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모토 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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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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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올림픽 야구 대표팀 코치 시절.
'''히로시마 도요 카프 No. 8'''
'''야마모토 코지(山本 浩二[1])'''
'''생년월일'''
1946년 10월 25일
'''국적'''
일본
'''출신지'''
일본 히로시마히로시마[2]
'''포지션'''
외야수
'''투타'''
우투우타
'''학력'''
하츠카이치 고등학교 - 호세이대학
'''프로입단'''
1968년 드래프트 1순위
'''소속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69~1986)'''
'''지도자 경력'''
히로시마 도요 카프 플레잉 코치 (1984~1986)
히로시마 도요 카프 감독 (1989~1993, 2001~2005)
<color=#373a3c> '''1975년 센트럴리그 최우수 선수(MVP)'''
1974년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자이언츠)

'''야마모토 코지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76년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자이언츠)
<color=#373a3c> '''1980년 센트럴리그 최우수 선수(MVP)'''
1979년
에나츠 유타카
(히로시마 도요 카프)

'''야마모토 코지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81년
에가와 스구루
(요미우리 자이언츠)
<color=#373a3c> '''1975년 센트럴리그 수위타자'''
1974년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자이언츠)
.332

'''야마모토 코지
(히로시마 도요 카프)'''
'''.319'''

1976년
야자와 켄이치
(주니치 드래곤즈)
.355
<color=#373a3c> '''1978년 센트럴리그 최다 홈런'''
1974년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자이언츠)
50홈런

'''야마모토 코지
(히로시마 도요 카프)'''
'''44홈런'''

1979년
카케후 마사유키
(한신 타이거스)
48홈런
<color=#373a3c> '''1980~1981년 센트럴리그 최다 홈런'''
1979년
카케후 마사유키
(한신 타이거스)
48홈런

'''야마모토 코지
(히로시마 도요 카프)'''
'''44홈런(1980년)
43홈런(1981년)'''

1982년
카케후 마사유키
(한신 타이거스)
35홈런
<color=#373a3c> '''1983년 센트럴리그 최다 홈런'''
1982년
카케후 마사유키
(한신 타이거스)
35홈런

'''야마모토 코지
(히로시마 도요 카프)'''
오오시마 야스노리
(주니치 드래곤즈)
'''36홈런'''

1984년
카케후 마사유키
(한신 타이거스)
우노 마사루
(주니치 드래곤즈)
37홈런
<color=#373a3c> '''1979~1981년 센트럴리그 최다 타점'''
1978년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자이언츠)
118타점

'''야마모토 코지
(히로시마 도요 카프)'''
'''113타점(1979년)
112타점(1980년)
103타점(1981년)'''

1982년
카케후 마사유키
(한신 타이거스)
95타점
<color=#373a3c> '''1979~1980년 센트럴리그 최다 출루수[A]'''
1978년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자이언츠)
247출루[3]

'''야마모토 코지
(히로시마 도요 카프)
220출루(1979년)[4]
240출루(1980년)[5]'''

1981년
카케후 마사유키
(한신 타이거스)
243출루[6]
<color=#373a3c> '''1983년 센트럴리그 최다 출루수[A]'''
1982년
카케후 마사유키
(한신 타이거스)
타오 야스시
(주니치 드래곤즈)
232출루[7]

'''야마모토 코지
(히로시마 도요 카프)
234출루[8]'''

1984년
야자와 켄이치
(주니치 드래곤즈)
231출루[9]
''''''히로시마 도요 카프''' 역대 감독'''
아난 준로
(1986~1988)

<colbgcolor=#b30000> '''야마모토 코지'''
'''(1989~1993)'''

미무라 토시유키
(1994~1998)
타츠카와 미츠오
(1999~2000)

'''야마모토 코지'''
'''(2001~2005)'''

마티 브라운
(2006~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역대 감독
하라 다쓰노리
(2009)

'''야마모토 코지'''
(2013)

고쿠보 히로키
(2017)
'''히로시마 도요 카프 영구결번'''
'''No.8'''

'''미스터 붉은 헬멧(ミスター赤ヘル)'''

일본 프로야구 선수, 지도자, 해설가. '''히로시마 도요 카프 역대 최고의 선수'''이자 프랜차이즈 선수. '''미스터 붉은 헬멧(ミスター赤ヘル)'''이란 별명으로 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30대 이후의 타격 기량이 향상되면서 절정을 맞이한 선수이기도 하다. 은퇴 후에는 히로시마의 감독을 두 번에 걸쳐 역임한 바 있다.
1. 아마 시절
2. 프로 시절
3. 은퇴 이후
4. 이모저모


