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일본시리즈
1. 개요
1979년 시즌 센트럴리그 우승팀인 히로시마 카프와 퍼시픽리그 우승팀 킨테츠 버팔로즈가 맞붙은 일본시리즈 역사상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명승부. 그 해 일본시리즈 6차전까지 3승 3패로 팽팽하게 맞서던 상황에서 7차전 9회말에 히로시마의 마무리 투수이던 '''에나츠 유타카'''가 상대방의 스퀴즈 작전을 간파하고 멋지게 저지하며 팀의 창단 첫 일본시리즈 우승을 실현시킨 일명 '''에나츠의 21구'''는 일본프로야구 역사에 길이 남을 명 장면 중 하나이다.
당시 에나츠의 활약을 소설가인 야마기와 준지(1948~1995)가 논픽션 소설로 엮으면서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2. 1~6차전 결과
2.1. 1차전 : 10월 27일, 오사카 구장
- 승리투수 : 이모토 타카시(킨테츠, 1승)
- 패전투수 : 키타벳푸 마나부(히로시마, 1패)
히로시마는 9회초에 1점을 만회 하였지만 승부를 뒤집지 못하면서 선발 이모토가 완투한 킨테츠가 먼저 1승을 거두었다.
2.2. 2차전 : 10월 28일, 오사카 구장
- 승리투수 : 스즈키 케이시(킨테츠, 1승)
- 패전투수 : 야마네 카즈오(히로시마, 1패)
2.3. 3차전 : 10월 30일, 히로시마 시민 구장
- 승리투수 : 이케가야 코지로(히로시마, 1승)
- 패전투수 : 야나기다 유타카(킨테츠, 1패)
- 세이브 : 에나츠 유타카(히로시마, 1세이브)
그러나 히로시마는 2회말 미즈타니 지츠오의 솔로 홈런과 선발 투수 이케가야의 호투로 반격을 시작했고, 결국 7회말 1사 1, 3루 상황에서 대타 우치다 준조의 동점타, 경기 중반 교체출장한 개럿이 역전 적시타를 날리며 3대 2 역전에 성공했다.
히로시마는 8회부터 구원 등판한 에나츠 유타카가 2이닝을 틀어막으며 시리즈 첫 승을 거두었다.[2] 그러나 시리즈 전적은 여전히 킨테츠가 2승 1패로 앞서고 있었다.
2.4. 4차전 : 10월 31일, 히로시마 시민 구장
- 승리투수 : 후쿠시 아키오(히로시마, 1승)
- 패전투수 : 이모토 타카시(킨테츠, 1승 1패)
킨테츠는 1차전 승리 투수인 이모토를, 히로시마는 후쿠시 아키오를 선발 투수로 등판 시켰다. 3회초 찰리 매뉴얼이 후쿠시를 상대로 투런 홈런을 날리며 킨테츠가 선제점을 뽑았지만, 4회말 무사 1, 3루 상황에서 야마모토 코지의 얕은 외야 플라이를 잡은 우익수 매뉴얼의 홈 송구가 빗나가며 1점을 허용하고 그 사이에 1루 주자가 2루로 진루한 것에 이어 후속 타자 미즈타니 지츠오가 자신의 시리즈 두번째 홈런을 뽑으며 히로시마는 3대 2 역전. 그리고 7회말에 타카하시 요시히코의 쐐기 투런 홈런이 터지며 9회초 아리타 슈조의 솔로포로 1점을 만회한 킨테츠를 5대 3으로 누르고 드디어 시리즈 전적은 2승 2패 동률이 되었다.
이날 히로시마의 선발 후쿠시는 완투승으로 마운드에서 큰 공을 세웠다.
2.5. 5차전 : 11월 1일, 히로시마 시민 구장
- 승리투수 : 야마네 카즈오(히로시마, 1승 1패)
- 패전투수 : 스즈키 케이시(킨테츠, 1승 1패)
결승 득점을 올린 야마네는 마운드에서도 킨테츠 타선을 2안타로 틀어막으며 완봉승, 2차전의 패배를 톡톡히 앙갚음 했다. 그리고 3연승을 올린 히로시마는 시리즈 전적 3승 2패로 전세를 뒤집을 수 있었다.
