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에다 토모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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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다 토모노리 (前田智徳)'''
'''생년월일'''
1971년 6월 14일
'''국적'''
일본
'''출신지'''
구마모토현 타마나시
'''학력'''
구마모토 공업 고등학교
'''포지션'''
외야수
'''투타'''
우투좌타
'''프로입단'''
1989년 드래프트 4순위
'''소속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90~2013)'''
'''지도자'''
히로시마 도요 카프 1군 타격보좌코치[1] (2013)
1. 개요
2. 선수 시절
3. 성격 및 인간관계
4. 기타


1. 개요


일본프로야구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 뛴 前 야구 선수.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프랜차이즈 스타 중 하나로, 카와카미 테츠하루[2], 토요다 야스미츠, 나가시마 시게오, 오치아이 히로미츠일본프로야구의 대타자들이 한결같이 '타격의 천재'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선수. 스즈키 이치로마츠이 히데키도 존경하는 타자였으며 최고의 선구안을 가진 일본프로야구의 선인(仙人) 에노모토 키하치도 자신과 공통점이 많은 선수라는 발언을 했던 선수다.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는 부상만 2번을 당하는 등 유리몸 속성을 보유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커리어를 쌓았다. 무엇보다도 열악한 재정의 약소 구단인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만 20여년을 뛰었다는 점으로 인해 카프 팬들에게는 구로다 히로키에 버금가는 성원을 받았다.
통산 성적은 타율 .302/출루율 .358/장타율 .484/OPS .842, 2119안타 295홈런 1112타점 68도루 76희생타 58희생플라이. 또한 3할 타율을 11시즌이나 기록했다. 통산 볼넷/삼진이 586볼넷 765삼진으로, 둘 모두 23년을 현역으로 뛴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적은 수치이다. 전성기에는 매 시즌 500타석 가까이를 소화하면서도 꾸준히 BB:K 1.0에 가까운 수치를 유지했던 만큼 선구안이 부족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볼넷을 얻어내는 것보다는 뛰어난 타격 기술을 바탕으로 일단 공을 맞추는 것에 집중했던 배드볼 히터 스타일의 강타자. 다만 커리어 전부를 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 보낸 것 치고는 통산 홈런 갯수가 다소 부족해 보일 수 있는데, 젊은 시절 부상으로 여러 번 시즌을 망친 것을 감안하더라도 본래의 장타력에 비해서는 구장의 크기로 인해 홈런 갯수가 뻥튀기되었다는 평가 역시 가능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마츠다 줌줌 스타디움으로 이전한 2009년 이후론 홈런을 단 2개밖에 치지 못했고, 이마저도 2010년 한 해에 기록한 것으로 이후엔 단 한번도 홈런을 치지 못했다.

2. 선수 시절


구마모토 공고 시절 고시엔 대회에 4회 출장했으며, 1989년 드래프트 4위로 히로시마에 지명되어 프로에 데뷔했다.
입단 후 스프링캠프에서부터 비범한 타격 재능을 선보였고 공-수-주 모두 두각을 나타내어 입단 2년차인 1991년부터 주전 중견수 자리를 차지했다. 1991년 개막전에서 1번타자로 선발 출장하여 첫 타석에서 데뷔 첫 홈런을 선두타자 홈런[3]으로 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었고[4] 그 해 카프는 야마모토 코지 감독의 지휘 아래 센트럴리그를 제패하고 일본시리즈까지 올라간다.[5]. 1991년부터 1994년까지 골든글러브를 연속 수상했고 92년 첫 규정타석 3할을 친 것을 시작으로 94년까지 3년 연속 3할 타율-두자릿수 홈런을 기록한다.
그러나 1995년 타격 후 1루로 돌진하다 오른발 아킬레스 건이 끊어지는 큰 부상을 당했고, 그 이후에도 계속 크고 작은 부상에 시달리며 데뷔 초기 보여주었던 수비능력과 주루능력이 크게 감퇴했다. 때문에 수비 포지션도 중견수 자리를 오가타 고이치에게 내주고 코너 외야[6]로 이동해야 했지만 늘 3할 이상의 타율을 유지하며 타격에서는 변함없는 활약을 펼쳤다. 90년대 중반 오가타 고이치, 쇼다 고조, 노무라 겐지로, 에토 아키라, 가네모토 도모아키등과 함께 히로시마의 핵타선을 이끌었고, 98년에는 .335 .388 .550 OPS .938 24홈런 80타점[7]의 호성적으로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스즈키 타카노리와 수위타자 경쟁[8]을 벌였다. 2000-2001년은 아킬레스건 부상 악화의 여파로 제대로 출장하지 못했지만 2002년부터[9]는 잔부상으로 매 시즌 20경기 가까이를 결장하기는 했지만 3할-20홈런대의 성적을 유지했고, 30대 중반인 2005년에는 홈런 커리어하이인 32홈런을 쳤다. 2007년에는 통산 2000안타를 달성하여 명구회에 가입한다.
2007년부터는 개인성적이 하향세를 그렸고, 2008년부터는 보다 발 빠르고 수비력이 좋은 젊은 외야수들을 기용하려는 팀 방침 상 주로 대타로 출전하였다.
2013년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와의 원정 경기에서 에무라 마사야 투수[10]의 투구에 손목을 맞아 골절상을 입었고[11], 그 해 마쓰다 줌줌 스타디움 히로시마에서 은퇴경기[12] 및 은퇴식[13]을 갖고 정든 그라운드를 떠났다.

