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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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炳善
1920년 5월 30일 ~ 2001년 2월 5일
1. 개요
2. 생애
3. 비판


1. 개요


대한민국 건군기군인. 제주 4.3 사건 당시 제2연대장으로 활동하며 초토화작전에 책임이 있는 인물이다.

2. 생애


1920년 5월 30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나 숭덕중학교를 졸업하였다. 태평양 전쟁 당시 '''특별지원병''' 제1기로 일본군에 입대하여 준위로 복무하였다. 8.15 광복 이후에는 조선경비대에서 활동하여 1946년 1월 5일 제1연대 A중대요원으로 응시해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소위가 되어 제1연대 대대구매관이 됐다. 1947년 5월에는 대전에 있던 제2연대로 들어가 육군 소령으로 활동했고, 1948년 12월 7일에는 보병제6사단 2연대장에 임명되어 중령대령으로 진급하였다. 그런 와중에 1948년 말 발생한 여순사건 진압에도 참여했다.
1948년 12월 29일[1] 제주 4.3 사건을 진압을 위해 초토화작전을 펼치고 있던 제9연대와 교대하여 제2연대장으로 제주도에 부임했다. 이때부터 그는 제2연대를 이끌며 1948년 11월부터 펼쳐지고 있던 초토화작전을 이어받아 1949년 1월 4일부터 항공기와 함정 지원을 토대로 여전히 강력한 토벌작전을 벌여 1949년 2월까지 숱한 민간인 희생을 낳았다. 1949년 3월부터는 유재흥이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으로 부임함에 따라 부사령관으로 활동했다.
6.25 전쟁 당시에는 제2사단장과 제1군단장으로 활동하며 여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대표적으로 1950년 7월에는 문경 이화령 전투에서 제6사단 2연대를 지휘하여 북한군 제1사단의 공격을 막아내어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1955년에는 육군 중장과 제2군단장, 1957년 7월에는 육군본부 기획참모장, 1959년 1월에는 작전참모부장, 1960년에는 국방부 연합참모부장을 각각 맡았다.
5.16 쿠데타 이후에는 부정축재자 혐의를 받아 재판을 받기도 했지만 곧 무죄판결을 받아 풀려났고, 국가재건최고회의 기획위원장 등을 맡다가 1961년 7월 14일 육군 중장으로 예편됐다. 이후 2001년 2월 5일 81세로 사망했고 국립현충원 장군묘역에 묻혔다.

3. 비판


조병옥, 박진경, 송요찬, 탁성록과 더불어 '''제주 4.3 사건 당시 강경토벌과 민간인 학살에 책임이 있는 인물 중 하나'''이다. 일각에서는 그의 이름을 딴 공적비와 마을 이름이 있다[2]는 것 등을 들어 그가 학살과는 상관없다고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최소한 2연대가 9연대와 교대한 1949년 12월 말부터 유재흥이 부임하기 전인 1949년 2월까지의 초토화작전과 민간인 학살의 책임을 지고 있다.
당장 4.3 최대의 학살사건인 북촌리에서의 학살이 그가 부임하고 있던 시절(1949년 1월 12일)에 발생했었고, 미군 비밀문서조차 '''"함병선 연대장은 신분이나 무기 소지 여부를 가리지 않고 '폭도 지역'에서 발견된 모든 사람을 사살하는 가혹한 작전을 폈다"'''고 기록해놨다. 또한 그는 서북청년회 단원들을 진압군으로 참여시켜 제2연대 제3대대의 경우에는 장병 전원이 서북청년회 출신일 정도였다.
[1] 이날은 대한민국 최초로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한 고상돈의 생일이기도 하다. 묘하게 그도 제주도 출신이다.[2] 실제로 제주시 봉개동의 옛 이름 함명리(咸明里)에 함병선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 4.3 전에는 봉개리(奉蓋里)였는데 연대장 함병선의 성인 '함(咸)'과 작전과장 김명(金明)의 이름인 '명(明)'을 각각 따서 붙여 '함명리'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름이 붙여진 봉개리는 정작 함병선이 연대장으로 있던 시기인 1949년 1월 21일 수백여 명이 군경토벌대에 의해 학살당하고 마을이 전소되는 비극을 겪었다. 그리고 4.3 진압 이후 다시 재건될 때 '함명리'라고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