2.6. 6차전 : 11월 3일, 오사카 구장
- 승리투수 : 이모토 타카시(킨테츠, 2승 1패)
- 패전투수 : 이케가야 코지로(히로시마, 1승 1패)
킨테츠 선발 이모토가 1회초 미무라 토시유키 에게 우월 솔로포를 허용하며 불안한 출발을 보였으나, 2회말 1사 1, 3루 상황에서 히라노 미츠야스가 1루 땅볼로 동점을 만들고 3회말 찰리 매뉴얼의 적시타와 나시다 마사타카의 투런포를 묶어 3득점, 4회말 히라노의 1타점 희생플라이로 5대 1, 전세를 뒤집었다. 6회말에도 킨테츠는 히라노의 스퀴즈 번트로 1점을 추가하여 6대 1로 달아났으며 9회초 히로시마는 야마모토 코지의 홈런으로 1점을 뽑았지만 승부에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이모토가 완투승을 거둔 킨테츠가 6차전을 6대 2로 가져가면서 전적은 3승 3패, 이제 1979년 일본시리즈 패권의 향방은 7차전 결과로 갈리게 되었다.
3. 운명의 일본시리즈 7차전 : 11월 4일, 오사카 구장
다음 날 오사카 구장에서 열린 일본시리즈 7차전. 5차전에서 맞붙었던 킨테츠의 스즈키 케이시와 히로시마의 야마네 카즈오 모두 이틀만 쉬고 선발로 마운드에 올랐다. 이번 시리즈 들어 세번째 맞대결 이었다.
3.1. 1회초~9회초
1회초 선두 타자인 타카하시 요시히코의 우전 안타성 타구를 우익수 찰리 매뉴얼이 뒤로 빠뜨리는 바람에 무사 3루의 위기를 자초했고, 오랫만에 스타팅 멤버로 복귀한 기누가사 사치오의 적시타로 선취 1득점을 뽑았다. 3회초 미즈타니 지츠오의 적시타로 1점을 추가하여 히로시마가 2대 0 리드를 잡았으나 5회말 히로시마 선발 야마네가 21타석 연속 무안타의 부진에 시달리던 킨테츠의 히라노 미츠야스 에게 불의의 좌월 투런포를 두들겨 맞고 2대 2 동점을 허용했다. 그러나 이어진 히로시마의 6회초 공격에서 2사 후 하기와라 야스히로가 안타로 출루한 후 미즈누마 시로가 다시 전세를 뒤집는 좌월 2점 홈런을 뽑아내며 4대 2로 다시 앞서나갔다. 킨테츠는 6회말에 1사 2, 3루의 기회를 잡았지만 하타 코이치가 3루 땅볼에 그치며 1점을 얻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4대 3으로 앞서고 있던 히로시마의 고바 타케시 감독은 승리를 굳히고자 6회말 부터 등판하여 1실점 한 후쿠시 아키오 대신 마무리 투수인 '''에나츠 유타카'''를 마운드에 올리는 초 강수를 두었다. 에나츠는 7, 8회 킨테츠의 공격을 잘 막아내었지만...
3.2. 9회말, '''에나츠의 21구'''
킨테츠의 9회말 정규이닝 마지막 공격, 마운드에 오른 에나츠는 선두타자 하타 코이치에게 초구부터 중전 안타를 얻어맞으며 조금씩 불안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급기야 후속타자 크리스 아놀드 타석 때 대주자인 후지세 시로[3] 가 2루 도루[4] 를 시도하자 포수인 미즈누마 시로가 2루에 송구한다는 것이 유격수 앞에서 원바운드 되며 중견수 쪽으로 빠지는 사이에[5] 후지세가 3루까지 질주하면서 무사 3루라는 위기가 찾아왔다. 어쩔수 없이 에나츠는 아놀드를 볼넷으로 거르며 무사 1, 3루.
8번 타자 히라노 미츠야스 타석 때 아놀드를 대신하여 1루 대주자로 나온 후키이시 토쿠이치가 2루 도루에 성공, 무사 2, 3루로 위기는 더 커졌고 고바 감독이 덕아웃에서 투수를 교체하려는 낌새를 보이자 에나츠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를 눈치 챈 1루수 기누가사 사치오는 마운드로 올라가서 에나츠를 다독였다.
