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요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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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제13대 국방부 장관.
미군으로부터 '타이거 송'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거침없는 맹장이었다. 다른 별명으로는 돌머리라는 뜻의(...) 석두(石頭).[1][2]
행적에 논란이 많은 인물로 제주 4.3 사건 당시 반인륜적 범죄를 자행한 학살자라는 평과 동시에 6.25 전쟁때 맹활약한 맹장이자 4.19 혁명의 숨은 공로자라는 엇갈린 면모가 존재한다.
학살자이므로 친일파란 편견이 있지만 노무현 정부의 보고서나 친일인명사전에도 송요찬은 제외됐다. 학살자가 친일파에서 나오는 건 아니다. 최덕신도 엄연한 독립운동가다.
2. 생애
2.1. 일제강점기 및 광복 직후
본관은 여산으로 1918년 2월 13일 충청남도 청양군에서 출생하여 일본군 지원병으로 입대, 일본 육군 군조(상사)까지 진급하였다. 창씨명은 나카무라 사다오. 광복 후에는 최경록 장군의 도움을 받아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하여 1946년 5월 1일 육군 참위(현재 계급으로 소위)로 임관하였다.
임관 후 부산에서 제5연대 창설요원으로 활동하다가, 그 해 9월 5일, 제5연대의 일부 병력을 중심으로 강릉에 제8연대를 창설하게 되자 그를 따라 강릉으로 이동하였다. 이후 강릉에서 대위로 진급, 1947년 3월 1일부로 제8연대 제3대대장의 지휘를 맡게 된다.
이후 소령 진급 후 제1연대를 거쳐 1948년 6월 11연대 부연대장으로 임명되어 제주도에서 공비 토벌 임무(제주 4.3 사건 진압 작전)를 수행 중에 제9연대장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육군 중령으로 진급하였다.
2.2. 제주 4.3 사건
해안선에서 거리가 5km 이상 들어간 중산간지역을 비워서 유격대를 고립시킨다는 것이 초토화 개념의 작전인데 송요찬의 제9연대는 모든 중산간마을을 태워버린 건 물론이고 거기 사는 주민들은 '모두 유격대를 도와주고 편의를 제공'한다고 가정하고 주민들을 대량학살한다는 계획을 골랐다.[3]
중산간마을 주민들에게 소개령(疎開令)을 내렸는데, 토벌대는 미처 내려오지 못한 주민들은 물론 소개령이 아직 안 내려졌거나 아직 내려받지 못한 마을에 사는 주민들까지 '''모조리''' 살해했다.[4]
또한 초토화 작전 시기 때는 중산간마을 사람이 아니라도 청년들을 재판도 없이 총살하는 게 흔했는데, 중산간마을에서 해안마을로 도피해온 사람들도 청년이 없으면 '도피자 가족'이라 해서 모두 죽이기도 했다. 역시 원래부터 해안선이나 그 가까이 마을에 살던 주민들도 가족 중에서 청년이 없으면 마찬가지로 모두 죽였다.[5]
다음은 당시 토벌대로 복무한 이들의 증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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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증언들에서 확인 가능하듯이 송요찬은 제주 4.3 사건 당시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 학살을 저지른 주범''' 중 하나다.[6]
산악지역을 근거지로 유격전을 하는 무장부대를 상대로 할때 해당 지역의 민간인 마을을 모두 비우고 물자를 불태워서 게릴라부대의 보급을 끊는다는 초토화 작전(청야 전술)은 기본적으로 상당히 유용한 방법이다. 하지만 이때 민간인들은 모두 후방지역으로 이동시켜서 게릴라부대와 차단하는 것이 정석이지, 무차별 학살하는 것은 명백한 전쟁범죄이며 오히려 민심이 게릴라 부대로 향하게 만들어 주는 짓이다.[7]
2.3. 4.3 사건 이후 및 6.25 전쟁
제11연대의 제주도 평정작전 임무를 인수받아 수행하던 중 이듬해(1949년) 2월 제9연대 수도여단(여단장 이준식 대령)에 배속되어 서울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강릉에 주둔하고 있는 제6사단 제10연대장으로 전보되었다.