1. 아마 시절


히로시마 토박이인 야마모토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히로시마 카프의 경기를 보며 히로시마의 팬이 되었고 그 영향으로 야구 선수가 되겠다는 희망을 품고 줄곧 야구에만 몰두했다.
히로시마 현립 하츠카이치 고등학교로 진학한 야마모토는 야구부의 에이스 겸 4번타자로 활약했고 3학년 때 주장으로 활약하며 학교를 히로시마 현 대회 준결승 까지 진출 시켰지만 같은 지역의 강호 고료 고등학교에 패한 경력이 있다. 고교 졸업 후 야마모토는 프로를 지망했지만 난카이 호크스 감독이던 츠루오카 카즈토로부터 "지금 네 실력은 프로에서 통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듣고 호세이 대학으로 진로를 틀었고, 투수에서 외야수로 포지션을 변경하여 2학년부터 학교의 중심 타자로 활약하며 타부치 코이치, 도미타 마사루와 함께 '''호세이대학 3인방''' 으로 불릴 정도로 좋은 모습을 보였다. 또 같은 시기 메이지대학의 에이스로 드래프트 동기가 된 호시노 센이치와도 교분을 쌓았다.

2. 프로 시절


1968년 드래프트[10]에서 고향팀인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1위 지명을 받으면서 프로야구계에 발을 들였다. 이 당시 한자명은 '''山本浩司'''.[11]
입단 당시 등번호는 27번이었지만 1971년, 팀의 주력 타자이던 야마우치 카즈히로[12]가 은퇴하면서 8번을 물려받았다. 데뷔 첫 해인 1969년 시즌 후반에 4번 타자로 뛰기도 하는 등 나름 활약을 펼쳤고 이후 히로시마의 주력 1번, 3번, 5번 타자로 뛰었지만 타격은 특별한 점 없이 평범한 중거리 타자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후 실력이 성장하며 주로 팀의 3번 타자를 맡게 되었고 비슷한 시기 입단한 키누가사 사치오, 미즈타니 지츠오 등과 함께 카프의 자체생산 중심 타선을 이루게 되었다. 1974년 시즌 타율 0.275, 28홈런, 74타점 이란 훌륭한 성적을 기록하였다.
이듬해인 1975년부터 한자명을 '''山本浩二'''로 바꾸고 본격적으로 히로시마의 4번 타자를 맡은 야마모토는 꾸준한 타격 페이스를 보이며 그 해 주니치 드래곤즈이노우에 히로아키와 시즌 말까지 치열한 경쟁을 벌인 끝에 타율 0.319로 센트럴리그 수위타자 타이틀을 따내고[13] 30홈런, 84타점, 24도루를 기록하며 시즌 MVP까지 수상한 데다 팀은 창단 최초로 센트럴리그 우승을 따내는 등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이때부터 야마모토는 '''미스터 붉은 헬멧'''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20대 시절 야마모토의 타격도 나무랄 데 없었지만, 30대에 접어들면서 야마모토의 장타력은 더욱 두각을 드러내었다. 대학 시절부터 고질적인 허리 통증으로 고생하던 야마모토는 스윙할 때 허리에 부담을 줄이려고 밀어치기 중심으로 타격했는데 그러다 자연히 스프레이 히팅을 습득하며 우측 펜스를 넘기는 빈도가 늘면서 장거리 타자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1977~1981년 5시즌 연속 40홈런을 기록했고[14], 한신 타이거스카케후 마사유키와 홈런왕 경쟁을 벌이며 1978, 1980, 1981, 1983년 시즌에 걸쳐 통산 4회의 홈런왕 타이틀을 석권하고 타점왕도 3번을 획득했다. 특히나 1978년의 사상 첫 홈런왕은 히로시마 도요 카프 구단 사상 최초의 홈런왕 배출이었기에 더욱 의미가 있었다. 참고로 1978~1984년 사이에 야마모토가 홈런왕을 차지하지 못한 해는 카케후 마사유키가 홈런왕을 차지했다.[15]
또한 중견수 수비도 일품이어서 1972~1981년 까지 10년 연속 다이아몬드 글러브를 수상했는데 이는 센트럴리그 외야수로선 역대 최고 기록.[16] 거기다 발도 빨라서 11년 연속 두 자리수 도루를 기록한 말 그대로 5툴 플레이어의 전형적인 선수였다.
1983년 시즌 부터는 포지션을 좌익수로 변경했고 그 해 4월 30일 한신 타이거스 와의 한신 고시엔 구장 원정 경기에서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한 바 있다.[17] 1984년엔 선수 겸 타격 코치로 뛰면서 그 해 팀의 일본시리즈 제패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1985년엔 장훈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통산 '''500홈런, 200도루'''를 기록 하였다.[18]
1986년 시즌 센트럴리그 우승 후 야마모토는 은퇴 의사를 표명했고 그 해 일본시리즈 패권은 8차전 까지 가는 접전 끝에 세이부 라이온즈에 넘겼지만, 히로시마의 코칭스태프와 동료들은 야마모토를 헹가래 쳐주며 그의 현역 마지막 무대를 빛내주었다. 야마모토는 은퇴 기자 회견에서 "나 야마모토 코지는 정말 행복한 남자입니다"라며 감격과 아쉬움이 섞인 눈물을 흘렸다.
다만 이 해 일본시리즈가 '''1무 후 히로시마가 3연승으로 우승 직전까지 갔다가 세이부에게 4연패를당하면서 허무하게 패배해버리며 어째 마지막은 영 좋지않게 되어버렸다(...)'''
18시즌 통산 '''2339안타, 타율 0.290, 536홈런[19], 1475타점, 231도루''' 의 기록을 남겼다. 또한 수위타자 1회에 센트럴리그 MVP 2회, 4번의 홈런왕, 3번의 타점왕을 기록했는데 홈런왕, 타점왕 타이틀 획득과 통산 홈런의 70%를 전부 30대 이후에 기록한 전형적인 '''대기만성'''형 선수였다.
히로시마 구단은 창단 이후 최초로 야마모토의 등번호 8번을 영구결번 으로 지정하며 그의 업적을 치하하였다.