>네 기분은 나도 잘 안다.
>네가 강판당한다면 나도 더 이상 안 뛰고 그라운드에서 나올거야.
>그런데 이 상황을 너 말고 누가 정리하겠냐?
>아무 생각 말고 타자한테만 집중해. 힘내라!
흔들리던 에나츠는 친구의 격려에 안정을 찾았고, 고바 감독도 투수 교체를 철회하면서 에나츠에게 한번 더 기회를 주었다.>네가 강판당한다면 나도 더 이상 안 뛰고 그라운드에서 나올거야.
>그런데 이 상황을 너 말고 누가 정리하겠냐?
>아무 생각 말고 타자한테만 집중해. 힘내라!
마음을 가다듬은 에나츠는 히라노까지 고의 사구를 내주며 무사 만루라는 배수진을 쳤고, 콩라인 탈출 일보 직전에서 마음이 달아오른 킨테츠의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은 강타자 '''사사키 쿄스케'''[6] 를 대타로 냈지만 에나츠는 사사키를 헛스윙 삼진으로 돌려세웠다.[7] 그럼에도 여전히 1사 만루의 중대한 핀치였고, 오사카의 킨테츠 팬들은 끝내기 안타를 기대하며 한창 들끓고 있었다.
후속타자는 1번 이시와타 시게루. 에나츠는 몸쪽 커브로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았고, 2구를 던지려는 순간 '''3루 주자 후지세가 스타트를 끊고 이시와타는 스퀴즈 번트 자세로 돌아서자 에나츠는 순간 당황하였지만 바로 자세를 가다듬고 침착하게 공을 멀찌감치 피치아웃 시켰다. 벌떡 일어서서 포구한 포수 미즈누마는 거의 홈까지 와있던 후지세를 태그아웃 시키며 상황은 2사 2, 3루로 급변.'''[8]
[image]
스퀴즈 번트를 시도하는 이시와타 시게루.
[image]
스퀴즈 번트 실패로 미즈누마 시로에게 아웃당하고 만 후지세 시로.
그래도 여전히 끝내기 찬스였지만 에나츠는 이시와타에게 몸쪽 떨어지는 커브를 던져 헛스윙 삼진으로 낚으며 한편의 드라마 같던 승부에 종지부를 찍고 미즈누마와 뜨거운 감격의 포옹을 나누었다. 히로시마의 창단 첫 일본시리즈 제패의 순간이었다.[9]
[image]
7차전 종료 후 팀의 우승이 결정되면서 환호하는 투수 에나츠 유타카와 포수 미즈누마 시로. 그리고 삼진으로 팀의 패배를 결정짓고 만 킨테츠의 마지막 타자 이시와타 시게루.
백문이 불여일견, 직접 보자.
9회말에 에나츠가 던진 공의 개수는 21개였고, 그래서 이날의 명승부가 '''"에나츠의 21구"'''로 명명된 것이다.
