지서장
  • 1948. 05. 11. 조천지서장
  • 1948. 05. 18. 제주감찰청 공안과
  • 1948. 09. 24. 한림지서장
  • 1948. **. **.   모슬포지서장(조재수 지서장 후임, 48. 12. 10. 이전 발령)

3.1. 시시하다. 아무 내용도 없다.


[image]
모슬포 진개동산에 있는 김남원 면장, 조남수 목사, 문형순 서장의 공덕비.
1948년 12월 군경은 대정읍 하모리 좌익총책을 검거해 관련자 백여명의 명단을 압수하여 이들은 처형될 위기에 놓였기에 김남원 면장과 모슬포 교회 조남수 목사는 문형순 서장을 찾아갔다. 그들은 좌익명단에 올려진 100여명의 사람들은 하모리 마을 주민이며 주민들이 죄가 있다면 산사람이 된 가족과 이웃들에게 식량과 의복 등을 전달한 죄밖에 없다며 이들을 자수 시킬테니 선처해달라며 문 서장에게 호소했다. 문 서장은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1백여 명이 경찰서로 가자 그들을 맞이한 사람은 바로 서청 대원들이었다. 총과 죽창으로 마구잡이로 주민들을 죽였던 서청의 극악무도한 행동을 잘 알고 있던 마을 사람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문 서장은 조 목사와 김 단장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마을주민들의 조서를 마을서기에게 쓰도록 했다. 경찰이나 서청대원이 조서를 받는다면 영락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뻔히 알고 있던 그는 재치를 발휘해 마을서기가 자수서를 받도록 한 것이다.[1] 주민들끼리 말을 맞추고 의논해서 아무런 탈이 없도록 쓰도록 한 것이다. 며칠 후 주민들은 다시 계엄사령부로 불려갔으나 민보단 자수서와 경찰의 조서를 본 군인들은 '시시하다. 아무런 내용도 없다'며 전부 주민들을 돌려보냈고, 100여 명의 주민들은 무사히 귀가할 수 있었다. 이것이 소위 '자수사건'이었다. 계엄하에 군의 지휘를 받는 입장에서 일개 경위 지서장이 위와 같은 과감한 결단을 내린 것은 자신의 목숨을 건 것과 다름없는 용단이었다.

3.2. 부당함으로 불이행


[image]

해정참 제16호

단기4283년 8월 30일

해병대 정보참모 해군중령 김두찬(직인)[2]

성산포경찰서장 귀하

예비구속자 총살집행 의뢰의 건

수제건에 관하야 본도에 계엄령 실시 이후 현재까지 귀서에 예비구속중인 D급 및 C급에서 총살미집행자에 대하여는 귀서에서 총살집행 후 그 결과를 9월 6일까지 육군본부 정보국 제주지구 CIC 대장에게 보고하도록 자이 의뢰함.

'''부당함으로 불이행'''

문형순 경위 지서장은 1949년 1월 18일 모슬포지서가 (제3구)경찰서로 승격하면서 서장서리(초대 서장)로 임명받아 근무하다가 1949년 10월 19일 경감으로 승진하면서 성산포경찰서장으로 부임하였다. 문형순 서장은 당시 국가 시책이었던 보도연맹원들에 대한 교화와 관할 지역 경비에 여념이 없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6·25 당일 오후 3시경, 내무부 치안국장은 각도 경찰국장에게 전통 「전국 요시찰인 단속 및 전국 형무소경계의 건」을 발하고 ‘국민보도연맹 가입자’ 및 ‘요시찰인’들을 예비검속하도록 지시했다. 제주도경찰국은 내무부 치안국의 통첩을 받아 관할 경찰서에 요시찰인 및 불순분자를 일제히 구금할 것을 지시하게 된다. 이른바 예비검속 집단학살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제주도에서는 약 1천 명으로 추산되는 예비검속자들이 해병대 사령부에서 총살 후 암매장되거나 수장되었다. 
1950년 8월 20일 제주도에서 새벽 2시와 5시경 2차에 걸친 '예비검속자' 총살집행은 당시 해병대 사령부 소속 모슬포 부대(제3대대)에 의해서 자행되었다. 모슬포 경찰서(당시 서장은 후임인 강문식 서장) 관내에서 예비검속됐던 347명 중 253명이 육군본부 제주지구 CIC에 넘겨지고 그 중 252명이 해병대에 의해서 학살되었다. 제주도내 4개의 경찰서는 구금한 예비검속자들의 과거 경력을 조사하고 명부를 작성하였다. 이러한 실무는 각 경찰서 사찰계가 담당하였다. 이들은 예비검속자들을 개인별로 심사하여 종별(種別)로 사정(査定)하고, 전체 D·C·B·A의 4등급으로 분류하였다. 이 가운데 B·A급은 석방 또는 계속 구금되었고, 나머지 D·C급은 1950년 8월 20일경 두 차례에 걸쳐 계엄 당국인 해병대에 송치되었다. 당시 이들 D·C급으로 분류돼 송치된 예비검속자 가운데 일부는 석방되었지만, 대부분 총살되었기 때문에 경찰의 등급 분류는 예비검속자 집단총살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선량한 마을 주민들의 생명을 살려내기 위한 문 서장의 행동은 여기에서도 그치지 않았다. 1950년 8월 20일 계엄군측으로부터 예비검속자 총살 집행 지시 공문을 접수하였다. 그러나 문형순 서장은 공문의 ‘성산포경찰서장 귀하’ 옆에 “不當하므로 不履行”이라 직접 쓰고 날인해서 끝까지 거부했다. 이 또한 당시 계엄이라는 엄혹한 상황하에서 대단한 결단이었다. 이 일로 성산포에서 예비검속으로 처형된 사람은 단 6명 뿐이었다. 성산서장 다음에는 경무과 감찰계장, 경찰국 경무과 서무계장 겸 공보실장을 거친 후 1951년 3월에 경상남도로 전출했다가 1952년 4월 다시 제주도로 전입해서 경찰국 보안과 방호계장을 끝으로 1953년 9월 퇴임했다.