그는 제10연대장 재직 시 '양양 돌입 사건'[8] 을 주도했고, 이 때문에 7월 24일 해임되었으나 군사재판은 면했다. 이후 육군보병학교 학생감과 제5사단 제15연대장을 거쳐 1949년 4월 최영희 대령 후임으로 헌병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좌천되었던 송요찬을 살린 것은 전쟁이었다. 헌병사령관이었던 송요찬은 전쟁 발발 당시 적의 공세에 밀려 대한민국 국군이 한강 이남으로 후퇴하자 헌병들을 진두지휘, 낙오병을 수습하여 국군을 재편성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후 1950년 8월 10일 대구방위사령관에 임명되어 임시수도인 대구를 지키는 데 전력을 다했다. 그 해 9월 1일 백인엽 대령[9] 의 후임으로 수도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여기서 송요찬은 안강-기계 전투와 뒤이어 벌어진 영천 전투에서 북한군의 경주 침투를 저지해 후방의 안전을 확보하고 1군단이 반격작전을 감행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그 전공으로 9월 20일 육군 준장으로 진급하였다.
수도사단은 이후 북진작전에서 회양, 신고산, 원산 점령에 이어 함흥, 흥남을 거쳐 소만(연해주-만주) 국경 인근까지 진출하는 등 맹활약하는데, 이러한 수도사단의 활약은 송요찬의 지휘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그러나 소만 국경을 목전에 두고 송요찬의 수도사단은 중공군의 남하로 철수할 수밖에 없게 된다. 1950년 12월 18일 흥남에서 묵호항으로 상륙한 수도사단은 1951년 1월 27일 다시 강릉을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이후 주로 동해안을 중심으로 한 동부전선에서 활약하다가 중공군 5월 공세 당시 백선엽 소장의 명을 받고 적의 좌측 돌파구에 해당하는 대관령을 점령, 적의 강릉 진출 기도를 봉쇄하는 등의 활약[10] 을 보였다.
이후 월비산 전투를 승리로 이끈 후 1951년 11월 15일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 토벌을 위해 편성된 백야전전투사령부(사령관 백선엽 소장)에 배속되어 작전을 실시했다. 이듬해 1952년에는 새로 재편된 제2군단(역시 사령관 백선엽 소장)에 배속되어 춘천 북방으로 이동, 수도고지 전투 등을 수행했다.
1952년 7월 8일 육군 소장으로 진급한 송요찬은 수도사단의 지휘권을 이용문 장군에게 인계하고, 전라북도 남원에 주둔하고 있던 남부지구경비사령부의 초대 사령관으로 영전했다.
그러나 1952년 10월 8일 다시 수도사단장으로 전보, 지형능선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전투가 소강상태에 접어들 무렵 송요찬은 도미 유학 대기 중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로 전황이 아군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자, 금성의 동남방의 방어를 담당하던 제8보병사단의 사단장으로 임명된다. 이때 송요찬은 금성천 이북까지 진출, 최후의 대공세였던 1953년 7월 13일 공산 측의 공세를 물리치고 휴전선의 확정에 전략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국군이 확보하게 하는 데 기여했다.