3. 은퇴 이후


현역 유니폼을 벗은 야마모토는 NHK의 해설위원 으로 일하다가 1989년 히로시마의 감독에 취임하여 팀을 1989~1990년 센트럴리그 2위, 1991년 리그 우승으로 이끄는 수완을 발휘하였다. 하지만 일본시리즈에선 세이부 라이온즈에게 패배. 그리고 이것이 2016년 오가타 고이치 감독이 25년만의 리그 V7과 일본시리즈를 이끌 때까지 카프의 마지막 리그 우승이었고, 마지막 일본시리즈 진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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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리그 우승 결정 후 헹가래를 받는 야마모토 코지.
그러나 이듬해인 1992년 팀 성적은 4위로 후퇴했고,[20] 1993년엔 19년 만에 처음으로 최하위로 추락하며(...) 야마모토는 이에 대한 책임으로 감독직을 사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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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 도요 카프 감독 2기 시절. 좌측은 전 히로시마 카프 감독 노무라 켄지로.
그 후 니혼 TV와 히로시마 TV의 해설가를 역임하고 2001년 히로시마 감독으로 다시 그라운드에 복귀 하였지만 팀은 2005년 까지 4위[21]-5위-5위-5위-6위에 그치며 별 소득없이 유니폼을 벗고 현장을 떠나야 했다(...). 그래도 히로시마 감독으로서 총 10년을 재임, 고바 타케시와 시라이시 카츠미(총 11년 재임)에 이어 최장수 히로시마 감독으로 남았다. 감독 시절 노무라 켄지로, 마에다 토모노리, 오가타 고이치, 아라이 타카히로, 쿠리하라 켄타 등의 강타자들을 육성한 바 있다.
2006년 부터 니혼 TV, 히로시마 TV 해설위원으로 돌아와 지금까지 활동 중이다. 한편으로는 동년배의 절친인 호시노 센이치 감독이 이끄는 베이징 올림픽 야구 국가대표 수비 겸 주루 코치로 합류하였다.
2008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2010년 일본 프로야구 명구회 부회장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2012년 10월에 2013년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대표팀 감독에 취임하여 일본을 4강까지 진출 시켰지만 푸에르토 리코에 1대 3으로 패하여 탈락[22], 3대회 연속 우승은 무위에 그쳤다.

