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무라 토시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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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前 NPB 선수, 지도자, 야구해설가/평론가, 프런트.
현역 시절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 활약하며 팀의 1975년 리그 첫 우승과 1979~80년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끌었으며, 은퇴 후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 지도자로 일하며 강타자들을 양성한 인물이다. 다만 감독으로써는 한때 수위였다가 11.5게임차를 뒤집혀 우승에 실패한 것과 15년 연속 B클래스의 시작을 끊게 되면서 명선수는 명감독이 될 수 없다를 실현하고 만 비운의 인물.
2. 현역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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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히로시마 현에서 태어나 히로시마 상고에 입학. 1966년 후배였던 에이스 투수 야마모토 카즈유키[3] 와 함께 야구부를 하계 코시엔에 진출시켰지만, 이후 코시엔 1회전에서 패배하여 우승에 실패한다. 이후 1966년 제1차 드래프트에서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2위 지명을 받아 프로에 입단한다.
입단 후 3년간 출장시합수와 타석을 늘려나간 미무라는 4년차인 1970년부터 주전 유격수 자리에 정착하여, 번트나 히트 앤드 런 등의 작전야구에 능숙한 모습을 보이며 시합에서 주로 팀의 2번 타자로 활약했다. 1974년엔 출장이 줄어들면서 규정타석 만족에 실패했지만 1년 후인 1975년 다시 출장이 증가해 규정타석을 만족, 많이 활약하게 되면서 그 해 카프의 첫 리그 우승에 공헌한다. 이듬해엔 전시합 출장을 달성, 또 무려 27홈런이나 치는 장타력을 선보이기도 했지만 이후 2년간 또다시 부진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1979년 부활하면서 또다시 팀의 주전 선수로 활약. 이 해 본인은 부진에서 빠져나온 선수에게 주는 컴백상을 수상하고 팀의 첫 일본시리즈 우승에 공헌한다. 그러나 다카하시 요시히코[4] 등의 대두로 점점 주전에서 제외. 이후 대타로 활약하다 1983년을 끝으로 은퇴한다.
'''통산성적은 1567시합 출장, 5567타석 1245안타 149홈런 490타점 49도루 123희생타 26희생플라이 타율 .255'''
'''베스트나인 선정 3회, 1979년 일본시리즈 기능상 수상.'''
유격수치곤 붉은헬멧 군단의 주전선수에 맞는 듯한 나름 괜찮은 타격실력을 선보였고 특히나 시즌 27홈런을 칠 정도의 좋은 장타력도 지닌 선수였다. 다만 느린 발을 가졌고[5] 한번도 시즌 70타점[6] 을 넘겨본 적 없는 건 흠.
3. 지도자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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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시절.
은퇴 후 곧바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코치로 전임. 수비주루 코치, 2군 감독 등을 맡았다가 1993년 시즌오프, 성적 부진으로 물러난 야마모토 코지의 후임으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감독으로 취임한다.
부임 첫 해인 1994년, 미무라는 그 전 시즌이었던 1993년 19년 만에 최하위를 찍으며 개발살난 카프를 66승 64패 승률 .508로 리그 3위를 기록. 카프를 다시 강팀으로 회복시켰고 이듬해에도 74승 56패[7] 승률 .569로 2위를 찍으며 점점 성적을 높였다. 특히 이 시기 에토 아키라, 카네모토 토모아키, 오가타 코이치[8] 등 젋은 타자들의 포텐이 폭발하고 이들이 마에다 토모노리, 노무라 켄지로[9] , 쇼다 고조 등 기존 전력들과 아우러지면서, 적어도 타선은 1970~80년대 아카헬 타선에 맞먹는 최강의 핵타선, 일본의 빅 레드 머신으로 불릴 정도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6년, 카프는 여름까지 리그 1위를 계속 이어나갔고 2위였던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무려 '''11.5게임차''' 라는 경이로운 승차를 선보이며 5년만에 리그 우승을 거두는 듯 했다. '''그러나..'''
이후 7월 9일 삿포로시 마루야마 구장에서 열린 VS 요미우리 자이언츠 戰에서 2회에 9타자 연속 안타로 한 이닝에 7점을 내주며 패배한 것을 시작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반격이 시작. 반면 히로시마 도요 카프는 이 이후로 DTD를 시전해 버리면서 결국 10월 6일, 나고야 구장에서 열린 요미우리 자이언츠 VS 주니치 드래곤즈 戰에서 요미우리가 승리하면서 2년만의 리그 우승을 결정지어 버리고 말았다(...)[10] 결국 이 해 카프는 71승 59패 승률 .546 으로 리그 3위를 차지했지만.. 11.5게임차의 리그 1위에서 3위로 추락하는 굴욕을 제대로 당해야만 했다. 이 후 이 일은 '''메이크드라마''' 로 불리며 현재까지 회자되고 있다.[11]
이렇게 어이없고 허망하게 우승을 놓친 탓인지, 이듬해인 1997년에도 리그 3위였지만 승률이 4할로 떨어졌고, 그 다음해인 1998년엔 리그 5위로 또다시 B클래스로 추락. 타선은 막강했지만 그를 뒷받침할 투수진이 번번이 무너진 것이 뻐아팠다. 결국 미무라는 이 해를 끝으로 사임하였고 그 뒤 카프는 2012년까지 단 1번도 리그 A클래스에 오르지 못하게 된다.
4. 감독 사임 이후
감독 사임 이후 미무라는 야구해설가/평론가로 활동하다가 2004~2005년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수석코치를 맡았고, 그 후 2008년 고향인 히로시마를 떠나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통괄본부 편성부 부장으로 취임하며 프런트로 전임한다. 이것은 원래 라쿠텐이 미무라를 노무라 카츠야의 후임 감독으로 세우기 위해 미무라를 라쿠텐에 부른 것이었다.(미무라 사후 확실하게 밝혀짐) 결국 미무라 밑에서 선수생활했고 히로시마에서 감독을 역임했던 마티 브라운이 노무라 후임으로 부임했다.
그러나 2009년 이후로 건강이 악화되면서 휴양이 잦아졌고, 건강악화가 심해진 끝에 결국 11월 3일 심부전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5. 기타
신 거인의 별에서는 호시 휴마의 스크류 스핀 슬라이딩에 의한 피폭자로 출현한바 있다.
[1] 3루 베이스 코치 겸임[2] 부임 도중 사망.[3] 한신 타이거스에서 16년간 활약한 선수. 무려 100승-100세이브를 전부 달성한 투수다.[4] 일본프로야구 최다연속경기 안타(33경기)기록 보유자다.[5] 49도루/50도루사로 도루실패가 더 많다.[6] 미무라 본인의 최고 기록은 1976년의 69타점[7] 1무 포함[8] 미무라의 뒤를 이어 9번을 달고 활약했다. 현 히로시마 감독[9] 2014년까지 히로시마 감독 역임[10] 공교롭게도 이 날이 나고야 구장에서 열린 주니치 드래곤즈 1군경기 최종전이었다. 거기다 그 때 주니치 감독이 하필이면 교진군이라면 이를 박박 갈기로 소문난 대표적인 교진군 안티 호시노 센이치였다(...) 자기 팀 홈구장 마지막 경기에서 그토록 싫어하는 교진군의 우승을 허락해 버린 주니치 팬들과 호시노는 엄청 멘붕 왔을 듯.. 이 후 나고야 돔으로 홈구장을 바꾸면서 나고야 구장은 2군 홈구장으로 쓰게 되었다.[11] 그러나 정작 교진군은 일본시리즈에선 오기 아키라의 오릭스 블루웨이브에게 1승 4패로 무기력하게 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