3.3. 2005년 공덕비 철거 논란


2005년에는 모슬포 지역에서 '자수사건'에서 살아난 사람 중에 고춘언씨(문형순 공덕비 건립 추진위원회 위원장)가 중심이 되어 공덕비를 세웠다. 그렇지만 그 때 살아난 사람 중에도 다수는 과거에 대해 자식과 일반인에 비밀에 부친다며 오히려 역정내며 동참을 거부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일부 주민('문형순 공덕비' 철거 비상대책위원회 제주 4.3 유족회 대정지회) 들은 문서장이 4.3시기 대정지역 학살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해서 공덕비 건립에 반대했고 철거를 주장(2005년 8월 1일 건립추진위원회 측에 공개질의)했는데 사실 관계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겠다.
이들이 주장하는 영락리 '양은하 고문치사사건'은 4.3이 일어나기 전인 1948년 3월 14일에 일어난 사건이고 문서장은 세화지서에 근무할 때이다. 
제주의 소리에 의하면 '동일2리 새미 피살'사건은 이경방(하모리), 양군일(신평리), 김우필(영락리) 등 대정지역 공무원과 유지들이 1948년 10월말경 모슬포 군부대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받다가 1948년 11월 6일 동일2리 천미동(泉味洞·새미)으로 끌려가 총살당한 사건으로 이 역시 문서장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게 객관적인 견해이다. 학살 주체가 군인인데다 학살 시기도 문형순 모슬포경찰서장이 부임하기 전이기 때문이다.
'일과2리 서림 피살'은 당시 모슬포 주둔군의 중요한 급수원을 둘러싸고 발생한 사건으로, 1948년 7월 2일 수원지를 지키던 경비대원이 탈영을 하고, 10월경엔 도로파괴 등의 사건이 벌어지자 이에 화가난 토벌대(군)가 1948년 10월 26일, 11월 4일, 12월 9일에 주민들을 총살한 사건을 말한다. 또 12월 9일에는 일과2리 이장 문병옥이 총살되기도 했다.
'상모리 이교동 48인 피살 및 대살'은 1948년 12월 13일 상모리 이교동 향사 앞에서 주민 48명이 총살당한 사건으로 학살 주체는 경찰이 아니라 군인들이었다. 이 때는 1948년 11월 17일 선포된 계엄령을 바탕으로 군대가 주도권을 쥐고 초토화작전을 벌이고 있던 시절로 경찰이 개입할 상황이 아님은 물론 이 역시 모슬포 경찰서가 만들어지기 이전이었다.
제주의소리에 따르면  '특공대 피살사건'은 주민들이 무장대로부터 마을을 지키기 위해 특공대(대장 이원하)를 조직하고 무장을 하기 위해 군에 무기를 달라고 요청하자 군이 1949년 1월 10일 특공대원 10여명을 모슬봉 기슭으로 끌고 가 총살한 사건으로 이 역시 학살 주체가 군대인 사건이다. 이 사건과 관련해서는 모슬포 출신으로 4.3연구가인 이도영 박사(University of California, Riverside 방문 연구교수)도 "대정고 옆 탄약고에서의 '모슬포 특공대 학살 사건'은 육군 허욱 대위가 이끄는 부대에서 자행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4. 퇴직 이후의 궁핍한 생활