- 승리투수 : 야마네 카즈오(히로시마, 2승 1패)
- 패전투수 : 야나기다 유타카(킨테츠, 2패)
- 세이브 : 에나츠 유타카(히로시마, 2세이브)
4. 타이틀 시상
- 최우수선수상(MVP) : 타카하시 요시히코(히로시마 도요 카프)
- 감투상 : 이모토 타카시(킨테츠 버팔로즈)
- 최우수투수상 : 야마네 카즈오(히로시마 도요 카프)
- 기능상 : 미무라 토시유키(히로시마 도요 카프)
- 우수선수상 : 미즈타니 지츠오(히로시마 도요 카프)
5. 여담
- 이 시리즈 당시 오사카에서 열린 킨테츠의 홈경기는 킨테츠의 메인 홈구장인 후지이데라 구장이 아니라 난카이 호크스의 홈구장인 오사카 구장에서 개최되었다. 그 이유는 후지이데라 구장이 오사카 교외인 후지이데라 시의 주택가 한가운데에 위치한 입지조건 때문에 야간경기를 할 경우 소음과 조명으로 인한 광공해로 생활에 지장을 받는다는 주변 주민들의 항의 때문에 조명탑을 설치할 수가 없어서 야간경기 개최가 불가했기 때문이었다.[10] 그 때문에 정규시즌 때 후지이데라 구장은 주말이나 휴일 낮 경기만 개최하고 야간 경기는 오사카 모리노미야에 있는 일본생명구장[11] 을 써야만 했다. 게다가 일본생명구장의 수용관중 수가 2만여명 밖에 안 되는 바람에 일본시리즈 개최요건(수용능력이 최소 3만명 이상)을 충족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일본시리즈에서 열리는 홈경기를 남의 팀 홈구장에서 열 수 밖에 없었다. 후지이데라 구장에서 일본시리즈를 개최된 것은 1989년 일본시리즈 단 한 차례 이며 그 때는 일본시리즈가 전 경기 낮경기[12] 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그제서야 비로소 킨테츠는 자기 홈구장에서 일본시리즈를 개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일본시리즈에서 킨테츠는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상대로 3연승 후 4연패로 역관광(...)이라는 안습의 기록을 세우며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특히 일본시리즈 패전이 확정된 최종 7차전이 열린 곳이 바로 홈구장인 후지이데라 구장이었다. 결국 킨테츠 버팔로즈는 경영 악화로 2004년, 단 1번도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루지 못하고 오릭스 블루웨이브에게 합병당했다.
참고로 위와 같은 문제로 올스타전도 개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홈구장으로 사용하게 된 1985년이 되어서야 겨우 첫 올스타전을 열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1989년 딱 1번 열린 후론 역시나 개최를 안했다.(...)
- 이날의 명승부를 본따서 마무리 투수들의 활약상에 따라 "OO의 OO구"로 자주 패러디 되곤 한다. 그 중에서 특히 유명한 것은 2009년 라쿠텐 이글스의 클로저이던 후쿠모리 카즈오의 이른바 후쿠모리의 21구와 2011년 일본시리즈 4차전에서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모리후쿠 마사히코가 기록한 모리후쿠의 11구. 그리고 이 둘의 활약은 이름의 순서만큼이나 극단적으로 대조를 이루었다.
- 창단 후 최초로 클라이맥스 시리즈에 진출하여 스테이지 1에서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를 꺾고 스테이지 2에 진출, 한창 기세를 올리고 있던 라쿠텐은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를 맞이한 1차전 에서 9회초 까지 8-4로 리드하고 있었다. 그러나 9회말에 마무리로 등판한 후쿠모리가 정확히 21번째 투구만에 터멜 슬레지에게 극적인 역전 끝내기 만루홈런을 두들겨 맞고 8-9로 대역전패(...). 결국 라쿠텐은 1차전의 충격을 극복하지 못하고 일본시리즈 문턱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경기의 중요성과 드라마틱 함 등등의 요소가 위의 에나츠의 사례 못지 않은데 결과는 완전 정반대 였다는 점, 그리고 하필이면 투구수가 21개로 딱 맞아 떨어지는 바람에 후쿠모리의 이 블론세이브는 불쇼의 대명사로서 또다른 의미로 전설이 되고 말았다(...).
- 그와는 대조적으로 모리후쿠의 케이스는, 시리즈의 흐름을 바꿔서 팀의 우승에 공헌한 경우이다.
2011년 일본시리즈에서 주니치 드래곤즈와 맞붙은 소프트뱅크는 홈인 후쿠오카 돔에서 벌어진 1, 2차전을 연장 접전 끝에 클로저 마하라 타카히로의 이틀 연속 불쇼로 내리 내주고 말았다. 최악의 상황에서 나고야 원정에 나선 호크스는 3차전을 승리하고 4차전에서도 2대 1의 박빙의 리드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선발투수인 D.J. 홀튼이 6회말에 안타-2루타-볼넷으로 무사 만루를 만들어 놓고 마운드에서 내려오고 말았다. 안타 한방이면 역전, 타자를 병살타로 잡아도 운이 없으면 최소 동점인 절체 절명의 상황. 소뱅 팬들이 최소 동점이라고 거의 체념하고 있던 상황에 등판한 모리후쿠는 단 11구만으로 타자 3명을 처리하고 무사 만루의 위기를 탈출했다.