3. 성격 및 인간관계


일본의 야구 팬들 사이에서는 성격 나쁜 야구선수의 대명사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젊었을 적에(1998년) 한 여성팬이 "마에다 씨 열심히 해주세요!"라고 얘기하니까 "니가 뭘 알아"(...)라고 대꾸해서 까인 적도 있다.
사실 이런 의혹은 정확히 말하면 그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루머가 떠돌아다니는 선수가 굉장히 많다는 점에 기인한다. 특히 히로시마를 거쳐간 유명 선수들은 대부분 마에다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루머가 떠돌았는데, 일단 구로다 히로키가 그렇다. 심지어 구로다가 히로시마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마에다와 노무라 감독이 없기 때문이라는 기사까지 있었다. 둘 사이의 서먹함은 마티 브라운 前 히로시마 감독과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되었다. 브라운 감독은 투수진의 리더로 구로다를, 타선의 리더로 마에다를 찍었는데, 구로다가 그 역할을 잘 해낸 반면, 마에다는 개인주의적인 성격이라 잘 되지 않았고, 두 사람 역시 잘 교류가 되지 않았다고 에둘러서 인정했었다. 가네모토 도모아키도 이런 루머가 있고 아라이 타카히로의 경우엔 이미 루머가 아닌 기정사실 취급이다. 당시 스포츠 신문에는 아라이가 FA 자격을 얻었을 때 히로시마에 남는 조건 중 하나로 요구했던 것이 마에다의 트레이드였는데 결국 성사되지 않자 한신으로 이적한 것이라는 기사가 실렸을 정도.
이 루머들에 대해 정확한 사실은 당사자들만 알겠지만, 일단 구로다가 히로시마로 유턴했을 때 마에다와 대담을 한 적이 있고, 둘은 그다지 친한 모습은 아니지만 상대를 존중해주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구로다는 자신의 공을 마에다라면 능히 칠 수 있다고 치켜세웠고, 마에다는 전혀 그렇지 않고 실로 훌륭한 피칭이라고 구로다를 높여주었다. 과거에 부딪히긴 했을지 모르나 현재 시점에선 얼굴 안 보고 살 정도는 아닌 것 같다. 가네모토는 일찌기 마에다를 평하기를 "히로시마 시절의 강훈련을 견딘 것은 나와 마에다 뿐이다"라고 그를 인정했었다.
마에다가 다른 사람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 타입이라는 얘기는 자주 들리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의 기분을 깔아뭉개고 나댄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냥 조용히 혼자 사는 타입이라는 얘기다. 실제로 그를 평가하는 사람들은 낮을 가리긴 하지만 제법 겸손하고 예의있는 사람이라는 평을 내린다.
입단 동기인 아사이 이츠키와의 에피소드는 그가 무작정 냉혈한은 아닌 것을 보여준다. 아사이 이츠키는 마에다와 히로시마 입단 동기생으로, 아마 시절 호쿠리쿠 최강의 타자로 불렸다. 그러나 입단 후 같은 외야수 포지션의 동기 마에다의 기술을 보고 주눅이 들 정도였다. 마에다는 1군에서 승승장구했으나 아사이는 2군에 주로 있었고, 기회가 주어질 때에도 아킬레스건 부상을 당하는 듯 고난이 이어졌다. 그러나 대타 전문 선수로 대타 타율 3할이 넘는 실적을 올리게 되었고, 어느 순간 동기생은 둘 만 남아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갑작스런 메니에르병으로 아사이가 은퇴하게 되자, 마에다가 돌연 전화를 걸어서 아사이의 목소리를 들었다. 둘은 그 전까지는 한 번도 전화를 해본 적이 없는 사이였는데, 갑자기 마에다가 전화를 걸어온 것에 대해 아사이는 지금도 고마운 기억을 가지고 있다.[14] 마에다는 아사이의 은퇴 경기에서 홈런 포함 4안타를 치고, 2루에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을 하는 등 전력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4. 기타


스즈키 이치로가 한참 두각을 나타내던 시절, 올스타전에서 마에다를 만난 뒤 어쩔 줄 몰라했던 일화가 있다. 이치로의 상징과도 같은 등번호 51번은 마에다가 신인 시절에 착용했던 번호로, 이치로가 이 등번호를 처음 착용한 것은 마에다를 목표로 삼겠다는 뜻이었다고 한다. 오치아이 히로미츠는 "일본 야구계에 천재가 두 명 있는데, 하나는 마에다, 다른 하나가 이치로"라고 했었다. 마에다는 두견을 죽이지 않고 기다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타입, 이치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타입이라고 평했다.