2.4. 전후와 4.19 혁명
미 지휘참모 대학, 3군단장, 육군 중장 진급, 제1야전군사령관(1957년)을 거쳐 1959년 2월 백선엽 대장의 후임으로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임무를 수행하다가 4.19 혁명 때는 이승만 대통령이 내린 비상계엄 지시에 따라 군 병력을 서울 시내에 진주시키기는 했지만, 절대 무력 사용을 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려 4.19 혁명 성공에 도움을 주었다. 설송웅 등의 증언에 의하면 4월 26일 하야 성명 발표 직전 경무대에서 학생 및 시민대표 5인의 이승만 면담을 직접 주선하여 사실상 이승만의 하야에도 직간접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11][12]
하지만 4.19 직후 김종필 등 젊은 장교들의 정군 운동에 따라 1960년 5월 23일 사임하고 14여 년간의 군 생활을 마치고 육군 중장으로 예편했다. 정군 운동의 주역들은 함께 예편되었다가 이후 5.16 군사정변을 일으키며 야심을 드러낸다. 5.16 군사정변 이후 장도영이 체포되자 송요찬은 군부의 내각수반 겸 국방장관을 역임했다.
이 후 외무장관, 경제기획원 장관, 인천제철 사장, 국정자문위원 등을 역임하다 1980년 10월 18일에 미국 시카고 로욜라 대학병원에서 신장병으로 사망했다.
3. 평가
제주 4.3 사건의 학살연루자이자 한국전쟁의 영웅이며 4.19 혁명의 협력자. 백선엽이 워낙 뜨거운 감자가 되어서 그렇지 이쪽도 평가하기 정말 어렵고 복잡한 인물이다. 창군 초기 4.3 사건때까진 일본군 물이 그대로 들어있어서 일본군이 중국에서 한 짓을 제주도민들에게 그대로 했으나, 한국 전쟁기엔 선진군대인 미군과 함께하게 되자 특유의 저돌적인 성향은 유지하면서 작전에 눈을 떠 국군의 맹장으로 활약했다. 4.19 혁명 시기에 이르면 그 돌머리 장군이 맞나 싶을 정도로 정치에도 눈을 뜬 모습을 보이며 시민학살을 저지하고 이승만 하야에 협력한다.
참 다채로운 이력인데 백선엽도 그랬듯이 2020년대 대한민국에선 종합적으로 평가받지 못하고 각기 진영논리에 따라 특정부분만 내세워 평가하고 있다.
4. 대중매체에서
김진태가 MBC 드라마 제2공화국과 제3공화국에서 해당 인물의 역할을 맡았다. 특히 제2공화국에서는 초반 계엄사령관 부분에서의 비중이 제법 높았다.
5. 여담
- 군사영어학교를 나왔지만 영어는 다소 미숙했던 것으로 보인다. 6.25 전쟁 시절 미군과 협조할 일이 있을 때 통역관을 대동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 당선인이 서울을 방문했는데 당시 수도사단장이었던 송요찬이 그의 앞에서 연설을 할 기회가 있었다. 처음에는 영어가 미숙해서 통역관을 대동하려고 했지만 밴 플리트가 "아이젠하워는 직접 리허설을 듣고 싶어한다."며 통역 없이 스스로 브리핑을 하라고 지시했다. 송요찬도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했지만 실제 아이젠하워 앞에서 브리핑을 할 때는 "Me, Song Yo Chan, commanding Capital ROK division. We are here Capital ROK division..... Capital ROK division...." 정도의 자기소개 정도밖에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게 송요찬은 "We want fight. we go."라고 하면서 지휘봉을 지도에 있는 압록강까지 쭉 밀어올리는 제스처를 취하면서 브리핑을 마쳤다. 영어가 좀 미숙하긴 했지만 그래도 아이젠하워는 송요찬에게 직접 악수를 청하면서 "이 부대의 사기와 관련하여 들어본 것 중 가장 훌륭한 브리핑이었다."면서 그를 칭찬해주었다고.[13]