투구 내용은
- 6번 코이케: 4구만에 헛스윙 삼진
- 7번 히라타: 2구만에 짧은 좌익수 플라이 (너무 짧아서 3루주자가 홈으로 들어오지 못함)
- 8번 타니시게: 5구만에 유격수 땅볼로 1루주자 포스아웃
투구 내용은
- 6번 코이케: 4구만에 헛스윙 삼진
- 7번 히라타: 2구만에 짧은 좌익수 플라이 (너무 짧아서 3루주자가 홈으로 들어오지 못함)
- 8번 타니시게: 5구만에 유격수 땅볼로 1루주자 포스아웃
덤으로 모리후쿠의 11구도 감상해보자.
만약 이 경기를 내줬으면 소프트뱅크는 1승 3패의 위기에 몰릴 상황이었으나 모리후쿠의 신들린 듯한 투구로 위기를 모면하고 4차전을 가져오면서 시리즈를 2승2패로 끌고 갔다. 결국 원정 3연전을 모두 쓸어담은 소프트뱅크는 홈에서 벌어진 6차전을 다시 주니치에게 내줬지만, 최종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8년만에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다. 7차전 9회말 마지막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극적인 요소는 에나츠의 21구 보다 덜할 수도 있지만, 게임 당시의 긴장감과 시리즈의 향방을 좌우하는 키플레이라는 점에서 모리후쿠의 11구는 야구 팬들과 평론가들의 갈채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명승부였다. 그렇게 가을의 저주를 겨우 풀었건만....
만약 이 경기를 내줬으면 소프트뱅크는 1승 3패의 위기에 몰릴 상황이었으나 모리후쿠의 신들린 듯한 투구로 위기를 모면하고 4차전을 가져오면서 시리즈를 2승2패로 끌고 갔다. 결국 원정 3연전을 모두 쓸어담은 소프트뱅크는 홈에서 벌어진 6차전을 다시 주니치에게 내줬지만, 최종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8년만에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다. 7차전 9회말 마지막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극적인 요소는 에나츠의 21구 보다 덜할 수도 있지만, 게임 당시의 긴장감과 시리즈의 향방을 좌우하는 키플레이라는 점에서 모리후쿠의 11구는 야구 팬들과 평론가들의 갈채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명승부였다. 그렇게 가을의 저주를 겨우 풀었건만....
- 실제 경기와는 상관없지만 만화 그라제니에서도 주인공 본다 나츠노스케의 XX구 식으로 패러디된다.주인공이 불펜투수[13] 다 보니 가능한 일로 만화 내에서도 본다가 등판해서 불을 끄거나 분위기를 환기시키고 내려가면 그걸 본다의 XX구로 부르는 식.
- 카프가 구단 첫 우승했던 이해에 미국의 피츠버그 파이리츠는 구단의 5번째이자 현재까지 구단의 마지막 월드 시리즈를 달성했다.
- 4차전에서의 히로시마의 선발 투수는 훗날 한국의 모 구단으로 가서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세우게 된다. 여담으로 에나츠의 21구때도 불펜으로 등판했다. 그것도 에나츠는 장명부 후속으로 등판.