4. 이모저모


  • 일본프로야구 팬 문화의 상징인 트럼펫 응원가와 응원구호를 처음으로 받은 선수이다. 직접 들어보자.[23]
[1] 1969~1974년까지의 한자 등록명은 '''山本浩司'''로, 발음은 동일.[2] 수정 전 하츠카이치 시라고 되어있었으나, 하츠카이치 시는 야마모토가 고등학교를 나온 곳이다.[A] A B 당시 출루율이 비공식 기록이었던(이 시기엔 퍼시픽리그에서만 공식 기록으로 채용했고 이땐 희생플라이가 계산에서 빠졌다.) 센트럴리그에서 1967~1984년까지 단독으로 시상하던 타이틀로, 안타+사구(출루)를 합산해 합산값(출루수)이 가장 높은 선수에게 타이틀을 시상했다. 1985년부터 출루율양대리그 모두 공식기록으로 채용되어(이때 희생플라이도 계산에 포함) 최고출루율 타이틀을 시상하면서 폐지되었다.[3] 132안타 115사사구[4] 137안타 83사사구[5] 148안타 92사사구[6] 156안타 87사사구[7] 카케후 마사유키는 151안타 81사사구, 타오 야스시는 174안타 58사사구[8] 146안타 88사사구[9] 166안타 65사사구[10] 일본프로야구 사상 희대의 황금 드래프트로 손꼽힌다. 야마모토, 타부치, 호시노 외에도 1순위 지명자들만으로도 히가시오 오사무, 야마다 히사시, 아리토 미치요 등의 명구회 회원이 등장했고 하위 지명에서도 후쿠모토 유타카, 가토 히데지, 오시마 야스노리 등 명선수들이 줄줄이 배출되었다.[11] 발음은 동일[12]롯데 오리온즈, 주니치 드래곤즈 감독.[13] 다만 이 과정에서 흑역사가 있었는데, 주니치와의 최종전에서 고바 타케시 감독의 결정에 의해 야마모토는 그 경기에 선발출장하지 않고(전 경기 출장 기록 때문에 경기 후반 대주자로 나왔다.) 이노우에는 '''무려 NPB 최초의 만루 고의사구'''로 걸러버리는 등의 비열한 작전으로 수위타자 타이틀을 가져올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게 더 문제인 건 이노우에는 원래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드래프트 1위 출신이자 야마모토와는 한때나마 팀 동료였다는 것이다. 천만다행히도 주니치의 잔여경기가 남아있어서 이노우에는 최종전 첫 타석에서 안타를 치고 교체되거나 2안타 이상을 치면 수위타자를 가져올 수 있었으나, 최종전에서 첫 타석 유격수 땅볼 이후 두 번째 타석에서 안타(2루타)를 쳤고, 특히나 마지막 타석에서 데드볼을 맞으며 결국 수위타자를 놓치면서 피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14] 이는 오 사다하루와 함께 유이한 기록이다.[15] 중간에 주니치 드래곤즈오오시마 야스노리(1983년)과 우노 마사루(1984년)가 공동수상하긴 했다. 그리고 1985년 이후부터는 저 둘의 기량이 떨어지며 은퇴 수순을 밟고, 한신 타이거스랜디 바스가 삼관왕을 먹으며 날뛰게 된다.[16] 퍼시픽리그 역대 최고 기록 겸 NPB 역대 최고 기록을 가진 사람은 다름아닌 前 세계의 도루왕.[17] 재밌는 건 사이클링 히트를 3루타로 달성했는데, 이때 3루수 수비를 보고 있던 게 카케후 마사유키였다. 이는 나중에 후쿠도메 고스케가 경신하기 전까지 일본프로야구 최고령 사이클링 히트이기도 했다.[18] 이 기록은 현재까지 장훈과 야마모토, 그리고 기누가사 사치오 3명만 보유하고 있다.[19] 이는 일본 프로야구 대졸 출신 선수로는 최다 기록이다.[20] 다만 성적 자체는 '''66승 64패 승률 .508'''로 엄청 괜찮았다. 이 해엔 유독 리그 우승을 걸고 피터지는 경쟁이 벌어졌기 때문에 리그 우승팀이었던 야쿠르트 스왈로즈가 '''69승 61패 1무 승률 .531'''의 리그 우승팀치곤 별로인 성적을 기록했고 최하위였던 주니치 드래곤즈도 '''60승 70패 승률 .462'''로 최하위치곤 나쁘지 않은 성적이라서 1위와 최하위간의 게임차가 꼴랑 '''9게임''' 차였을 정도. 참고로 성적 자체는 3위급이었으나 이 해 한신 타이거스요미우리 자이언츠가 이 해 '''67승 63패 승률 .515'''로 공동 2위를 찍어서(한신은 2무 포함, 참고로 한신의 1987~2002년의 암흑기 중 유일하게 A클래스를 기록한 해다.) 자동으로 4위로 내려가 버렸다. 근데 아이러니하게도 카프가 우승한 전해 1991년엔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1992년 히로시마와 '''승패수, 승률, 순위까지 똑같은 성적'''을 찍은 바 있다!(...)[21] 다만 이 해 승률은 '''68승 65패 7무 승률 .511'''로 5할 승률을 찍었다. 이것이 2014년 승률 .521로 5할 승률에 복귀하기 전까지 마지막 5할 승률이었다.[22] 통한의 주루미스로 득점찬스를 살리지 못하며 패했다. 자세한 내용은 링크 참조[23] 47초부터. 2012년 9월 1일 한신 타이거스와의 원정 경기로, 올드 유니폼 데이였다. 경기 시작 전 카프와 타이거스의 양대 OB인 야마모토 코지와 우에다 지로 간의 1타석 승부 이벤트가 있었다.