[image]
퇴임 이후인 1953년 제주시 삼성혈 삼성전 앞에서 촬영된 그의 마지막 사진. 맨 오른쪽이 문형순이다.
1952년 제주도 경찰국 보안과 경감으로 근무하던 그는 곧 퇴직하였다. 퇴직 후 제주시에서 자그마한 가게를 운영하던 그는 장사가 안 돼 가게를 넘기고 경찰 쌀배급소 직원도 했고,[3] 산지천과 칠성통 입구사이의 남의 집 단칸방에서 얹혀 살면서 제주의 첫 영화극장이었던 대한극장(현대극장의 전신)에서 매표원으로 일하다가 1966년 6월 20일 제주도립병원에서 가족도[4] 가진 것도 없이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5. 사후


[image]
제주시 오등동 평남도민회묘지에 있는 그의 무덤
경찰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경찰서장이 돌아가셨다"는 내용을 중앙에 보고했더니 박정희 대통령이 하사금을 보내줘 평안도민회가 돈을 보태 당시 건입동 공동묘지였던 황세왓에 묻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문 서장의 묘비가 누군가 해머로 내리쳐 두 동강났다. 두 번 내리친 자국이 선명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평안도민회에서는 누군가 문 서장의 묘비를 고의적으로 깨뜨렸다고 생각해서 1976년 4월 5일 평안도민회 공동묘지였던 지금의 제주대학 자리로 옮겼다가 다시 대학이 들어서면서 공동묘지를 옮기게 돼 지금의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고 한다.

5.1. 경찰영웅 추서, 그러나 국가유공자 선정은 불발


[image]
[image]
2018년 추서된 경찰영웅패
같은 해 제주지방경찰청에 세워진 흉상
경찰청은 매년 경찰 정신에 귀감이 되는 전사·순직 경찰관 1~2명을 선정해 추모 흉상을 건립하고 있는데 2018년 8월 23일에는 위원회를 열어 문 전 서장을 '올해의 경찰 영웅'으로 선정하고 추모 흉상을 제작하기로 했으며, 2018년 11월 1일 제주지방경찰청 청사 본관 앞에 문형순 서장의 흉상이 세워졌다. 국가보훈처가 2005년 6월 공개한 독립운동 참여자 명단에도 문형순 서장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관리번호는 70229번. 일련번호는 18262번이다. 그러나 국가유공자 선정은 불발되었다. 전정택 전 제주평안도민회장은 2006년 8월30일 문 서장의 역사적 자료를 직접 모아 독립유공자 포상 신청을 했다. 문 서장이 홀로 살아 후손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국가보훈처는 입증자료가 부족하다며 불허 결정을 내렸다. 전 전 회장이 별세하자 2010년 4월 제주보훈청장 직권으로 국가보훈처에 재심사를 요청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2011년 3월 이대수 전 제주보훈청장이 자료를 보강해 재차 심사를 요청했지만 입증자료 부족과 사후행적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역시나 심사를 통과하지 못했다. 최능진 수사국장, 안맥결 총경, 양한나 경감, 이양전 경감과 함께 경찰청이 발굴한 미서훈 독립운동가 출신 경찰관 5인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6. 김경훈 시인의 시 '부당함으로 불이행'


'''부당함으로 불이행'''

북지십년 만주십년 경찰백지 일자무식 문도깨비 문형순!’

어느 경찰 출신은 문형순을 그렇게 음률을 맞추어 기억했다

왜 이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라는 거야?

안 돼!

광복군 출신으로, 친일 군경과 맞짱 뜰 수 있는 배짱과 용기

너희 놈들이 하는 짓거리가 이게 뭐야?

부당함으로 불이행!

말년엔 여느 독립 운동가들처럼 쓸쓸하게 죽었다고 전했다 그러나

‘북지십년 만주십년 경찰백지 일자무식 문도깨비 유방백세(流芳百世) 문형순!’

[1] 당시에는 군이나 서청 단원들이 주민들의 조서를 빼돌려 중간 조작을 해서 처형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기 때문이다.[2] 해당 인물의 이름을 딴 건물이 2019년 해병대교육훈련단에 개관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김두찬 문서 참조.[3] 이 당시엔 경찰 봉급으로 돈이 아닌 쌀로 주는 일이 많았다.[4] 후손이 없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