[1] 킨테츠로선 전날에 이어 두 게임 연속 완투승 이었다.[2] 그리고 이 승리는 히로시마 창단 후 처음으로 일본시리즈 에서 거둔 승리였다. 처녀 진출한 1975년 일본시리즈에선 단 1승도 거두지 못한 채 한큐 브레이브스에 2무 4패로 패퇴했기 때문이다.[3] 주로 대주자로만 출장했지만 통산 105도루를 기록, 2014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스즈키 타카히로'''가 갱신하기 전까지 대주자 전문 선수 통산 최다 도루 기록 보유자였다. 일본프로야구 판 강명구라 해도 무리는 없을 듯... 1984년 은퇴 후 1995년 까지 킨테츠의 주루 코치로 재임했으며, 1996년엔 프런트로 전업하여 구단 관리부장 까지 올라갔지만 2004년 시즌을 끝으로 킨테츠가 오릭스 버팔로즈로 흡수통합 되자 사표를 제출했다. 현재는 모교인 오사카 체육대학 산하 나미쇼 학원의 운동부 강화 센터장으로 재직 중.[4] 니시모토 감독이 생전에 회고한 바에 따르면 '''히트앤드런''' 사인을 냈는데 에나츠의 피칭이 볼이 되고, 아놀드가 스윙하지 않는 바람에 단독 도루의 모양새가 나왔다고 한다.[5] 아래 동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송구가 유격수 글러브에 제대로 들어갔다면 아웃 타이밍 이었다.[6] 1978년 시즌 타격왕. 은퇴 후에 1996~1999년 킨테츠 버팔로즈의 감독으로 재임했고, 주니치 드래곤즈 1군 수석 겸 타격 코치이던 2003년 시즌 도중 야마다 히사시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퇴진하자 감독 권한대행으로 잔여 시즌을 지휘하여 정규시즌 순위를 5위에서 2위로 올려놓는 수완을 발휘했지만, 이듬해 오치아이 히로미츠가 감독으로 취임하며 주니치에서 퇴단했다.[7] 여기서 킨테츠로서는 통한의 장면이 나왔는데, 카운트 1-1에서 에나츠가 던진 14번째 투구를 사사키가 잡아당겨 3루수 미무라 토시유키의 글러브를 스치며 외야 파울지역으로 날아가는 2루타성 타구를 만들었으나, 3루심이 타구가 미무라의 글러브를 스치지 않았다며 파울로 판정하면서 끝내기 안타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8] 이 대목에서 흥미로운 점은 니시모토 유키오가 다이마이 오리온즈 감독 시절 처음으로 진출한 1960년 일본시리즈에서 다이요 훼일즈에게 밀려 준우승에 그친 가장 큰 원인이 2차전 때 스퀴즈 번트 실패였다는 것이다. 즉 니시모토는 스퀴즈 번트 무산으로 두 번이나 콩라인 탈출의 기회를 날려버린 셈...[9] 1979년 일본시리즈는 히로시마나 킨테츠 모두 사상 첫 우승을 노리고 있었다. 더구나 킨테츠의 감독 니시모토 유키오는 리그 우승 경력은 화려했지만 정작 시리즈에선 준우승만 6번을 기록하고 있었던 바 누구보다도 7차전의 승리가 절실한 상황이었다. 결국 에나츠의 벽을 넘지 못한 니시모토는 이듬해에도 시리즈 준우승에 그치며 콩라인 탈출에 실패한 채 현장을 떠났다(...).[10] 리글리 필드보다 더 안습인 건 리글리 필드는 주변 주민들의 항의를 핑계삼아 평일에도 낮경기를 하면서 조명탑 설치비용을 아끼는 꼼수를 부렸지만 후지이데라 구장은 돈들여서 조명탑까지 건설해놓고도 정작 주변 주민들의 항의로 조명시설을 설치하지 못했다는 점이다(...).[11]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일본생명보험 건설-소유의 야구장으로, 산하에 있던 사회인야구팀의 홈구장이었다. 킨테츠가 1984년 다시 후지이데라 구장을 본격적으로 홈구장으로 쓰게 된 이후엔 제2홈구장으로 사용되다가 1996년을 끝으로 프로야구 경기 개최를 중단. 이후 1997년을 끝으로 철거했다. 여담으로 근처에 모리노미야역이 있었으며, 1996년 5월 9일 이 구장에서 마지막으로 열린 프로야구 경기인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VS 킨테츠 버팔로즈 戰은 다이에가 2-3으로 역전패하면서 경기 종료 후 당시 다이에가 이날 경기까지 포함해 9승 22패로 3할이나 겨우 넘나드는 단독 최하위라는 것과 이날 패전으로 4연패에 빠진것에 빡친 오사카의 다이에 팬들이(당연히 오사카에 있었던 전신 난카이 호크스 팬들도 포함) 경기 종료 후 다이에 선수단 버스를 둘러싸고 날계란을 던지며 격하게 항의한 날달걀 사건(生卵事件)으로 유명하다.(...)[12] 심지어 평일 경기마저 낮경기로 치뤘다. 일본시리즈가 다시 야간경기로 환원된 것은 1994년 일본시리즈에 들어와서였다.[13] 중반 이후 셋업맨으로 정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