주니치 감독이었던 오치아이 히로미츠는 팀의 타자들에게 마에다의 타격폼 흉내를 내라고 했다. 타격폼은 따라할 수 있지만 특유의 임팩트나 타이밍, 리듬감은 그만의 것이다. 당시 주니치의 주축 타자였던 후쿠도메 고스케가 그의 타격폼을 보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경기 후에도 나고야돔에서 늦게까지 연습했다.
천재타자라고 사람들은 칭송했지만 목표치를 높게 잡고 목표 달성을 위해 훈련에 훈련을 거듭했으며 배트 그립 잡는 법, 타격 폼 등을 끊임없이 연구하는 노력파였다. 바로 이런 점이 에노모토가 자신의 현역 시절과 비슷하다고 했던 부분이다. 천재타자라는 주위의 말이 본인은 부담스러웠다고. 가와카미 테츠하루, 오 사다하루, 오치아이 히로미츠, 와카마츠 츠토무 등의 대 타자들에게 찾아가 타격 지도를 부탁할 정도의 노력파였다.
상술했듯이 아킬레스건 부상 이후 주루플레이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2002년 4월 6일 주니치 드래곤즈와의 경기에서는 2루 주자로 있던 상황에서 후속 타자인 루이스 로페스[15]가 안타를 쳤음에도 홈에 들어오지 못했는데, 타점을 날려먹었다는 생각에 불만을 품은 로페스가 덕아웃에 들어오자마자 마에다를 양 팔로 밀치면서 한 차례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2016년 아사히TV 해설자로 근무 중이다. 위에 서술된 것처럼 현역 시절에는 과묵한/까탈스러운 구도자적인 이미지가 강했던 탓에 해설자로 선임되었다는 소식에 일부 카프 팬들이 당황하기도 했지만 현재까지도 해설자로 활동 중.
[1] 선수 겸임[2] 구마모토 공고 직속 선배이기도 하다.[3] 1회 초/말에 팀의 1번 타자가 선두로 나서서 친 홈런.[4] 현재까지 일본프로야구 사상 유일한, 프로 첫 홈런을 개막전에서 친 사례다. 게다가 선두타자였으니 임팩트가 더했다.[5] 일본시리즈에서는 당대 최강전력의 세이부 라이온즈에게 패배한다. 그 이후 팀은 리그에서 하위권을 전전하는 안습한 세월을 보내다가 2016년 시즌에 25년만의 센트럴리그 챔피언 자리에 올랐고, 일본시리즈에 진출했으나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에게 2승 4패로 아쉽게 패배했다.[6] 카네모토 토모아키가 좌익수 주전을 차지했으므로 주로 우익수. 카네모토가 FA로 한신으로 이적한 뒤에는 마에다 본인의 노쇠화나 시마 시게노부같은 타자들의 대두도 있고 해서 좌익수로 이동했다.[7] 2루타(36개)와 총 루타수(277루타)에서 센트럴리그 1위를 차지했다.[8] 이미 요코하마의 리그 우승이 결정난 상태에서 그 해 요코하마와 히로시마가 양측의 수위타자가 걸린 최종전을 치루게 되자 당시 요코하마의 감독이었던 곤도 히로시가 "만약 마에다가 출장하면 스즈키는 결장시키고, 마에다는 전 타석 고의사구로 승부를 피하겠다." 라는 발언을 하였고 마에다가 이에 분노하여 "팬들에게 꼴사나운 모습 따위 보이고 싶지 않다. 고의사구나 받을 바엔 결장하겠다."며 스스로 출장을 거부하는 바람에 결국 최종전에서 두 선수가 모두 결장해 버렸고, 결국 타율이 2리 더 높았던 스즈키가 영 좋지 않은 모양새로 2년 연속 수위타자가 되는 찜찜한 결말을 맞이했다. 마에다는 결국 커리어 내내 수위타자 타이틀을 한 번도 획득하지 못했다.[9] 이 해 컴백상을 수상.[10] 치바 롯데 마린즈의 포수 에무라 나오야의 4살 터울 형이다. 야쿠르트에 2012년 드래프트 4위로 입단한 왼손투수로 2015년 시즌 종료 후 방출되었다.[11] 이 때 마에다가 에무라에게 고성을 지르고 에무라가 사과했지만 그 직후 마에다가 통증으로 쓰러지면서 벤치 클리어링이 일어났다.[12] 마지막 타석은 투수 앞 땅볼.[13] 같은 성씨의 마에다 켄타가 울면서 꽃다발을 전해주었다.[14] 둘 사이의 자세한 내용은 鯉のはなシアタ― 141101 방송을 참조[15] 히로시마 역대 최고의 외국인 타자 중 하나로 꼽히지만, 실력만큼이나 다혈질적인 성격으로도 유명한 선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