[1] 나중에 이를 알게 된 송요찬은 "내가 석두(石頭)면, 그놈들은 철두(鐵頭)"라고 말했다는 후문. 사람들이 자신을 '송석두' 장군이라 불러 실제로 이름이 '송석두'라고 아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루는 한 병사에게 "너 내 이름을 아느냐"라고 묻지 그 병사가 "네! 송석두 장군입니다!"라고 대답했고, 그 말을 들은 송요찬 장군이 웃으며 "내가 석두면 너는 철두다"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있다.[2] 드라마 제2공화국에서는 머리가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고지식하다는 의미로 석두라고 설명했다. 작 중 홍종철 중령 역의 탤런트 주현이 박정희 역의 이진수와 석두라고 이야기한다.[3] 1차 출처: Hq. USAFIK, G-2 Periodic Report, No. 1097, April 1, 1949. 2차 출처: 4.3 진상조사서 449쪽.[4] 출처 4.3 진상조사서 378쪽~391쪽.[5] 출처: 4.3 진상조사서 391쪽~400쪽.[6] 그런데 2016년 11월 충남 청양군에서 송요찬의 생가, 동상, 비석 등을 복원 및 정비하는 선양사업을 추진하면서 논란이 되었다. 이에 4.3 단체들의 항의가 이어졌고 충남도청에서도 이 사업에 대한 행정적, 재정적 지원을 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선양사업이 철회되었다. 아직도 4.3 사건의 인지도가 여전히 낮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7] 이것은 일본군이 중일전쟁 기간동안 행했던 삼광작전을 보면 알 수 있다.[8] 1949년 동해안에 배치된 한국군 제6사단 10연대가 북한 제38여단의 계속된 도발에 1949년 7월4일 '''단독 북진해서''' 당시 북한 땅이었던 38선 이북의 양양(정확히는 양양 남부 일부)으로 돌입하고 남대천 이남의 80고지와 더 북쪽의 기사문리(현 양양군 현북면)라는 곳까지 점령한 사건이다. 북한군은 일시 후퇴하는 척하면서도 술수를 부렸다. 바로 그물로 가린 어선에 위장한 병력들을 태워 남하, 그대로 국군의 후방을 기습 공격한 것. 이를 잘 물리쳤으면 좋았겠으나, 한국군은 1개 중대 규모의 피해를 입는 대패를 맛보고 철수했다. 북에서는 제2차 고산봉 전투라고 부른다.[9] 백선엽의 동생으로 인천대학교와 인천전문대학 등이 포함된 선인학원 이사장이었다. 망나니+막장으로 유명하다.#[10] 사실 송요찬은 백선엽 장군의 명령을 쌩까고(...) 장시간 부대를 대기시켰다가 자칫 대관령 점령을 말아먹고 국군과 UN군의 전체 작전에 커다란 차질을 가져올 뻔했다. 참다못한 백선엽 장군이 직접 찾아가서 항명죄로 파면시키려고 하자 그제야 겁먹고 부대를 움직였다.#1, #2[11] 허정 과도정부가 들어서자 송요찬은 국방장관 감으로 물망에 올랐는데 4월 26일 이 때 당시 시민대표 5인이 "송요찬에게 권력을 넘겨라."라고 이승만에게 말한 탓으로 허정이 극구 반대하는 바람에 국방장관직은 거부당했다.[12] 김정렬 장군의 회고록인 <항공의 경종>에서는 4.19 당시 계엄령에 따라서 부대 동원시에 송요찬의 직할이 되는 위수부대 견제를 위하여서 1군사령관 유재흥에게 별도의 부대동원을 요청하였다라는 것과 이후에도 혼란한 한국사회 안정을 위해서 미국으로부터 과도정부의 수반으로 올린다라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에 국방장관이던 김정렬 앞에서는 아니라고는 하였지만, 내심 기뻐하는 것 같았다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오해일 수는 있지만, 내심 야심이 있었던 사람일 수가 있다.[13] 반면에 같은 군사영어학교를 나온 백선엽은 영어를 매우 잘해서 아이젠하워 앞에서 20분간 통역 없이 매끄럽게 브리핑을 잘 끝마쳤다. 당연하다면 당연한게 같은 군사영어학교 나왔어도 송요찬은 조선지원병으로 징집된 부사관 출신이고 백선엽은 봉천군관학교 수석 졸업한 만주군 장교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